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서 십자가 은혜를 강조하며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이 저주라는 말인데, 저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주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에 좋지 않은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정의가 참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저주라는 의미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21장을 보게 되면 나무에 달린 자가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 바로 저주받은 자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형을 당하고 나면 시체를 다시 나무에 매다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그 처형당한 사람의 죄가 너무나 크게 되면 그 죽은 시체를 매달아 사람들에게 전시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저주받은 시체라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시체를 일정한 기간 둠으로서 시체가 짐승의 밥이 되기도 하고 끔찍하게 변하는 나무에 달린 시체를 바라보며 저주받은 인생의 끝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선언합니다. 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냐 하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의롭다 존재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율법이라는 행위를 통해 내 스스로 의로워지고 구원받을 만하게 만들려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버림받음, 저주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죄를 드러나게는 하지만, 율법이 우리 죄를 속할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의로워질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도 없으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인생 저주받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이란 나를 대신해 저주 받으신 사건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내가 달려야 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의미와 함께, 내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될 저주, 하나님께 버림 받아야 하는 저주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인생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으시며 십자가에서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그 절규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시는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냥 물과 피를 쏟으시며 고통 가운데 돌아가신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버림받는 그 저주는 내가 받아야 될 저주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써 그 저주를 다 온몸으로 받으신 겁니다. 죄의 무게는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치루어야 될 대가가 있으며, 죄는 받아야 될 저주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는 심각한 권세가 있어서 우리를 결박하고 옥죄는 힘과 압력이 있습니다. 죄를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든 자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저주 받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살리고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 죄값을 다 치르시고 내가 받아야 될 저주를 온 몸으로 감당하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친히 감당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데, 죄 없는 어린 양 되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아 저주받은 자로 죽으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계속 반복되는 저주라는 말을 풀어주는 신비, 바로 “믿음으로 말이암아…”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값이 해결되며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며 하나님의 자녀 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임하며 모든 결박이 풀어지며, 모든 저주가 풀어집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던 박물관에는 아주 유명한 미술 작품이 있습니다. 너무나 위대한 조각상들이 있습니다. 그 귀한 미술 작품에 내가 뭘 좀 도와준다고 붓을 가지고 가서 덧칠을 하려 한다면 그건 잡혀갈 일이고, 큰일 날 일입니다. 그 미술 작품에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면 좋을 거 같다며 붓을 들고 거기다 덧칠하는 순간 그 모든 미술 작품들은 망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감옥 가는 일이자 절대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박물관에 그 유명한 미술 작품들도 그렇게 덧칠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심지어 감옥 가는 범죄라는 것을 아는데,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는 너무 쉽게 덧칠하려고 하고, 얼마나 위험하고 큰 잘못인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래야 된다… 내 느낌과 감정에 이렇다… 나의 입장에선 이렇다… 너무나 쉽게 순전한 십자가 복음에 덧칠하고도 그게 얼마나 복음을 망가뜨리는 일 인줄 모르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십자가 복음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는 것을 사도 바울은 허용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 복음 자체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예수님이 바로 나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겁니다. 나를 위해 친히 하나님께 버림받으시고 저주받아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으시면서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만 내가 그분 안에 있음으로 의로워지는 겁니다. 반대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나의 죄값을 치르시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며 내가 받아야 될 저주 하나님께 버림 받음을 친히 다 감당하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늘 내가 죽어야 할 자리였으며, 내가 하나님께 버림 받아 저주받아야 할 자리였음을 잊지 않는 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덧칠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큰 잘못이며, 얼마나 복음을 망가뜨리는 일인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순전한 복음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 너희가 복 받는 비결이라는 것 구원받는 비결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순전한 복음만을 붙들고, 나를 저주에서 건지신 십자가의 은혜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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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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