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극적인 개입하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싸워 주심으로 압살롬은 전쟁터에서 상수리 나무에 걸려 죽었으며 모든 반란이 진압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본인의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너무 슬픈 감정이 매몰되어 빨리 수습해야 되는 민심을 읽는데도, 그 민심을 붙드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이 피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는 자신의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된다며 주도권 싸움에서 승기를 잡으려 하고 나머지 지파들은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가 숫자가 훨씬 많은데 우리는 뭐냐…그러면서 갈등하고 분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으로서 빨리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고 수습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그들을 품었어야 되는데 슬픔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이 모든 일을 그냥 방치했습니다.
그렇게 갈등하고 반복하는 일이 결국 방아쇠를 당기듯 하나의 큰 사건으로 터지게 되는 사건이 바로 오늘 말씀인데 바로 세바의 반역입니다.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 사이에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분쟁하던 사이에 베냐민 지파의 있었던 불량배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의 지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베냐민 지파는 기본적으로 다윗 왕가에 대해서 안 그래도 삐딱한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나면 다윗왕의 흠과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데, 수습되지 않는 민심과 백성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방치하여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백성의 마음에 세바가 불을 지른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에게는 받을 유산이 하나도 없으니까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자 그러면서 반란을 부채질하는 겁니다. 그동안 참고 참았는데 왕이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그러면서 분노를 이용하여 안그래도 위태위태 했던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 사이에 갈등을 폭발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확 돌아서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세바가 반란을 선동하며 마음의 불을 지피자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만 지금 다윗왕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고 나머지 모든 지파들은 이 베냐민 지파 불량배인 세바를 따라 떠나 버리는, 이스라엘 나라가 두 동강 나기 일보 직전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내분을 터지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또 비슷한 다윗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바로 압살롬의 반란 진압후 남아 있었던 후궁들을 처리하는 문제였습니다. 다윗왕이 급하게 도망가고 피난 가면서 왕궁을 지키라고10명의 후궁들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10명의 후궁들이 힘이 있습니까? 군사력이 있습니까? 압살롬이 군사력으로 짓밟고 오니까 그냥 다 밟힌 겁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끔찍하게도 폐륜의 일을 저지르며 그 후궁들을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억지로 동침하였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10명의 후궁들을 다윗왕이 돌아와서 처리하는 방법이 책임회피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후궁 10명에게 왕궁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거나 아니면 그 압살롬에게 그렇게 겁탈당한 것에 죄를 묻기 전에 소위 조선시대에 말하는 홍제천에 은혜가 있어야 했지 않겠습니까? 많은 여인들이 이유도 없이 잡혀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년이라 그랬는데, 나라가 약해서 자신의 힘과 지킬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짓밟힌 그 젊은 여인들에게 정죄의 화살을 쏘기 전에 왕은 홍제천의 은혜를 주었습니다. 홍제천에 그 몸을 씻으면 넓은 마음으로 어떤 것도 다 용서받아 새사람이 된다는 은혜를 선포하여 수많은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홍제천에서 몸을 닦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후궁 10명에게 필요한 건 다윗왕의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는 홍제천에 은혜였습니다. 후궁 10명에게 그 홍제천의 은혜를 줬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품지 못했던 다윗왕은 이 후궁들의 마음도 품지 못한 채, 이들을 평생 가두어두고 밥만 주며 생과부로 살게 만들면서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은 것이죠. 그렇게 후궁들을 처리하게 되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다윗의 실정은 요압이 아닌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운 결정입니다. 왜 아마사를 요압 대신 군대 장관으로 세웠는가? 전쟁의 공로로 봤을 때는 요압이 훨씬 더 그동안 많은 일을 했는데 다윗왕은 의도적으로 요압 대신에 아마사를 세웠습니다. 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압이 다윗 왕이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을 죽였다는 데 있습니다. 분명히 왕이 죽이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전쟁에서 이기는 명목으로 압살롬을 죽였기에, 요압을 군대 장관으로 세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간과한 것은 요압이 다윗 왕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은 흔들고 다윗 왕의 약점을 붙들고 다윗 왕에게 넘어서는 반항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나가 죽이라는 편지를 요압에게 썼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가 공개되면 다윗왕은 굉장히 어려워지는 겁니다. 요압은 말은 안 했지만 그 편지로 인해 다윗왕의 약점을 이미 쥐고 있는 것입니다. 군대 장관인 요압이 다윗에게 대항하고 반항하고 함부로 하는 반역의 모습이 등장하게 됩니다. 요압은 다윗왕이 자기 대신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세우는 것에 큰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요압이 어떤 일을 합니까?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세운 다윗에게 항명하면서 군대장관 아마사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친척 관계였지만 주도권과 정치적인 이해와 권력에는 죽일 수 있는 존재죠. 그러니까 요압이 꼭 압살롬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의 권력을 위해서 내 친척을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사를 죽인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시신을 몰래 옷으로 가리는 이야기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그 모습은 무엇을 떠오르게 만드냐 하면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남편 우리야가 전쟁에 나가 홀로 죽게 만들면서 이 모든 것을 잘 마무리 하려 했던 그 속임수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옛날 죄악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요압이 그렇게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였을 때도 다윗왕이 세운 군대 장관을 죽였을 때도 다윗왕이 그를 처단하지 못하는 겁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진압되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복귀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백성들을 품지 못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며 백성들은 분열하고 갈등으로 폭발했습니다. 후궁들을 제대로 치리하지 못하고 그들을 품지 못해서 그 가운데 원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요압은 다윗왕이 세운 군대장관 아마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윗왕에게 풀어야 될 짐으로 찾아오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란 진압 후 바로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품고 백성들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책임으로 엄중히 묻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오케이면 상황은 종료된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은 분명히 보시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윗왕의 어려움을 바라보며 반면교사로 삼아, 백성의 마음을 읽고 살피고 품는 영적 리더심을 가지고, 은혜로 모든 어려움을 치리하며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데 쓰임 받는 귀하고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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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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