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기회가 있기도 하고 결정적인 위기의 상황이 있기도 합니다. 사울왕에게도 다윗에게도 두번씩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었는데 결정적인 기회와 위기가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사울 왕은 그 두 번의 테스트에서 불순종의 결정으로 무너졌고 다윗은 그 두 번의 테스트에서 순종했습니다. 사울왕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번제를 드리며 인생의 최고 위기 가운데 불순종의 결정으로 무너졌고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 이후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며 귀하고 중한 것들은 남겨두기를 선택함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게 됩니다. 반면에 다윗은 결정적인 기회, 거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던 용변을 혼자 보러 왔던 사울왕을 자기 분노에 휩싸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고 있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에서도 부하에게 명령만 하면 단칼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는데 그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물병과 창만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내 마음으로 100번도 더 죽일 수 있었던 사울왕인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그 말씀을 내 생각과 내 느낌보다 더 중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붙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다윗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번 절호의 기회에서, 놀라운 영적인 결단과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순종을 한 이후에 사울왕이 다윗에게 자신의 범죄를 깨달으면서 오늘 고백하는 것이 오늘 말씀에 핵심입니다. 자신이 잘못했고 자기가 어리석은 일을 했고 범죄했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이 사울왕의 고백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회개하면 돌아올 수 있는데 사울왕은 계속 회개 대신 후회를 합니다. 후회를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나서 그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냥 후회만 하다 스스로 자책하고 끝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왕은 범죄했고 잘못했고 어리석은 일을 했다고 말은 하는데 그냥 후회만 하는 겁니다. 회개를 해야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이지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되면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사울왕의 입술에서 후회와 함께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을 또 한번 “ 내 아들아” 부르며 돌아오라는 겁니다. 내가 다시는 너를 해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말을 믿고 다윗이 그냥 사울에게 갈 수 있겠습니까? 이 말 믿고 이제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니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사울왕이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은 이미 지킬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다윗도 알고 주변 모든 사람들도 아는 것이죠. 저는 여기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그렇게 말을 해도 사울은 그 말을 지킬 능력이 이미 그 자신에게 없었던 자입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한 말을 지킬 능력과 힘이 없고, 주변 사람들도 그 말을 믿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 그게 사울왕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의 이 말을 듣고 죽이지 않을 테니 돌아오라는 말을 거절하고 한 소년을 보내서 사울왕의 창만 가져 가게 합니다. 저 말을 그냥 곧이 곧대로 믿으면 큰일 나는구나…라는 것을 분별한 것입니다. 그 말을 믿고 덥석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내서 창만 가져가게 시킨 겁니다. 내가 말을 잘하고, 아무리 좋은 미사 여구를 말할지라도 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합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한 말도 지킬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의 이런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과 순종에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고 하나님이 왕을 붙이신 것 같았는데 중요하게 여긴 결정 기준은 하나님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기 “원하지 않으심”이었습니다. 그 말은 다윗 자신이 원하는 건 뭐였다는 겁니까? 나는 당장 사울 왕을 치고 싶었다는 거죠. 단칼에 그냥 명령해서 모든 도망자의 삶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자기의 원함이었어요. 그런데 자기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하심이 부딪혔을 때 그는 뭐를 결정한 겁니까? 나의 원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붙들고 결정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더 중하게 여겼다는 그의 고백입니다. 내 원함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기준을 더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며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가 되는 그 마음의 중심이 드러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은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은사자들이 처음에는 좋다가 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사들을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하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 선물로 써야 되는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해야 되는데 그 은사들을 사적 용도인 나를 위해 쓰면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닌 은사 받은 자가 더 드러나게 되고, 예수님이 아닌 은사 받은 자를 더 추종하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 변질과 왜곡이 시작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며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합니까? 저 사람들이 내 편인가 아닌가…저 상황이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내가 정말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이런 것들이 선택 기준이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산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하심이 충돌할 때 나의 원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선택하며 붙드는 겁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가, 교회 공동체에 유익한가를 선택하며 붙드는 겁니다. 그런 영적 결정은 반드시 성도들의 삶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고, 예수님을 더 바라보게 만들고, 예수님의 이름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결정의 요소이고 분별의 요소가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favor와 은혜가 지속적으로 부어지게 됩니다.내 인생에 진정한 승리는 그 승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나의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기 원하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붙드는 시간이 되기 사모하십시오. 그런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은혜를 놀랍게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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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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