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한국전쟁을 보게 되면, 전쟁 직후 얼마 있다가 남한군이 밀리고 밀려 낙동강까지 이르러 거의 모든 땅을 잃어 버릴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을 직면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두 지파 중에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서 북쪽 이스라엘이 됐으니까 남유다의 모습은 영토로 봤을 때는 거의 지금 낙동강 밑으로 남한이 밀려가고 쫓겨간 상황과 거의 비슷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만큼 대부분의 영토와 백성들은 북 이스라엘로 흡수되었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딱 남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남유다가 두 지파만 있었지만 그 두 지파가 결코 그 열 지파와 싸우는데 힘과 군사력이 뒤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기가 충전했고 이 모든 하나님을 반역하는 형제 백성들을 가만 두면 안 된다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북이스라엘을 수복하기 위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난 10지파, 인본주의 대표로 보여지는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낯을 피하며 애굽으로 도망간 그런 리더를 쫓아 추종한 그 열 지파를 정벌하여 다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를 재건하며 르호보암을 왕으로 다시 한번 온 지파에 통치할 왕으로 돌리려는 계획, 그것이 바로 지금 남쪽 유다 해서 백성들의 그 마음 가운데 가지고 있었던 열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었고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어떻게 보면 정당성이 있고 하나님에게 등돌린 저 북쪽 백성들을 징벌해야 할 거 같은데 하나님께서 올라가지 말고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라고 명하시는 겁니다. 원수가 되버린 형제들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 가라는 것지요. 내 생각과 마음에는 지금 당장 올라가 저 배신자들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쳐서 징벌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남유다 백성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힘이 약해서 벌벌 떨고 위축되서 못 올라간게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 그 순종의 결과가 열 지파를 치러 올라가지 않고, 형제들이 피흘리지 않고 분단 상태로 나누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나의 생각과 뜻이 옳고 정당함에도 그것을 막아서실 때가 있습니다. 남 유다가 동일하게 그 원수가 되어버린 열 지파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다윈 언약과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난 그들을 치러 올라 가는 것이 바른 일이고 성전 신앙을 회복하는 중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형제들끼리 피 흘리지 말고 싸우지 말라 명령하신 그 말씀에 그들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멈추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죠. 다윗은 자신의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 돌려려고 했는데 전쟁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며 하나님은 그 마음만 받으시고 그 실행한 것은 나중으로 미루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킨 것이죠.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충돌할 때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아무리 그게 좋은 정당성과 명분을 가지고 있어도 말씀이 멈추라 하면 거기서 멈출 수 있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치러 가지 않는 이 말씀 보다 앞서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남과 북이 갈라진 이스라엘의 역사는 분명히 비극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역사 였고 실패의 역사이자 좌절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와 좌절에 역사인 분단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선 더 큰 뜻을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그 역사를 해석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남유다는 전쟁으로 올라가는 대신 어떤 일을 집중하게 되었는가? 바로 남 유다인 예루살렘과 성전 지역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더욱 견고하게 하고 그곳에 모든 방비 하는 사업들을 쌓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 순종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바라보게 만드셨습니다. 남유다,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하나님께서는 정통성을 부여해 주시며, 다윗 언약 중심, 성전 중심의 신앙으로 다시 한번 개편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남북 분단의 역사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해석하는 눈이라는 것을 역대기는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생각과 뜻이 달라 지체가 원수가 되고, 형제 자매가 원수가 되고 서로가 칼을 가지고 싸우는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납니다. 이 세상은 수많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적인 갈등으로 말미암아 서로의 적과 적을 만드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형제들과 원수되지 말고 피흘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우리가 몸된 교회에서 지체들에게 원수되지 말고, 서로 칼과 총을 겨누지 말고 순종하기 원합니다. 나의 편파적이고 치우치며 편향된 나의 생각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서로 나가 원수되어 피흘리며 싸우기 전에 먼저 그들이 나의 형제 자매이며 나의 지체임을 잊지 않고 우리가 이 시간 주님의 뜻을 붙들고 멈추는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뜻과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큰 뜻 앞에 우리가 엎드리는 지혜가 더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험한 세상 이 복잡한 세상, 진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이 세상 가운데 진리 이신 말씀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견지하며 살아가는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9장까지 말씀은 솔로몬 왕에 대한 증언들이었고 오늘 10장 말씀부터는 아들인 르호보암 왕에 대한 증언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열왕기서를 통하여 이 르호보왕이 바로 남과 북으로 이스라엘이 나누어지는데 단초를 제공하게 된 악한 왕이라 강조하며 증언합니다.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탐하는 타락과 변질이 분단의 단초를 제공했고 결국 르호보암 때에 와서 결정적으로 일이 터지면서 분단 되었다는 것이죠. 그 터진 일이 바로 오늘 말씀 배경인 북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로보암과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오늘 역대기서는 이 사건을 열왕기서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솔로몬 왕과 달리 르호보암의 지혜 없음이 분명히 분단의 아픔을 제공했지만,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원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성전 건축과 왕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백성들의 성전 건축과 성전 자체를 바라보는 마음과 태도가 얼마나 큰 문제였는가? 이미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완성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이 성전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다 재편하셨습니다. 왕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지도자인 왕이 성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구도가 이미 시작된 것이죠. 그런데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세겜으로 내려오라고 압박을 하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는 의도적인 백성들의 불순종과 반역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물론 12지파를 다 포함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주도 세력은 바로 북쪽에 있는, 나중에 북 이스라엘이 되는 그 열 지파들이 르호보암을 세겜으로 와서 우리 인준을 받으라고 압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에 세우신 왕이 아닌 아닌 백성들이 인준하고 세겜에서 왕을 삼으려 하는 인본주의의 태도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든 영적 질서가 움직이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 앞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이 거룩한 질서를 거절하고 거부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의 리더로 여로보암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호보암은 “솔로몬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한 자”로 묘사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한 왕, 하나님의 지혜를 품고 성전을 완성한 위대한 왕이었죠. 그런데 그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피하고 하나님이 재편하신 성전 중심의 신앙을 피하는 자로 매우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도망을 간 곳도 애굽이지요. 세상 가치와 문화로 상징되는 애굽으로 도망간 자가 여로보암입니다. 북쪽의 10 지파가 이렇게 하나님이 세운 지혜의 왕을 피하여 애굽이라는 세상으로 도망가는 이런 여로보암을 추종하고 있음을 지금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 중심의 신앙, 지혜를 피해 세상가치과 문화로 도망간 여로보암과 그를 따르는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과 태도에서 이미 인본주의로 타락하고 변질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돌아와 르호보암 앞에 와서 민심의 소리라며 이야기하는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솔로몬 왕이 이루었던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 따라 완성된,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움직인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거룩한 사역이자 성역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여로보암은 그 성전 건축의 일을 뭐하고 폄하하는가 하면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무거운 멍에” 라고 선언합니다. 즉 성전 건축을 위해 했던 성전 건축의 모든 사역들이 고역이자 무거운 멍에였다...그게 다라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영적 태도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전 건축은 매우 힘들고 고되고 어려운 일이었고 온 몸과 마음으로 쏟아내야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과 사역이 고역이고 무거운 멍에로만 여겨졌다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는 태도, 성전에서 일하는 모든 사역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악한 모습이고 타락한 내적 동기였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여로보암을 추종하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건 뭐냐면 단 한가지, 백성들이 기뻐하고 편하게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쉽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과 소통 잘하고 백성의 의견을 존중하는 왕 잘 섬기겠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고역과 같은 사역을 가볍게 하면, 교회에서 무거운 멍에와 같이 일하는 헌신을 가볍게 하면 교회 잘 섬기겠다는 겁니다. 이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 교회와 하나님의 일에 대하는 태도입니다. 성전 사역과 교회 사역에 헌신하는 일이 그저 고역이 되고 무거운 멍에가 되어 그런 것을 가볍게 하면 교회 잘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하나님의 지혜와 낯을 피해 세상인 애굽으로 도망가 철저히 세상과 인본주의 가치에 물든 백성들의 불신앙과 반역의 모습을 그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역대기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마음이 영적인 문제이며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로보암이라는 인본주의 지도자를 추종하며 이미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악한 태도와 불신앙의 태도를 품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본질적 영적 문제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성전 사역이 고되고 무거운 멍에 였기에 무조건 가벼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 생각 자체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이 불신앙의 근거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역대기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 사역을 그저 고역으로 여기고, 무거운 멍에로만 여기며 그것을 가볍게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을 기쁘게 하는 일로 여기는 이 태도와 마음을 경고하며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피하여 세상 지식과 문화인 애굽으로 도망하여 철저히 인본주의적 태도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역과 사명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역과 사명도 있고, 가정적인, 그리고 교회에 주신 사역과 사명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은 그 맡겨진 사역과 사명을 이루며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개편 되서 살아 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들이 그냥 고역이고 멍에이고, 그것을 가볍게만 해주는게 좋은 그런 영적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기 원합니다. 교회 사역과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이 그냥 벗어 버려야 될 것처럼 생각하는 이 모습이 혹시 나의 모습이 아닐까 반성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추고 반성하며 성전 중심의 신앙,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 중심의 신앙,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개편되며 주님이 맡기신 사역과 사명이 고역이나 무거운 멍에되는 것을 넘어 기쁨과 감사의 도구가 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이 풍성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 왕이 누구인가? 역대기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모습으로 솔로몬 왕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성전건축을 완성한 위대한 왕,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충만한 왕, 이게 지금까지 평가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마지막 평가는 하나님이 주신 재물과 부가 넘쳐 났던 왕이다…굉장히 긍정적으로 솔로몬을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결과물들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얼마나 부자였는가에 대해 금이 넘칠 정도로 많이 있었고, 은은 귀하게 여기지도 않을 정도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이 넘쳐나고, 심지어 그릇들도 금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역대기는 이렇게 넘치도록 많았던 금은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었던 왕, 솔로몬에게 부어진 부어지는 복, 부산물과 같은 복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재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재산과 지혜가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재산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고, 재산은 하나님의 지혜와 더불어 따라오는 복들이었음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고 살아갔기에,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전은 세워졌고, 수많은 왕들이 솔로몬의 얼굴을 보기 원하며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그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받기 원했다는 것이죠. 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는 모습은 신약에서 지혜이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모습과 연결되어 있다고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나의 삶 가운데 우리 마음에 주신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살아가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살아가는 그 간절함과 열망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을 바라보지 않고 구하지 않으며, 세상 것에 나의 마음을 두지 않고, 먼저 주님의 그 지혜에 내 마음을 두고 주님의 얼굴을 보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런 주님을 향한 순전한 갈망과 간절함을 기뻐 받으시며 더불어 주시는 수많은 복들이 흘러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솔로몬 왕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큰 뜻은 우리가 담고 바라보는 부분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열왕기서의 평가, 솔로몬 왕이 이렇게 금이 넘쳐나고 재물이 많았던 사실이 타락과 변질의 징조로 보여지며 그것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고 사실에 기반한 평가라 믿는 경향이 많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 금이 얼마나 넘쳐 났으면 금으로 방패를 만든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열왕기서의 해석, 이렇게 금을 녹여 방패를 만드는 모습을 솔로몬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군사력을 의지하고 군사력을 자랑하는 마음으로 방패의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었다고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서술하는데 마음이 끌립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재물에 가 있어서 심지어 자기가 쓰는 그릇들도 금으로 만들 정도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타락과 변질의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 역대기의 해석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진리를 발견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시고 평가하시는가? 역대기를 바라보면서 소망을 바라고 은혜를 붙들게 됩니다. 우리에게 실수하고 무너지고 좌절한 부끄러운 과거 모습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을 역대기의 시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의 관점으로 지지하고 믿어 주시며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약점과 문제와 부족한 점에 먼저 눈이 가시는게 아니라, 성도로써 성전과 말씀 중심의 신앙을 살아가며 주님의 지혜를 붙들고 살아가려는 그 열망과 간절함이 있다면 그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보시고 잘했다 칭찬해주시는 겁니다. 역대기에서강조하는 부분,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바라보는 솔로몬은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약속으로 성전 건축을 성취하고 충실히 수행한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지혜가 넘친 왕이 그의 실수들과 무너짐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바라보는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우선순위로 무엇을 먼저 구하고 붙드는가가 여러분들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솔로몬이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은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지혜를 최우선으로 붙들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시각입니다. 그것을 통해 솔로몬은 하나님의 복을 더불어 누리는 비결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은혜의 시각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발견하기 원합니다. 내 삶의 흠과 부족함,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일 먼저 구하고 붙드는 것이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갈망하고 붙드는 것이 될 때, 하나님은 솔로몬과 같이 은혜의 시각으로 평가하시고 바라보심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시간 솔로몬 왕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먼저 구하며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며 그 지혜 가운데 머무르기를, 은혜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심을 믿음으로 붙드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에 탄복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높이고 찬송하는 시라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찬송의 시는 사실 솔로몬 자신을 높이는 게 아니라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인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그 지혜에 놀라며, 그 지혜를 주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고 선언합니다. 이 찬양시를 통해 결론 말씀과 같이 역대기는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지혜를 붙든 위대한 왕이다.”라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붙들었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성전 건축을 완성한 위대한 왕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위대한 왕 솔로몬에 대한 평가로만 멈추면 안되고 더 깊은 영적 의미로 들어가야 합니다. 역대기 말씀에서 성전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 지혜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다 장차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기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한 위대한 왕,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지혜의 왕이라는 이 찬양시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그대로 보여주는 연결점을 갖게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 즉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참 성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지혜의 본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바 여인이 솔로몬이 가진 지혜를 찬송하는 말씀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따르며 살라는 영적 진리를 마음에 담는 것을 넘어,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성전 되심과 참 지혜 되심을 찬양하고 있음을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이 스바 여인이 솔로몬의 지혜를 간구하고 찬양하는 이야기를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2절에 보면 “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선언하셨습니다. 이 남방 여왕이 바로 스바 여왕입니다. 심판 때에 이 세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남방 여왕인 스바 여왕을 통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는 그 간절함으로 땅끝에서 왔다는 거예요. 지금 유대인들 앞에 지혜 자체이시고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계신데, 그 말씀을 듣지도 믿지 않고 거절하며,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요구하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질책하시며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이방 여왕이 저 멀리 남방에서부터 찾아오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솔로몬의 지혜 듣기를 그토록 간구했었는데, 솔로몬 왕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이 진리와 지혜를 가르치시는데 귀를 막고 듣지 않고 거절하는 이 완악한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크신 분, 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저자 직강을 들으며 살아가는 것, 이게 얼마나 큰 복인 줄 모르느냐? 지금 진리와 지혜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앞에서 회개를 촉구하며 복음으로 돌아오기를 말씀하고 계신데 너희는 지금 돌아오지도 않고 말씀을 듣지도 않고, 듣기를 거절하고 있고, 눈에 보이는 표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아느냐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매일의 삶 속에 내 눈에 먼저 들어오고 주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지혜가 보이고 주목합니까?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는 것, 주목하는 것이 마음에 있는 관심입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내 인생의 지혜로, 진리와 생명으로 받아들이며 사모함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스바 여왕은 돈과 금과 보석을 가지고 와서 땅끝에서부터 찾아와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며 열망함으로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땅 끝에서부터 찾아온 지혜를 구하는 그 간절한 갈망, 내 모든 것을 가지고 와서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은 그 지혜를 구하는 스바여왕의 태도를 배우기 원하십니다. 그 간절한 마음 지혜를 구하는 태도에서 등돌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지혜를 정말 사모하며, 지혜의 본체이신 주님을 열망하며 추구하며 따라 가고 있는지…예수님은 물어보십니다. 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라는 이 지혜를 붙들고 스바 여왕의 지혜를 구하는 갈망과 태도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놀랍게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9장 말씀으로 역대기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마지막 평가가 담긴 역대기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장에서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완성한 위대한 왕, 오늘 말씀에서는 마지막으로 지혜의 왕으로 평가합니다. 솔로몬에게 부정적인 면, 잘못한 실정들이 있었고 그의 결혼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라가 분열하는 단초를 제공했던 그런 실패와 실수들이 있었던 왕이 솔로몬 왕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기가 바라보는 솔로몬의 모습은 성전 건축을 완성한 위대한 왕, 하늘의 은혜와 분별을 구한 지혜의 왕이라는 데 방점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가진 지혜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 이상의 큰 일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과 놀라운 일들이 성전 건축을 통해 일어나고 완성되게 한 위대한 왕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지혜의 왕으로서 위대한 왕이었다는 평가를 증언하는 대표적인 예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스바 여왕입니다. 스바라는 곳은 아라비아 반도의 저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남쪽 나라의 대표였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을 듣고 저 멀리 떨어 있는 남쪽 나라의 여왕이 멀리서 부터 찾아온 것이죠. 그리고 솔로몬에게 와서 어려운 문제로 테스트 한 거죠. 주목할 것은 수 많은 향 품과 금과 보석을 싣고 와서 지금 솔로몬에게 지혜를 구하며 스바 여왕이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했다.”는 부분입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고민은 돈 문제나 명예, 권력 이런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부자가 되고 더 잘 살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스바 여왕은 부유할 정도로 부유했던 사람이고, 그런게 마음속에 있는 질문이었으면 그 많은 돈과 보석과 향품을 싣고 그 멀리서 부터 와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물어 봤을 리가 없습니다. 솔로몬에게 구한 지혜는,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한 내용은 분명히 자기가 가진 수많은 금과 보석과 향 품으로 풀 수 없는 깊은 문제들과 고민들 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돈과 명예, 권력으로 풀 수 없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힘도 있고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겉으로 봐선 다 가진 것 같은데 내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고민과 인생의 빈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바 여왕만이 아니라 솔로몬 왕 자신도 그렇게 고민 했었습니다. 정말 아쉬운 것이 없었던 모든 것을 풍족히 가졌던 솔로몬 왕도 그 입술로 “헛되고 헛되다…모든 것이 헛되다.” 고 고백할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쾌락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허전함, 빈 공간과 공허함이 있다는 것이죠. 지혜의 왕 “솔로몬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솔로몬의 머리가 좋고 똘똘했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 솔로몬은 지금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왕으로서 하늘의 지혜를 품고 서 있는 지도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여왕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속 깊은 고민과 공허함과 그 헛된 마음에 채워지는 단비와 같은 지혜를 솔로몬이 그 여인에게 준 것입니다. 하늘의 지혜를 솔로몬을 통해 발견한 스바 여왕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의 지혜가 내가 들은 소문에 절반도 못하다고 고백합니다. 보통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문보다 못하는 게 대부분이죠. 그런데 솔로몬의 지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솔로몬의 지혜는 소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지혜라는 본질은 내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믿고 전인적으로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잠언서의 큰 주제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결국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맛보아 알고 그 분과의 관계성을 갖는 것을 통해 내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깨달으며, 나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분의 부르심과 뜻에 따라 허락하신 시간을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바라보고 살다 주님이 부르시면 홀연히 떠나 돌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지혜라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아무리 겉으로 화려해 보여도 채워지지 않는 자기 마음속에 빈공간을 채워 주는 하나님의 지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 지혜가 솔로몬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죠.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진정 하나님이 주신 지혜라는 것을 발견하며 그 지혜에 탄복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역대기가 바라보는 솔로몬 왕에 대한 평가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지혜를 가진 지혜의 왕.. 우리는 이 험하고 깨진 세상에서 솔로몬에서 부어 주셨던 하나님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자들입니다. 부산물과 같이 주시는 이 세상에서의 복들에 내 인생의 가치와 지향점을 두면 안되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게 지혜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과 돈과 명에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이용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풀리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있음을, 그것들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돈과 물질로 풀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빨리 깨닫고, 솔로몬에서 부어 주셨던 이 하나님의 지혜를 진심으로 구하고 사모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구하고 바라고 사모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돈과 물질과 권력을 넘어서는 인생,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사모하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때를 구하며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사모하며, 붙들고 살아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선 시대 역사를 보게 되면 한양에 있었던 경복궁이 불타고 나서 후에 그 경복궁을 재건하는 일을 통하여 나라를 재건하려 했던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북궁 재건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결국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나라 전체가 어려워진 과거 역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경복궁 하나를 재건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힘과 노력, 백성들의 피땀의 노력이 들어가서 국가가 휘청거리고 어려워졌는데, 수천년 전에 솔로몬 왕이 성전을 완성하고 자신의 궁궐과 여러 건축들을 계속하는 가운데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성전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 일에 집중 아니라고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항상 위기는 그 큰 일이 끝나고 나서, 대 공사가 끝나고 나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죠. 성전 공사를 다 마치고 나니까 그 동안 쌓여 있었던 문제들이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전 건축 이후에 솔로몬 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눠집니다. 열왕기서에서 솔로몬 왕의 평가와 오늘 말씀인 역대기에서 바라보는 평가가 굉장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평가에 따라서 이 솔로몬 왕이 정말 하나님에게 합한 왕이었는가, 아니면 정말 국가적 위기와 문제의 단초를 제공하는 하나님께 등을 돌린 왕이었는가가 나뉘어 집니다. 성경은 감사하게도 한쪽만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양쪽에 다른 관점들을 동일하게 말씀으로 증언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늘 치우칠 수밖에 없고 늘 부분적으로 알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열왕기서와 역대기의 이런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인 역대기는 성전 건축 이후 등장하는 솔로몬의 문제와 변질을 성전 건축이라는 큰 과업 아래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은 “건축하고…건축하고…”입니다. 20 년 동안 백성들이 부역하고 모든 재물을 다 모아서 하나님의 성전과 왕의 궁궐을 지어 쓰니까 얼마나 백성들이 피혜하고 어려워졌겠습니까? 경복궁 하나 재건하는데도 나라가 휘청 했는데 하나님의 성전과 자기 궁궐 까지 20년 동안 토목공사를 했으니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면 잠시 멈췄으면 좋은데 계속 건축에 끊이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건축을 무리하게 계속하는 것에 대한 평가가 열왕기서에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니까 솔로몬 왕이 백성들의 마음과 그 지치고 힘든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몰아 붙이며 건축 공사를 계속하는 것을 통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것이죠. 반면에 역대기서인 오늘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걸 계획하셨다는 것을 믿고 온전히 순종해 이 일을 잘 추진하는 솔로몬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부역하며 힘이 들었지만, 사실 많은 부분을 이방인들이 감당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방인들을 노예로 삼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관리를 하게 되었음을 오늘 말씀은 부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솔로몬의 실정과 문제는 큰 일을 추진하는데 따라오는 부산물과 같은 문제들이고 그 어려운 성전 건축의 과업을 강력한 리더십과 하나님의 은혜로 잘 추진하고 있음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솔로몬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서를 보게 되면 솔로몬의 정략 결혼으로 데려온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집중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 그것을 통하여 이방 신들의 가치와 정신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것이 솔로몬의 가장 중요한 실정이자 타락이라는 것이죠. 결국 이것으로 말미암아 솔로몬은 나라를 분열하고 분단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 문제 있는 왕이다….이게 열왕기서의 관점이고 해석입니다. 솔로몬은 굉장히 타락하고 변질된 왕, 성전 건축 이후 영적으로 완전히 하향 곡선을 그리는 왕...아버지 다윗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끝이 좋지 않았던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서는 이 솔로몬의 정략 결혼을 매우 짧게 서술합니다. 바로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문제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었음을 지적하지만, 그럼에도 방점은 어디 있는가 하면 그 여인을 성전에 출입하지 못하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구별된 성전에 모습을 지키려고 노력한 왕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실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에게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런 어려운 성전 건축을 잘 했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면서도 그 거룩한 성전의 본질을 지키려 노력한 왕이라는데 방점이 있는 것이죠 이렇게 성전 건축 이후 솔로몬 왕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른 관점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 우리는 말씀을 읽고 대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부분적인 편향성, 치우침을 내려놓고 말씀이 나를 교정하고 바꾸기를 갈망하며 읽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내가 좋은 대로 바라보고 내가 편한 대로 바라보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바라보며, 그 과정에서 왜곡하고 치우치게 바라본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은 다양한 관점을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큰 그림을 동시에 보게 되는 이스라엘의 경륜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말씀과 내가 충돌할 때, 나의 뜻과 나의 생각을 넘어 늘 우리가 먼저 엎드려 내가 잘못되었고 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와의 영광이 놀랍게 성전에 임하며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와 모든 재물을 태우고 하나님이 받으셨음을 보여주며 그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가운데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렸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사건들이 끝난 후 백성들은 기쁨과 즐거움 충만으로 풍성함을 누린 채 다 돌아가고 하나님과 왕인 솔로몬이 홀로 남아 독대하는 장면입니다.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임하셔서 중요한 지침서를 내려 주시는 거죠. 첫 번째는 이 성전이 얼마나 특별한 성전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열심히 노력하고 인생을 불태워 지은 성전이 아니라 너의 기도를 듣고 너를 택하고 하나님이 불로 태우시며 예배 하는 전을 삼은 곳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성전에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있을 곳이라는 것이죠.
성전이 성전되게 하는 것은 겉으로만 화려하고 멋있는 건축물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 곳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은 건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재정도 아니고 프로그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의미 없다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것이 성전이 성전 되게 하는 게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하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여호와의 이름이 머물고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고, 그 곳에 바로 여호와의 눈과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머물고, 하나님의 마음을 두시고 눈과 귀가 항상 머무는 곳이기에 성전이 거룩하고 구별된 특별한 은혜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본질을 분명히 붙들 때, 교회는 건물과 재정, 성도, 프로그램들이 어우러져 그리스도의 몸 된 역할을 감당하는 영적인 일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솔로몬에게 밤에 나타나셔서 이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달으라 말씀하신 겁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은 나의 이름이 거기 있고 내 눈과 마음이 항상 있는 이 본질을 붙들 때 여호와의 영광과 임재를 경험하는 성전이 되고, 기도하는 것을 듣고 그 기도를 통하여 놀랍게 역사 하신다는 것이죠 두번째로 성전은 위기 가운데 본질로 돌아오는 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찾아오는 어려움과 위기를 직면할 때 항상 주님 앞에 조율되고돌아오는 사인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고, 메뚜기가 산을 먹고, 전염병이 창궐하고…이게 바로 그 당시에 국가적인 대표적 위기 상황들 이지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위기 상황들이 찾아올 때마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거에요.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는 도구로 삼으라는 겁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도구가 되게 하라는 거예요. 스스로 겸비한다는 것은 교만한 자가 교만과 자기 중심성을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두손 드는 것을 말합니다.얼굴이라는 것은 “얼꼴”이죠. 그 얼과 마음이 들어 있는 모양을 얼굴이라 한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붙들며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의 불을 붙들고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자, 하늘을 늘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어려움 국가적인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 위기 어려움이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도구로 변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쳐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위기를 기회로 고쳐 주시는 그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겸비하는 대신 스스로 등돌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상숭배 하게 되면 그게 악한 길로 들어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변절 되고 타락하는 거에요. 이 때는 하나님이 성전 중심의 신앙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정도냐 하면 땅에서 뿌리를 뽑아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의 웃음 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 당시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처절한 삶의 자리이자 부끄러운 자화상이었으며 지금 많은 교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하는 부끄러운 자화상이자 삶의 자리입니다. 악한 길에 머문다면 성도들은 비웃음 거리가 되고 이야기 거리가 되며 부끄러움과 함께 뿌리가 뽑혀지는 안타까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 하신 그 말씀, 성전 중심의 신앙을 붙드는 그 핵심이 보이는 껍데기와 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고 붙드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올 때 그것이 악한 길을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얼굴을 구하는 도구가 되게 사용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주의 임재와 여호와의 영광을 맛보기를 사모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전에 가득히 임한 여호와의 영광이 저희 교회의 나의 삶 가운데 간절히 임하기를 사모하며 여호와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 그 임재 가운데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함께 말씀을 통해 묵상하기 원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다 완성하고 성전에 언약궤를 중심에 두고 무릎 꿇고 두 손을 펴고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왕으로서 백성들을 의식하지 않고 무릎 꿇고 철저히 주님의 은혜만을 간절히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 후 성전에서 일어난 세 가지를 주목하기 원하는데 1)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고, 2) 하늘에서의 불이 번제물과 제물들을 모두 태웠고, 3)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했다는 것이죠.
첫번째,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냥 인간이 만든 불, 인간의 열심이 만들어낸 불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새로운 불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했던 거대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다윗 때부터 모든 자재들과 건축비를 준비했고, 솔로몬 때 국가의 모든 힘을 쏟아 성전을 완성할 정도로, 소위 말하는 인간의 불이 필요했었습니다. 사람들의 땀과 눈물, 열심과 열망과 성실함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불이 필요했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열심히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행위가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드리는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 의미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생활의 본질과 기초는 내가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공급을 받는 겁니다. 내가 뭔가 열심히 하는 인간의 불이 유지하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우리는 하늘로부터 은혜를 받는, 불을 받는, 공급받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가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불, 새로운 양식, 새로운 힘과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겁니다. 두번째, 그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제물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솔로몬이 마음을 다해 드린 기도 후 하늘에서 새로운 불이 내려온 것입니다. 솔로몬이 드린 마음과 제물들은 그런 인간들이 만든 불, 인위적인 불이 태운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로운 불이 태웠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조율된다는 것은 바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이 나를 태우는 겁니다. 나의 죄를 태우고 나의 연약함을 태우고 나의 근심걱정을 태우고 나의 막혀 있는 눈을 열리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새로운 불과 함께 이 세상에서 봐야 될 것을 보고, 이 세상에서 집중해야 될 것에 집중하며, 이 세상에서 내가 나아갈 바를 주님께서 인도하심에 따라 나아가는 겁니다. 하늘에서 내리신 주님의 불과 함께 내 자아가 죽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이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게 신앙생활의 신비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수동태입니다. 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죠. 주어가 “하나님”이 되는 인생이 신앙 생활입니다. 세번째,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전심으로 기도하고 마음을 담아 제물을 드리며 예배드릴 때, 하늘에서 새로운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고 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그냥 여호와의 영광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오늘 말씀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했다 그랬습니다. 찔끔 찔끔의 영광이 아니라 흘러 넘치는 영광이 성전 안에 가득한 거죠. 여호와의 영광이 흘러 넘치도록 풍성하게 임하는 이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내 삶 가운데 가득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 교회에 가득하기 위해 우리가 늘 집중하며 조율되어야 하는 진리는 신앙은 나의 열심과 나의 노력과 나의 발버둥을 통하여 내 삶이 태워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그 새로운 불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태워지는 인생이 됐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며, 여호와의 영광을 사모하며 그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길 원한다면 나는 하늘로부터 건짐 받은 인생,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전적으로 내가 건짐 받은 인생이라는 이 분명한 자의식이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 열심으로 내 불로 살고, 내 불로 열심이 태우는 인생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본 이유는 그들의 영적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떠진 거죠.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이고 여호와의 영광을 주목할 눈이 열린 겁니다. 그렇게 영적 눈이 열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인간의 반응은 항상 뭐냐면 예배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엎드려 경배한다, 감사한다, 찬송한다, 제사를 드린다…이게 다 예배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결국 예배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영적인 눈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바라보는 그 영적 눈이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게 되고, 그 반응으로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며, 엎드려 경배하고 감사하고 제사를 드리며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 마음에 채워지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예배가 나에게 흘러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놀라운 그림입니다. 내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내 열심으로 나를 불태우는 인생이 바로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빈그물을 직면한 베드로와 같은 인생입니다. 밤새도록 온 인생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다녔는데 내 인생이 텅 빈 공허한 인생입니다. 열심의 부재가 아닙니다. 달리는 것이 부족해서 아닙니다. 나의 바라보는 눈과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귀하고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나를 이끄는 힘과 내 인생을 태워야 되는 본질은 내 열심이 아니라 내 노력이 아니라, 하늘의 불로 태워져야 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 부어지는 힘과 불로 내가 태워 질 때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과 나의 인생을 주님께 드릴 때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불이 나를 태워 주님께 영광 드리는 그 놀라운 인생이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될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공급하심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바라보는 그 예배와 삶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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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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