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 왕은 귀한 어머니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아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왕이자 말씀 가운데 거하는 왕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밝은 스가랴를 가까이 두어 하나님에게 합하고 정직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높이 세워 주시고 형통하고 강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간 웃시야 왕은 결국 높아졌고 강성 해졌습니다. 제가 알기로 대한민국의 군인 전체가 60만명이 안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국보다 훨씬 작은 남 유다에 군인이 30만명이나 있었으니, 그 군사력을 보면서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강성해져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도 생기고 유명해지고 왕도 높아지고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웃시야 왕이 형통하고 강성해진 비결을 오늘 말씀은 정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강성함임을 증언합니다. 강성 해졌는데 그 이유는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지략 때문이 아니라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 결과죠.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심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문제는 높아지고 강성해지는 그 자리에서 웃시야 왕은 결국 무너지고 실패하며 영적인 하향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오늘 말씀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형통하고 강성할 때 웃시야 왕이 무릎 꿇고 하나님을 더 구하고 매달려 쓰면 더 크게 하나님이 사용 하시는데 안타깝게 여기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겁니다. 웃시야가 강성하여짐에 따라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똑같은 패턴으로 웃시야 왕이 무너질 수 있을까요? 그 아버지 아마샤와 할아버지 요아스와 마찬가지로 거의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전반전은 참 좋았는데 후반전이 너무나 좋지 않은 왕, 전반전에 하나님께 정직하고 쓰임 받았던 왕 후반전에는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며 무너지는 왕, 자기 아버지도 그랬고 자기 할아버지 도 그랬고 결국 본인도 똑같은 그 패턴에 무너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성하게 해 주시고 세워 주셨는데 어떻게 3대가 똑같이 무너질 수 있습니까? 똑같이 후반전에 변질될 수 있습니까?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동일한 패턴의 무너짐을 우리에게 경고하며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강성해졌을 때 웃시야 왕의 마음이 교만 해져서 악을 행한 대표적인 예로 등장하는게 바로 예배 드리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넘보는 겁니다. 왕으로서 여호와의 전을 찾아 예배하는 것은 참 귀한 일인데 본인이 향단에 스스로 분향하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웃시야는 자기가 왕이 됐고 강성해지고 나니까 제사장이 우스운 겁니다. 제사장이 우습게 보여서 이런 일 꼭 제사장만 해야 하나…나도 할 수 있지…그러면서 바운더리가 무너지는 겁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교만과 착각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세상에서 사장인 사람이 교회 와서도 사장 역할을 하려 하고, 세상에서 국회의원이 사람이 교회 와서도 국회의원 노릇을 하려고 하려 하면서 교회에서 영적 질서와 바운더리가 무너지는 겁니다. 교회 와서는 밖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던, 겸손하게 말씀을 듣는자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아무리 왕이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전에 왔을때는 은혜를 구하는 죄인으로 두손 들고 서야 하는 거예요. 자신이 나가지 말아야 될 것은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세상에서의 자기 역할을 교회 안에 와서도 하려는 것은 본분을 잃어버리는 교만한 증거이며 하나님 앞에 범죄 않은 일이라는 것을 성경은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왕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거기 목숨을 걸고 막는 겁니다. 그 당시 왕의 명령 이면 제사장들을 단칼에 그냥 없앨 수 있죠. 그러니까 지금 목숨 걸고 막아서는 거에요. 아무리 왕이셔도 지금 여기서 이 일은 왕이 하실 수 없습니다. 그냥 물러가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웃시야 왕이 너희들이 뭐라고 나에게 지금 분향하지 말라 그러냐며 손으로 향로를 잡고 제사장을 향하여 노를 발하는 겁니다. 그 순간, 손으로 향로를 잡고 제사장에게 화를 내는 순간 이마에 나병이 생겼다고 증언합니다. 모세 오경에 보면 성전에 불을 잘못 만져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각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 지정하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웃시야 왕이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며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는 찰라에 나병이 든 것은, 하나님이 정확하게 치신 사건임을 증언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웃시야 왕을 치신 거예요. 그런데 왜 많은 병 중에 특별히 나병이 걸렸을까요? 성경에서 나병이라는 것은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몸의 감각이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 이 왕은 영적 감각이 완전히 다 사라진 거예요. 먹어야 될거 먹지 말아야 될 걸 구분 못하고, 찬밥 더운밥 못 가리고, 나가야 될 것 나가지 말아야 될 걸 모르고 영적 교만 덩어리로 지금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성전에 들어가 향로를 손으로 잡고 제사장들에게 노를 발하다 이렇게 나병에 걸리게 된 겁니다. 결국 이 나병이 평생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웃시야 왕은 사람들에게서 평생 격리되어 홀로 고립되는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후반전 인생이 좋지 않게 마무리 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지금 코로나로 오랜 시간 신앙 생활에 제약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어렵고 힘든 시기라 그러지만 사실 이 때야 말로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번 진리에 비추어보고 제자리 찾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똑같이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하나님이 높여 주시고 강성 하게 해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높아지고 강성해진 것 자체가 분명히 복이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그 강성함과 높은 자리가 나를 무너뜨리는 화가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높아지고 무조건 잘 되고 강성 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올라 갔을 때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으며 하나님을 붙드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지혜를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인생의 전반전에 은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것을 실패하고 무너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패턴에서 돌아봐야 합니다. 나에게 반추해 보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용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나병에 걸려 모든 감각이 사라져 본분을 잃어버린 채 인생 끝에 비참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늘 반성하고 영적 긴장감을 잃지 않은 채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 패턴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끝까지 신실하게 영적 겸손함과 민감함을 붙들고, 주님이 세워 주시는 강성 함이 나에게 복으로 끝까지 남아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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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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