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다윗의 영적인 결정을 한 후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울 왕의 반응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마음 속에서는 백 번도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는데 그가 그 절호의 찬스에서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자기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하게 하는 영적인 결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고요. 그것을 통하여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은 큰 소리로 자신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친히 갚아 주시고 나를 풀어 주시고 나를 건져 주신다는 것을 선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에서 다윗을 향한 사울왕의 세 가지 놀라운 반응이 등장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다윗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고, 두 번째는 소리 내서 울고, 세 번째는 그 입술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첫 번째 사울의 반응은 다윗에 대한 호칭이 “내 아들 다윗아..”로 바뀐 것입니다. 사울왕은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눈과 마음에는 다윗은 자기가 죽여야 되는 평생 원수였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설정해서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자기를 살려주고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을 듣고 나서 그의 입술에서 놀랍게도 자기 원수인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게 참 안타깝고도 슬픈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다윗은 사울에게 사위니까 아들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뭐 법적인 아들일 수도 있고 데려온 아들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아들이 맞죠.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에게 충신이자 호위무사 였습니다. 자기가 귀신이 들렸을 때 악기를 연주해서 자신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던 자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울 왕은 그렇게 다윗을 미워하고 평생 원수로 만들게 되었는가…. 그가 악한 영의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그가 분노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선대를 직면하면서 지금 잠시 정신이 번쩍 든 거죠. 죽여야 될 평생 원수에서 내 아들로 호칭이 바뀐 겁니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비슷한 것에서 훨씬 큰 차이를 많이 느낀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고양이와 컴퓨터 그리고 고양이와 개 그러면 당연히 고양이와 컴퓨터가 큰 차이가 많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종이를 주고 고양이와 컴퓨터의 차이를 쓰고 고양이와 개의 차이를 쓰라고 문제를 주면 놀랍게도 고양이와 컴퓨터에는 별로 차이점을 못 쓴다는 것이죠. 대부분 고양이와 개의 차이점을 훨씬 더 많이 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과 심리는 생각보다 가깝고 비슷하게 여기는 것에서 더 많은 차이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고양이와 컴퓨터가 훨씬 큰 차이가 많은데 갈대와 같은 우리 마음은 고양이가 개가 고양이와 개가 훨씬 차이가 많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사울왕에게 다윗은 좋은 일이 훨씬 많고 잘한 일이 훨씬 많고 귀하게 쓰임 받는게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차이점과 문제점과 죽여야 될 이유만 그동안 계속 묵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 원수가 된 건데 지금 잠시 정신이 돌아와서 다윗이 내 아들이었지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 사울 왕에 놀라운 반응은 그가 소리 내어 울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 앞에서 소리를 높여 통곡했다는 겁니다. 미안해서 후회해서 소리 내어 울었는지 모르지만, 이 통곡은 안타깝게도 회개의 눈물과 통곡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 감정에 북받친 통곡이었습니다. 만약 이게 회개의 눈물이었고 회개의 통곡이었으면 이 말씀 이후에 사울의 인생이 변화되었어야 되고 더 이상 다윗을 쫓지 말았어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이 통곡과 눈물 뒤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울 왕은 그 눈물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도 거론합니다. “ 여호와께서 나를 내 손에 붙이셨으나 내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사울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물과 통곡은 회개의 눈물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이때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사울의 인생이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또 날리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울 때가 있고 어떤 분은 기도하다가 소리를 높여 통곡하며 울 때가 있습니다. 기도 중에 소리를 높여 통곡하는 것이 귀하고 진실한 마음을 쏟아내는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의 정화가 되긴 하지만 운다는 것이 꼭 회개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도하다 통곡하고 울면 회개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리 높여 통곡한 후 사울왕의 입술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내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내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고백하는 겁니다. 사울왕의 고백은 정신이 확 들어서 그의 말에 움직이는 것이 제정신이 박힌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동안은 정말 정신줄을 놓고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그가 하는 생각도 그가 하는 말도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제정신이 돌아와 하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네가 그 놀라운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선으로 갚기 원하신다…그 후에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겁니다. 다윗을 통하여 반드시 왕이 되고 이스라엘 나라가 견고히 서게 된다는 것을 놀랍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통해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우리가 누구를/무엇을 묵상하고 살아가는가…이것이 결국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울 왕은 무엇에 붙들려 있습니까? 악한 영에 사로잡혀 붙들려 있었습니다. 누구를 묵상하고 있습니까? 분노와 열등감과 비교의식이 사로잡혀서 다윗을 죽여야 될 평생 원수로 계속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그렇게 망가지고 결국 파멸의 인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사울왕의 이 모습을 통하여 내 인생의 반면교사를 삼아 내가이 시간 미워하지 말아야 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오히려 나와 가까웠게 느끼지 못하고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의 연약하고 갈대와 같은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이 새벽에 성도들이 성전에 나와 하루의 첫 시간에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가 뭡니까? 말씀과 기도를 사모하며 엎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내 생각을 묵상하고 내 감정을 묵상하고 내 분노를 묵상하면 우리는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단에게 가장 좋은 미혹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묵상하지 않고 내 억울함을 묵상하지 않고 내 분노를 묵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산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이 오직 말씀에 붙들려 있어야 산다는 것을 믿고 말씀에 뿌리 박으십시오. 나의 억울함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에게 덮혀 내가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께 붙들려 살아 나의 입술이 내 생각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아버지 은혜가 내 입술을 통하여 나오며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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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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