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을 하시면서 미스바 성회, 미스바 집회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부흥회와 회개를 위한 특별한 집회에 많이 붙이는 이름이 바로 "미스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케 하며 영적으로 크게 각성하게 만드는 모임이 바로 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미스바에서 모이게 된 집회 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으로 험한 수치를 당해 왔습니다. 그 험한 수치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게 대패 했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사건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는 이 현상들을 넘어 가장 심각한 수치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간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간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수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는데 하나님만바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가며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간 상태, 그 자체가 바로 수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를 부적과 같이 이용 대상으로 바라보다 큰 코 다치고 그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하셔서 그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취급하며 번제를 자기 마음대로 드려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러고도 20년을 계속 미적 거리고 있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수치였습니다.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난 후에 사무엘이 드디어 일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촉구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과 우상을 제하여 버리고,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항하며 주님만을 예배하고 섬길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껍데기로 드리는 예배와 제사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다른 것과 겸하여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리면서도,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지 않으면서도 문제 의식이 없었습니다. 분산된 마음들로 인해, 겸하여 섬기려는 태도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영적 대각성의 시작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돌아보는 겁니다. 내가 겉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교회를 들락날락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는 과연 전심으로 주님 앞에 마음이 향해 있는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 만을 예배하는 자인지를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회개와 결단으로 자기 주변의 우상들을 다 제하여 버리며 여호와만을 섬긴다는 그 모습이 나가니까 사무엘이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 놓고 대각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은혜로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먼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결단과 우상을 제하여 버리는 결단을 선행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은 사무엘의 도전에 반응하며 온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 하였습니다. 먼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다는 것은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쏟아 붇는다는 고백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금식 이라는 것은 내가 그동안 이 세상 을 통하여 먹을 것을 얻었던 모든 것들을 멈추고 나의 갈망이 오직 주님께만 나아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시간이 하루에도 몇 시간 되지 않습니까? 모든 식사를 멈춤으로서 그 시간동안 다 기도 한다는 거예요.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았던 내 삶을 금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 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금식하며 주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두 모여 그렇게 금식하면서 간절하게 마음을 쏟으며 백성 차원에서 모든 백성이 기도한 건 내 소원을 들어 주시 옵소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자녀 잘 되게 해 주시 옵소서…기도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범죄했음을 마음을 쏟아 놓으며 회개하는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마음을 쏟으며 금식하며 주님 우리가 주님 앞에 범죄하였다고 진정한 마음으로 마음을 토설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죠. 그 회개와 영적 대각성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린지라…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으로 온전히 영적 지도자로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무엘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전히 다스리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 앞에 나와 전심으로 회개하며 돌아서며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며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는 이 회개와 영적 대각성을 통하여 그 놀라운 하나님의 다스림에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길이었고, 그것이 진정한 영적 대각성이자, 하나님이 새롭게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새 시대를 여는 문이었다는 겁니다.이게 바로 그들에게 다가온 새 시대의 부흥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적 대각성과 회개의 집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며, 영적 대각성을 위해 주님 앞에 금식하며 마음을 쏟으며 나를 치며 내가 주님 앞에 범죄했다고 통회하는 기도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미스바에서 주신 은혜와 부흥을 체험하기를 사모하기에 회개 기도와 영적 대각성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여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금식하며 주님 앞에 이 만큼 철저한 죄인입니다…간절히 기도하며 용서를 구하며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오는 회개와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야 합니다.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며 오직 하나님에게로 마음을 향하며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회개와 영적 대각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겠다고 결단하며 주님께만 마음이 향하는 결단을 통해, 이렇게 회개로 주님 앞에 나오는 영적 대각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고 새로운 movement를 여시고, 새로운 다스림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역사 하시며 새롭게 다스리시는 그 영적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이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왔는데, 흠없는 수소로 번제를 드리는 대신 편의주의에 빠져 가까이에 있는 흠이 있는 암소를 드리며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보지도 만지지도 허락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법궤를 구경거리가 난 듯이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자 벧세메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여호와의 궤를 감당할 수 없어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오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 놓았습니다. 사람들 마음의 중심, 예배와 제사의 중심, 나라의 중심에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법궤가 여전히 제자로 가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산에 사는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듯 변방에 놓여 있는 안타까움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법궤가 무려 20년을 이 산속의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게 됩니다. 2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있었던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압제와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며 20년을 보냈는데 그들의 영적 상황이 어땠냐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리는 겉모습은 있었지만, 하나님만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는 그런 혼합주의 신앙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블레셋으로 부터 침략의 위협, 학대와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고 제사 드리지 않으며 하나님을 그냥 겸하여 섬기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며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2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로 대표되는 그 과거의 영적 암흑기를 단절하시고 새로운 지도자인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그 전환기를 여시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새로운 영적 리더인 사무엘을 통하여 다음 세대가 일어나며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백성들을 새 시대로 이끌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가는데 육적인 생각과 잔꾀를 부리게 되며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흠이 있는 암소를 제물로 드리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그런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20년만에 깨우는 겁니다.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촉구하며, 너희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이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결단은 너희가 지금 겸하여 섬기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대신,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겸하여 섬기는 삶이 만연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이 세상에 방식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냐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일은 교회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하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이 세상에 이방 신들과 세상이 주는 것들에서 우리가 철저히 순응하면서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경고하는 겁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 이방 신들과 세상이 주는 것들을 제하여 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비결 첫 번째는 하나님과 함께 겸하여 섬기는 모든 것들을 제하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돈 신이 있고 명예 신이 있고 권력의 신이 있고 수많은 그런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과 겸하려 섬기고 같이 붙들고 가려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우리 가정과 교회의 삶 속에서 풍성히 역사 하지 못하시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 가려는 것,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려는 것, 하나님을 뒷전으로 밀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잡초와 같이 올라오는 이 이방 신들과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수많은 것들을 제하여 버리는 분명하고도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결단은 마음이 주님에게만 향하고 주님만을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 항상 향하게 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하나님 백성다움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말하지만, 우리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이 향하며 세상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면서 예배하게 되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다루고 경시 여기는 자들을 심판 하신 이유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자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는 대신, 다른 곳에 마음이 쏠려 있으면서 하나님도 겸하여 예배하려는 혼합주의였으며, 그들의 마음은 예배 가운데 온전히 주님께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며 다른 것들을 향하여 나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는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만 향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향할 때,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가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고 일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선명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고 청산하며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언자와 같이 선언하는 겁니다. 전심으로 너희가 하나님께 돌아오려 거든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모든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여 주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라... 감사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무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제하고 거기서 고개를 돌리며 겸하여 섬기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기 시작했고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기를 결단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 원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영적으로 준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따르며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시며 새로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려는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고, 내 마음이 온전히 주님만을 향하며 주님만을 예배하며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빼앗겼던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 했겠습니까? 벳세메스 사람들이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것으로 그 감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유를 하고 있는 어미 소 두 마리가 끌고 가는 하나님의 법궤, 울면서 본인들이 원하는 길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이스라엘 지경에 하나님의 법궤를 도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상상해보면 지금 분위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감격과 축제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지경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왔으니 온 백성이 축제를 벌이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 지경으로 돌아오는 사건을 바라보며 해피엔딩이 될 것 같은데 오늘 말씀은 그 축제 현장에 거의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바라봤던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법궤를 보았다는 것 때문에 5만 70인 을 죽이신 것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70명을 죽이셨다 되어 있고, 어떤 사본에는 50070명을 죽이셨다고 되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그 축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5만명 정도이고 그 중에 70명을 치셨다고 해석합니다.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열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찬물을 확 끼얹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와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그 현장이 하나님이 치시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그 축제 현장에서 이렇게 찬물을 끼얹으셨는가? 그렇게 어미소들 에게까지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주도하심으로 그 법궤를 이스라엘 지경으로 오게 하셨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시면서까지 경고하신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축제의 현장에 찬물을 끼얹는 두 가지 이유는 모두 본질적인 결론을 가져오는데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그들의 제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에 돌아왔으니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당연한 일 이자 좋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기쁘고 좋고 감격해도,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기준에 따라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제사 규정을 기억하실텐데, 번제를 드릴 때나 하나님께 소를 드릴 때는 반드시 흠이 없는 수컷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흠이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라고 분명히 명령하셨고 기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와서 하나님께 지금 번제를 드리려면 어떻게 드려야 됩니까? 흠 없는 수소로 번제를 드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번제를 드리는가 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온 소를 잡아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 소는 아직 수유를 하고 있던 어미 소, 즉 암소였습니다. 또한 법궤를 메고 오는 동안 그 무거운 것을 끌고 오는데 흠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습니다. 소들이 당연히 몸에 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흠이 있는 암소를 번제로 드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규정이나 하나님의 명령하신 그 기준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거죠. 수컷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흠 없는 소를 드리라는 하나님 명령도 그냥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그냥 때우듯이 드린 겁니다. 두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법궤를 마음대로 열어본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막 열어서 볼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 안을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겉모습도 보면 안되고요. 언약궤를 만지면 다 죽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오니까 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사람들이 막 와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궤 앞에 엎드리고 회개하는 대신 뭐 구경거리가 난 듯이 사람들이 모여 들어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오만 명이나 모인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실제로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70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영적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에게 엎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마치 부적과 같이 여기면서 그들은 참패를 당했고 그들은 그렇게 비참한 결과를 직면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그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정신을 못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들 마음대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계를 법궤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과 명령을 무시하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이 악한 행동을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기고만장한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인 하나님의 손이 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하고 독종으로 그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헤매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인 이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마음대로 대하는 벧세메스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과 제사의 기준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렇게 70 명을 심판하셨으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바로 정신 차렸어야 합니다. 아… 우리가 뭐 크게 잘못했구나….이거 하나님께 회개해야 되는 시간이구나…엎드렸어야 합니다. 거기 레위인들이 분명히 있었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지금 흠없는 수소로 번제를 드려야 되는데 흠이 있는 암소로 드리면서 하나님 멸시한 것을 모르느냐…경고했어야 합니다. 절대 보지 말아야 될 하나님의 법궤를 보아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우리가 회개해야 된다 이렇게 나왔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 자리에 레위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 규정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거기 암소가 있으니까 그 암소 잡아서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면 되지…라는 편의주의로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반응은 심판 가운데 울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회개나 반성은 전혀 없이 이럴 거면 하나님 누가 하나님 앞에서 서겠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벧세메스 사람들과 같이 때우듯이 드리는 예배, 편의주의로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는 예배와 제사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기 원합니다. 예배와 제사 드리는 것이면 충분하지...그렇게 하나하나 다 기준에 맞춰서 하냐고 결과 지상 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정과 기준은 무시한 채 그냥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신 것과 마찬가지로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셨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버려야 될 사고방식이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제사를 드린 게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의 편리한 대로 드리게 됐다는 것, 결국 그런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함부로 여기는 것이자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지키는 자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겉으로는 예배 드리고 제사 드린다고 그러지만 하나님의 뜻과 기준과 명령을 함부로 여기며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라며 싫어하십니다. 흠 없는 수소 대신에 그냥 가까이에 있는 흠이 있는 암소 아무거나 드려도 된다고 편리한 대로 드리며 나아오는 제사를 하나님이 싫어하심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대강 때우듯 드리는 태도와 편의주의를 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나서 기고만장하여 착각했습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을 싸워 이긴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런 블레셋을 향하며 착각을 깨 주시며 여호와의 법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스스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의 목과 손목을 자르시고, 블레셋의 온 지경에 독종의 심판으로 치셨습니다. 그러면 빨리 정신 차리고 아 우리가 잘못했구나…인정하고 항복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면 고생을 덜 하는데, 어제 말씀을 통해 배웠듯이 블레셋은 7개월을 버티었습니다.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하늘을 부르짖음이 올라가고 있음에도 그들은 7개월을 버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졌다고 승복하기 싫었으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항복합니다…이 사실을 인정하고 끝까지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버티고 고집 부리다가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결국 7개월 만에 빼앗아온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보내야 된다는 것을 결정하며 두 손 들고 항복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옮을 끝까지 증명하려 하고 고집 부리다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은 두 손 들고 돌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배우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를 깊게 묵상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7개월을 버티다 여호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온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돌려보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항복 선언을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 보내면서도 끝까지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심판의 결과로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법궤를 돌려보내는데 이걸 가지고 끝까지 테스트를 해보는 겁니다…정말 우리가 7개월 동안 고생한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심판의 손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은 우연히 생긴 일이었는지…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독종의 심판으로 그렇게 고생했지만 진짜 이것이 하나님에게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겁니다. 그 시험의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법궤를 나르게 될 어미 소들의 반응과 행동을 통해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젖을 먹이며 수유를 하고 있는 어미 소 두 마리, 자신의 새끼들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송아지들이니 동물이어도 얼마나 자신에 새끼들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까? 그런데 젖도 안뗀 새끼들에게서 이 어미 소 둘을 떼어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게 하는 겁니다. 그 어미 소 두 마리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뒤돌아보지 않고 길을 벗어나 새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면 그게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심판하신 증거라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거의 답을 정해 놓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본성을 이기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엄마로서 아직 수유를 하고 있는데 자기 자식과 떨어져 있고 싶은 동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자식에게 돌아가고 싶고 새끼 젖 먹이고 싶은 게 본성이지요. 이 블레셋 사람들의 시헌 문제는 마치 뭐랑 똑같냐 하면요…아기가 엄마가 한편에 처음보는 사람이 맞은 편에 서 있는데, 아기가 엄마에게 가면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고, 아기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가면 하나님이 역사하신 심판이라 믿겠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아닌 우연히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악한 마음입니다. 무슨 마음이 다 드러나는 겁니까?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그들의 고집과 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지금 그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 보내면서까지 그들은 끝까지 버티고 고집 부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생했음을 부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악한 의도로 하는 테스트와 시험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다. 그 놀라운 일이란 수유를 하던 어미 소들에게 그들의 본성 넘어서도록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젖을 여전히 먹이는 어미 소 두 마리가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면 당연히 가지 않고 멈추어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아갈 길로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당연한 본능이지요.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이 어미 소 두 마리가 바로 행하여 흔들림이 없이 그냥 쭉 직진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 새끼들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바로 나아갔습니다.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어미 소들이 “울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갔다는 것입니다. 어미 소들이 왜 울었겠습니까? 이게 자기 본성을 거스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본성으로는 당연히 자식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고 가야 하는데 갈 수 없으니까 우는 겁니다. 이 부분에 잘못된 해석이 뭐냐면 어미 소들이 하나님께 헌신 되었기 때문에 자기 본성을 넘어서서 그렇게 바른 길을 나아갔다….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어미 소들과 같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 어미 소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육신의 본성으로, 어미 됨의 본성으로는 당연히 자식 새끼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겁니다. 근데 왜 그들이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직진하여 나아갔습니까? 하나님이 막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미로서 본능을 넘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가도록 하나님이 역사 하시고 이끄시는 겁니다. 심지어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막고 역사 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의 악한 의도로 하는 이 시험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사건이 돼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늘 순종하고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지만 이렇게 블레셋의 백성들과 버티기와 고집을 부릴 때가 많고, 하나님에게 항복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계속 테스트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악한 본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시기 위해 사람들을 들어 쓰시기도 하지만 이렇게 미물인 동물들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성으로 만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이끄심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본성을 거스르고 내가 원하는 것을 거스르며 사는 삶이 때로는 우리에게 부대끼며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 나아가는 그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울면서도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으며 주님 앞에 따라가는 그 소명의 길을 오늘도 나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께서 역사 하시고 주관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그들의 신인 다곤의 목과 손목이 잘려 나가며 하나님의 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과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말할 수 없는 독종 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일곱 달이나 그 땅에 있게 했습니다. a 라는 도시에서 b 도시로, b 도시에서 c 도시로 옮겨가면서 모든 도시들을 쑥대밭을 만들고, 이건 누가봐도 여호와의 손이 치시는 재앙이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일곱 달을 꿈쩍 않고 버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과 싸워 완전히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이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끝까지 믿고 않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블레셋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블레셋은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신을 자신들이 이겼다고 하는 그 착각을 붙들고 끝까지 선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일곱 달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버틴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패배했습니다…하나님께 항복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렇기 버티는 일곱 달 동안 수 많은 백성들은 독종에 걸려 죽어 나가며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고집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패배하고 항복합니다…그러면 일이 쉽게 풀리는 데 끝까지 우리는 내 뜻이 맞았습니다…나의 길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라는 것을 하나님에게 증명하려고 버티고 고집을 부리는 만큼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쓸데 없는 고집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모시게 되면 그 밑에 백성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죽어 나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빨리 하나님 앞에 항복 선언을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손이 치시는 거구나… 하나님의 손이 지금 나에게 경고를 주시는 거구나… 빨리 깨닫고 그 발 앞에 엎드려 항복 선언하는 겁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버티고 고집을 부리고 싶어 끝까지 항복하고 엎드려 굴복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끝까지 대항하며 자신의 옮음을 증명하려고 버티다 이렇게 생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집 부린다고 그게 됩니까? 그렇게 고집스럽게 버티고 그렇게 수 많은 것을 통해 미루고 밀어도 결국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거역하고 나아가겠습니까? 블레셋은 일곱 달을 버티다가 고생할 거 다 하고 나서야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버티다가는 우리가 다 죽겠다는 것을 알고 두 손 들고 항복하며 정말 이스라엘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능력을 고백하며 결국 법궤를 돌려 보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아 이거 안 되는구나 더 이상은 안 되는구나…하고 그들이 사람들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착각했을 때는 그냥 여호와의 궤를 아무 생각없이 뺏어서 가져왔는데 하나님의 법궤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알게 되니까 지금 보내야 되는 것은 결정 됐는데 어떻게 보내는지를 몰라 벌벌 떨며 점성가들까지 붙러 하나부터 끝까지 물어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면 안 되고 속건제를 드려야 하고, 형상을 만들어 여호와께 영화를 돌려야 한다는 등 이것저것 조언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만만히 봤다가 큰 코 다친 블레셋의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물음에 자세가 있어야 했었고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런 물음의 자세가 있었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위기와 심판 가운데 그렇게 하나하나를 물어보는 그들의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둔감함을 대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 축복과 은혜의 도구인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도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갈 길에 인도함을 받지 않은 이스라엘의 영적 둔감함을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속건 제물을 드려야 되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고 바치며 뭔가 배상을 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려고 하는 이 모든 이유는 뭐냐면 그렇게 하면 혹시 하나님의 그 위대하시고 놀라운 손을 너희와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조금 약하게 치지 않을까…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적들이며 이방인들인 블레셋은 큰 어려움과 심판을 당한 후 적어도 하나님을 존중하고 두려워할 줄 알고 그 하나님의 손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대하고 큰 길을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손을 들어 하나님께서 블레셋 땅을 치셔서 내린 심판은 예전에 애굽 사람들과 바로 왕을 치셨던 여호와의 손을 떠올리게 합니다. 언제까지 그 여호와의 손의 강하게 치심이 계속되는가 하면 완악한 마음과 강팍한 마음이 무너지기 전까지…계속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애굽 사람과 바로 왕의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해서 하나님이 심판을 계속 내리시는데도 버티다가 점점 강도가 세지는 그 열가지 재앙을 다 맞고 나서야 두 손 들고 항복하듯이, 블레셋 사람들이 그렇게 버티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강해지는 것을 모르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치시고 심판하심은 여호와의 놀라우심을 드러내며 마음의 완악함과 강팍함을 치시는 징계이자 심판임을 왜 모르고 버티냐는 것입니다. 버티면 버틸 수록, 고집을 부리면 부릴 수록 하나님의 손이 치시는 심판은 점점 강해지고 항복하고 두손 들 때 까지 계속 되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고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강팍해지고 완악해져서 쓸데 없는 고집을 부리고 버티는 사람들을 결국 항복하실 때까지 계속 치십니다. 그것이 끝나는 제일 빠른 방법은 내가 빨리 항복하고 두손들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일곱달 동안 버티며 고집을 부린 블레셋 사람들의 어리석음으로 그 고생하지 말고, 완악하고 강팍한 마음으로 버티다 10가지 재앙을 다 맞고 나서야 두 손 들었던 바로의 어리석음으로 고생하지 말고, 지금 주님 앞에 돌아서시고 주님 앞에 항복하십시오. 이 시간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 여전히 나의 길이 맞다고 하는 그 고집스러운 버팀을 주님은 결국 꺾으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면 그 강팍하고 완악한 마음이 무너지기 전까진 하나님의 손이 치시는 심판이 떠나지 않는다는 이 경고의 말씀을 잊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돌아서서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행복 하십시오. 주님이 언제나 옳으시고 내가 틀렸음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엎드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법궤로 말미암아 블레셋 땅에 임한 심판과 재앙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고 착각하며 기고만장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승리를 기념하며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 가져와 다곤 신전 옆에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곤 우상이 두 번이나 엎드러져 쓰러졌고, 두번째는 두 손목과 목이 잘려 나갔습니다. 신전에서 다곤을 향한 심판을 넘어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지역의 사람들을 재앙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백성,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하는 그 블레셋 사람들에게 심판 이라는 도구를 사용 하시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스스로 드러내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의 한 지방인 아스돗에 임해, 독종이 온 지역에 퍼졌습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심판과 재앙이 임하게 하는 “여호와의 손”입니다. 여호와의 손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나오는 원천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법궤가 다곤의 두 손목을 잘라내며 그 힘을 다 끊어 버린 것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강하게 역사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시고 독종의 재앙을 내리게 하십니다.
그 독종의 재앙과 심판을 직면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입에서 “그 손이 우리를 오늘 치신다”는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어쩌다가 내린 독종이 아니라,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치시는 심판 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한 거죠. 이것은 초 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치시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이만큼 무섭고 이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지금 이방 백성이니 블레셋 백성들의 입을 통해 지금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아스돗에서 그렇게 독종으로 지역이 쑥대밭이 된 후, 하나님의 법궤를 또 다른 도시인 가드로 옮겨가기를 결정합니다. 가드로 옮겨간 후 옮겨간 도시에서 동일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손이 더 큰 환란과 심판으로 치셔서 그 성에 모든 자들이 독종으로 고생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 가드 지역에서 우리 죽겠다고 아우성이 나는 거죠. 그래서 또 한번 가드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에그론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랬더니 그 도시 사람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는 겁니다. 이 법궤가 우리 도시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다 알게 됐는데 그 법궤를 우리에게로 가져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하느냐고 못 들어오게 딱 막아서는 겁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법궤가 뜨거운 감자가 된 것입니다. 가는 곳 마다 여호와의 손이 치셔서 심판이 임하며 독종으로 쑥대밭을 만드는 끔찍한 재앙 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을 친다…” 이게 아주 무서운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승리의 도취되고 착각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이겼다고 기고만장 하며 하나님의 법궤를 아무 생각 없이 빼앗아 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는지 이제야 온몸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임하게 하시는 놀랍고도 무서운 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지금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출애굽 직전에 바로 앞에서 애굽의 온 땅에 10가지 재앙을 계속 임하게 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스스로 보여주신 것과 똑같은 심판입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법궤를 옮길 수도 없는 진퇴 양란의 상황에, 그 심판의 강도가 점점 세지면서 가는 곳마다 심판과 재앙이 일어나게 되면서 이게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구나…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대한 죄,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한 죄,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한 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지금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엄중히 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호와의 손의 위대한 힘입니다. 그 엄중하고도 무거운 하나님의 손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잊지 마시며 그 여호와의 손이 우리에게 능력임을 깨달으며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그 능력의 손으로 놀랍게 임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손을 들어 엄중히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그 손이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면 교사를 삼게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며 하나님을 예배 하며 의지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 우리는 그 여호와의 손 안에서 큰 보호하심과 위로하심을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놀라운 여호와의 손이 심판의 손이 아닌 축복과 보호의 손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워 전쟁에 나오니 처음에는 좀 무서워하고 두려워했지만 막상 전쟁을 해보니 수 만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을 죽이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대는 이제 기고만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전쟁이 아니라 신들과 신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무찔렀다는 것은 그들의 신인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전쟁 승리 후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법궤를 빼앗아 블레셋의 진영으로 옮겨와 다곤 신전에 딱 놔둔 겁니다. 오늘 말씀은 다곤 신전에 하나님의 법궤가 옮겨진 후 일어나는 놀라운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쟁 후 기고 만장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계를 빼앗아 다곤 신전에 딱 놔둔 때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법궤를 통해 놀라운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이겼다고 착각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심판이라는 도구를 통해 일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이 바로 5장 전체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법계를 자신들이 섬기는 신 다곤 옆에 두었는데, 아침 일찍이 일어나보니 다곤 신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 엎드려저 땅에 고꾸라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스스로 일 하시는 하나님, 사람의 도움 같은 거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스스로 드러내시는 스스로 있는자 여호와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곤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착각하는 그들을 향해 너희가 믿는 우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밤사이에 여호와의 궤 앞에서 다곤이 쓰러진 겁니다. 그들이 믿고 숭배하는 우상인 다곤이 쓰러진 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렇게 쓰러져 있는 다곤을 사람들이 일으켜 세워 그 자리에 다시 놓았다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곤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사람들이 다시 그 자리에 세워 되는 껍데기인 우상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가 아주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다곤 신전에서 쓰러졌음에도 일어나지 못하는 우상, 스스로 일하시고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사람들의 도움 필요 없이 스스로 서 계시고, 사람들의 불순종과 착각에도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진 다곤 신상을 일으켜 그 자리에 다시 세우고 그 다음 날, 더 심각한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은 것은 어제와 똑같은 데, 자세히 보니까 다곤의 머리가 끊어져 있었고 두 손목이 잘려 나간 것입니다. 머리는 중심을 상징하고 손은 능력을 상징하는데, 머리가 잘리고 손목이 잘린 것입니다.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라며 다곤의 목과 손목을 자르신 것입니다. 결국 너희가 섬기는 다곤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착각하는데, 너희가 믿는 우상이 이런 허상이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시며, 여호와 하나님을 스스로 드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법계가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놀라운 심판의 도구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만큼 하나님의 법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에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렇게 놀랍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씀을 바라봐서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되었고 말씀이 일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두 손들고 회개하는 대신, 하나님 말씀을 부적과 같이 사용하려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능력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하는 블레셋을 향하여 하나님의 법궤를 손대고 빼앗아 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경고와 심판을 제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는 우상인 다곤이 이렇게 손목과 머리가 다 잘려 나가게 하심으로, 너희들은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엎드려야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전쟁을 통해 약속하시고 이루실 심판,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그 가문 전체를 심판하시며 새 시대를 여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기에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패배를 허용하신 것인데, 블레셋 너희가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하는 교만을 내가 이렇게 무너뜨리고 삭뚝 잘라 주겠다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우상은 스스로 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상은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여 사람들이 일으켜 세워야 하는 허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일하시며 역사하시며 권능의 손과 심판의 손을 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가볍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싸우려 하지도 말고 하나님과 싸워 이기려 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의 역사로 스스로 임하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며, 스스로 존재하시며 일하시는 그분 뒤에 서서 주시는 은혜 넙죽 받아 먹으며 말씀으로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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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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