룻기에는 세 등장인물— 나오미, 룻과 보아스가 있습니다. 룻기는 그들의 개인적인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사 시대라는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새 시대를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 준비하시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 룻기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축복의 땅,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삶의 흉년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셨던 삶의 방식은 그 어려움과 흉년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하나님께 자문하며 은혜를 구하는 기회로 삼기 원하셨는데, 엘리멜렉 가정은 말로는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라고 말했지만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생의 흉년 가운데 하나님께 나오지도 않았고 기도나 자문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그냥 결정해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가 버립니다. 이민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상의 없이 하나님께 나아옴 없이 자기 스스로 그냥 인생의 흉년 가운데 결정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그 집안이 어려움을 직면하는데, 이민 생활 10년 만에 남편도 죽고 그 자기 두 아들도 모두 죽는,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막힌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지금 나오미와 그 가족이 직면한 것입니다. 이민간 땅에서 여자 셋이 남은 상황,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만 남은 상황은 이 집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다 끊겼고 더 이상 소망도 회생할 가능성도 없는 모든 것이 무너진 깊은 절망에 직면한 겁니다. 그 인생이 밑바닥의 수렁, 가장 힘든 절망의 상황 가운데, 모든 것이 다 막히고 소망을 잃어버린 그 때 나오미와 그 가정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부어 주시는가…그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두 가지의 놀라운 영적 결단이 오늘 6절 말씀에 등장하는데 첫째는 “듣고,” 둘째는 “돌아오려 하여” 입니다. 이 두 가지 영적 결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무엇을 들었는가 하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기들은 빨리 그 땅을 떠나야 살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 땅을 빠져나와야 그 가족이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여호와께서 그 흉년 가운데 자기 백성을 돌보셨고 양식을 주셨다는 것을 들은 거예요. 여호와께서는 살아 계셔서 그 백성을 잊지 않고 그 백성을 돌보시고 먹이셨던 것입니다. 자기 가족이 인생의 흉년에 하나님과 상의도 인도함도 없이 훌쩍 모압 땅으로 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결정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고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거기 떠나야 사는 것 같았는데 거기 머물러 있어야 산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리석어서 눈에 조금만 어려운 상황이 생기고 흉년이 들면 그 곳을 떠나야 산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땅에 버티고 함께 있어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흉년에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잊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백성을 돌보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허락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이 결정적인 “들음”은 마치 뭐랑 똑같냐 하면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다 가지고 나서 다 탕진하고 나서 쥐엄 열매를 먹다가 그것 마저도 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마침내 아버지가 생각 난 것과 똑같은 사건입니다. 인간이 참 어리석어서 이렇게 모든 걸 잃어 버리기 전에 하나님이 생각나면 참 좋은데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겁니다. 꼭 마지막에 가야…맨 밑바닥에 가야 하나님이 생각나고 하나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안되겠습니까? 근데 그 말씀에 내 마음을 파고 들어오지 않는 거죠… 언제까지요?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까지… 의지하는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지기 전까지는… 그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가장 밑바닥에 가서야 그 진리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이 안타까운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영적 결단은 “듣고 돌아오려고 결단”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어요. 이민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돌아오기로 결정 한 거죠.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양식을 주셨음을 듣고 그들이 돌아오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들이 사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 날개 밑으로 돌아 오기로 결단한 거죠. 그래서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그 인생의 절망에서 소망의 빛이 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길 잃고 헤매며 방황하는 인생에서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기로 하는 놀라운 결단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에게 회개와 돌이킴이 무엇입니까? 결국 나의 인생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영적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적 변화는 결국 하나님 품에 돌아오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하나님의 은혜 곁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복이 없는 자, 복을 차버리는 사람이란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죠. 나오미와 그 가정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무너진 잿더미에서 “듣고” “돌아오는” 영적 결단을 통해 새로운 은혜의 삶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에게 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찾아온 인생의 흉년에 그 깊은 실패와 무너짐에 가기 전에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들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 말씀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본질로 돌아오라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결단을 통해 오늘도 새 일을 행하시는 그 주님의 은혜가 부어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에 그 땅에 흉년이 찾아온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왕이시라 고백하는 엘리멜렉이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그 흉년 가운데 하나님께 상의하고 물어보며 가까이 나와 지혜를 구하는 대신 자기 눈 앞에 좋은 대로 행하며 스스로 결정하여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흉년 가운데에 하나님 앞에 돌아와 매달리고 가까이 나아오기 원하셨는데, 그 흉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더 멀리 도망가 버리고 모압 땅으로 완전히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과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 등 돌리고 하나님께 상의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인생의 흉년을 풀려고 했던 이 엘리멜렉의 모습은 한 개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암담한 영적 현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의논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결정해 모압 땅으로 가족을 다 이끌고 이민 온 결과를 증언합니다. 지금도 이민 생활이 어려운 데 수 천년 전에 이민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 당시 이민이란 돌아올 생각을 접고 떠나는 겁니다. 심지어 시집을 가도 평생 친정 집에 못 온다고 생각하고 떠나는 시절이었는데 유대인들이 이방 땅으로 이민 간다는 것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퇴로를 끊어버린 채 떠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나간 이민 생활, 그 객지에서 남편이 죽은 것입니다. 정말 큰맘 먹고 퇴로를 다 차단한 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모든 생각을 접고 모압으로 이민 갔는데 났는데 그 이방 땅에서 남편이 죽은 거예요. 이민 간 그 객지에서 자기 남편이 죽으니까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 시절에는 여인들은 돈을 벌 수 없고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일찍 죽었다는 것은 자기 인생의 모든 기반이다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잃은 여인은 가장 불쌍한 사람 중에 하나 여서 고아와 과부를 동급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이민 생활 중에 나오미에게 일어나게 된 거예요. 그게 첫번째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더 큰 비극이 찾아오는데 이민 생활 10년이 되었는데, 그 두 아들도 이민 간 땅에서 다 죽은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이민 생활을 하는 그 여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건 말로 할 수 없는 어려움과 눈물과 고통 가운데 지냈을 겁니다. 그래도 남은 가족도 있고 아들들도 있으니까 그 척박한 이민 생활 가운데 살아남아야 했고 버텨야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이민생활 하며 그 두 아들이 장성해서 그들을 위해 모압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게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억척스럽게 힘든 이민 생활을 10년 동안 했는데, 그 두 아들이 이민간 땅에서 다 죽은 것입니다. 손자도 없이 며느리들만 남겨 놓은 채…지금 룻기 1 장에서 나오미와 그 남겨진 가족들의 모습, 남자 셋이 다 죽고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만 남은 상황은 세상에서 가장 복 없는 여인들, 가장 절망적인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나오미의 입장에서 자기 남편이 죽었을 때와 자기 두 아들이 죽었을 때의 임팩은 거의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겁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아무리 어려웠어도 그래도 참을 만 했을 것 같아요. 자기가 먹여 살리고 어쨌든 간에 함께 해야 될 두 아들이 있으니까….그때 슬픔은 어떻게든 견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 두 아들마저 그 객지에서 이민 생활 가운데 다 죽는 것을 보면서는 정말 살 이유가 다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숨쉬는 것조차 힘든, 더 이상 내려갈 때가 없는 그 모습으로 깨지고 무너졌을 것입니다. 엘림멜렉,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과는 달리 이름값을 못한 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인생의 흉년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 상의하고 붙들고 기도하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못한 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한 결과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다 죽은 비극이었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아 집안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최악의 절망을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욥이 당한 고난의 거의 필적할 정도로 소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모든 것이 잃어버리고 이제 이 이방 땅에서 죽는 일만 남은 가장 비참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인생의 흉년을 직면할 때, 그 문제와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오는 도구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인생의 흉년 가운데 하나님을 오히려 떠나게 되고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약속의 땅을 떠나면 인생이 꼬일대로 꼬이게 되고 비극적 결과를 직면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민간 땅에서 완전히 무너진 가정, 인간의 가장 비참한 모습,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채 망연 자실한 나오미…이 참담한 비극을 묵상 하면서 한 가족의 비극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영적 현주소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은 그 절망과 영적 암흑의 상황 가운데, 모든 것이 무너진 하나님께서는 그 가족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품으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소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비극적 상황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영적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그 깊은 어둠과 절망 가운데, 영적 암흑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룻과 나오미를 건지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건지실 것입니다. 룻기는 나오미와 룻의 이상적인 고부관계,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며느리에 이야기도 아니고, 보아스와 룻의 로맨스라던지, 좋은 남자 만나 인생이 바뀐 현숙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배웠습니다. 룻기는 그런 한 가정의 일대기를 넘어 영적 암흑 속에 있는 사사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새 시대를 준비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성경입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 시대, 사람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가나안 땅 정착 이후 경제적으로 좀 풍성하고 안정을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역사 심과 구원하심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등 돌리며 살았던 영적 암흑기가 바로 사사 시대였습니다. 사사 시대 영적 하향 곡선의 패턴을 기억하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면 축복을 당연히 여기고 망각하다 하나님을 떠나고, 그러다가 하나님이 치시면 다시 한번 부르짖고 살려 달라 매달려서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회복됩니다. 그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무너지는 것… 이것을 반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며 어둠으로 달려갔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사 시대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물론 표면적인 의미는 그 땅의 먹을 양식이 자라지 않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흉년 이었습니다. 먹을 거에 대한 고민이 생긴 인생의 흉년이 찾아온 겁니다. 동시에 사사 시대의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영적인 타락과 암흑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이 흉년과 같이 바짝바짝 메말랐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직면한 상황도 마음도 다 바짝 마르는 흉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흉년이 들고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사인으로 알고 그 인생의 흉년을 통해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해 하나님이 그 가운데 개입하시도록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그렇게 하지 않고 인생의 흉년 가운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결정하는 한 집안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겁니다. 바로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인데, 특별히 남편 이름 엘리멜렉인데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입니다. 이걸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하면 좀더 이것을 실감나게 번역하면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다..”입니다. 오직 내 삶의 왕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이 멋진 이름, 그런데 그 이름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지금 살아가는 것이죠. 인생의 흉년이 들었는데 하나님만이 왕이시다…라는 그 이름과 같이 하나님에게 나아가고 물어봐야 사는 것 아닙니까? 인생의 흉년 가운데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저희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묻는 태도도 없고 기다리는 태도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야 될 인생,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축복의 땅에 잠시 흉년이 들었다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머리를 굴리고 그냥 행동하고 그 땅을 이민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성취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축복의 땅입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하나님께 간구하고 매달려 그 언약의 땅, 축복의 땅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게 아니라 아무 미련없이 그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축복의 땅을 떠나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상의 없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서슴없이 이방 땅인 모압 땅으로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인생의 모든 것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해서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 스스로 결론을 내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인생의 흉년 가운데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그냥 마음대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자, 그게 바로 엘리멜렉 가족의 비극이자 이스라엘 백성의 비극이었던 것입니다. 이 엘리멜렉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던 이스라엘의 왕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왕입니다. 사울왕이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는 포인트가 뭐냐면 국가적 위기와 압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거나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눈에 보기에 옳은 대로 행해버리는 겁니다.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냥 엘리멜렉이라는 개인의 일탈이 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적인 영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묻기를 거절하는 백성들, 인생의 흉년이 왔는데도 하나님께 자문 하며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을 멈춘 백성, 이름값 하지 못하는 백성들, 그게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엘리멜렉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흉년을 통해 돌아오기 원하셨는데 인생의 흉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더 멀리 도망가 버리는 시대, 하나님에게 자문하고 엎드리고 기도하며 부르짖고 매달리는 내 스스로 결정하고 내 눈에 보이는대로 결정하여 모압 땅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그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오늘 말씀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공로로 새 사람된 우리 모두의 삶은 엘리멜렉의 고백이 있는 삶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내 삶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성도, 예수님만이 내 삶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이 세상에 살아가는 천국 백성입니다. 이 땅에 소속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며 압박을 다하며 인생의 흉년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될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에게 묻고 엎드리며, 하나님에게 나아가고 하나님만 붙들어야 사는 겁니다. 나의 인생의 어려움과 압박이 하나님께 묻게 만들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만든다면 우리는 사는 겁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 삶의 흉년이 있고 어려울 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 않으며 내 스스로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해 움직이는 이 비참한 엘리멜렉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입술로만 하나님만이 내 삶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이런 엘리멜렉의 삶이 아니라, 진짜 내 삶의 왕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묻고, 기도하며 부르짖으며,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그 인생의 흉년 가운데 하나님만이 왕이심이 선포되며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고 이끄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새벽기도 시간에 룻기를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룻기를 시작하는데 1장 처음이 아닌 가장 마지막 부분을 먼저 살피며 영적 큰 그림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룻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룻, 나오미, 보아스 세 사람의 이야기, 혹은 서정적이고 추수 때에 곡식을 줍는 여인의 모습을 쉽게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룻기를 읽을 때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그냥 읽는 경향이 있는데, 룻기가 부분적으로 가르치긴 하지만 전체 진리가 아닌 두 가지의 착각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룻기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효심 많은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시어머니를 남편이 사망 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는 효심 많은 룻의 이야기가 분명히 등장하고 성경이 증언하는 사랑의 고부관계,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진 시어머니 와 며느리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알고 은혜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룻기 전체의 주제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효심 많은 며느리 이야기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두번째로, 룻기는 보아스와 같은 유력하고 좋은 남자 만나 재혼해서 인생을 편 현숙한 여인의 이야기, 로맨스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보아스라는 유력한 자, 좋은 남자를 만나 현숙한 여인 룻이 회복되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게 룻기 전체 주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룻기가 성경으로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 지혜는 좋은 남자 만나 인생을 편 현숙한 여인의 이야기라든지, 남녀 사이의 로맨스를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룻기의 큰 주제는 무엇일까요? 룻기는 영적 암흑기인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 다윗 계보가 시작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지금 영적 암흑기,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완전히 막장으로 가는 그 소망 없는 시대로 끝나는 것 같지만, 그런 절망의 모습 뒤에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새 역사를 준비하시며 그 사람들을 통하여 새 시대를 이미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말씀이 룻기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와 룻기를 한 그림으로 보면서 이 시대가 사사기 같이 완전히 무너지고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 수 없는 수많은 부끄러운 일을 하며 완전히 무너져 못 일어날 것 같은데 그렇게 처절하게 무너진 현장 뒤에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들을 준비 시킴으로써 이미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새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신다는 이 룻기의 큰 그림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영적 큰 그림을 보기 위해 룻기 맨 마지막 족보 이야기를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룻기 4장 마지막은 다윗 왕의 조상에 대한 족보를 결론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족보가 베레스에서 시작되는데 베레스는 창세기 38장에 유다와 그 며느리 다말이 동침함을 통해 태어나는 아들입니다. 며느리가 변장해 시아버지 유다에 들어가는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창세기가 이유는, 그렇게 부끄러운 모습을 통해 태어난 그 베레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태어날 다윗을 큰 그림으로 준비하셨고, 더 나아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족보를 큰 그림의 경륜으로 준비하셨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레스 이후에 족보가 내려오는데 그 유명한 보아스의 아버지가 살몬입니다. 마 1장 5절을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증언합니다. 즉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 어머니는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이방인의 기생, 여리고 성에서 유일하게 붉은 줄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은 가정….그러니까 보아스는 이스라엘 아버지와 이방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이중 문화 가정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유력한 보아스가 이방 여인, 그것도 전직 창녀였던 라합이었다는 것을 통해, 왜 보아스가 모압여인이었던 이방인 룻에게 특별한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방인이었고 기생이었기 때문에, 자기 어머니와 처지가 비슷한 이방 여인이자 과부인 룻에게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특별한 배려를 개인적인 연민이라든지 어떤 끌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밖에 있는 이방인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다윗 왕가의 족보는 순혈 이스라엘 족속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끄러운 다말을 사용하셨고, 이방 여인 기생 라합을 쓰셨고 그리고 보아스와 함께 모압 여인 룻을 사용하셔서, 나중에 다윗을 낳는 이 드라마틱한 역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어둠으로 달려가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돌아오도록 새시대를 그렇게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에 사랑의 고부 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아스와 룻의 개인의 로맨스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여인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준비하셨고, 다윗의 조상들을 준비하시는 은혜의 말씀, 그게 룻기의 큰 영적 그림입니다. 눈에 보이는 정치 지도자가 이 세상을 이끄는 것 같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은 이 때에, 광야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암흑과 같이 어두운 시대,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 창조적 소수, 진정한 예배자와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 시대를 준비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그 역사의 경륜을 여전히 이루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시간 나의 개인의 신앙을 넘어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의 인생을 통하여 새 시대의 새로운 사람을 통해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데 나를 사용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이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도록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룻기를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진리이며, 이 시대의 광야에서 하나님께 붙들려 보이지 않는 곳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비결인 줄 믿습니다. 이 은혜를 붙드시고 룻기를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는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로 감옥에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쓴 서신이 마무리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 말씀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 입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는 결론을 통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 모두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직분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이루어야 할 직분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는 직분, 저는 목사, 여러분들은 성도,집사,권사,장로라는 직분 대로 살아야 된다는 정도의 일차적인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앙 생활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정의되고,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을 통해 정의되는 것을 안다면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이란 그런 타이틀을 넘어서는 나의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직분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명…소위 말하는 명령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 잠시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것, 그래서 내가 하나님으로 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잠시 사는데 그 이유는 보내신 분의 명을 따라 그 명을 이루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내적으로 내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그 보내신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믿는 게 바로 예수님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보이지 않는 직분과 사명을 주셨는데 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과 명령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을 안타깝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그 인생의 펼쳐지지 못한 채 인생이 끝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죠. 그것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지 못하고 거절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결론을 우리에게 전하며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 있고 하나님이 맡기신 명령이 있다는 것을 알아 내가 이 세상을 주님의 명을 붙들고 받은 자로 살아가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열심과 열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 이 삶을 위해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다는 걸 잊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살아낸 주 안에서 직분을 이룬 삶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감옥에서 친필로 쓴 골로새서일 것입니다. 친필로 쓴 이 서신, 매여 있는 감옥에서 이 서신을 쓴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골로새서가 끝이 나는데,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이루는 삶을 묵상해보게 됩니다. 사실 지금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주 안에서 받은 사명과 직분을 이루는 방법은 빨리 감옥에서 나가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을 만나 전도하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에요. 그것을 위해 완전히 인생을 던진 자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 생명을 전해 한 사람이라도 건져야 된다는 그 열망이 가득한데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그 열망을 아시는지 지 모르는 지 모르게 많은 세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오랜 시간을 그냥 감옥 안에 있게 만드셨어요. 나는 주님을 향한 열망이 이렇게 크고 시간을 아껴서 복음을 전하고 매일매일 노방전도 다니고 주님의 복음으로 변화되야 할 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감옥에 갇히게 하셨는가? 사도 바로 나가서 뛰어 복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루기 원한 직분은 뭐냐 하면 진득하니 앉아서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말씀 쓰는 거였어요.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그를 통해 생각하지 않은 다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열망을 가지고 당장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 복음의 비밀을 빨리 나가 설교하고 선포하고 싶은데 왜 나를 이렇게 가두시는지….그를 갇히고 묶이게 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통해 성경을 진득하게 쓰게 하시는 직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가서 뛰어 복음 전하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자기 인생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의 인생은 대부분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는 그 갇힌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것을 이루기 원하셨던 사명이 있었던 겁니다. 네가 나가 열심히 뛰어다녀서 복음받고 새생명 얻는 것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서 써서 그 말씀을 읽고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한 것과 뭐가 더 효과가 컸겠느냐고 분명히 물어 보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며 수많은 성경의 말씀을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을 통해 생명의 복음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전달한 것이지요. 나가 설교하고 전도하는 대신 사도바울은 여러 성경 말씀을 쓰게 되어 저와 여러분들에게 복음의 감격을 알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직분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부딪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연약해지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삶의 여러가지 일로 꼼짝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은 이루기 원하시는 직분과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나중에 큰 그림을 통해 주님께서 주신 그 뜻을 깨닫는 때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내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는 삶을 원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있을 줄 믿습니다.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계획을 넘어 주신 그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내 삶의 이루기 원하시는 뜻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부름 받은 자로 주 안에서 받은 직분과 사명을 이루기를 소망하십시오. 해가 지면 끝나는 것과 같은 짧은 시간을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주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언젠가는 주님께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실 것을 잊지 말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주님께서 주신 그 명령과 뜻과 직분을 이루는 삶을 저와 여러분들이 이루어 가시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골로새서 말씀이 결론으로 나아가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들을 소개하며 그들에게 문안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짤막한 문안 인사와 함께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 인생이 이렇게 하나님한테 한 두 줄로 딱 간단하게 평가 받는 인생이라는 것을 묵상해 보게 됩니다. 이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가 2022년을 어떻게 보내고 새 출발 할까를 고민하면서 예수님 앞에 내 인생이 어떻게 기록되고 남겨질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 결국 이렇게 예수님 앞에 한 두 줄로 평가 받는 것이죠. 신앙 생활 안 해도 똑똑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앞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기억될까를 고민하며 인생의 후반전에 가면 선행도 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받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 된 자들이라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받고 기억되는가를 넘어,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가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받는가를 정말 인지하고 실제로 믿으며 그게 더 중요한 본질로 믿고 살아 가는지 자문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거하시며 그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나, 그 예수님이 평가하시는 내가 사람들의 평가나 사람들의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정말 믿고 살아가느냐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 증언하는 동역자들, 그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동지들이 소중한 이유는 결국 그들의 인생의 끝나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시는 나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고 함께 목숨 걸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이 주님 앞에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받기를 기대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동지 의식을 가지고 함께 헌신한 동역자들이 소중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 중에 특별히 한 사람을 주목하기 원하는데 그가 10절에 등장하는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한 동역자들 중에 정말 중요한 사람들만 뽑아 가지고 지금 얘기하고 있겠죠. 그중에 지금 누가 등장 하냐면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마가가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에게 선교 여행 중에 완전히 찍힌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이 마가가 1차선교여행을 같이 갔었는데, 선교여행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마가가 중간에 탈락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는데 바나바는 사람 중심의 사역자, 관계 중심의 사역자여서 이 마가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다시 데리고 가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그런데 일과 사역 중심이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간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목숨 걸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그 복음에 올인 하지 않는 마가 같은 사람하고 동역할 수 없었던 거죠. 바나바의 제안을 거절한 정도가 아니라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결국 바나바와 결별하려 따로 팀을 꾸려 2차 선교 여행을 가게 됩니다. 그 문제의 핵심이 바로 이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였습니다. 그러니까 마가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바울에게 완전히 찍힌 사람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이 마가를 동역자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근데 분명한 것은 한때 사도 바울의 눈에 그렇게 찍혔지만, 함께 선교여행을 갈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은혜로 결국 그들은 함께 동역자로 끝까지 사랑하며 가는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마가가 지금 사도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한때 완전히 찍혔던 마가가 어느정도 열심을 다하는 동역자가 되었는가 하면 지금 복음으로 말미암아 같이 감옥에 갇힌 3인방 중에 한 사람이 된 겁니다. 소시적 선교 여행이 힘들어서 중간에 탈락했던 마가는 그 미성숙한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영적으로 큰 자가 되어 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변하게 된 겁니다. 내 눈에 봤을 때 저 인간은 안 돼… 이렇게 내 눈에 찍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눈에 찍힌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에도 찍혔다고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무나 쉽게 단정하게 될 때가 있어요. 근데 나에게 찍힌 사람이 하나님께 이쁨 받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내 눈에는 마음에 안 드는데 하나님께는 놀랍게 쓰임 받는 사람 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지금 나와는 관계가 틀어졌고, 내 눈에는 성이 안 차는 사람이고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것이 평생 그걸로 고정되지 않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좋은 씨앗교회를 통하여 믿음의 동지로 만났다면 나는 예수님께 예수님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나는 어떤 평가를 받기 원하는가를 분명히 인식하며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나의 짧은 인생,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며 어떻게 평가하는가에만 너무 민감해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며 어떻게 기억 될지를 민감하게 바라보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사도 바울과 같이 한때 내 눈에 찍힌 사람일지라도 그게 평생 찍힌 사람으로 남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됐을 때 모든 것이 녹아 함께 손 붙잡고 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도와 주옵소서… 그것을 놓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눈에 찍혔지만 인생의 큰 그림 가운데 언젠가는 하나님 은혜로 녹아져 동역자로 함께 손붙잡고 가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품고 나아가며 깨진 관계가 회복되는 놀라운 기적을 저와 여러분들이 현재형으로 풍성히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성도로서 우리가 이 새해에 새 마음을 가지고 새 출발하면서 우리의 영적으로 무장해야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입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내 말이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이 있어 새 출발하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껍데기의 변화가 아니라 내 속사람의 변화이자 그 결과 입술에서 나오는 말에 변화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내 속사람이 변한 증거, 마음이 드러나는 향기가 바로 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영적으로 변화한 우리의 삶 가운데 말이 놀랍게 변화하는 삶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새 사람 된 성도로서 우리는 말을 어떻게 해야 되냐면 항상 은혜 가운데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얼굴이 이쁜 사람은 5년만 지나면 무덤덤 해집니다. 근데 그 이쁜 얼굴 지나가고 나면 남는 건 바로 말을 이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말을 이쁘게 하는 사람이 결국 평생 사랑 받는 거예요. 잘 생긴 훈남, 그거 5년 지나면 무덤덤 해지고,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바로 말을 훈훈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을 이쁘게 한 사람이 진짜 이쁜 사람이란 것을 아는게 지혜로운 자입니다. 말을 훈훈하게 하는 사람이 진국임을 아는게 지혜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가진 것 많고 껍데기는 대단해 보이는데 말을 함부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성경에서 보면 영적인 문제라는 거예요. 내가 말을 함부로 하고 말을 기분 나쁘게 하고 내 성격대로 말하는 것은 솔직하고 뒤끝이 없는 게 아니라 영적 미성숙의 문제라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 나와 내 마음이 완전히 변화 받아야 되는 영적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은혜 가운데 말하는 이쁜 말이란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말한다고 증언함을 주목해보기 원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이쁘게 말하는 사람, 훈훈하게 말하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일반적인 사람들을 말의 끝은 꼭 자랑으로 끝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기가 죽고 풀이 죽게 만드는 은혜 없는 말이지요.. 반대로 소금과 같이 보이지 않게 맛을 내는 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하고 말하면 살 맛나게 해주는 말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하고 얘기하면 기분이 너무 좋아지고 듣는 사람 마음을 격려하고 일어서게 만드는 말들을 하는 게 바로 소금으로 맛을 내는 말들입니다. 은혜 가운데 맛을 내는 그 말을 통해 한 사람이 세워지고 한 사람이 위로 받으며 한 사람의 마음이 열리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때 내 입술을 통하여 주님이 사용하는 놀라운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쁜 말들을 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셔서 마땅히 대답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에게 해줘야 될 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는 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내 생각대로 마음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대답할 것을 알려 주시는 그 지혜를 주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바울의 동역자 중 한 사람인 두기고를 보낸 이유가 “너희 마음을 위로하려 함이라…” 증언합니다. 두기고를 통해 그 백성들과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고 보낸 겁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그의 말을 통하여…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낸 과 같은 그 넉넉한 말로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보낸 겁니다.. 말하는 것을 통해 그 사람들의 마음이 위로 받는 것, 이것만큼 놀라운 은혜의 통로가 있겠습니까? 이게 내 힘으로 안되고요 사람의 힘으로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에 힘쓰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며 기도를 통하여 감사함과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을 통하여 나의 입술이 주님 앞에 은혜 가운데 조율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 시간 말을 이쁘게 하기를 기도 하세요. 말을 함부로 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 자들은 회개 하십시오. 새해를 시작하면서 결단할 때 나의 말이 항상 은혜 가운데 주님의 통제를 받아 나오도록, 주님이 말하게 하심을 말하는 인생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 내가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 하셔야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말을 은혜 가운데 할 수 있도록, 소금과 같이 맛을 내는 말을 하도록 기도 하셔야 합니다. 은혜 가운데 변화되어 내 말을 통해 주님의 은혜가 충분히 넉넉히 전해지도록 기도하기 원합니다. 항상 나의 말을 통해 소금으로 맛을 낸 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하며 꼭 필요한 말을 하며 이런 놀라운 삶을 살아갈 때 여러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며 여러분들을 통하여 전도의 문이 열리며 여러분들 통하여 그리스도의 비밀이 놀랍게 드러나는 그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내가 쓰는 말들을 통해 듣는 사람들이 힘이 나고 격려 받고 꼭 필요한 말들을 해서 마음을 터치하고 마음을 열리는 역사로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의 힘을 쏟고 기도를 통하여 감사하며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나의 중보 기도의 내용이 바뀌는 자, 이것이 성도로서 새해를 준비하는 첫 번째 영적 무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두 번째 무장으로 외인들에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증언합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것은 불신자들인데, 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는 삶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와 기도로 힘을 쏟으며 기도 가운데 우리가 공급 받아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을 보여주는 지혜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내가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내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 받으며 지혜를 받아 세월을 아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시간을 함부로 쓰지 않고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일차적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천 년 만년 살지 않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게 지혜이고 시간을 함부로 쓰지 않고 시간을 절약하여 시간이 정말 귀한 줄 알고 살아가는 것, 이게 지혜를 행하며 세월을 아끼는 방법이죠. 그런데 이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훨씬 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끼라는 말의 원어 의미는 시간을 redeem…하라는 의미입니다. 세월을/ 시간을 건지라/ 구원하라는 겁니다. 즉 내 일상의 삶에 하나님 은혜가 나에게 임하는 때로써의 시간을 살라는 것입니다.
시간에는 그냥 흐르는 시간인 크로노스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연대기라는 말을 영어로 chronology라 하는데 그게 바로 크로노스라는 말에서 나왔지요. 그 연대기로서의 시간은 오늘 뭐 했고 내일 뭐 있고 저번 주에 뭐 했고 쭉 그냥 직선의 인생을 하나로 펼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만 있는 게 아니라 인생에는 시간이 아주 갑자기 천천히 가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카이로스….라고 하는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임하는 그 타이밍이에요. 사고가 나기 직전에 타이밍…그러다 기적적으로 사고를 면한 타이밍, 그 시간은 순간에 1,2초 가 아니라 슬로우 모션으로 흐르는 결정적 때이자 우리가 계속 복기하게 되는 타이밍이지요. 우리 교회의 성전을 주시기로 결정한 그 타이밍, 그게 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임한 결정적인 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인생에는 다 때가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나아가야 할 때, 그리고 멈춰야 될 때, 물러서야 될 때, 모든 인생에는 때가 있다는 그 때, 그 타이밍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 얘기한 게 아니라 바로 결정적인 순간을 얘기하는 것이죠. 결국 우리가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기껏해야 100년을 살아가는 데 그 100년의 삶을 의미 없이 흘러가도록 하나님 나라나 영의 세계가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에 두고 그 타이밍을 건져내는 거예요. 하루를 마무리하고 복기 했을 때도, 기억에 남고 담기는 시간들을 몇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흘러가게 두는 게 아니라 그냥 무의미하게 뭔가를 끝내는게 아니라 이 결정적인 순간을 계속 만드는 게 뭐예요. 지혜롭게 가는 성도라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을 통해서만 가능하냐면 영적으로 깨어있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민감해지며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때,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 그 결정적인 타이밍 그 결정적 "때"들이 나의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가져 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세월을 아끼는 자아의 지혜로운 삶이라는 거예요. 사랑할 때 기도할 때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 문을 열 때, 그리스도의 비밀을 나누는 때 이 결정적인 시간들을 만드는 게 바로 세월을 아끼는 삶,, 세월을 redeem하는 삶입니다. 2022년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365일이 주어진 새해가 열렸습니다. 이 때 뭐 하고 뭐 하고 뭐 하고 뭐 하고 다 귀하고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매일매일 주님이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은혜의 때를 만드는 겁니다. 유통기한이 있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모든 세월을 다 탕진하는 인생, 다 쏟아 붓는 인생이 아니라 그것은 필요의 개념으로 한정하고 나의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예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으며,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는 그때, 주님이 나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그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그들의 영이 변화하고 새롭게 되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그때 그 타이밍들을 가지고 내 인생을 재편하는 인생이 바로 지혜로운 인생이자 세월을 아끼는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그것을 민감하게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하며 나는 그것을 통하여 쓰임받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 내 인생이 하늘에서 주시는 그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맞닿는 그 놀라운 은혜가 내 삶 가운데 풍성히 펼쳐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골로새서 4장 말씀을 통해 신년 첫 주간에 딱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는 그 은혜를 말씀을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새로 출발하는 2022년, 무엇을 붙들고 우리가 나가야 되는가?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첫 번째가 무엇인가? 그것을 오늘 말씀은 기도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붙들고 새해를 출발할 것을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고 계십니다. 기도에 힘을 쓰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서 실제로 기도에 힘쓰는 인생이 되라...이 사도바울의 권면은 새해를 출발하는 저희가 마음에 새겨야 되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기도에 힘을 쓰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성도, 그것이 바로 기도를 계속하는 자들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땀과 기도의 눈물이 있어 내 삶이 메마르지 않고 습기가 촉촉하게 있을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 기도에 힘쓰며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삶임을 믿으며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나의 영적 구보와 같이 실제로 지속되는 은혜로 내 삶에 체득되기 원합니다.
기도에 대한 강조 하면서 사도 바울은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권면합니다. 기도를 하는데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며 기도하라는 겁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이고, 감사하는 것은 상황과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가 호흡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행이라면 기도를 통해 나의 기도의 요청을 하기 전 먼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분히 감사하는 게 기도의 문을 여는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내 기도 첫 번째는 내 안에 함께 하시며 역사 하시며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으로 기도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기도 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먼저 나에게 충분한 감사가 되는 인생입니다. 무언가 기도가 응답되고 무언가 상황과 환경이 변화되기 전 우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내가 기쁜 겁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고 거하기 때문에 내가 기도 중에 감사하는 거예요. 그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거하신다는 이 감사함을 충분히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누리면 누릴 수록 내 삶이 영적으로 깨어 있게 되는 것이죠. 영적으로 민감해진다는 거예요.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 영이 깨고 민감해질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육적인 일이 둔감 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도를 통하여 주시는 놀라운 축복 이라는 거예요. 왜 기도를 계속하는 게 중요하며 기도의 힘을 쓰는 게 중요하냐 하면 평소에 기도의 힘을 쓰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그 기도가 없는 삶에는 결정적인 순간과 위기 가운데 기도가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은 찾아다니고 눈에 보이는 방법들은 찾아 다니는데 그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의 자리에서 공급받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매일매일 삶 가운데 기도에 힘을 쓰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내 삶이 기도 가운데 조율 돼야만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에, 인생의 위기 순간에 믿음을 사용하게 되며, 기도를 통하여 공급받게 되는 것이죠. 내가 어느 정도 오래 기도를 하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내가 기도할 때 기도를 지속하며 기도에 힘쓰며 기도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감사함을 충분히 누리는 영적 기도, 그리고 내가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기도하는 그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깊은 기도 가운데 주님이 함께하심을 풍성히 누리는 그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도를 강조하면서 자신을 위한 중보 기도를 부탁합니다. 내가 중보기도가 정말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인지한 것입니다. 이게 참 겸손한 자의 태도입니다. 내가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의 은혜가 필요한 자라는 것을 아는 게 영적으로 겸손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얼마나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끝까지 중보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자라…고백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중보 기도로 공급받는게 필요해요. 만나는 자마다 나를 위해 중보기도 해달라고 부탁하는 이 영적 겸손함과 초심을 잃지 않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요청했던 중보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사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될 중보기도는 뭡니까? 감옥에서 건강한 것, 그리고 감옥에서 석방되는 것…거의 매일 매일 날짜를 정해 놓고 기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별 잘못도 없는 억울하게 투옥된 우리 사도 바울 선생님이 속히 석방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게 당연히 중보기도 첫 번째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중보기도 요청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옥 안에서 건강이나 아니면 감옥에서 빨리 석방 되는 것을 놓고 중보기도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요청한 중보 기도 첫 번째는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중보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전도의 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감옥 안에서 그가 요청한 첫 번째 중보기도 였다는 게 복음이 가져다주는 충격 이라고 할 수 있죠. 이게 사도 바울의 우리와 다른 차원의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걸 통하여 그는 그 나머지 것들도 저절로 풀릴 거라는 거 알고 있었고 풀리지 않아도 본인은 상관이 없는 인생이라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투옥되었기에, 때가 되면 풀릴 거고 풀리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이 선명히 전파 되면 나는 그걸로 족한 인생인 거예요. 나를 위하여, 내 주변에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하여 이런 중보기도 하는 것이 귀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깊은 중보 기도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놓고 간절히 중보 기도하기 원하는 것이죠. 나의 일상에 만나는 사람들을 놓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 달래 마음의 문을 열게 주님 지켜 주옵소서…어떤 상황 가운데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도와 주옵소서… 이게 저와 여러분들의 깊은 중보기도가 된다면 이걸 놓고 정말 간구한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놀랍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하여 이 기도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기도에 힘을 쓰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한해가 놀랍게 풀어지며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담기는 새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새벽에 이 한해를 주님과 함께 다시 한번 새 출발 하기를 다짐하며 특별 새벽기도 시간에,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도에 힘을 쓰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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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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