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사도 베드로를 사도 바울이 책망하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은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 베드로의 위상이라 것은 거의 뭐 지금 교황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중요했고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에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가장 큰 어른이자 기둥과 같은 상징적 존재가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바울이, 그것도 살인자라는 과거가 있는 바울이 이렇게 상징적 존재인 사도 베드로에게 감히 말할 수 없는 책망을 그렇게 담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사도 베드로를 향한 책망은 그 당시 상식으로 봐도 문화도 봐도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 대선배를 신참으로 막 들어온 바울이 야단을 치고 책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고 겁을 완전히 상실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예의도 없고 경우도 없고 자기 파악도 안 되는 이런 개념 없는 책망을 감히 사도 베드로에게 했다고 비난 받을 수 있음에도 이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더라도 사도 베드로에게 말할 것을 말해야 되는 거룩한 부담감이 사도 바울에게 가득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도 베드로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걸고 공개적인 책망을 해야 될 정도로 큰 문제였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상식과 문화와 경우를 깨면서까지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그 내용은 무엇이며 원인이 무엇입니까?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선교 기지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잘 감당해서 크게 부흥하고 있었던 이방인의 첫 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심방 차 방문한 겁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잘 부흥되고 탄탄하게 믿음의 길을 지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교회 안에 이방인으로서 회심한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문화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없었는데 사도 베드로는 기쁜 마음에 안디옥교회 성도들인 이방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겁니다. 그러다가 야고보와 유대교 배경의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하니까 그들을 보고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다가 사도 베드로가 회심한 이방인 성도들과 식사 교제하는 데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서 물러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사도바울은 지금 강력하게 책망하고 지적하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어른이자 상징적 인물이기에 그가 하는 어떤 것들도 다 초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방인들의 구원의 문제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문제가 되었기에 첫번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미 일단락되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안식일 준수와 음식 준수와 이런 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계속 내걸기 시작한 것이 큰 문제가 되어 사도행전 15장을 보게 되면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립니다. 그 모임에서 베드로 사도와 함께 여러 사도들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게 뭐냐면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할례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한 이 구원에 대해서 자꾸 덧씌우고 물타기를 하려는 시도들을 공식적으로 멈추게 한 역사적 결정이었고 이 결정을 주도한 자가 바로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 이나 짐승의 보자기가 내려 오는 환상을 보여주시며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깨끗한 것이며 그것이 신앙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직접 알려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법적으로 자유함을 선포하고 환상으로 세 번이나 보여주시며 그를 교정해 주셨는데 정작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 와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식사교제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 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식탁 교제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같이 먹던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떠나버리게 되고 바나바 또한 그에게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말로는 할례와 안식일, 음식 규례를 안 지켜도 됐다고 공포를 했지만, 환상으로 분명히 가르쳐 주시며 교정하셨지만, 사도 베드로의 일상의 삶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함께 식사 교제하는 것도 안되게 되는 이 이중적인 모습의 잣대를 지금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경우 없다는 소리를 듣고 비난 받을 것이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도 베드로를 강력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 대신 사람들 눈치 보고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어 있는 사도 베드로를 향하여 책망한 것입니다. 아직도 복음 안에서 자유 하지 못해서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여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에 교제하는 것도 피하고,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공동체에서 남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묶여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왜 억지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 답게 살게 하려 그러느냐고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공개 석상에서 지적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첫째로는 초대교회 거장이자 큰 기둥이었던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가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선포했으며 환상을 통해 그에게 교정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해 사람들에게서 자유하지 못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 겸손하게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였고 기둥이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통해 우리 인생 또한 그런 모습임은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도 베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 큰 사도였다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사도 바울과 같은 자가 사도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책망하면 그 조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찍힐 대로 찍혀서 이미 손을 봤을 거고 그 공동체에서는 이미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사도바울의 그 경우 없어 보이는 책망에도 불구하고, 그를 찍어내지 아니하고 그를 품고 같이 동역하며 나아갔다는 겁니다. 그렇게 높은 지위에 상징적 인물이었던 사도 베드로는 비난과 책망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큰 마음과 반대자를 품을 수 있는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조직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이런 세상의 구조가 아니라 어디 너 같은 자가 나에게 지적을 하고 있냐고 찍어내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그 진정한 용기와 분명한 동기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을 알고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품고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나아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통 크게 그 책망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사도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고 주님의 뜻이 맞다면 그것을 당당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대담함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물이자 거성인 사도 베드로를 수많은 비난을 감수하고 라도 책망한 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음 안의 자유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대신 사람들에게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도 바울의 이 책망,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는데 왜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가…반성하며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렸다면 옛날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참 자유는 결국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에게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며 하나님 외에는 어떤 누구에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을 통해 누려집니다. 나의 복음 안에서 정체성이 주님 안에서 변화된 자유임을 깨달으며, 율법과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풍성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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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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