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일곱 마디, 가상 칠언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네 번째 말씀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 중에 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행악자의 한 사람 같이 몰아넣는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그래서 혼자 예수님을 달지 않고 두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상 칠언 네번째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그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에 강도와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 두 강도는 어떻게 보면 모든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여주는 모든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두 강도, 죽어가면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이 두 강도의 모습은 우리가 선택해야 되는 영원한 선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죽진 않지만 이렇게 시한부의 인생을 통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인데 그 죽음 앞에서의 마지막 선택과 결단이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를 결정하게 된다는 이 우주적인 사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왼쪽에 달린 강도의 선택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네가 지금 그리스도면 지금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우리를 살리라는 것이죠. 예수님과 함께 죽어가면서도 강도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너의 능력을 보이는 게 구원하는 거라고 예수님을 흔들고 있는 모습은 끝까지 강도로 이용하여 사단 마귀가 예수님을 흔드는 모습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바로 앞두고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도록 흔드는 사단의 미혹입니다. 이 강도와 같이 죽음을 앞두고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면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남 탓하면서, 하나님 탓하면서 원망과 분노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는데 그 다음에 답이 없는 인생으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영접하지 않은 채 이렇게 원망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며 탓하고 끝나는 인생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십자가 오른쪽에 달린 강도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냐면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강도를 꾸짖습니다. 결국 많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비방하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했던 이유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런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이 강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자각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 인생을 두면서 죽게 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 강도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죄 값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자각했습니다. 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전혀 알지 못하나 십자가의 형에서 죽을 정도면 중범죄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에게 돌아왔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서며 내 죄값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자각한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거절합니까? 나는 나름 착각에 살았다는 겁니다. 나는 나름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않기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냐고 늘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그 빛 가운데 서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빛 가운데 내가 얼마나 어둠이었는지를 깨닫고, 나는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자각하고 발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자복해야 그 은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세번째, 마지막 강도 입술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 나 천국 데려가 주세요… 이렇게도 못했고 그냥 기억해 달라…한마디 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에게 침투하고 임하는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의 나라가 나에게 임하며 그의 다스림과 통치가 지금 나에게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천국 확신은 내가 죽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나를 무관한자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나를 알고 기억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더라도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야…여기 생명책에 너 이름 기록되어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을 확신하는 게 천국 확신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건 그냥 내 기도 제목을 아뢰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기도 제목을 응답 받고/ 받지 않고 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분명한 믿음 가운데 주님과 사귐의 소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를 기억하심을 분명히 믿기에 내 기도 제목도 주님은 분명히 들으시고 기억하심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인생, 죄값으로 죽어 마땅한 인생, 주님께 기억되기를 소망하는 인생으로 놀라운 고백을 이 강도가 하고 있는 겁니다. 그 강도를 향하여 예수님이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오늘…예수님을 영접한 그 순간, 그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영생을 좌우한 것입니다. 내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나서 예수님이 왕이신 그 천국에, 주님의 손에 이끌려 나아가는 존재, 나는 주님께 선명히 기억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인생을 끝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는 영원히 거할 처소가 천국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억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 주님과 함께 그분의 손에 이끌려 가는 곳이 천국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시한부 인생으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인데 이 시간 내가 예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아니하면 그 십자가 은혜가 나에게 생명과 능력 되지 못함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십자가 은혜가 절실하지 않은데 그 십자가 사랑이 감격으로 나에게 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인생, 예수님에게 기억되는 인생, 죄로 죽어 마땅한 죄임을 발견하는 인생이 되어야 십자가 사랑을 은혜와 감격으로 받아들이며 바른 선택과 고백으로 영원히 거할 처소가 결정될 줄 믿습니다. 그게 저주가 떠나간 인생이며 죽음이 떠나간 인생이며 모든 결박이 떠나간 인생이며, 참 자유 누리는 인생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 앞에 지금 죽어가는 두 강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하고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있고 예수님을 부정하고 부인하고 거절하며 심판과 죽음으로 끝나는 그 멸망의 인생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죽음 앞에서 둘 중에 하나의 선택과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없는 인생으로 영원한 사망으로 끝나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든지… 죽음 앞에서 예수님에게 내 영혼을 부탁하는 인생이 있고 예수님 앞에 거절하고 거부하고 비방하고 탓하며 허무하게 끝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으로 영원히 거할 처소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영원을 좌우한다는 이 깊은 진리를 말씀으로 깨닫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두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가로 결정됩니다. 신앙의 무감각을 깨고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고 나의 죄값은 죽음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억되는 인생이 되면 여러분들은 승리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고 그분의 자녀로 바른 관계 속에서 있는 게 여러분 승리하는 인생입니다. 주님이 약속으로 주신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놀라운 생명의 말씀으로 품고 감격으로 받아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그 은혜 가운데 거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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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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