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다윗 왕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만나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내가 가장 힘들 때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 바로 시므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피난길을 가는데 돌을 던지고 욕하고 그렇게 힘들게 했던 시므이가 다윗왕이 회복되어 돌아오니까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와서 살려달라고 다가오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내가 비보셋과 같은 사람으로,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 사람은 나를 도와주고 힘을 줄 것 같았는데 나와 함께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아 마음에 배신감과 섭섭함이 가득했던 이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므이와 사람들, 므비보셋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치리하는가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참 중요한 영적 성숙의 지표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인간은 항상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죄성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내가 힘이 떨어지고 약하게 되면 이렇게 썰물과 같이 떠나가고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임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실망을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대다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 달리 정말 소수였지만 어려움에 처한 다윗왕에게 끝까지 함께 하며 다윗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진짜 친구, 진짜 충신이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바르실래인데, 그는 다윗이 힘들고 어려워서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 갔을 때도 다윗을 떠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와 함께 했던 정말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르실래는 굉장히 돈이 많은 부자였기에 피난가는 다윗을 그 어려운데 돕는다는 것은 모든 재산을 날릴 수도 있고 심지어 목숨을 거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과 위험에 빠진 다윗왕을 끝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사람, 다윗왕의 마음을 정말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 바르실래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썰물과 같이 빠져나갔지만 이 바르실래는 끝까지 다윗 왕과 함께 했고, 그 긴박하고 어려운 피난 길에 여러 물질을 다 대면서 한결같은 충성심을 다윗왕에게 보인 것입니다. 다윗왕와 같이 내 주변에도 정말 이 사람이 진짜 내 사람이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이런 소수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르실래와 같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진짜는 언제 드러나냐 하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힘이 빠지고 내가 곤경에 빠졌을 때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왕은 압살롬이 일으킨 모든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가장 먼저 보상을 하고 보답하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자가 누구였겠습니까? 바로 바르실레 같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겠죠.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길에 만나게 되는 바르실래에게 다윗 왕은 정말 통큰 감사표현과 보상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르실래 같은 한결같은 사람들,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면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자신이 한 일에 티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두번 도와주고 나서는 자기의 공로를 앞세우고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두번 크게 도와주고 나서 다윗왕은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산 거야…저 어려운 피난 길에 나의 도움 없었으면 안 됐어….라고 자기의 공로를 드러내고 티를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티를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항상 좋은 일을 하고 뒤에 욕을 먹는 겁니다. 내가 드러내지 않고 티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저 사람이 이곳에서 열심히 헌신했고 저 사람 때문에 이곳이 든든하게 서 있다는 것 다 압니다. 그런데 그 공로를 스스로 인정받으려고 스스로 티 내기 시작하면 그 공로와 노력이 반감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티를 내게 해 줘야지 내 스스로 나의 공로와 한 일에 대해 드러내려고 하면 항상 문제와 어려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르실래의 특징은 다윗왕이 어려울 때 정말 귀하고 소중한 도움을 물심양면으로 부었음에로 불구하고 그 공로와 일에 대해 티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티내지 않는 바르실래는 당연히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바르실래의 특징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이런 선행과 공로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지금 바르실래에게 예루살렘으로 같이 가자고 초대합니다. 그럼 내가 너 평생 통 크게 보답하겠다고… 왕이 하는 보답이라는 것은 그의 인생과 가문이 다 탄탄대로가 펴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왕이 어찌하여 이 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그것을 바르실래는 거절합니다. 내가 나이가 많기도 하고 내가 그런 것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바르실래의 한결같은 마음은 어떤 대가가 보상을 바란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충성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왕 같은 다윗왕을 잘 섬겼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그렇게 티 내지 않는 영적 겸손함, 사람들에게 내가 한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어려울 때 자기를 떠나지 않은 충성됨과 동시에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이 다윗왕에게 너무나 놀라운 힘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정말 소수였지만 다윗왕에게 이런 바르실래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 인생에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에 이런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을 곁에 두고 함께 하는 것이 인생의 큰 복입니다. 정말 소수이지만 우리에게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나에게 한결같이 사랑하며 자리를 지켜주는 그 사람을 귀히 여기십시오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런 바르실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인 교훈으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정말 영적으로 깊은 인생이 되려면 정말 우리가 한 선행들과 공로들, 우리가 많은 일들을 내 스스로 티 내지 않는 겁니다. 계산적인 신앙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얄팍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이런 공로를 하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주셔야 되겠다고 우리가 계산하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가운데 그 놀라운 언약 관계가 흔들리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나를 건지시고 구하시며 천국 백성 만드셨다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바르실래와 같이 헌신과 사역에 티내지 않고, 보상을 계산하거나 바라지 않고, 그냥 순전하게 나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한결같이 주님 앞에 순종하고 충성하며, 그 충성과 헌신을 티 내지 않으며 일방적으로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나아갈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길이 펼쳐질 줄 믿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내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라는 그 일방적인 고백, 계산하지 않는 고백, 머리를 굴리지 않는 고백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역을 다 진압하고 왕으로서 귀환하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배신 당하며 그렇게 힘들게 큰 고생을 하며 광야 생활을 했지만 그 시간을 통하여 영적 민감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회복하여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피난길에서 다시 돌아와 왕으로서 귀환하게 될 때 다윗왕 앞에 세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다윗왕 앞에 찾아온 이 세 사람은 우리 인생이 어려웠다가 회복되게 되면 우리 인생에도 찾아오게 될 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윗왕이 이 세 사람들을 어떻게 치리하고 대하는가를 통하여 나의 인생에 찾아오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치리하고 대해야 될까를 우리가 영적 진리로 마음에 새겨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왕으로 귀환하는 다윗왕 앞에 등장하는 사람은 시므이와 베냐민 사람 천명입니다. 시므이는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하면 나의 인생이 가장 힘들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시므이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왕이 힘이 빠지고 약해져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게 될 때 가장 앞에서 다윗을 저주하던 자였습니다. 다윗을 저주하는 것을 넘어 그에게 욕하며 돌을 던지며 모욕적인 행동을 했던 자가 바로 시므이였습니다. 나에게 상처가 너무 아픈데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자, 바로 시므이 같은 자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내가 힘이 좀 있을 때는 지위와 권한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내가 힘이 조금만 빠지게 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썰물과 같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그냥 나가는게 아니라 시므이와 같이 나에게 욕하고 돌을 던지고 저주하며 떠나가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이 세상 살이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썰물과 같이 떠나가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좋은데 다윗왕이 힘을 다시 찾아 왕으로 복귀하게 되니까 시므이와 같은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돌아와 지금 다윗 왕 앞에 엎드리는 것이죠. 썰물같이 빠져나가며 돌 던지고 저주했던 시므이가 베냐민 사람 1000명과 함께 다시 돌아와서 살려 달라고 엎드리는 겁니다. 무슨 낯짝으로 돌아오냐고….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냐 우리가 상심할 수 있으나 그게 인간의 죄성을 가진, 그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내가 힘들 때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자가 내가 상황이 괜찮아지고 좋아지니까 다시 돌아와 친한 척하고 엎드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시므이 같이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을 때 나를 힘들게 한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거나 철저하게 복수해 주는 것이 내 감정에 흐르는 본능입니다. 다윗의 군대 장관 아비새가 조언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소금을 뿌린 이런 사람들은 살려두지 않고 당장 처단해야 하는게 당연하고도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놀랍게도 인간 같지도 않은 시므이를 보복하지 않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시므이와 함께 엎드린 베냐민 사람 천명을 다 품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죽이지 않고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고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렇게 시므이를 죽이지 않고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이라는 직책의 본질을 광야 피난길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전에도 다윗은 왕이었고 늘 왕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배신당해 광야로 쫓겨나서 피난길에서 왕권의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가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압살롬과 같이 반역하고 불순종과 교만이 가득한 존재였음을 직시하였고,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한 마음으로 품어주시고 거둬 주셔서 내가 이렇게 왕으로서 지금 주신 명을 감당할 수 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옛날에도 왕으로서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때는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 채 왕의 자리에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광야 피난길을 통과한 다윗왕은 이제 진정한 왕됨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 받아야 되는지를 깨달은 것이죠. 내가 하나님께 기름 부은 왕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선명하게 붙들고 나니까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했던 시므이 같은 자를 죽이지 않고 품고 용서하는 놀라운 왕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다윗왕이 왕으로 귀환할 때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므비보셋과 같은 사람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왕 생각에 당연히 1순위로 자기를 따라올 것 같이 생각했던 측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힘들고 어려우니까 피난길에 함께하지 않은 사람, 꼭 나를 배반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므비보셋입니다. 시므이는 처음부터 아예 대놓고 다윗왕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했고 돌 던지고 욕했던 사람이라면 므비모셋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따라오지 않을까…생각하고 기대했던 자였는데 따라오지 않은 것이죠. 요나단의 아들로서 그 왕의 식탁에서 늘 초대받았던 정말 아들과 같이 생각했던 므비보셋인데 그가 피난길에 같이 동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적잖은 실망감과 섭섭함, 배반당한 마음이 다윗왕에게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므비보셋은 내가 그토록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배신하고 등 돌리고 멀어진 거 같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적어도 나를 도와줄 줄 알았던 그런 사람들이 배신하고 함께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느끼는 상실감이 매우 큽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직면하고 그 사람들과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다윗왕 같이 그 사람에게 먼저 솔직하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 므비보셋이 다윗이 왕으로 귀환하는 여정 중에 만나게 되니까 다윗 왕이 빙 돌리지 않고 솔직히 물어봅니다…왜 나를 따라오지 않았느냐고…내가 피난길 갈 때 적어도 너는 나와 같이 갈 줄 알았는데 배신감 느끼게 왜 가지 않았느냐 물어보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왜 그때 나와 함께 하지 않았고 나의 편에 서지 않았냐고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물어보고 나니까 므비보셋에게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리가 불편한 장애로 피난길에 걸림돌과 짐이 될까봐 가지 못한 것이었는데, 그 종 시바가 모함을 해서 므비보셋과 다윗왕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해하게 만들도록 참소해서 다윗왕이 그걸 통하여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그런 나쁜 일을 그 종 시바가 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다윗 왕이 그렇게 피난 간 후에 므비보셋은 수염도 깎지 않았고 옷도 빨지 않으며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름대로 충성된 마음을 지키면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밭을 종 시바와 나누라고 했을 때 그거 다 종이 가져가도 상관없다고 대답할 정도로 므비보셋에게는 다윗왕이 안전히 돌아왔다는 것 그것으로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는 정말 순전한 신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해한 것은 오해한 것이구나…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래서 잘못 이해했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며, 마음이 상하지 않고 그 오해를 풀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힘을 회복했을 때 해야 되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힘들고 어렵게 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썰물과 같이 다 빠져나갑니다. 그냥 빠져나가는게 아니라 나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하면서 떠나가는 시므이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나를 떠나갔다가 내가 힘이 생기니까 철판 깔고 나에게 다가오는 혈압 올라가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당연히 나를 따라오고 나를 도와주고 내 편에 든든히 서질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섭섭하고 배반 당한 느낌이 드는 므비보셋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시므이가 다시 돌아온다면… 여러분들에게 므비보셋이 다시 돌아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들을 처리하시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대하시겠습니까? 뻔한 반응은 나에게 힘이 생겨 다시 돌아올 때 가만두지 않는 겁니다 복수하는 겁니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뻔한 반응이 아닌 놀라운 영적 반응으로 죽이지 않고 보복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품는 것, 이것이 이 험한 세상에서 성도됨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천국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하는가가 여러분들의 영적 수준을 판가름 합니다. 내 힘이 빠지고 어려울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썰물과 같이 떠나감을, 내가 또 힘이 생기고 돌아오게 되면 철새와 같이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이고 죄인된 자화상임을 잊지 않고 사람들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기 원합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경험되어 막힌 것들이 풀어지며 원수 맺어진 것이 녹아지며 오해도 풀어지는 이런 기적의 삶, 주님의 은혜 가운데 회복과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귀한 역사가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지도자던 이 세상의 지도자던 지도자의 요건 중에 하나가 바로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는 겁니다. 영어로는 emotional disengagement라고 하는데 쏠린 감정에서 빠져 나오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정에 오래 매몰되어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아니라고 보는게 일반적입니다. 예를 들면 의사가 자기 앞에서 환자가 죽어갈 때 그 죽어간 환자가 나 때문에 죽어갔다고 자책하면서 그 쏠린 감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의사의 일을 계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간 환자가 안타깝지만 자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환자가 있음을 알고 얼른 마음을 추스리고 그 다음 환자에게 갈 수 있어야 지도자가 되는데 그 감정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면 결국 그 자리에서 무너져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왕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기 감정에 매몰되어 빠져 나오지 못한 채 목숨 걸고 전쟁에 참여한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다윗왕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마음이 매몰되어 단장의 마음으로 슬퍼하며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야로 내몰리면서 다윗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압살롬과 같이 반역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등에 칼을 꽂은 죄인이었음을 돌아보았기에 다윗은 지금 압살롬의 죽음이 자신의 죄 때문에 내 아들이 죽은 것처럼 끌어안고 자책하며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칼을 들이댄 반역자였고 이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나쁜 사람이었지만 압살롬은 다윗에게는 여전히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지금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전쟁해 나가 싸워 이기고 돌아온 후에 그 왕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라는 것이죠. 자식이 먼저 죽은 아버지의 슬픔을 과소평가할 마음은 없지만 적어도 다윗 왕은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 준 백성들의 마음을 챙기고 돌봐야 할 지도자이자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개인적인 슬픔에서 빠져나와서 기적의 승리로 전쟁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고 돌아볼 영적인 책무가 그에게 있었는데 다윗이 너무 감정적으로 매몰 되어서 적군의 수장이자 반란자인 압살롬의 죽음만 애도하고 슬퍼하고 있는 겁니다. 그날 다윗의 군대가 경험한 승리는 기적의 승리이자 하나님께서 앞서 싸워 이겨주신 영적 승리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숫자로 봐서는 절대 다윗의 군대가 이길 수 없었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해 주셔서 하나님이 이기게 하셔서 압살롬과 그 군대를 모두 무찌른 놀라운 영적 승리였습니다. 그렇게 절대 열세의 전쟁에 다윗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싸운 군사들이 돌아올 때 당연히 축제의 분위기에 승전가를 부르는 기쁨이 가득해야 했으며, 왕으로부터 큰 칭찬을 들을 기대를 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왕이 기뻐하고 축하해주기는 커녕, 적군의 수장이자 반란자인 압살롬을 애도하고 슬퍼하고만 있으니까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듯 가라앉은 것입니다. 너무나 강한 적과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 기적과 같은 대승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영적 승리였는데 백성을 대표하는 왕은 지금 대성통곡하고 소리 높여 울고 있으니까 기뻐할 수도 없고 슬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목숨걸고 싸운 후 돌아온 군인들 사이에 어떤 마음이 드냐면 우리가 괜히 싸웠나 보다…목숨 걸고 싸웠는데, 동료 중에는 이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뭔가…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 왕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운 우리는 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승전가를 부르며 복귀한 군인들이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되는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자기가 공인이고 지도자라는 것을 망각한 채 자신의 감정에 몰입하여 큰 승리를 경험하고 돌아온 백성들과 군인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마음에 절망감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뭐냐면 큰 승리 이후에 돌아온 백성들의 마음을 다윗이 품어주지 못하니까, 승리를 승리로 기뻐하지 못하니까 9절부터 15절까지를 보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갈라진 것이 수습이 안되서 이곳 저곳에서 문제로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백성이 아버지 왕의 편과 아들 압살롬의 편으로 나와서 전쟁을 했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죽었고 전쟁은 끝이 났지만, 사분오열된 백성들의 마음은 큰 상처와 분열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어떻게든 품어서 나누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아야 되는데 지금 다윗 왕이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하고 자기 감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시한 폭탄같은 백성들이 다윗 왕을 왕국으로 모셔온데 있어서 의견이 계속 갈리며 이곳 저곳에서 뻥뻥 터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마음 속 감정을 돌아봐야 되지만 거기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내가 지도자로서 돌봐야 될 백성들이 있다라는 것을 망각한 채, 결정적 순간에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품지 못하여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군대 장관인 요압이 총대를 매고 다윗 왕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왕 앞에 총대를 매고 나아가 왕에게 정신 차리시라는 말을 직언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우리 모두가 죽고 반란군의 수장 압살롬이 살았으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다고…백성들의 마음을 가감 없이 왕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주셔서 성대한 축제를 벌여도 모자라는 판에 반역자인 압살롬을 위해서 왕이 이토록 슬퍼만 하는게 백성들의 마음을 멸시하고 나라를 뒤흔드는 일이라는 것을 왜 모르시냐며 탄원하는 겁니다.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압살롬의 죽음만 슬퍼하는 것이 우리 백성들과 군사들을 멸시하는 것이며, 얼마나 백성들의 마음을 상심하게 만드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이렇게 작심하고 직언하는 겁니다. 지금은 개인적인 슬픔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할 때임을 잊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왕으로서 지금 다윗이 해야 될 일은 목숨 걸고 싸운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품어주는 것임을… 마음을 깨우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다윗왕은 이 요압의 직언을 듣고 말을 듣고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자기 감정에서 빠져 나와 일어나 성문에 앉았습니다. 왕이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왕이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려고 앉았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이제 자기 개인적 슬픔을 거둬들이고 왕으로서의 사명을 다시 한번 깨달아 이 시간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품으려고 왕의 직에 돌아와 앉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수습되게 되는 것이에요 지도자의 자질 중에 하나가 내 개인적인 감정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는 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깨지고 아픈 세상을 사노라며 우리 인생에 어려움과 아픔, 눈물과 고통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 슬퍼서 단장의 아픔으로 통곡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일이 우리 가운데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도자라면, 내가 품고 돌보는 백성이 있다면 내 개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빠져 나오지 못하면,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기뻐하고 찬양해야 하는 그날의 이김이 백성들에게 슬픔이 되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내 삶이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이며 이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자임을 잊지 말고, 내 감정에 속히 빠져나와 주님께서 주신 사명 가운데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품으며 그 백성들을 세우는 일로 속히 복기하는 영적 회복 탄력성이 우리 가운데 회복되기 원합니다. 내 개인적인 슬픔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승리를 멸시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빠져나와야 되는 감정임을 잊지 않으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자로 선명하고 굵직하게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가 감정이란 함께 할 수 없는 감정이나 느낌이 동시에 내 마음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이 두 마음이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 같이 양립하면서 내 마음에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그 감정이 머물러 있을 때 그것을 양가 감정이라 그럽니다. 예를 들면 오늘 새벽기도 오는데 마음이 좋으면서도 싫거나, 혹은 기쁘면서도 슬픕니다. 설명되지 안호 이해되지 않는데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고 내 마음에 동시에 찾아올 때 양가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왕이 문 사이에 앉아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바로 이 양가 감정입니다. 그가 간절히 기다리는 소식은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지만 좋으면서도 나쁜 소식일 수도 있고 기쁘면서도 슬픈 소식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왕은 무슨 소식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로는 정말 질 수밖에 없는 열세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의 승리를 주시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압살롬은 살았으면 하는 소식을 기다렸을까? 반란군의 수장인 압살롬이 건강히 살아 돌아오면서 전쟁에 이기는 건 불가능 합니다.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다윗이 왕으로 복귀하고 살아날 수 있는 것이고, 그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그 군사들이 죽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을 향하여 칼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 열세인 상황에서 반드시 압살롬의 군대와 싸워 이겨야 되죠. 근데 동시에 그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아들 압살롬은 건강하고 멀쩡하고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마음을 간절히 품고 지금 설명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다윗은 문 사이에 앉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왕과 마찬가지로 좋으면서도 슬픈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이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양가 감정을 가지고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 모순과 같은 양가 감정을 가지고 앉아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그 다윗의 실존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이 설명되지 않는 아픔과 어려움에 점철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실존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 양립할 수 있는 없는 두 마음이 지금 다윗에게 있을 때 저 멀리서부터 두 전령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 멀리서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적어도 그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하러 오는 전령이 재를 뒤집어쓰고 막 저 멀리서 달려오면 내용이 뭔지 모르지만 아 저 소식은 지금 좋지 않은 소식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식을 가져 오는 사람들이 제사장의 아들이었으니 분명히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가 가져온 좋은 소식은 질 수밖에 없는 전쟁 겉으로 봐서는 패배가 분명했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이겨 주셔서 그 모든 원수와 대적하는 자들을 다 물리치고 승리해 주시게 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기적과 같은 소식을 듣고 왕이면 이렇게 대답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제군들이여 정말 수고했다…이렇게 얘기해야 되는데 전쟁 이긴 건 됐고 내 아들 젊은이 압살롬은 잘 있나 물어보는 겁니다. 어떻게 다윗왕은 압살롬을 향해서 이런 양가감정을 가지게 되었는가? 첫 번째는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사랑일 겁니다. 전쟁의 승패의 소식도 중요하지만 내 아들이 죽지 않고 잘 있느냐를 물어보는 바보 아버지가 누구냐면 바로 다윗 왕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은 아들인데 지금 그 아들과 전쟁을 하는 중인데 그 아들이 살았나 죽었나를 물어보는 바보 아버지가 바로 다윗왕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고 아버지 등의 칼을 꽂아도 결국 압살롬은 내 아들이라는 것은 지울 수가 없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광야로 쫓겨나가면서 다윗이 영적으로 민감해지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압살롬의 배신과 배반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앞에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다윗은 발견한 것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 앞에 압살롬이었음을, 이렇게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늘 하나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던 자가 바로 압살롬 같은 내 자신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돌아오기를 그렇게 바라시는 말도 안 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졌다는 것을 다윗이 신앙적으로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생을 얼마나 용서하시고 나 같은 인생을 얼마나 기다려 주셨으며 나 같은 인생을 얼마나 용납 하셨는지를 광야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 대해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윗의 생각대로 압살롬이 돌아오지는 못했습니다. 두 번째 전령이었던 구스 사람 이디오피아 종을 통하여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 다윗의 마음이 심히 아파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프다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한 우리 말이 바로 장이 끊어지는 아픔의 “단장”입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우리 마음이 창자의 끝인 쓸개에 있다라고 믿었기에 창자가 들어간 마음의 표현이 많았습니다. 장이 뒤틀리는 환장이라는 말도, 장이 끊어지는 단장도 다 마음의 아픔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압살롬의 소식을 듣고 다윗의 마음이 바로 단장의 마음으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그 아들로 인하여 그 소식은 슬픈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날 향하여 등에 칼을 꽂고 배반하고 반역한 그 반역자 압살롬을 여전히 내 아들로 부르며 단장의 아픔으로 통곡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았겠다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헤아릴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다윗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이 단장이 아픔으로 통곡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장의 아픔으로 통곡하신 것 뿐 아니라, 실제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내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될 그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며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게 나를 살려주시고 구원해주시고, 내 아버지는 평화시라는 그 진정한 압살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며, 모든 원수 맺어진 것이 풀어지는 진정한 평화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의 안에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배신하고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죄인이었는가… 그런 나를 여전히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내가 발견하게 될 때 은혜로 하루를 시작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 압살롬과 같은 인생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가능성이 없고 나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충돌하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압살롬과 같은 인생이었음을 발견하십시오. 그런 소망 없는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위해 그 죽을 자리에서 대신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돌아와야 될 때가 돌아오지 않고 구원받아야 되는데 구원을 거절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단장의 아픔으로 아파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에 적셔져 사명자소 선명히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비극적으로 죽은 아들 압살롬의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함께 갖도록 하겠습니다 압살롬의 인생 큰 그림을 통해 우리 인생이 어떤 뒷모습을 남겨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압살롬이라는 이름은 압살롬과 샬롬과 거의 비슷한 의미로 내 아버지는 평화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아들 압살롬을 통하여 하나님의 평화와 아버지가 주시는 평화가 풍성히 누려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그의 이름값을 전혀 하지 못하는 평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충돌과 반역, 불순종과 교만의 인생으로 점철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평화를 등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기억합니다. 그가 왕권을 갖기 위해 형이었던 암논을 자기 동생을 범했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고요. 아버지 다윗 왕의 등에 칼을 꼽아 반란하고 대역죄를 졌습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후궁들이 성에 남아 있었는데 백주 대낮에 그 아버지의 후궁들을 억지로 범하는 끔찍한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평화의 인생과는 전혀 다른 반역과 대역과 그리고 불순종의 인생의 점철이었습니다. 그렇게 압살롬은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은 자리를 스스로 올라가 왕이 되었고 그 자리에 올라가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도 않는 왕의 자리에 올라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런 비슷한 인생이 있었는데 바로 사울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간 사울 왕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기념비를 세우며 무너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름의 의미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인생을 살았던 압살롬의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채널을 통하여 압살롬에게 돌아올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돌아올 수 있는 여러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스스로 그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여러 번 거절하고 차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비극적인 인생은 어떻게 결말이 납니까? 전쟁에 가서 크게 패배한 후 자기 머리카락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비참하게 살해되며 그의 인생이 끝나게 됩니다. 그 머리카락이 상수리 나무에 걸렸다는 것을 통하여 사람에게 잡힌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잡힌 인생이 돼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보면 압살롬의 시신은 구덩이에 던져지고 큰 돌 무더기를 쌓아서 끝났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시신을 돌 무더기에 쌓았다는 것은 불명예 인생, 부끄러운 인생으로 죽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인생에게 이 돌무더기가 항상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여리고성 승리 이후에 죽음을 당한 아간이라는 사람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고 나서 그 원인이 바로 이 반역자 아간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간이 죽인 후에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더 나아가 압살롬의 죽음을 사람들은 기뻐하며 좋아해서 전할 복된 소식으로 여겼습니다. 압살롬이 비참하게 죽었을 때, 정말 잘 죽었다 저 인간 정말 잘 없어졌다…라는 평가, 사람들에게 기쁨 되는 죽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압살롬의 죽음을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갚아 주신 소식이라 믿으며, 그 좋은 소식을 빨리 전하기를 막 원하는 사람들이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죽음 가운데 아쉬워하고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야지, 저 사람 정말 잘 죽었다 저 사람 죽어서 속이 시원하다, 정말 저 사람 죽은게 좋은 소식이다..이런 평가를 듣는게 비참한 죽음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압살롬의 죽음은 불명예의 죽음,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은 돌무더기 무덤으로 끝이 난 겁니다. 이 압살롬의 비참한 인생 결말의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를 마음에 좀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첫번째, 이 세상에 압살롬과 같이 악인이 판치는 그런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낙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잠시 악인들이 주도하는 것 같고, 좌지우지 하는 것 같지면 결국 끝에 가서는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를 갚아 주시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악인을 치시고 멸하신다는 걸 우리가 분명히 믿고 확신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악인에게 상처받지 않으며 악인에게 눌려 살지 안혹,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악인이 세상을 다 지배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고 심판의 날이 곧 속히 오리라는 것을 믿으며, 악인의 끝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게 된다라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 이름값 하지 못하고 끝난 압살롬의 비극적인 돌무더기 무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비참하게 죽은 그 비참한 인생의 끝을 바라보십시오. 악인의 끝은 정확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악인과 단절되어 주님이 허락하신 평화의 길,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을 계속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두 번째 우리가 새겨야 될 진리는 우리가 예전에 바로 압살롬과 같은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내 인생이 바로 이 압살롬과 같이 이름값 하지 못하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외부로부터 누군가 건져주지 아니하면 누군가 나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내 인생의 끝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고 돌무더기 가운데 저주와 파멸로 끝나는 인생이었음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같이 허락하지 아니하신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 자꾸 내가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을 세우는 대신, 내 나라와 내 이름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오늘도 기념비를 세우며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나의 인생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늘 거절하는 인생이 바로 나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멸망과 저주 가운데 끝날 수밖에 없는 나의 인생을 건져주신 주님의 손이 있기에 내가 압살롬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새기며 발견하기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건지신 그 예수님의 사랑이 이 시간 나에게 현재형으로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 바로 내 영혼이 평안한 비결이며 내 영혼이 주님의 십자가에 매여 오늘도 든든하게 살아가는 비결일 줄 믿습니다.그런 나를 건져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내가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에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경험할 때 우리는 말로 할 수 없는 절망감과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 다윗왕은 피하고 싶고 경험하고 싶지 않는 전쟁 앞에 서 있습니다. 아버지의 군대가 아들의 군대와 씨워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라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일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모든 것을 걸고 혈안이 되어 쫓아오고 있고, 이 전쟁에서 지면 자신이 죽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자기를 따르는 모든 군대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결국 이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들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 전쟁 앞에 서 있지만 녹녹하지 않은 현실입니다. 지금 압살롬에게 승리가 거의 약속된 것 처럼 보였습니다. 압살롬의 군대가 굉장히 많고 무혈입성으로 모든 것을 장악했고, 다윗은 도망가는 신세이기에 누가 봐도 이것은 압살롬의 군대가 이길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면 결국 아들 압살롬의 군대는 결코 다윗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은 이 전쟁은 군사력이 얼마나 많고 적냐에 따라, 힘이 얼마나 크냐 작냐에 따라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이기는 전쟁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압살롬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 이길 거라고 자부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이 후세의 의견에 갑자기 마음이 쏠려 그 전략으로 전쟁에 임한 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라는 것을 압살롬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군사력을 가지고 너무나 쉽게 이길 거라고 착각했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압살롬의 인생이 파멸로 끝나게 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아들의 군대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여야 되는 다윗왕, 그는 경험하기 싫었던 그 절망감을 뒤로한 채 영적으로 민감하게 전쟁을 준비함과 동시에,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도 동시에 드러내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군대와 치루는 전쟁 가운데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깨어 바른 방향으로 군대와 백성들을 이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전쟁은 눈에 보이는 현실로 봤을 때 이기기 어려운 굉장히 불리한 싸움 이었습니다. 그 불리한 전쟁의 한 복판에서 다윗은 그 군대를 세 부류로 나누며, 전략을 다 짜고 전술을 지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말 중요한 말을 하는데 내가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죽을 수 있는 전쟁이고 매우 불리한 전쟁이었지만 왕으로서 최 전선에 나가 반드시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민감함과 결연한 의지에는 다윗의 회개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인 밧세바를 범하는 간음죄를 언제 범했냐하면 전쟁을 나가야 되는 왕이 전쟁 나가지 않고 혼자 편안하게 낮잠 자다가 거기서 영적으로 나태해져서 자빠지고 넘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회복된 민감해진 다윗왕은 아들의 군대와 싸우는 이 전쟁에서 내가 죽을 수 있는 불리한 전쟁이지만,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백성과 함께 그 전쟁을 나가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들과 백성들은 다윗왕을 막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압살롬의 군대가 지금 백성들을 죽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다윗왕을 죽이러 오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왕을 죽이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왕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만류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은 정말 나가서 싸우고 싶었지만 백성들의 만류를 받아들여서 싸우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후방에 머물게 됩니다. 동시에 다윗은 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영적 전쟁에서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들에 대한 사랑에 이해되지 않는 부탁, 전쟁에 나가는 군대 장관들에게 젊은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 부탁합니다. 불리한 전쟁, 전력으로 열세인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나가는 군대 장관들에게 무조건 싸워 이기기를 응원한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지금 적군의 수장이자 반란자인 압살롬을 선대하라 부탁하는 겁니다. 전쟁을 나아가는 신하들에게 왕으로서 말도 안되는 부탁을 하는 겁니다. 압살롬은 지금 반역자고 자기를 노리는 역적입니다. 이 압살롬 때문에 온 백성이 이렇게 생 고생을 하고 있고 지금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망나니 같은 아들이여도 끝까지 다윗에게는 아들었기에, 그 반역자이자 역적 아들을 품고 말도 안되는 부탁을 하는 겁니다. 사실 다윗의 압살롬을 끝까지 용서하고 보호하기 원하는 이 아버지의 마음이 결국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되지 못하는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모습을 그림자와 같이 바라보게 만듭니다.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아셨지만 그들을 향한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 우리는 죄값을 받아 죽어야 마땅하고 정말 소망 없어 보이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우리를 향하여 끝까지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기다리시고, 우리를 위해 먼저 죄의 대한 모든 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르신 주님의 마음은 이해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 신비일 뿐입니다. 다윗의 군대는 패할 줄 알고 다윗왕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강력하게 만류했지만, 압살롬과 압살롬의 군대는 당연히 본인들이 이길 줄 알았습니다. 압살롬은 전쟁의 최전선에서 나아가서 승리를 기대하며 진두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는가 하면 2만 명 이상이 전사하는 철저한 패배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군사력을 봤을 때나 숫자를 봤을 때는 당연히 압살롬의 군대가 이길 것 같았는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까 다윗의 부대에 처절하게 패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훨씬 많았다는 말씀을 통해 결국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자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인간의 칼에 죽은 자보다 다른 이유로 죽은 자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의 군대가 이기게 하신 겁니다. 이 영적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의 군대에게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전쟁에서 패배한 압살롬은 멘탈 붕괴, 멘붕이 왔습니다 그래서 막 정신없이 도망가게 되는데 도망가다가 정말 어의 없이 압살롬의 인생이 파멸로 끝이 나게 됩니다. 도망가다가 사람들의 손에 잡힌게 아니라 상수리 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노련한 장수인 압살롬을 잡은 것은 군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상수리 나무에 잡으신 것입니다.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의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 요압의 부하들은 그 압살롬을 죽이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어명을 모든 백성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군대 장관인 요압은 지체하지 않고 왕의 명령을 거스르면서도 압살롬의 심장을 찔러 죽이게 됩니다. 역적이자 반역자인 압살롬을 죽임으로 그 모든 전쟁을 끝내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거역한 압살롬의 마지막이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압살롬의 머리카락은 매우 길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증언하는데, 그의 긴 머리카락은 그의 매력과 능력, 더 나아가 교만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능력과 힘, 교만의 상징인 그의 머리가 상수리 나무에 딱 걸리게 되면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게 되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이 공존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싸움을 싸워야 되는 안타까움과 절망 속에서도 이기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아들의 군대와 전쟁해야 하는 인간의 실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만 살아나는 전쟁인데 동시에 아들은 죽지 않았으면 하는 그 두 마음이 있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두 마음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동시에 그렇게 상수리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비참하게 죽은 압살롬을 바라보며 악인의 끝이 어떻게 되는가를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인을 가만히 두시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믿으며 오늘도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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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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