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1장은 여호사밧 아들인 여호람이 왕으로 등극한 시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그래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노력했고 하나님을 붙들었던 왕이지만 그 아들 여호람은 그 아버지 완전 정반대의 모습으로 그 나라를 풍지박산으로 만드는 주인공이 돼 버렸습니다. 그는 먼저 권력욕에 눈이 멀어 형제들을 모두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입니다. 여호사밧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여호람을 왕으로 등극시키고 나머지 아들들, 즉 왕자들에게는 보물과 여러 견고한 성읍들을 다 선물로 후하게 주고 세상을 떠난 것이죠. 그런데 이 여호람 왕이 마치 누구와 비슷한가 하면 북한의 김정은 같은 겁니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자기의 왕권에 위협 되는 사람들은 가족이고 뭐고 다 그냥 전멸 시키고 씨를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참하게 죽이듯이, 자기 형제들, 소위 왕자들을 모두 칼로 죽여버리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이는 것입니다. 자기 왕권을 공고히 지킨다는 명분으로 형제들을 이렇게 죽여 씨를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자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왕자들을 다 죽이게 되는 피비린내 나는 공포 정치를 펴니까 주변에서 계속 배신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 하나님에게서 떠난 왕의 결과가 주변에 이렇게 배신자들이 많아지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냥 여호람 왕이 권력을 탐하고 왕위가 자기의 왕권에 눈이 멀어 잠재적 경쟁자들은 왕자들을 다 죽여버렸다는 인간적인 야욕으로만 끝나는게 아입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위에 세워진 나라 아닙니까? 언약을 붙든 다윗의 씨앗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계속 전수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도록 남유다를 구별하여 세우셨는데, 여호람이 모든 왕자들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다 막아 버리는 거죠. 자기 하나를 위해 그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들인 왕자들의 씨를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남유다 왕국에 좋은 면을 부각하고 긍정적인 모습을 강조하며 쓰여진 역대기임에도 불구하고 여호람 왕에 대한 증언은 정말 나쁜 것 위주로만 증언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역대기의 여호람 왕에 대한 평가는 냉정합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걸었다는 악한 평가입니다. 아합의 집과 같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뜻을 떠나 우상숭배와 세상의 힘을 숭배하며 세상에 칼을 휘두르는 그 힘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악한 왕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호람 왕이 그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윗의 새 언약을 붙들어야 되는 남유다 왕이 하나님이 제일 싫어 하셨던 아합의 집과 같이 행하며 무너졌을까? 그 본질적 이유는 여호람이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호람이 그렇게 무너지게 되고 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파고 파고 들어가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싫어했던 북이스라엘과 연을 맺은 문제가 딱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합과 이세벨을 얼마나 악한 모습으로 증언하는지 하나님이 그런 우상숭배와 영적 타락을 싫어하셨는지 다 압니다. 그런 아합의 딸과 연을 맺어 한 몸으로 이루는 결혼을 하니, 그 아합의 딸이 남유다 왕궁의 영적 질서와 분위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게 모든 왕자들을 죽이는 것, 주변에 백성들과 나라들이 배신하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의 뿌리에 결혼 잘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둠을 붙들고 살아가는 악한 왕, 아합의 딸과 결혼의 연을 맺게 되니 그 삶의 결과가 이처럼 참담하다는 것입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내 삶에 있어서 나의 동반자가 누구이고 내 남편과 내 아내가 누구인가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좋아하고 사랑하고 같이 사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한 가족과 한 가족이 영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왕들도 이미 이 문제 때문에 무너지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아합왕과 연을 맺어 전쟁에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던 과거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전의 그 실수와 무너짐을 남유다의 왕들이 계속 반복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삶의 가치관과 우선순위, 붙들어야 할 영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결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나라가 이렇게 휘청거릴 수 있을 정도로 국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왕의 아내가 누구인가가 이 모든 것을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호람 왕이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 보이지 않는 원인, 영적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합의 집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집이었습니다. 아합의 딸과 가족을 맺는 것을 이토록 싫어 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람 왕의 잔인한 형제들의 살인,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모든 것들은 아합의 집과 연을 맺으며 그 딸이 아내로 들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며 무너지게 되는 데에도 보이지 않는 원인 영적 원인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변절과 타락으로 우상숭배에 몰입하고, 세상의 힘을 숭배하고 세상에 칼을 휘두르며 선지자 죽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그런 집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그런 집안을 멀리하십시오.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도 영향을 받는데 가족을 맺고 연을 맺는 관계로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무너지기를 작정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영적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그것이 한 나라에도 이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고 여호람을 통해 반면 교사를 삼아 오직 주님 한분 만을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사밧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판관장되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평가하며 하나님이 내 인생의 최종 재판장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아가는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곁길로 빠지기도 했고, 인생이 승승장구할 때 큰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 돌아와 다시 한번 조율 받으며 하나님께 주 손 들고 나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였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즐거움을 풍성히 누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호사밧의 모든 삶의 행적은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것 같이 보였는데, 오늘 말씀에 증언되는 그의 마지막은 씁쓸하기 그지없는 결말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끝까지 신실한 모습으로 사는 것을 마무리 하지 못한 왕, 이름값 하지 못하는 왕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부정적 평가로 마무리 되는 대표적 사건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는데 또다시 북이스라엘과 연을 맺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과거에 아합과 가족의 연을 맺은 까닭에 전쟁에서 거의 죽을 뻔 하였습니다. 아합은 전쟁터에서 죽었으며 거의 구사일생으로 하나님이 건져 주셔서 빠져나왔습니다. 그걸 통하여 여호사밧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이 죽으러 가는 그 전쟁에서 구해주신 은혜와, 절대 아합과 북이스라엘과는 연을 맺으면 안된다는 것을 마음에 인이 박히도록 새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마지막에 또 다시 한번 북이스라엘과 연을 맺기 시작하는 겁니다.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인 아하시아 왕과 교제를 하며 가까이 지내고, 그의 인생 마지막이 결국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바로 여호사밧의 그런 영적 리더십 아래로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백성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산당을 폐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두 왕이 서로 연합하여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는데, 그 배가 완전히 파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하시아 왕과 연합해서 만드는 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뭐와 똑같냐 하면요 기적적으로 암에 걸린 환자가 치유받았습니다. 정말 의사도 포기한 그 암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고쳐 주셨어요. 하나님의 기적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했는데, 하나님께서 건강을 기적적으로 회복시켜 주신 걸 모르고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며 아무거나 먹고 몸에 해로운 것을 막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다시 암에 걸리게 되는 것이죠. 그게 여호사밧왕 인생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야 당연한 전쟁터에서 아합은 죽고 본인을 구사일생으로 살려 주셨는데 그걸 망각하는 겁니다. 그 모든 게 하나님 은혜이고 다시는 북이스라엘과 연을 맺으면 안되는 것인데, 그걸 망각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악한왕 아하시아와 다시 교제하며 또 다른 죄의 길로 넘어가 결국 그 인생이 망가지게 되었다는 이 안타까운 이야기가 여호사밧왕의 결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판관자 되신다는 그 이름의 고백대로 살지 못했고, 그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왕으로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가기 전까지 죄성을 가진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죄와 상함과 깨짐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물들지 않아야 하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한 순간만 정신을 안차리고 망각하게 되면 이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가며 세상 가치가 나에게 스며들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같은 경고를 무시하며 늪으로 빠지는 이 안타까운 결론을 바라보며 이것이 나의 인생 되지 않기를 반성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이 이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 시간 하나님 말씀을 나에게 비추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이 이렇게 이름값 하지 못하며, 하나님 자녀에 걸맞지 않은 인생으로 끝나지 않도록 늘 근신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인생에 정말 하나님이 판관자 이심을 믿는다면, 내 인생 끝자락에 내가 어땠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인생의 끝에 서서 내 인생이 어떤가를 주님이 바라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인생 끝까지 주님만 붙들고 신실하게 나아가시기를 결단 하십시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주님 앞에서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죽을뻔 한 전쟁에서 건짐을 받고 북 이스라엘 아합왕이 전쟁 현장에서 죽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의 길을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전심으로 변화되며 그 기준을 붙들고 조율 되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여호사밧 왕에게 모압과 압몬이 쳐들어오는 이야기가 20장 말씀인데, 그렇게 갑자기 전쟁이 터지고 적군이 밀고 내려올 때 하나님 낯을 향하여 기도하였고, 하나님을 붙들고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절체 절명의 위기 가운데 그렇게 기도한 결과,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주신 응답이 오늘 말씀입니다.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1) 적군으로 말미암아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2)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결과는 어떤 눈에 보이는 것을 주신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신 겁니다.
첫째로, 갑자기 찾아온 적군과 갑자기 전쟁을 시작해야 되는 그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감정입니다. 누가 두려워 하고 싶어서 두려워 하겠습니까? 그냥 두려움이 갑자기 불쑥 나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내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초대하지 않은 그 두려움이 내 인생의 확 찾아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두려움이 내 마음에 딱 중앙에 주저 앉아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내 마음속에 주저 앉은 그 두려움을 벗어 버리려고 굉장히 발버둥을 치지만 그게 안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지요. 두려움이 내 마음에 주저 앉아 있는 이것이 영적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면 눈에 보이는 것만 묵상합니다. 특별히 삶의 압력과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올 때 이것이 더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두려움에 매몰되는 사람들을 향상 자신을 묵상하고 주변의 사람들의 말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상황과 환경을, 왜곡되고 과장된 상황과 환경을 묵상합니다. 왜곡되고 과장된 것을 마음에 품고 계속 곱씹고 곱씹으면서 그것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실체가 되어 두려움이 내 마음에 큰 물줄기로 흐르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그 전쟁 가운데 갑자기 찾아온 위기와 압박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는 비결은 뭐냐면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 봐야 하는 것이죠. 계속 두려워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게 영적 문제임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약속,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약속을 붙들어야 두려움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데 오늘 말씀은 더 중요하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두려움은 쫓아내 시는 분이 있다는 거예요. 내 마음속에 두려움은 어둠과 속성이 거의 비슷합니다. 내 인생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빛이 딱 비치면 그 두려움이 어둠이 없어지지 갑자기 싹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다시 바라면 두려움을 단번에 쫓아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게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내가 두려워 하지 말아야지 결단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두려움을 쫓아내시는 분이 있음을 것을 믿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내가 스스로 두려워 하지 말아야지…. 결단하고 다짐하며 주먹을 쥐는 인생에서, 나에게 두려움을 쫓아내 주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으며 주님을 바라볼 때, 두려움을 쫓아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약속을 붙들 때, 내 마음속에 가득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물러나는 역사를 실체로 경험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약속은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거에요. 결국 이 전쟁의 승패가 너희에게 군사력이 얼마나 많은지 상황과 환경 조건이 얼마나 좋은지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 하고 바라보는지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에,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기에…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상황은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함이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적군은 여전히 밀고 내려오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봤을 때는 왜곡된 상황과 환경밖에 안보이고 갑자기 쳐들어오는 적군밖에 보이지 않는 절체 절명의 위기입니다. 두려워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때에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을 붙드는 것이 기적입니다. 두려움을 물러가게 해주시는 분이 있음을 믿으며 하늘을 향해 눈을 드는 것이 기적입니다. 원수와 적군이 갑자기 쳐들어 온다는 것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위기 가운데 벌벌 떨고 두려움을 증폭하고 있다면, 멈추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드는 기적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하나님을 계속해 바라보고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너희 두려움이 사라지고 두려움을 몰아내 주시며 친히 싸워 주시며 승리를 허락하실 것을 약속하신 겁니다. 여호사밧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왕을 비롯해 온 백성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 하나님을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온 백성이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붙들며, 하나님 앞에 얼굴을 땅에 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온 백성들도 함께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 갑자기 찾아오는 전쟁과 같은 위기와 어려움이 이 깨진 세상에는 만연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영의 백성으로 이 여호사밧과 같이 믿음의 반응을 하기 원하십니다.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을 할 때 우리 인생에 두려움이 물러가게 해 주시고, 내 삶에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승리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죠. 나를 묵상 하지 않고, 상황과 환경을 묵상 하지 않고, 사람들의 말을 묵상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고 붙드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두려움을 물러가게 해주시는 분임을 믿으며 주님만을 바라보고 붙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임을 잊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주님 앞에 서는 믿음의 결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고백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아합왕과 동맹을 맺고 올라가지 말아야 될 전쟁에 올라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합왕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보며 자신은 하나님 손에 건짐을 받은 거라는 걸 깨닫고 선지자 예후에 질책을 하나님이 주신 질책으로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며 온 나라가 주님의 믿음과 은혜 가운데 다시 한번 조율 되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다 정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으면 평탄함이 찾아오면 참 좋았을 텐데 오늘 말씀에 모압 자손과 압몬 자손이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신실하게 주님 앞에 변화되고 조율 되었는데도, 예상하지 않게 이런 어려움과 복병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모압과 암몬 자손의 공격 가운데, 갑자기 찾아온 어려움 가운데 여호사밧 왕은 어떤 반응을 하게 됩니까? 모압과 암몬 자손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첫 번째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이 불청객과 같이 마음에 확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음의 걱정과 두려움에 찾아오죠. 그런데 그 두려움에 머물지 않고, 바로 그 두려움을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매달리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도 동일하게 금식을 선포하는 겁니다. 위기 가운데 믿음의 반응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간구한 기도, 매달린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오늘 말씀 이곳저곳에 등장합니다. 주에 손에 권세와 권능을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6절), 이 환란 가운데 죽게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 하시리라 (9절) 등등, 기도로 믿음의 반응을 지금 보이는 거예요. 기도의 마지막 결론이자 핵심이 뭡니까? 우리를 치러 오는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도 없고 어찌 할 줄도 알지 못하고 없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12절). 위기 가운데 자신의 무능함을 처절하게 고백하고 오직 주만 바라보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위기 가운데 두려움이 차지하고 압박이 찾아오고 마음에 근심 걱정이 찾아올 때 오직 주만 바라볼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에 대한 평소 태도와 반응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나타나는 여호사밧왕의 반응이 평소 말씀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찾아온 위기 가운데 대적할 능력도 없고 어떻게 할 바를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압도당하고, 허둥대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쫓아다닙니다.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 하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거의 매일의 삶에 있어서 속에 있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죠. 그렇기에 여호사밧 왕이 평소에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그 삶으로 살았기 때문에 인생의 어려움과 국가적 위기 가운데 두려움에 매몰되거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허둥대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로 나아가 낯을 향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평소에 말씀을 향한 반응이 몸에 체득되었기 때문에 위기 가운데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이라는 거예요. 그러지 아니하고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 말씀에 믿음의 반응을 하지 않는 자들은 위기 가운데 여전히 불신앙의 반응으로 허둥대고, 왔다갔다하며 내 스스로 문제를 풀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는 것입니다. 이 위기때의 반응이 평소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과 같이 등장하는 왕으로부터 시작해 유다 모든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자녀들까지 모두 여호와 앞에 서는 것을 깊게 묵상하기 원합니다. 국가적 위기 가운데 모든 백성들이, 왕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하나님 앞에 서서 주님의 낯을 구하고 주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을 하는 그 태도 그대로 그 위기의 반응도 공동체 적으로 동일하게 나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믿고 말씀 앞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조율하고 변화하도록 내어 드리는 자는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동일하게 하나님을 구하고 바라며 하나님께 매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가문을 세우고 우리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로 붙들려 있기 위해서, 오늘 말씀과 같이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온 백성이 주님 낯을 바라보고 주님께 매달리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평소에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위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내 안에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심기우지 않는다면 내 삶의 위기 가운데 그 말씀은 결코 힘을 줄 수 없다는 것이죠. 인생이 평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들의 반응과 태도가 무엇입니까? 평소 말씀에 대한 반응과 태도가 인생의 위기가 찾아올 때 반응으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의 위기가 갑자기 찾아올 때 믿음의 반응을 사모하십시오.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과 풍랑이 찾아올 때, 우리는 몸에 체득된 믿음의 반응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만 바라 보는 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주님께 부르짖으며 주님의 낯을 구하는 것은 평소 나의 삶 속에 체득된 말씀에 대한 반응이 결정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 위기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는 놀라운 삶이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에게 신실 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공과 승리를 넘치도록 주셨는데 그렇게 인생의 하이 포인트에서 결국 아합왕과 혼인관계로 엮이면서 변절과 타락이 시작되었고요. 그 중요한 일에 결국 하나님에게 묻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전쟁에 나가게 되죠. 그 전쟁에서 여호사밧 왕은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돌아왔습니다. 죽으러 간 전쟁에서 아합왕은 죽었고, 여호사밧왕을 살아 돌아온 겁니다. 전쟁터에서 살려고 머리를 온통 굴렸던 아합왕, 사실 살기 위해 왕복을 벗고 변장을 하고 나갈 정도였지만, 결국 아합왕은 그 전쟁터에서 죽에 되고, 왕복을 입고 전쟁 내내 모든 적군의 타겟이 되었던 여호사밧은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의 죽음에서 건져 내시다시피 보호해 주셔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준비했고 왕복까지 벗어 던지며 전쟁터에서 죽지 않으려고 그렇게 발버둥 친 아합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아합왕과 인척 관계를 맺고 가지 말아야 될 전쟁을 가며 타락하고 변질했습니다. 그럼에도 전쟁터에서 죽음의 위기 가운데 건짐을 받았습니다. 죽고 사는 게 우리 손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에서 죽지 않을 것 같은 확률에 목숨 걸고 변장하고 숨고 내 스스로 발버둥 치며 살려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생사화복이 다 주님 손에 있음을 망각한 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아가다가 이 전쟁터에서 이렇게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복귀한 여호사밧을 평안이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오늘 말씀은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여호사밧이 평안히 돌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심, 하나님이 건져 주심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 평안함 이었다는 거예요.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에서 평안함으로 돌아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임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진 여호사밧 왕이 돌아오게 되니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 것은 선견자 예후의 혹독한 질책이었습니다. 호통을 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막 질책을 하는 겁니다. 사실 왕으로서 그런 호통과 질책은 듣고 싶은 얘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전쟁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왕에게 그것은 불편한 얘기고 마음에 팍팍 찔리는 말들이었습니다. 왕으로서 여호사밧은 그 예언자 하나 죽이는 거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얼마전 아합왕이 듣기 싫은 예언자를 멀리하며 옥에 가두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은 예후의 질책을 들으며 놀라운 믿음의 반응을 하게 됩니다. 여호사밧 왕은 자신을 향해 쓴소리와 질책을 하는 선지자의 말씀을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으로 알고 붙들었고 그 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오직 하나님 은혜였고, 하나님이 나를 기적적으로 건져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후 선지자의 호통과 질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바로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이키는 거예요. 4-11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사밧 왕이 예후의 말씀을 듣고 엎드린 후 그가 한 믿음의 반응들입니다. 자신을 포함해 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며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조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하냐 하면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게 만들고, 재판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걸 잊어 버리지 말게 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신앙 조율을 다시 하는 대대적인 변화가 나라 전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하나님이 보내신 질책으로 알고 회개하고 돌이킨 결과입니다. 그것이 여호사밧 왕의 위대한 점이 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선지자 예후가 질책하고 호통 하지만 그 호통을 하나님의 호통과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앞에 엎드린 여호사밧왕…그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여호사밧 왕의 위대한 점은 실수하고 실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실패와 실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 했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내 인생의 소망이 있는가, 소망이 없는가는 결국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내가 변화하고 내가 조율 되고 내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나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등을 돌리고 살게 되고 변화하기를 거절하고 거부하고 충돌한다면 결국 어둠을 향하여 가게 되는 안타까운 종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여호사밧 과 같이 때로는 곁길로 가고 변질되고 쓰러지고 넘어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 가운데 자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질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와 반응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를 변화 시키며 나를 돌이키게 한다면 그게 바로 소망 있는 성도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를 교정 시키시고 변화 시키며 나에게 회복을 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말씀에 엎드리고 말씀을 받으십시오. 말씀 앞에 바른 반응으로 나아가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내 삶의 닿는 큰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선지가 미가야의 예언대로 비극이 결국 이루어지고 있음을 결론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가야는 하나님께로부터 정확히 들은대로 말하고, 하나님이 알려주신 진리를 아합왕 선포했습니다. 그 전쟁에 올라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길이며, 왕 옆에 있는 예언자들은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미혹된 자들이라는 그 말씀을 듣고 아합왕은 화가 나서 미가야 선지자를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실 아합왕은 그 말씀을 들었어야 사는 건데,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듣지 않고 듣기 싫어했던 그 말씀이 실제로 현실로 일어나는 것이 오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합왕과 여호사밧왕의 생과 사는, 이것을 통하여 그들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미가야 예언자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반응하였는가에 달려있었다는 것이지요.
아합왕은 전쟁에 나가면 살기 위해 얼마나 교활하고 얼마나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지금 남유다 여호사밧왕과 함께 연합군으로 전쟁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자기만 살려고 왕복을 벗어버리고 변장해 은폐해서 군중으로 들어가고, 여호사밧왕만 당신만 왕복을 입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전쟁에서 왕을 죽이면 이기는게 고대 사회의 전쟁이니 군인은 왕복 입은 사람을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오지 않겠습니까? 이 아람 군대는 누구를 찾아 죽이려고 전쟁을 하는 거냐면 이스라엘을 왕을 찾아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호사밧에게만 왕복을 입으라는 겁니다. 아합 자신은 변장해서 왕이 아닌 척 군중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고 싶어서 당신만 왕복 입고 전쟁에 나가라는 것이지요. 아합이 얼마나 교활하고 얼마나 리더로서 자질이 안 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왕은 전쟁 중에 맨 앞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군대를 이끌고 그 사람들을 앞서서 싸우는 게 왕 이어야 되는데 왕이 저 뒤에 서서 그냥 너희만 앞으로 나아가라 그러는 것도 모자라, 왕이 왕복을 벗어버리고 왕이 아닌 척하고 사람들에게 숨어 버리는 것 이것이 아합왕의 비열한 참 모습이자, 어떻게 보면 이 세대의 비극적인 지도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가야의 예언을 통해 드러났지만, 아합과 같은 이런 지도자는 있으면 있을 수록 백성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없으면 없을수록 백성들이 오히려 더 평안하게 되는 그런 함량미달의 지도자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운명이 달린 큰 전쟁에, 위기 가운데 목숨을 부지하려고 왕이 이렇게 백성들 안에 숨어버리고, 왕복도 벗어버리고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말하는 이 모습… 여호사밧 에게만 왕복을 입고 너만 왕으로서 모든 사람의 죽음의 위협을 받으라 앞으로 밀치는 그 아합왕을 바라보며 여호사밧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게 됐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쟁이 아니구나….반성하고 이대로 하면 안되는구나…. 깨달은 거죠. 사실 여호사밧이 너무 늦게 깨달은 겁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를 잡아 옥에 가두는 것을 보면서 이미 그 때 정신을 차려 써야 되는데 그때 여호사밧은 멈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전쟁에 올라와 정신 차리는 겁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전쟁이고 우리가 올라가면 죽는 전쟁이구나….이 전쟁은 패하기 위해 올라가는 전쟁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자신을 죽이려고 몰려드는 적군들 사이에서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간절히 도움을 구하고 매달린 거죠.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에게 개입하셔서 적군이 떠나가게 하시고 그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왕복도 벗어버리며 머리를 썼던 아합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인지도 모르고 조준한 화살, 우연히 적군이 당긴 활에 맞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참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연히 죽은게 아니라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간 것이죠. 하나님의 손을 떠난 아합은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치고 머리를 쓰고 했지만, 미가야가 예언한 대로 그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과론적으로 아합왕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쟁에서 죽은 이유를 역대기는 선명히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자가 보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그가 죽었다는 것이죠. 나의 마음에 찔림과 부담감을 주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 했으면 살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아합왕은 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충돌 함으로써, 진리의 예언자를 옥에 가두면서 결국 아합왕은 그런 비참한 최후를 향해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스스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한 전쟁 그런데 그 전쟁은 이기려고 나간 전쟁이 아니라 죽으러 간 전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붙들어, 말씀이 내 심령 골수를 쪼개고 변화 시키며 말씀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그 길로 내가 변화되며 교정 받아야 내가 결과적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오는 영적 결과를 바라보며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에 새기시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좋은 시작과 출발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그 비결을 알아 하나님에게 말씀을 구하고 은혜만을 구하고 바알신을 멀리하고 아세라를 찍어버리고, 북이스라엘의 변질된 문화 가치관에 젖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견고하게 세워 주시며 강성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과 부와 영광이 극에 달할 정도로 풍성해지니까 안타깝게도 여호사밧이 곁길로 가고 변질과 타락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왜 여호사밧이 이렇게 인생의 정점에서 곁길로 가며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는 원인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합과 더불어 연혼 하였더라.” 아합왕이 누구입니까? 북 이스라엘의 왕 중에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왕 중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 아합과 더불어 연혼, 결혼을 통해 친인척 관계를 맺는 거에요. 결혼이 그냥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게 아니라, 상대방의 문화와 가치관을 다 수용하는 것이죠. 아합 집안이 가진 문화와 가치관과 더불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이 가지고 있는 세상 가치관과 우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여호사밧은 물들고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와 가까이 하는가가 여호사밧 왕이 변질과 타락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정점에 부귀와 영화가 넘쳐날 때, 자신이 강성해지고 견고해진 원인이 오직 하나님임을 끝까지 붙들고 서 있어야 하는데, 아합이라는 자와 가까이하면서 곁길로 가고 변질하며 이탈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인척 관계를 맺은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이 함께 힘을 모아서 길라못에 가서 전쟁을 할 것을 계획을 세웁니다. 여호사밧은 타락과 변질 중에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고 전쟁을 결정하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불러와 물어보는데, 무려 400명의 예언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동일한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니까 지금 당장 올라가시라는 겁니다. 어떻게 4백 명이 한 목소리를 내며 이렇게 예언 하는가? 바로 이 예언자들은 겉으로는 예언자들 이었지만 사실 어용 예언자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대로 된 선지자가 아니라 한 목소리로 앵무새 같이 왕이 원하는 대답을 하는 겁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항상 주변에는 이런 어용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이 득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 권력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한결같이 앵무새와 같이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하는 자들이 늘 포진되어 있는 거죠. 아합의 영적 타락의 본질은 결국 진리와 바른 길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예언자들을 통해 듣는 겁니다. 그런 예언자들이 한 두명 예외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백 명이나 있었다는 것, 바로 그 당시 아합을 위시한 북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었고요. 여호사밧 왕은 그런 타락하고 변질된 영적 현실에 지금 계속 물들면서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어두워질 때 암흑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선포 되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를 이구동성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을 성경은 영적인 타락의 증거로, 영적 암흑기의 증거로 선명히 지적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자 400명이 지금 이구동성으로 아합왕 앞에 앵무새와 같이 말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여호사밧 왕이 뭔가 아직은 양심이 살아 있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뭐라고 했냐면 이런 예언자들 말고 다른 예언자는 없냐고 물어봅니다. 아합이 대답하기를 미가야라는 예언자가 있기는 한데, 그는 늘 나에 대해 길한 것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것만 예언하는 내 눈에 찍힌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둠이 빛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잡아 죽이려는 그 모습이 구약의 그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진리를 말할 때 빛이 비칠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진리를 말하는 자는 때로는 외롭고요 때로는 이렇게 미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여호사밧왕이 그 미가야 선지자를 데려와 말씀 듣기를 촉구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아직 살아 있어서 400명의 예언자들 말고 들어야 될 진짜 말씀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러면서 아합왕에게 듣기 싫어하고 그리고 나에게 좋은 얘길 안 한다고 그 예언자를 미워하고 저렇게 찍어 가지고 좌천 시키면 안된다....그 미가야에게 물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 내가 지도자의 위치에 선다는 것은 늘 좋은 소리만 들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되고요.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그런 진리의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 큰 자입니다 내가 듣기 좋은 얘기만 듣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가까이 두는 자들은 결국 타락하고 변질될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사밧 왕이 그 좋았던 신앙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행의 은혜를 저버리고 타락과 변질되어 가는 것은 그에게 가까운 사람들이 누구였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주변에 아합왕 같은 사람을 두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내가 가까이 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변질되고 타락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교회란 좋은 신앙 생활이란 내가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듣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을 진리로 들을 수 있는 곳이고 말씀이 나를 깨우치며 심령 골수를 쪼개며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말씀을 들으며 그 진리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며 나를 회복시키며 나를 깨우는 것이 진짜라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조율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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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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