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사울왕 인생의 완전한 파멸과 무너짐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울왕의 두려움과 불안의 마음을 타고 들어와 가짜 사무엘의 모습을 악한 영의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대적이 돼서 돌아올 수 없는 인생이 되었으며, 사울 자신과 아들들은 모두 죽을 거라는 끔찍한 본인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사울 왕은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려 졌고 온몸을 떨고 기력이 다 빠지게 되었습니다. 계속 반쪽 진리로 미혹한 악한 영의 속임수로 사울왕을 혼미하게 속이는 모습 주목해야 하는데, 사무엘로 혼미하게 한 악신이 한 말 중에 맞는 부분은 뭐냐면 사울왕이 그 아들들과 함께 같은 날에 죽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실에 틀린 이야기를 교묘하게 섞는데 바로 내일 죽는다고 말한 겁니다. 사실 내일 죽지 않고 한참이 지나서야 죽게 되는데 마치 내일 죽는 것처럼 거짓을 툭 섞어 놓은 겁니다. 또 하나 틀린 가짜는 사울왕이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게 완전히 거짓이지요. 사무엘은 죽어서 천국에 간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사울왕이 천국에 갔겠습니까? 지옥에 갔겠습니까? 이 말은 사울왕이 악한 영과 함께 지옥에 있을 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귀신은 환생한 사무엘이 아니라 사무엘을 가장한 악한 영인 게 분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참과 거짓을 섞어 놓으면서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함을 증폭시키는 것이고 이 말을 듣고 사울왕은 두려워하여 완전히 KO 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는 게 아니라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사울왕 자신이 원하는 답을 안 해주시는 겁니다. 본인이 답을 정해 놓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기대하니까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토록 금하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얘기를 듣고 싶었고 자신이 기대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음성 비슷한 거라도 듣기 원했는데, 아니 좀 더 얘기해 정확하게 얘기하면 자신이 원하는 뜻에 하나님의 이름을 얹고서 정당화시키려 그랬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는 얘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압도당해 영적으로 완전 KO 되어 자빠져 모든 것을 놔 버린 사울왕의 그 비참한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결말은 두려워함이고 기력이 쇠함이며 완전히 모든 걸 자빠지면서 무너지게 만들고, 사울 왕은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더 안타까운 건 뭐냐면 그렇게 기력이 다 쇠하여 완전히 엎드려진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의 이야기와 음식으로 위로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기력을 완전히 잃고 넉다운 된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떡 하나 먹고 기력 좀 찾으시라고 얘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는게 아니라 무당이 주는 격려로 힘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떡이 아닌 무당이 주는 떡을 통해 힘을 받는 이 모습….이게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결국 사울 왕은 무당이 준비한 떡과 준비한 요리를 먹고 힘을 내어 일어나게 됩니다. 사울왕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갔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고, 의지하고 붙들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고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 끝은 먹지 말아야 될 음식을 먹으며 무당에게 힘과 위로를 받고 일어서는 끔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며 하나님 영광이 떠나고 악한 영의 사로잡혀 파멸을 향해 달라가다가, 결국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드는 대신 신접한 여인을 구하다 두려움에 완전히 엎드려진 사울왕이 무당이 주는 음식 먹고 힘을 내라고 위로 받는 이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탄식이 나오는 현장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되는데 무당에게 가서 진리를 찾으려는 이 어리석음,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고 경고하신 무당에게 완전히 놀아난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울왕의 철저하게 무너짐…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사단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며 무너진 사울왕을 중한 경고로 내 삶에 받아들이며 말씀을 통해 배워야 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기준이라면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한 곳을 가지 말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지 말고, 붙들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지 않는 결단이 있기 원합니다. 특별히 내 공포심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나에게 왜곡된 모습으로 찾아오는 사단의 미혹이 있음을 깨어 분별하기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 눈에 보이는 유혹과 미혹의 영에 인생을 걸면 안 됩니다.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불안함과 두려움에 흔들릴 때 눈에 보이는 유혹과 미혹의 영의 인생을 걸게 되며 무너지게 되고 영적 파탄이 일어나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흔들리게 만들고 착각하게 만들며 반쪽 진리를 붙들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속임수이며 사단에게 이용당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며 그 기준 안에 머물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어야 소망있음을 잊지 마시고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생각하며 하나님에게 달려가며 하나님만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신들린 무당들이 귀신을 불러오는 영상들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귀신이 꼭 죽은 자에게 가서 그 신들린 무당이 그 신을 받아서 꼭 목소리를 흉내 내서 마치 죽어 있는 그 영혼의 사람처럼 행세하는 거죠. 목소리가 달라져서 갑자기 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갑자기 귀신을 불러들인다고 아기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막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무속 신앙은 사람들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믿고 그 귀신이 떠돌아다닌다고 믿기에 그런 초혼 의식으로 사람들을 혼동하게 만들고 홀리며 속이는 것입니다. 그 신내림 받은 무당의 말에 다 속고 거기 진짜 그 영혼이 온 줄 알고 막 벌벌 떨고 막 거기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죠. 왜냐하면 그 속고 홀리는 본질에는 사람들 마음속에 불안함과 두려움을 타고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 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울 왕이 사무엘의 영을 데려오라고 부탁을 하고 지금 사무엘의 영을 불러오는 듯한 이 신접한 여인의 모습은 사울왕의 불안과 두려움을 타고 마치 사무엘 귀신이 온 것과 같이 홀리고 속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신접한 여인이 불러온 사무엘의 모습을 한 귀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환생한 사무엘 귀신이 아니라 무당이 속이는 자로 가짜 사무엘의 악한 영을 불러와 사무엘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어로 얘기하면 무당이 deceive, 속이는 건데 perceive 내가 알고 본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왜 사울 왕은 사무엘의 가짜로 홀리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사무엘이 환생한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사울왕이 이 귀신이 사무엘이 환생한 영이라고 결정적으로 믿게 된 모습은 아주 간단합니다. 신접한 여인이 초혼의식을 통해 불려 올린 그 모양이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입었다고 하니까 그걸 가지고 저 사람은 사무엘이다…라고 혼자 지레짐작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불러온 귀신이 진짜 환생한 사무엘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게 잘못된 귀신론에 치우친 이단의 가르침들입니다. 귀신론을 특별히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속신앙의 믿음인 귀신이해를 차용해와서 귀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적용하려는 우를 범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명심하셔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접한 무당과 박수를 찾아가는 것을 철저히 금하셨고 죽을 죄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금 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선지자를 통해 데려 오실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울 왕이 나중에 죽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신접한 무당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0장 13-14절에 보면 죽은 사울왕의 인생을 평가하는데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함,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함,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을 하나님이 죽이신 이유 중 하나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초혼의식으로 청하고 물었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사무엘을 보내신 거라면 이 악한 영을 다루는 신접한 여인을 만나는 걸 이토록 강하게 금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신접한 여인이 지금 사무엘이라고 말하는 그 영은 가짜의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그 악한 영이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통해 초혼의식을 통해 불러온 귀신이 가짜라는 것을 또 알게 됩니다. 신접한 여인이 불러온 귀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늘에서 올라온 게 아니라 땅에서 올라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편 95편 말씀을 보면 땅의 깊은 곳은 지하 세계 암흑과 지옥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 귀신은 땅에서부터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사무엘이 환생한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사무엘이라고 말하는 가짜 귀신 가짜 영은 전형적으로 사울이 생각하는 잘못된 왜곡된 사무엘의 투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환생한 사무엘 귀신이라고 그러면서 말하는 얘기가 다 반쪽 진리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리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실에 왜곡된 거짓을 교묘하게 섞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의 원수가 되었다..”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원수가 된 게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린 것이지요. 동시에 죽기 전까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가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는 죄를 지으면 큰일 난다고 돌아오라고 심판을 받는다고 계속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고 무너진 현장에서는 소망과 위로의 말씀으로 다시 한번 돌아오기 원하시기에…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사울의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었다고 왜곡 시키는 겁니다. 부분적 진리를 품고 왜곡과 변질을 가져오는 대표적 반쪽 진리입니다. 이런 비슷한 교묘한 왜곡이 사도행전에도 등장하는데, 어떤 점치는 여자가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얻기 위해 귀신 들려서 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 귀신 들린 여종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며 돌이켜 그 귀신을 쫓아냅니다. 왜 그렇게 사도 바울이 심히 괴로웠는가 하면 점치는 귀신인 여종이 하는 말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반쪽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반쪽 진리에 사람들이 미혹되기에 그렇게 사도 바울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사무엘이라고 착각하는 가짜 영, 가짜 귀신이라는 것을 왜곡된 사단의 미혹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 항상 사단은 우리에게 반쪽 진리를 가지고 와서 이렇게 미혹합니다. 우리는 안다고 착각하는 데 실제로는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신접한 자를 찾아가고 무당을 찾아가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심심하니까 재미로 무당을 찾아간다 말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나의 두려움과 불안함의 문제를 무당에게 의탁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영이 아닌 다른 악한 영을 통하여 나의 미래를 묻고 의탁 하는 모든 시도를 죽을 죄라 경고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안 알려주신 진리는 모르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좋기 때문에 안 알려주시는 것임을 믿고 알려주시는 만큼만 아는 게 복임을 믿으십시오. 언젠가는 알게 될 거지만 지금 알 필요 없다는 것이죠. 그게 우리에게 유익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려주시고 알려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운 사울 왕은 평소에는 하나님 찾지 않다가 다급해 지니까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이 음성을 들리지 아니하시니까 신접한 여인에게라도 가서 내가 원하는 소리를 듣겠다고 이렇게 찾아가 미혹 당하고 파멸하고 무너지는 사울왕의 모습을 반면교사를 삼으십시오.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우리의 마음이 두려울 때 우리는 악한 영의 미혹에 빠지기 쉬운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평안이 내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을 물러가게 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늘 말씀의 진리 가운데 늘 빛 가운데 내 삶을 두십시오. 어둠 가운데 머물며 거기에 주저앉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에 주저앉지 않고 내 마음이 언제나 주님의 빛 가운데 선명하게 두려움이 물러가고 불안함이 물러가며 주님이 주시는 밝은 거룩한 영인 성령 하나님의 온전히 사로잡혀 미혹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그 길을 오늘도 충실하게 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왕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였습니다. 대신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영적인 하향 곡선을 계속 그리다가 오늘 28장 말씀을 통하여 완전히 무너지는 결정과 함께 돌아오지 못하는 파국으로 나아가는 사울왕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블레셋 군대를 바라보며 다급하니까 두려움이 몰려 오며 마음이 사정없이 요동쳤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되는데 당연히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습니다. 대답하지 않으시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 요동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울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신접한 여인, 무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선 사울이 신접한 여인, 무당을 찾아간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무당과 박수를 찾아가 영적 도움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고 백성 중에 끊어버리겠다며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무당을 찾아가는 것을 스스로 더럽히는 일이라 경고하셨고, 음란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무당을 찾아가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것이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선명하게 경고하십니다. 강력한 경고와 함께 절대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거나 따르거나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죠
두 번째 이게 잘못된 이유는 사울왕 자신이 어명을 내려 무당과 박수를 다 금지시켰다는데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죽은 직후에 사울왕이 정신이 좀 번쩍 들어 가지고 내가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되겠다고 다짐하고 내린 어명이 바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사라지게 만든 겁니다. 전국의 모든 신접한 자와 박수를 금지하라 왕이 명령을 한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내린 어명을 스스로 어기면서까지 다급하다는 핑계로 지금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겁니다. 자기 마음이 두렵고 요동치니까 하나님이 철저히 금하신 것도 상관없고 자기 입으로 어명을 내린 것도 상관 없는 무원칙의 왕이 되 버리는 겁니다. 모든 원칙들이 다 무너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용한 무당을 찾아가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사울왕이 그 무당에게 나아갈 때 변장을 하고 가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사울의 안타까운 영적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왕의 옷을 입고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옷을 입어서 왕이 아닌 것처럼 변장하고 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것과 똑같냐면 야곱이 자기가 하나님의 축복을 아버지로부터 받기 위해 에서로 변장하고 나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진짜 자아를 잃어버리고 껍데기 가짜 자아를 가지고 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사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철저히 금하시고 자신이 어명으로 금지한 그 무당과 신접한 자를 만나러 가짜로 몰래 가는 것입니다. 가짜로 포장하고 변장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무당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그 무당에게 요청한 것은 오늘 말씀에서 두번이나 반복되는 내가 원하는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 올리라…는 것입니다. 신접한 술법으로 소위 말하는 신내림 받은 능력으로 그 죽은 영혼을 여기로 불러오라는 것입니다. 이걸 초혼이라고 하는데 결혼을 처음 했다는 말이 아니라, 죽은 영혼을 초대하는 의식입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할로윈때 큰 사고가 있었는데, 10년도 안된 수입한 할로윈, 어떻게 보면 한국에는 맞지 않는 것 같은 할로윈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한국 젊은이들이 열광하는가….그 이유 중에 하나는 한국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이 초혼의 문화가 너무나 피부에 와닿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제사를 그냥 돌아가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드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본질적으로 그 제사는 유교의 예배의식입니다. 뭐를 위한 예배의식이냐 하면 죽은 엄마와 아빠의 영혼을 불러오는 초혼 예식이에요. 그래서 음식을 쫙 차려 놓는 거 아닙니까? 그 기일에 엄마의 영혼이 와서, 아빠의 영혼이 와서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사 때 그 음식을 잘 준비하지 않으면 그 조상 귀신들이 우리 집안을 저주한다라는게 기본적인 우리의 멘탈리티에요 할로윈에는 이 초혼, 혼을 불러오는 무속 의식이 깔려 있다는 걸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영혼이 현재 나를 도와줘야 된다는 이런 착각을 여전히 많이 가지고 있고 수많은 의식들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할로윈이 피부에 딱 맞고, 한국 젊은이들이 그런걸 좋아하는 겁니다. 여전히 한국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금해도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왕의 마음에 두려움이 압도하고 마음이 사정 없이 요동치니까 한게 뭐냐면 바로 지푸라기를 잡듯이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초대해서 데리고 오라는 거예요. 이 무당과 함께 초혼 의식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초혼 의식을 요구하니 무당이 손서리를 칩니다. 지금 어명이 떨어져 가지고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다 멸절시킨 거 모르냐…나 죽이려고 그러냐…그랬더니 사울왕의 대답을 좀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데 너 결코 안 죽는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도 않고 악한 영의 사로잡혀 있는 사울왕이 뻔뻔하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는 겁니다. 믿지도 않고 고백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런 생각 없이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으로 내가 맹세하는데 너 안 죽는다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두려움이 찾아올 때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요동칠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에게 달려갈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가만 놔두면 사울왕과 같이 파멸의 인생으로 돌진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짜 믿는 사울왕이라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에게 달려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행한다는 것이 바로 내 믿음의 고백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하는 거예요.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실제로 내가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뻔뻔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두렵고 요동칠 때 하나님에게 달려가서 피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울함과 정반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내가 맹세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 두려움은 물러가라…선포하며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마음에 흘러 넘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27장 말씀을 통하여 다윗의 반복된 실수와 영적 침체를 배웠습니다.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마음의 생각에 사로잡혀 결국 블레셋으로 도망가게 되면서 큰 승리 이후에 영적 침체를 경험했고 그 대가가 참담할 정도로 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다윗과 비교되며 사울왕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 영적 내리막길이 거의 파탄으로 다다르는 결정적 가속화의 시점이 되는 것이 바로 오늘 28장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급격히 좌초 하면서 사울 왕이 스스로 파멸의 길로 질주하게 됩니다. 말씀의 배경은 사울왕에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후에 그 마음에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컸는데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 마음이 크게 떨렸을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두려워서 두려운 마음이 나를 지배하니까 마음이 크게 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전반전에 사울 왕은small, humble, faithful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붙어있고 의지함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왕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왕,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올라가며 완전히 무너진 왕이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를 바라보고 두려움에 압도당해 크게 떨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다급함으로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이미 사울에게서 떠났고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당연히 대답해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침묵으로 아무 말씀도 도움도 주시지 않는 하나님, 두려움에 크게 떨리는 마음은 사울왕으로 하여금 파멸로 이끄는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사울왕이 두려운 마음에 답을 얻는다고 나아간 것이 바로 신접한 여인, 무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사정 없이 흔들릴 때는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사인으로 여기면 소망이 있는데 사울왕은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겁니다. 그 결과는 파멸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두렵고 떨리기 때문에 가지 말아야 될 곳을 가며, 만나지 말아야 될 사람을 만나며, 붙들지 말아야 될 것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사울왕이 “나를 위하여” 신접한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울왕 인생의 후반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악한 영의 사로잡힌 인생의 특징은 뭐냐면 다 자기를 위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울 왕은 어떤 삶을 살았어야 되냐 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름 부음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을 망각하고 포기한 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상황이 다급하고 두렵고 마음이 사정없이 요동치니까 신접한 사람이라도 찾아가는 것입니다. 국가의 큰 위기와 어려움 앞에 왕이 점집에 가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온 백성의 운명이 그 왕의 영적 지도력에 달려 있는데 그 왕이 점집을 찾아가고 무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의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렇기에 십계명에서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 우상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언제나 넘버원인 삶,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드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떠나가게 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나를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자들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감을 정확하게 지적하신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왕의 비극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기를 포기한 채 왕이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 불쌍하고 비참한 삶입니다. 나 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삶의 끝은 항상 이렇게 비정상적이고 파괴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할 것 못할 것을 다하면서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금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그 길을 향해서라도 내가 가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노라면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며,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보고 두렵고 마음이 크게 떨릴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두려움과 무서움이 찾아오고, 마음이 크게 요동하고 떨릴 때 그 때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내 두렵고 무서운 마음, 요동치며 떨리는 마음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엎드릴 때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평안으로 덮여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나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마음이 두렵고 무서웠고 떨릴 때 나를 위한답시고, 인생의 어려움을 타개한답시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고, 붙들지 말아야 될 걸 붙들게 되면 결국 사울왕과 같이 파멸로 무너지는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이 괴롭고 불안하고 힘들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이고 만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아예 들어서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붙들지 않는 담력과 권능이 하늘로부터 임할 줄 믿습니다. 성도로서 나의 존재감은 내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고, 주님 앞에 엎드리며 은혜를 구하여 사울왕과 같은 파멸의 인생이 아닌 다른 인생으로 주님 앞에 끝까지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생각, 마음에 사로잡혀 블레셋 땅으로 도망가는 잘못된 결정, 하나님께 여쭤봤으면 바로 막으실 그 일을 다윗은 기도하지 않고 묻지 않으면서 똑같이 실수를 반복하며 블레셋 땅으로 도망갑니다. 사울왕이 블레셋으로 넘어간 다윗을 수색하지 않게 되면서 잠시 사울의 어려움에게서 피함을 받고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항상 인간적인 결정은 잠깐의 해결책을 주는 것 같은 것이 보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상의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기근을 피했고 거기서 잠시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여겼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다윗이 가지 말아야 될 블레셋 땅으로 두 번째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넘어갈 때 그는 1년 4개월 동안 숨을 좀 쉬는 것 같이 추격에서 벗어나 잠시 해결책을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참담했습니다.
두 가지의 참담함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데 정말 다윗이 얼굴이 부끄러워서 들지 못할 정도의 잘못된 대가 두 가지가 선명하게 등장합니다. 첫번째 참담한 대가는 주적으로 싸워야 될 블레셋 왕에게 무릎꿇고 스스로 종이 되는 굴욕감입니다. 나와 내 사람들이 지금 거할 곳도 없고 머물 곳도 없으니까 우리 사람들 머물 수 있는 땅 좀 주세요…요청하는데 그 요청하는 방식이 얼마나 굴욕적이고 비굴한지 모릅니다. 당신의 종…이라고 무릎 꿇고 당신께 은혜를 입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주와 함께 살겠습니까.. 말하며 바짝 엎드리는 겁니다. 블레셋 왕 당신같이 대단한 사람과 나같이 천한 종이 같은 지역에 살 수 없으니까 우리 살 수 있는 곳 따로 좀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얼마나 비굴하게 다윗이 그 아기스에게 아부를 잘하며 고개를 숙였냐 하면 블레셋 아기스왕 다윗은 내 수중에 들어왔구나… 나의 충신이 됐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에게 블레셋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싸워야 되는 주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적 앞에 엎드려서 나를 종으로 낮추며 그 블레셋의 왕을 주인으로 말하며 아부하고 엎드리는 이 참담한 모습…그렇게 비굴하게 나아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세워 왕이 될 기름 부은 자가 이렇게 블레셋 왕 앞에 비굴하게 엎드리고 종이 되며 거기서 아부하며 그 부하가 된다고 얘기하는 모습, 싸워야 되는데 그 싸워야 될 대상에게 엎드리며 그에게 불안정한 평화를 요청하고, 주적 앞에 비굴해지는 다윗의 모습이 참담함 그 자체입니다. 그게 바로 블레셋에 간 다윗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다는 것이죠. 두 번째로 다윗이 치른 참담한 대가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다윗의 거짓말입니다. 신실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바라봤던 다윗이 입에 거짓말을 달고 그 거짓말을 가리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침략한 곳은 아말렉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왕 아기스 어디를 치고 왔냐고 물어보니까 유다 네겝과 겐 사람들을 쳤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친 것처럼 거짓말로 둘러대는 겁니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전쟁에서 남녀를 살려 두지 않고 다 죽였는데 그 이유가 그들이 진실을 말할까 봐, 자신이 거짓말 한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서 사람들을 다 쳐 죽인 겁니다. 자기가 하는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말 못하게 하려고 다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런 참담하고 끔찍한 일을 다윗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따라간 자였고,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사로잡힌 생각에 붙들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한 잘못된 결정은 잠시의 평안, 잠시 추격을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고개 숙이지 말고 싸워야 될 주적 블레셋의 왕에게 엎드리고 굴복하며 그에게 내가 종이 되며 그 왕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런 굴욕을 경험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거짓말을 했어야 되며 그 거짓말을 둘러대기 위해 남녀를 이유 없이 다 죽여야 되는 이런 끔찍한 일도 서슴치 않는 이런 부끄러운 자가 되어 버린 것이죠 우리도 똑같은 것에 반복적으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하며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적인 생각으로 잠시 피하려 하는 꾀를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잠시 위기를 벗어나는 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가는 처절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에게 피해야 될 자들이지 블레셋에게 피해야 되는 존재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블레셋에게 피하고 의지하려는 순간, 처절할 대가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어려울 때 블레셋에게 피하려는 마음, 애굽으로 피하려는 마음, 세상으로 피하려는 마음을 멈추고 오직 나의 인생을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가 되기를 결단하십시오. 다윗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간구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기대며 주님에게 피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또 한번 다윗이 똑같은 곳에서 실수하고 넘어짐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26장에서 다윗은 두 번째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서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고백하며 나와 함께 하신 여호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사울왕을 죽이지 않은 다윗의 이 모습은 놀라운 영적 승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큰 영적인 승리 이후에 어떻게 오늘 말씀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실수로 넘어지는지, 어떻게 그렇게 큰 승리 후에 갑자기 영적으로 침체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하다 보면 정말 저러지 않을 사람 같은데 갑자기 확 믿음이 떨어지며 영적 침체로 들어가기도 하고, 마치 믿음 없는 사랑과 행동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이 사람이 바로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갈멜산에서 수많은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워서 하나님이 주신 큰 영적 승리를 이루고 나서 갑자기 이세벨의 카톡 메시지 하나로 마음에 영적 침체가 찾아오고 갑자기 쪼그라들면서 나는 죽는게 낫다면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는 그 엘리야의 모습, 그게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대는 것을 멈춘 다윗은 큰 승리 이후에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며, 하지 말아야 될 실수와 문제를 반복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반복된 실수는 바로 적진의 땅인 블레셋 땅으로 가서 자신의 위험함과 어려움을 타개하려 한 모습입니다. 다윗에게 찾아온 이 영적 침체,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하며 반복적으로 실수하고 넘어진 이유는 분명한데, “스스로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입니다. 보통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을 때는 어떤 결정을 할 때에도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먼저 묻고 말씀의 기준을 먼저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마음에 스스로 드는 생각을 붙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하나님께 기도해보면 이건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분명히 알려주실 일이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막으실 일입니다. 그냥 물어만 봤어도 하나님이 바로 얘기하셨을 겁니다. 너 가면 큰일나…저번에 가서 망신 당한 거 기억 안 나? 그런데 하나님께 물어보질 않는 것이죠. 이때 물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중요한 결정 가운데 언제나 하나님께 물어보고 여쭤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갔는데 오늘은 그저 자기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다윗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 사울왕이 자기를 언젠가는 잡을테니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블레셋 땅으로 가는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도망자의 생활이 너무 길었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유랑생활도 도망자 생활도 잠깐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길어지면 지쳐가는 게 인간입니다. 더구나 혼자만 도망하는 게 아니라600명의 사람들이 같이 자기만 믿고 따라와서 도망자 신세가 되니까 그 어깨의 짐이 많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지치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고 피곤함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 두려움과 피곤함에 사로잡힌 나의 생각은 왜곡된 결정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와서 그 두려움이 쌓인 왜곡된 생각이 투영되니, 조만간 내가 사울의 손에 붙잡힐 거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난 곧 사울에게 붙잡힐 인생이니까 붙잡히기 전에 사울왕이 제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블레셋에게 도망가면 되겠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결정이냐 하면 블레셋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싸워야 되는 주적으로 말씀하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적진을 향하여 나아 간다는 게 말도 안됩니다. 더 말이 안 되는 이유는 이미 다윗은 예전에 한번 이런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으로 도망가서 큰 모욕을 당하고 미친 사람 취급하고 침을 질질 흘리고 그런 모욕을 다 당하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도망 나온 경험을 이미 했습니다. 블레셋으로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다 알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이자,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인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블레셋으로 도망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 모든 배경이 바로 하나님과 기도하고 상의하는 대신 내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하는 결정입니다.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왜곡되어 내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거기에 사로잡히면 이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이끌려,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할 수 있는가…성경은 다윗과 같은 사람도 하나님을 철저히 붙들고 의지하지 않는 순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도 늘 내 마음에 찾아오는 생각으로 떠밀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으로 실수를 반복하고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고 한순간에 자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하면서 종종 기도하는 시간보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특별히 인생의 어려운 결정이나 중요한 갈림길에서 혼자 마음에 생각을 붙들고 잘못된 결정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믿음 생활 잘 하는 거 같은데 한순간에 무너질 때, 한 순간에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있음을, 심지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넘어질 때가 있음을 아는 게 지혜입니다. 우리가 일상성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되는 이유 우리가 말씀을 봐야 되는 이유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내 왜곡된 자아와 내 마음의 생각이 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경계하며 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의 생각으로만 결정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께 구하며 바른 길을 나아가는 삶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늘 예수님을 온전히 기대고 의지해야만 살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잠시라도 내가 기대고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곧 넘어지고 실수하는 게 내 인생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는 게 믿음입니다. 다윗과 같은 믿음의 사람도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성경이 가감없이 증언하는 이유는 우리도 언제나 이럴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도 엘리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큰 승리 이후에 정신 못 차리고 영적 침체를 겪는다면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더 쉽게 영적 침체를 경험할 수 있을까…를 깨닫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큰 승리 이후 저 하나님을 철저히 붙들고 의지하는 영적 민감함을 견지해야 합니다. 좋은 믿음의 사람도, 대단해 보이는 믿음의 사람도 한순간에 영적인 침체로 이렇게 무너질 수 있음을 잊지 말고 나에게 영적 침체가 찾아오도록 방치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에 들어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그것이 위험한 사인임을 정확하게 발견하십시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결정으로 넘어진 이 다윗의 영적 침체를 반면교사 삼아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이 나를 압도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도록 큰 승리 이후 특별히 영적으로 깨어 있으십시오. 마음의 생각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며 기도로 주님의 뜻을 구하여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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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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