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져 그들이 이제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그 다른 길을 남유다의 순종과 북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대비하여 우리에게 영적 지혜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열 지파가 갈라져 북이스라엘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남아있는 남유다 사람들은 마음에 분노와 복수의 칼을 들고 지금 당장 올라가서 저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나라를 회복해야겠다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이 군대를 모았는데 보니까 18만명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18만 명이면 굉장히 많이 군대를 모은 것입니다. 그만큼 북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이 전쟁은 정당성이 있었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 임하는데 올라가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되어 버렸지만 저들은 우리의 형제이고 같은 팀으로 있었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는 당장 저 배신자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쳐야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가지 말라 막으시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남유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전쟁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결국 열지파를 치러 올라가지 않았고 동족이 피흘리며 싸우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유다가 힘이 약해서 위축돼서 못 올라간 것이 아니라 싸움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뜻을 내려놓고 순종한 것입니다.
남유다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보면서 두 가지의 마음이 듭니다. 르호보암이 조금 일찍 하나님께 더 순종했으면 어떨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분단되기 전에 일찍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될 말을 먼저 들으며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이번에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멈추는 지혜가 그에게 있어서 남유다가 저렇게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나의 생각과 뜻이 100% 옳고 정당한 거 같은데 그것을 막아서실 때가 있습니다. 분노와 복수의 칼을 들고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될 것만 같은데 하나님이 그것을 멈추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인 교회 안에서도 생각과 뜻이 달라 서로 싸우며 원수가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분노와 복수의 칼을 들고 서로를 죽여야 되는 사람들이 생기면 사단만 기뻐하는 일이 되며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팀이며 같은 민족이며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싸우지 말고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멈추는 지혜가 있기 원합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될 때 쓰임받는 신실한 종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듣고 내 뜻을 멈추고 순종하는 지혜가 있을 때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백성 되는 줄 믿습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의 불순종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불순종의 근거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대해 무거운 멍에이며 고역으로만 생각하는 인본주의 생각에서 기인합니다. 그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가볍게 하는 것이 나에게 복이라 생각하는 착각이 그들을 불순종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의 뜻, 사람들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중요한 신앙의 기준들이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먼저 여로보암 왕은 머리를 굴려 세겜 지역에 금송아지 신상을 세워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하려 합니다. 여로보암 스스로 머리를 굴려 보니까 백성들이 제사 드리러 예루살렘에 계속 왔다 갔다 하게 되면 마음이 누구에게로 쏠린다는 겁니까? 남유다 왕에게 쏠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자리가 위태로울까봐 스스로 머리를 굴려 예루살렘에 갈 필요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편하고 쉽게 예배드리라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왜 세우셨냐 하면 성전 중심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게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금송아지로 바꾸어버리는 겁니다. 어깨에 무거운 멍에와 고역도 없이 편하고 쉽게 예배 드리도록 해준다는 명목으로 성전 중심의 신앙을 다 버리는 겁니다. 오랜 코로나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켜고 누워서 예배를 드렸다 그래요. 그렇게 눕방으로 온라인 예배 드리면서 주일 성수 잘했다고…예배 잘 드렸다고 면죄부를 주는게 바로 북이스라엘에서 행한 일들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 죄가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게 북 이스라엘의 직면한 인본주의적 리더십이 가져오는 영적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죠 더 나아가 그들의 타락은 제사장의 타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고 구별된 레위 자손을 통하여 세워져야 되는데 하나님의 뜻에 상관없이 아무나 백성 가운데 제사장을 삼는 것입니다. 왕 말을 잘 듣고 권력에 길들여진 자 아무나 그냥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제사장 되고 싶다…그러면 가서 제사장 하는 것입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을 무너뜨리며 마음대로 편하고 쉽게, 말씀의 기준과 가치를 다 흔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게 영적인 기준이나 분별력 없이 사람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마음대로 결정하는 왜곡을, 하나님 믿는 신앙이 자기를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리는 변질을 보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굳이 안식일에 주일날 뭐 예배드리냐는 거예요. 절기도 편한 때 사람들 스케쥴이 잘 맞을 때 아무 때나 편할 때 와서 드리라는 거죠. 자기 마음대로 정해 내 편한 시간에 와서 마음대로 제사하고 예배 드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백성들을 위하고 백성들의 민감한 소리를 듣고 민심을 민감하게 챙긴다는 말 아래 인본주의적 리더십을 통하여 신앙의 기준을 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게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편하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타락과 변질입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남과 북의 분열을 단순히 영토의 분열이 아니라 신앙의 분열과 가치관의 분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숫자로 봐서도 영토로 봐서도 북쪽에 있는 대다수가 남유다에서 이탈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갈라진 나라를 통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얼마나 많은 영토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전하게 남아 하늘의 기준을 붙들고 버티는 진짜 남은자가 있느냐로 하나님의 경륜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전하게 남은 자들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두며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그곳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과 성전 중심의 신앙을 다 버려 버리며 아무나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정한 날에 와서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는 영적 타락이 신앙의 기초와 기본을 다 잃어버려 백성들을 다 무너지게 만들어 버렸음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겉으로 봐서는 우리를 위하고 백성의 소리를 듣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지만 인본주의적 리더십과 신앙은 결국 나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인본주의적 타락 신앙의 왜곡을 바라보며 순전히 주님을 구하고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남은 자가 되기를 열망하며 십자가를 꼭 붙들기 원합니다. 신앙생활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 중심과 성전 중심, 말씀과 예배 중심의 삶을 회복하여 타락과 변질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말씀의 기준을 붙드는 순전한 남은 자로 선명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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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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