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감옥 안에서 간절히 중보기도 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증언합니다. 사실 지금 위로 받아야 되고 중보기도를 받아야 되는 자가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가장 힘들고 어렵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더 감사하고 기뻐하며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그렇게 힘쓰는 전천후 신앙, 신비의 신앙 생활을 한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자기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정의하는 인생, 그분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따라 내 인생이 정의되는 그 놀랍고 선명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그 힘들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중보 기도를 하는데 육신의 얼굴을 보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관계성이 없고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지체로 있는 자들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도 참으로 귀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나를 넘어서는 기도,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넘어서는 기도의 삶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 내가 개인적으로 가보지도 않은 땅 선교지를 놓고 간절히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겁니다. 이런 놀라운 중보기도의 신비는 바로 육신으로는 떠나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영으로는 함께 있다는 것이죠. 나의 육신은 너희와 떨어져 있으나 시공을 초월하여 영적으로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실체로 고백하기 때문에 내가 감옥에 있지만 심지어 한 번도 보지 못한 너희를 위해 간절히 애쓰고 기도하며 힘쓴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지만 수많은 교회들을 품고 기도할 수 있으며 그들과 육신은 떨어져 있으면 영적으로 심령으로 함께 하는 것을 믿으며 그렇게 놀랍게 중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기도할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이 역사와 신비를 믿을 때 우리는 그 중보 기도의 지경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죠. 나는 육신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심령으로는 함께한다는 이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기도할 때 우리가 선교지를 향한 기도와 선교사님들을 위한 기도가 놀라운 폭발력을 가지는 것이죠 그렇게 영적으로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그렇게 힘쓰고 간절히 기도했던 중보 기도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마음의 위안을 받는 거예요. 여기서 마음의 위안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위안이고 그 결과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겁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연합하는 것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인들은 마음의 위안이 없었고 사랑 안에서 연합한 대신 분열하고 깨지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죠. 내가 마음에 위안을 받지 못하고 메말라 가며 내가 자꾸 분열하며 내가 풍성한 대신에 그런 메마르고 빈약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비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마음의 위안을 받고 그분의 사랑 안에 연 합하며 인생의 풍성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위안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연합하는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거예요. 또한 성도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이 임하며 그리스도를 깨닫는 자가 되기를 중보 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계속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달아 그 깊은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그런 삶이 될 수 있도록 기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그 예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부활을 누리게 누리게 됨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은 진리를 보거나 바로 이해하려는 힘이고 지혜라는 것은 진리를 굳게 간직하고 계속 파악하려는 힘입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영지주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만의 어떤 주관적인 지식, 자신들이 체험한 어떤 경험들을 절대화 하는 거예요 자신들만 가지는 특별한 지식과 자신들만 경험한 특별한 경험이 절대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대화 시키는 게 모든 이단의 공통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깨닫지 않게 되면 내가 경험한 어떤 특별한 경험과 어떤 지식을 절대화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하며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교묘한 말로 그들이 속임을 받고 미혹을 받아 말씀 위에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 지식을 우위에 두며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 당시에 골로새 교회가 직면한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렇게 교묘한 말로 속임을 당하지 않고 미혹 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 분 안에 인생을 세우는 것이죠. 그래서 미혹이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붙드는 삶을 멈추게 만드는 모든 게 미혹이라는 거예요. 영적 미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만 바라보고 붙드는 것을 멈추게 만드는 거라는 거예요. 그게 상황이 됐든 환경이 됐든 나의 지식이 했던 경험이 됐던 내 삶을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붙드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그게 바로 교묘한 말로 우리를 속이는 미혹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이게 너무 신비해 가지고 찾기 어려워서 우리가 하루 종일 찾아야 된다는 게 아니라 라면으로 얘기하면 동결건조 스프 같다는 것입니다. 라면 동결 건조 스프는 그 상태로 먹으면 아무런 맛도 잘 나지 않죠. 그 스프는 라면과 함께 끓는 물에 끓여서 익혀야 되는 것이죠. 물에 넣어서 부풀려 익혔을 때 그 본연의 맛이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마음에 담기며 품었을 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실체와 되는 것을 경험할 때 그 진리를 깨닫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보화가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 마음의 품었을 때 나타나는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보화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경말씀 그냥 글씨가 아니라 생명이며 실체이며 그것이 육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품어 내 마음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실체로 흐를 때,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그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나에게 풍성한 역사로 임하게 된다는 것이죠.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으로 회복되며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교회가 어느 때보다 간절한 중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 말씀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깨달아 풍성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되며 마음의 위안을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도록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내가 육신으로 떠나 있을 지라도 심령으로 함께하는 그 영적인 비밀을 믿고, 중보기도를 위해 애쓰고 힘쓰는 자가 되십시오. 중보 기도의 지경을 넓혀가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또한 성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그 사랑 안에 연합하며 풍성함을 누리고 그리스도를 깨닫고 살아가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마음의 위안을 받는 것도, 우리가 연합을 하게 되는 것도, 풍성하게 되는 것도, 미혹에 빠지지 않는 것도 모두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데서 온다는 사도 바울의 분명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그분의 지혜이신 말씀에 내 인생 모든 것을 걸며 의탁하여 살았을 때 무질서한 인생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믿음의 굳건한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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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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