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라비아에서 하나님의 확성기와 같은 말씀으로 예수님과 깊은 교제와 친밀감을 누리며, 내적으로 충분한 은혜와 준비를 한 후, 삼년 만에 드디어 이방인의 사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라비아 사막에서 예수님과 깊은 교제와 만남을 통하여 그의 내면을 다진 후에 3년만에 이제 쓰임 받기 위해 초대교회의 본산 예루살렘에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로 이루어진 사도들을 만나러 갔는데 그 사도들과 초대 교회들이 사도바울을 향하여 호의적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면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동지였던 스데반 집사를 쳐죽인 살인자였다는 삐딱한 시선과 사도 바울이 정말 변한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합쳐서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렇게 살인자라는 과거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예수님이 쓰실 수 있는가에 대한 불만과 여러 색안경이 사도 바울을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야고보 사도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 보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와 그 지역 성도들에게는 변화된 사도바울이 환영 받지 못하는 자였다는 겁니다.
그것 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얼마 잊지 못하고 떠나야만 됐습니다 오늘 말씀 21절을 보게 되면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라고 증언하는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이방 지역으로 가게 되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모든 것이 변하여 복음의 증인이 된 사도 바울을 배신자로 여기고 죽이려 했기 때문에 피신 가고 도망간 것이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가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결과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로 핍박 받고 목숨이 위태로운 자가 되었고, 그리고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환영 받지 못하는 이런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낙심하지 않게 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와 내적 준비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그가 변화되어 분명한 사명으로 부름 받은 복음의 증인인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좋게 하려고 사도가 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의지해 사도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실망할 필요도, 낙심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대쪽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색안경과 의심의 눈초리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유대인들을 통해 배신자로 낙인 찍혀 살해 위협을 받고 도망 다니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나 끊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보름 동안 있으면서 사도들에게 별로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 환영 받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살해 위협 가운데 시리아 지역으로 피신 했을 때도,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지는 사명자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는 부름 받음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 지역으로 피신 갔을 때 사도 바울을 얼굴을 보고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진이 없었으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생겼고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에 대한 변화된 이야기는 이방 땅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그렇게 핍박하던 자가 변하여 복음을 전한다…. 우리를 죽이려 했던 그가 이제는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변화 돼서 우리보다 더 앞장서서 예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소식이 이미 퍼져 있는 것을 목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얼굴은 모르는데 그의 변화된 이야기를 통해 신앙에 힘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방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보게 된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사도 바울이 봤을 때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는구나…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신 것이구나….확신하는 간증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사람들과의 만남을 다 멀리 하고, 예수님만을 만나고 예수님과 친밀함을 가지며 웅크리고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그 사이에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아니하며 사도 바울의 변화된 인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알게 하셨고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게 하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분명하게 변한 나 같은 인생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사용되는구나…사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대하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지 자발적으로 가든지 비자발적으로 가든지 좋은 일로 가든지 슬픈 일을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 께서 보내신 그 사명, 즉 이방인의 사도로서 예수 복음을 전하는데 올인해야 되겠구나…라는 분명한 외적 증거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주님을 향하여 나의 인생을 던질 때 사람들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자도 아니고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는 자도 아닌, 오직 십자가 은혜에 매여 주님을 바라보고 이 사명을 감당하리라…분명한 다짐을 하게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의 송두리째 변화된 인생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색안경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했고, 사람들에게 핍박 받고 살해의 위협까지 당하는 오해와 억울함이 가득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사도 바울이 바라보고 붙들었던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명히 붙들고 있기에 사람들이 삐딱하게 말하고 색안경으로 평가하고 의심하고 오해하는 것들이, 마음에 멍이나 상처로 남지 않고 나에게 흘러가는 물과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에도 기적과 같이 경험되기 원합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말로 주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생명을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전도의 방법은 나의 변화된 삶, 나의 고백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도 내 삶의 일상도 다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도하는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내가 주어가 아닌 예수님이 주어 인생으로 변화된 나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을 살지만 천국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 생명의 길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그 길을 우리는 순종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에 오늘도 나는 절망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아 계신 예수를 전하는 삶, 예수 생명을 선명히 전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
아카이브
10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