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쓴 권면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로서 두 가지를 붙들고 살기를 권면하고 있는데 “깨닫는 것”과 “자라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점점 넓고도 깊게 깨닫는 것이 신앙 생활 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 이제껏 산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 내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고 해석되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미숙한 사람은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모르고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을 바라보게 되며 철저히 주님 중심으로 살며 은혜를 붙들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v.6)”를 주목하기 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은혜를 깨닫는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그냥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귀로 들어 마음에 담기도록 듣는 것이죠. 말씀을 마음에 담아 피가 되고 살이 될 때,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메마르지 않고 내 영혼이 채워지는 삶의 비결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마음에 꾸준히 심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성전에 장식된 이 크리스마스 트리가 얼마나 이쁩니까? 이 크리스마스 트리가 사실 누군가의 헌신을 통하여 이렇게 성전에 이쁘게 장식되어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겁니다. 누군가의 손길로 이렇게 예배당 안에 잘 데코레이션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중보 기도를 통하여 지금까지 축복받고 기도로 은혜를 받고 살았음을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몸이 연약한 분들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자라고 있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이곳 저곳에서 스며져 있음을 발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도록 말씀이 이 진리를 증언하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일이 매일매일 새벽기도를 통해 경험이 될 때 여러분들은 바른 신앙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여러분들은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주님의 종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성도의 삶,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로 열매를 맺어 자라나는 삶입니다. 열매를 맺어 자라난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의 믿음, 하늘에 쌓아두는 소망,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열매가 나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복음 안에서 깨달은 결과입니다. 내가 매일 주님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예수 안에서 하나님 은혜가 깨달아지고, 내 삶 가운데 예수 안에서 믿음의 열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의 열매, 모든 성도들은 사랑하는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겁니다. 내적으로는 그런 열매들과 더불어 외적으로 복음의 열매, 구원 받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온 천하에 열매를 맺는 것을 강조하는데, 온 천하, 바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세워진 게 바로 에바브라를 통한 복음의 열매였음을 증언합니다. 깨닫는 것과 자라나는 것 신앙 생활을 구체적으로 골로새 교회를 통해 드러내셨음을, 이 두 가지를 붙들고 에바브라가 골로새 지역에 주님의 교회를 개척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 창립 멤버인 에바브라를 “우리와 함께 종된 자”로 소개합니다. 사실 에바브라와 사도바울은 직접 만난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잘 몰랐지만, 우리와 함께 종 된자…로 고백하는 이유는 안 만나도 이런 영적인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누구 안에서? 성령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함께 중보 기도할 수 있고 성령 안에서 함께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에, 오직 주의 사랑에 매어 열매 맺고 자라나는 기쁨을 나의 일과 같이 함께 축하하고 함께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나에게 선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며 구원받는 자가 더해지는 풍성함을 경험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선교사님과 통화할 일이 일었습니다. 선교지의 선교사님과 통화할 때면, 우리가 몸은 이렇게 떨어져 있지만 한번도 선교지에 직접 방문해보지 못했지만, 함께 종 되어 사랑하는 동역 관계로 일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대신하여,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선교지로 파송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믿고 중보기도와 후원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은 우리를 대신해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 척박한 땅에서 뛰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직접 가지 못해도 함께 할 수 없어도 영적으로 함께하며 중보 기도하며 후원하며 그 사역을 함께 감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비라고 믿습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깨닫는 삶, 은혜를 붙들고 열매 맺어 자라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본질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열매가 맺어지며 성장하는 것을 성도들의 삶 가운데 풍성히 경험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신앙 생활의 본질인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은혜를 붙들고 성령 안에서 열매 맺고 자라나는 은혜가 가득하길 사모하십시오. 바라기는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삶으로 점점 더 나아가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되는 인생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교인들을 향하여 권면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너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옥이란 불평불만과 절망이 가득한 곳이자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 감옥 안에 갇혀서 사도바울은 본인이 기도 받아야 될 입장인데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거고 더 놀라운 것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다는 것이죠. 어떻게 감옥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며, 기도할 때 마다 감사한다는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는가….이것이 복음이 주는 충격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감옥안에 절망하지 않고 이렇게 산다는 게 기적이고 이것이 바로 부어 주시는 하늘로부터의 은혜와 평강이 사도 바울에게 임했다는 구체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감사 했는가? 내용을 보면 그가 감사한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기도하면서 감사하는게 기도 제목이 응답 되거나 내가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질 때 기도할 때마다 감사할 수 있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금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는 이유는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복음을 자랑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는데 그 감사가 나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고, 말씀을 듣고 변한 것을 놓고 감사하고 있는 것이죠. 결국 자랑하는 내용이 다른 게 성도의 차별성임을, 내 자랑거리가 무엇이며 내가 내세우는 게 무엇이며 내가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가 나의 영적 수준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내용이 주님 앞에 조율되어 나를 자랑하고 나의 업적이나 열매를 자랑 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고, 복음이 들려지는 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감사하고 복음의 열매를 자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의 감사 내용을 보면,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 골로새 교인들은 믿음 소망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믿음 소망 사랑을 그냥 뜬구름 잡듯이 감사하는게 아니라, 바로 예수 안에서의 믿음,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통해 녹아져 그들의 삶에 임하고 있음을 사도 바울은 듣고 기도할 때마다 이것을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예수 안에서 믿음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 자체를 열심히 일하는 신념과 동일시 하며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즉 믿음의 대상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믿음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예수 안에서 믿음,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방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 성도가 성도 되게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 안에서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신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의 믿음이 믿음의 대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며 그 예수 안에서의 믿음이 될 때 그 믿음을 붙들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바라보며 감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지향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쌓아둡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바라보며 힘과 권력의 소망을 쌓아 둡니다. 그게 자연적인 삶이고 일반적인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 소망을 쌓아두는 것을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소망을 쌓아두는 곳, 초점과 관심이 쏠려 있는 곳이 과연 하늘입니까? 그게 바로 변화된 백성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두고 있는가 나의 관심과 초점을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자라면 복음의 충격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변화 시키는 것은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믿으며 보이지 않는 천국에 소망을 쌓아 두기 시작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늘의 소망을 실체로 바라보고 나의 소망을 하늘에 쌓는 인생이 되는 것, 바로 하나님 앞에 복 된 인생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라는 단어를 썼으니까, 거의 일방적으로 부어주는 희생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대해서 나눠주고 희생하는 삶을 기쁨으로 감당한 교회가 바로 골로새 교회였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대한 희생적인 사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 안에 믿음을 분명히 붙들고 하늘을 향한 소망을 쌓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성도들에 대해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어려움에 갇히고 감옥에 있는 것 같은 곤고함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더욱 기도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 주님이 주시는 감사가 회복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 나의 인생에 주는 충격이자, 복음을 누리며 살아가는 초자연적인 인생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안에서 믿음, 하늘의 소망,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며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부어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의 간구가 되기 원합니다. 복음의 충격을 내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그 성도가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늘로부터 부어 주신 은혜 가운데 거하는 주님의 백성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인생, 복음의 충격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골로새서를 통하여 새벽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나누기 원합니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골로새 교인과 성도들에게 쓴 편지로, 특별히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 그 지역 출신 에바브라라는 사람을 통해 개척된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그 교회 개척자도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된 그 골로새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보낸 편지가 골로새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쓴 목적은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큰 도전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직면한 큰 두 가지의 도전을 다루고 있는데 첫번째는 다신론적 신비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되시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선포하는 그 복음이 점점 흐려지면서 그들이 예전에 익숙하게 지내왔던 문화인 다신론적 신비주의에 섞여 버리는 겁니다. 유일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라는 그 신성 대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흔들리면서 다른 신들 가운데 하나처럼, 하나의 피조물과 같이 생각하며 교리가 모호해지는 이런 이단들이 미혹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도전은 율법주의였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 하고 천국 가기 위해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계속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특정한 음식을 먹지 말아야 되고 할례를 받아야 하고…이런 것들을 자꾸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두면서 순전한 복음이 자꾸 흐려지고 변질되고 타락하는 것을 골로새 교회가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약해지고 이단에 흔들리고 휘청 거리는 소식을 듣고, 그런 혼란과 도전 가운데에 있는 골로새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 쓴 서신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은혜를 나눌 이 골로새서를 통하여 사도 바울이 그렇게 선명하게 세우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그 신앙을 마음에 담아 우리도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의 자기 소개로 시작됩니다. 지금 옥중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는 겁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끄는 초점이 하나님의 뜻에 있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에 보내져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을 살다, 때가 차서 하나님이 부르시면 본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말미암아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자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의 인생이 내 뜻으로 말미암아 살아 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살아 가느냐가 바로 성도됨의 구별됨과 차별성이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물질 가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내 삶 속에 실체로, 그리고 실제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그 삶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을 실제로 믿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는 것은 너머의 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바라보며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성도들이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v.2)이라는 겁니다. 그냥 신실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 바로 성도들 이라는 겁니다. 교회 성도들의 차별성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이며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며 그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나에게 실체로 흐르는 자들이자,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으로 움직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냥 신실할 수 있고 착할 수 있고 그냥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지 아니하면 그냥 나를 드러내는 자기 교만이 될 뿐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도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신실함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함입니다. 성도들의 충성됨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됨 입니다. 성도들의 열심히 일하는 헌신은 자기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헌신입니다. 그래서 방점이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것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움직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누리는 하늘의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 (v.2)입니다. 사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이냐 하면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그 두렵고 무섭고 절망스러운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지금 축복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상황과 환경이 주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라 위로부터 선물로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을 얘기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평화를 갖겠다고 내가 내적으로 수련하고 명상해 가지고 생기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부어지는 평강이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누리게 되는 초자연적인 은혜와 평강, 상황을 초월하여 상황과 상관없이 누리는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것을 지금 실제로 사도 바울은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은혜와 평강 절대 은혜와 절대 평강을 너희들이 경험하기 원한다고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축복하며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오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부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린다 고백하는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그래서 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되었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자신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사도 란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죠. 실로암 연못의 이름이 바로 보냄을 받았다…라는 말인데,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밝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인생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나의 인생을 던진다는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그의 인생을 불태웠던 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순전한 복음에 사로잡혀 보냄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며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이 나에게 임하길 사모합니다. 상황과 환경을 넘어 부어 주시는 은혜와 부시는 평강이 나를 사로잡아 나를 덮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사도 바울과 같이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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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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