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에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이 있죠. 종로에 가서는 뺨 맞아도 아무 얘기도 못하다가 괜히 만만한 데 가서 화풀이하는 것을 우스갯소리로 표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만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분노를 폭발하고 희생양을 찾아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보게 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삼손의 장인이 삼손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딸을 그냥 시집보내서 결혼이 파경에 이르게 되었음을, 그리고 나서 삼손은 화가 나서 여우 300마리를 맨손으로 그 꼬리들을 다 묶어서 불을 질렀음을 배웠습니다. 그 불붙은 여우들이 밭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일년 양식이 있는 다 태워 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불타고 있는 일년 양식을 바라보며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자기들 1년 양식이 불붙은 여우 300마리로 다 타버리는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겁니다. 그리고 삼손이라는 사람이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뭐냐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향하여 지금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삼손을 대적해야 분노를 터뜨려야 되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리고 복수한 사람, 분풀이한 사람들은 삼손이 아니었습니다. 삼손 대신 그 장인과 결혼하려 했던 여인에게 분풀이를 하는 겁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데 삼손과 싸울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삼손은 싸우기에 너무 큰 존재가 되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분노가 지금 폭발하고 홧김에 싸워도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거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취한 방법 뭐냐면 만만한 사람을 희생양을 찾은 겁니다. 모든 원인을 누구에게 돌리냐 하면 그 처갓집으로 돌리는 겁니다. 그 장인과 딸이 잘못해서 이런 일을 한 거니까, 너희가 나의 분노를 대신해 죽어 줘야 된다는 희생양을 찾은 거예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을 끔찍하게 태워 죽입니다. 그 장인과 여인을 불에 태워 화형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마치 북한의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희생양으로 삼아 끔찍하게 로켓포로 죽인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블레셋으로 대표되는 세상 문화가 얼마나 이중적이며, 얼마나 끔찍한지 모릅니다. 정작 싸울 대상인 삼손에게는 싸우지도 못하고 찍소리도 못하고, 약한 두 사람을 잡아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며 끔직하게 죽여버리는 이 모습이 바로 인간의 이중성이며 블레셋의 문화와 가치관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유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중성을 가지고 희생양을 찾는 비겁함을 보입니다. 유다인 3000명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협조하려고 삼손을 지금 붙잡으려고 왔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원수이자 압제자입니다. 싸워야 할 대상인데, 유다 사람들은 주적인 블레셋과 싸울 생각은 안하고 삼손을 희생양으로 잡아 넘기려고 하는 것이지요. 블레셋은 자신들이 싸워 이기기에는 너무 크다고 생각되니….싸우는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손 한 명을 잡으려고 3000명이 지금 내려 온 거예요. 이 블레셋 사람들의 이중성이나 유다 사람들의 이중성이나 모두 인간의 이 부끄러운 민낯, 죄악된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문화와 가치관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손해가 나고 내가 화가 나면 우리는 누구든지 희생양을 찾는 거예요. 내 분풀이를 위해서 만만하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우리는 희생양을 찾아 내 화를 다 쏟아붓고 화풀이하며, 희생양에게 모든 이유를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늘 약한 사람 만만한 사람들에게 화를 붓고 그들에게 희생양을 살며 그들을 이렇게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면서 정당화하는 거예요. 희생양에게 나의 화풀이를 정당화시키는 이 모습, 이게 죄악된 인간의 모습이고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안 좋은 방법이고 길들어진 방법이에요. 오늘도 내 마음의 분풀이할 대상을 삼아 끔찍한 보복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약한 사람들에게 만만한 사람들에게 화풀이와 희생의 대상으로 삼는 이 방법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 특별히 약하고 만만한 사람들을 희생양을 삼아 그들에게 화풀이의 도구로 삼고,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워 불태워 죽이는 이런 일들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서 눈흘기고 분풀이할 대상을 찾고 계십니까? 그것이 우리의 악한 습성이며 영적 타락의 모습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분노가 나를 지배하고 분노가 나를 행동하게 만들며 분노에 끌려다니며 결정하는, 홧김에 하는 충동적인 결정이 얼마나 영적으로 해로운지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블레셋의 문화에 철저히 길들여지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너뜨리고 있어서 그들의 우상과 그들의 가치관과 가까이하지도 말라고 그렇게 경고한 것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세상은 항상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어 자신이 손해가 나게 되면, 항상 희생양을 찾으며 약하고 만만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분풀이의 도구로 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며 이런 문화를 성도로서 과감히 거절해야 합니다. 나보다 만만한 사람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그들에게 분노를 쏟아 버리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 악한 패턴을 끊어 버리십시오.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강한 자에게 더 강하고 약한 자에게 한없이 약한 이 영적인 담대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주님만 붙들고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삼손이 세상에 길들여져 세상 방식으로 결정하며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하며 무너지는 영적 하향곡선을 계속 말씀을 통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한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식 잔치에서 분노를 통해 30명을 쳐죽이고 옷을 빼앗아오는 것과 결혼잔치 도중에 혼자 돌아오는 잘못된 결정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분노가 이끈 즉흥적 결정이 가져온 또 다른 잘못된 결과,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 속에 드러나는 세상방식의 결혼관에 대해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삼손은 결혼 잔치 중이었는데 홧김에 그냥 혼자 집으로 돌아와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블레셋 장인어른 될 사람이 어떤 결정을 했는가 하면 자신의 딸을 그 결혼식 잔치에 온 삼손의 친구에게 아내로 그냥 줍니다. 이게 바로 블레셋 사람들을 통해 세상방식에 길들여진 결혼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끄심과 계획하심에 대한 믿음도 없고, 거룩함과 신중함도 없고, 심각한 고민도 없는 합법적 동거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닌 결혼관 말입니다. 내 눈에 좋은 사람 만나 그냥 동거하고 사는 게 결혼이고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삼손이 그렇게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간 직후 결혼이 예정된 자기 딸을 친구한테 그냥 줘버리고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화가 누그러지고 삼손이 아주 큰 선물인 염소 새끼를 사가지고 처가집으로 다시 찾아갑니다. 자신의 아내를 보러…자기가 홧김에 잘못 결정한 것이 얼마나 잘못 돌아갔는지 모르는 것이지요. 돌아와서 내 아내랑 다시 결혼해서 잘 살겠다는 거죠. 본인은 그렇게 한번 일이 해결될 줄 알았던 겁니다 삼손은 자기가 홧김에 그런 잘못된 결정을 하고 집으로 가 버렸지만 그 여인은 언제나 내 아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 어른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자기 딸은 이미 버스가 떠나 다른 사람한테 시집을 가버린 거죠. 이제 더 이상 네 아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손이 홧김에 그냥 가버려서 내 딸 더이상 안 사랑하는 줄 알고, 미워하는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냈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거죠. 자기는 홧김에 그냥 나왔는데 홧김에 결혼식을 깽판 치고 왔는데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질 걸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분노로 즉흥적인 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착각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잘못된 결정을 하면서 상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그 다음 말이 더 우리에게 주목하고 마음의 새겨야 할 말입니다.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너는 그를 대신해 이를 취하라.” 전형적인 세상 방식의 결혼관이 드러나는 겁니다. 너 우리 큰 딸하고 결혼 하려는데 큰 딸은 이제 결혼해서 버스 떠났으니, 작은 딸이 사실 더 이쁘니까 대신 결혼하라는 겁니다. 꿩 대신 닭이고 A아니면 B로 그냥 결혼하라는 겁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 물건과 같이 골라 대신 가지는 게 결혼인 셈이지요. 즉흥적이고 자기 마음대로,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하는 세상 가치관의 결혼, 그 전형적인 모습인 셈입니다. 문제는 거룩하게 구별된 삼손도 세상 방식에 길들여진 결혼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결혼 전에 기도했다는 부분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분노가 이끄는 대로 홧김에 돌아오고…어떤 신중함과 거룩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세상적 가치에 그대로 젖어 있는게 삼손인 것입니다. 지금 그 블레셋의 결혼관을 아주 처절하게 삼손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방식에 길들여지면 많은 것이 무너지지만 특별히 결혼이 무너집니다. 세상 가치에 물들어 결혼은 눈에 좋으면 그냥 즉흥적으로 만나 결혼하고 싫으면 즉흥적으로 헤어짐을 반복하면, 결혼은 무덤이 되고 결혼은 지옥 맛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이 나 자신이고 즉흥적이며 물건 고르듯이 흥정하고 이거 아니면 저것으로 하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결혼은 우리에게 올무가 되고, 피해야 할 것이 되며, 결혼이 축복의 도구가 아니라 저주와 눈물의 도구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블레셋 사람들의 전형적인 결혼관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 방식에 길들여진 결혼관에 우리 성도들도 철저히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가치관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는 우리는 이런 가치관과 기준으로 살아가는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그냥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내 눈에 보기 좋아 같이 동거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즉흥적으로 이 사람 아니면 저 사람이라고 정하는게 아니라, 누구 대신 누구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을 대신 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결혼은 거룩한 일이며 남자와 여자가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아주 신비로운 거룩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과 연결시킬 정도로 결혼은 신앙 생활에 있어 중요한 삶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사람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거룩하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주며 말씀이 가르치는 결혼의 본질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결혼은 올무가 아니고 결혼은 지옥 맛보기의 현장이 아니고 결혼은 피해야 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됨을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살아내는 그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신비이자 하나됨을 경험하며 예수님을 중심에 두는 거룩한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거절하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바른 가치관과 기준을 붙들고 결혼을 살아내는 힘과 은혜를 간구하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세상 방식에 길들여지는 대신에 주님께 길들여지며 주님 은혜에 머무는 결혼이 되기를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사명으로 주신 적군, 그 싸워 이겨야 될 적인 블레셋 여인과 자기 눈에 올가미가 씌워져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사명과 전혀 맞지 않는 그 여인을 향해 직진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조언하고 막아섰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과 지금 결혼식을 하는 중이죠. 그 결혼 잔치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 삼손이 재미로 지금 수수께끼를 냈는데 그 수수께끼를 푸는 거에 목숨을 거는 블레셋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옷 30 벌을 손해보지 않기 위해 그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그 신부측 가족을 협박하는 거죠. 수수께끼 답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너희 집 모두 불질러 버리겠다고….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전형적인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삼손의 아내 될 블레셋 여인이 결혼 잔치 7일 내내 그 수수께끼 정답을 알기 위해 삼손에게 애걸복걸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를 미워하는 게 분명하다며 울면서 사정하는 겁니다. 결혼 잔치 일주일 내내 아내가 수수께기 정답 알려 달라고 저러고 있으니 얼마나 어의 없습니까?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한 여인의 모습만 보면 안되고 이 세상을 봐야 합니다. 블레셋으로 대표된 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길들이려 하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삼손은 하나님께 길들임을 받아야 되는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인인 삼손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결박되어 하나님에게 길들여지는 대신, 블레셋 여인에 의해 세상에 길들여지며 세상의 가치관에 끌려 다니며 자꾸 세상을 향해 지금 나아가는 겁니다.결국 삼손이 두손 들었습니다. 삼손이 버티질 못하고 결국 답을 알려주는 것이죠. 세상이 여러분들을 길들이는 방법이 이렇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완전히 거절하지 아니하면 이런 식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울면서 사정하고 매달리는 모습, 삼손을 끌어 당기는 그 모습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삼손을 길들이고 있는지를 보는 영적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정답을 가져오니 삼손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결혼하려는 이 여인이 결국 자기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 블레셋 사람들의 편에서 섰다는 것도 화가 나는 것이고, 그런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수수께끼 정답을 가져온 것도 화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홧김에 삼손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수수께끼 경품인 옷 30벌을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고 뺏어오는 것입니다. 옷 30 벌은 집 한 채도 아니고, 그냥 결혼식 잔치에서 재미로 걸 수 있는 경품들 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목숨 걸고 협박한 블레셋 사람들도 어의가 없고, 그것에 화가 나서 홧김에 30명을 쳐죽이고 옷 30벌을 가져온 삼손도 어의가 없는 겁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가치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이 사건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죽인 첫 번째 싸움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오거나 하나님의 사명이 완성 되거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 홧김에 한 분노 폭발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는 홧김에 결혼 잔치 중간에 집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씩씩 거리고, 결혼식 깽판 치고 지금 아내를 처가에 놔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와 버린 것입니다. 이 두가지 다 분노가 이끈 즉흥적 결정이자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이런 삼손의 모습이 영적 문제라는 것을 성경은 선명하기 증언하며 경고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가 이끄는 즉흥적 결정에 끌려 다니는 이 모습이 바로 삼손의 영적 현주소이며, 세상에 길들여져 있는 삼손의 영적 미숙함이었습니다. 야생마 같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데로 자기가 마음대로 판단하는 영적인 하향 곡선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명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삼손, 철저히 세상에 물들고 세상에 길들여진 삼손을 보게 되는 거예요. 분노가 그 사람을 일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 거예요. 분노를 터뜨리며 홧김에 즉흥적으로 잘못된 결정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 말하는데 나를 움직이고 이끄는 힘이 여전히 분노의 힘이라면, 즉흥적으로 분노가 잘못된 결정을 하는데 끌려간다면 이건 영적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가 나를 이끌어 즉흥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하게 하는데 큰 대가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삼손의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즉흥적인 결정이 아닌 신중한 결정이 나를 이끌기를, 나의 삶이 분노가 아닌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동력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삼손을 특별한 은혜와 섭리로 역사의 축을 바꿀 놀라운 사람으로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과 달리 삼손이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점점 영적인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싸워 이겨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는 전혀 상관없이 블레셋 여인에게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버립니다. 부모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인을 데려와 아내를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쩔 수 없이 부모가 자식의 뜻을 따라 그 여인을 삼손에게 데려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그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러 길에 대한 이야기고 내일 말씀은 그 결혼하는 중에 일어나는 일을 증언합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 하러 가는 길에 두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사건들을 통해 삼손의 잘못된 선택들과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boundary를 망각하는 삼손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는 갑자기 어린 사자가 그에게 달려드는 사건이죠.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특별히 구별되어 부름 받았습니다. 3가지를 특별히 구별해야 된다증언하는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는 것,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 죽은 시체를 절대 만지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그 삼손을 잉태한 어머니도 먹고 마시는 것을 특별히 조심해야 될 것을 강조하며 그만큼 특별하고도 구별되게 삼손은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삼손이 가는 길에 포도원에 이르렀음을 강조합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멀리해야 할 삼손이 지금 포도원에 이른 것입니다. 유혹이 있는 곳, 그 영향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 곳에 간다고 꼭 문제가 되는 걸 알지만 유혹의 손길이 늘 가까이에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런 곳들은 근처에도 가까이 가지 않는데 좋은데 나는 거기 가도 아무 문제없다며 괜찮다며 굳이 거기를 가서 나는 괜찮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죠. 지금 삼손이 그런거예요. 포도원은 가지 않는게 좋은데 포도원을 헤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린 사자가 그에게 갑자기 딱 나타난 것입니다. 어린 사자가 갑자기 길가에 딱 나타나는 것은 특별한 경고 사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옛날 전래동화에도 그런 일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길을 가는데 갑자기 사자나 호랑이가 많이 나오죠. 이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경고라는 것을 묵상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삼손, 사명을 잃어버리고 블레셋 여인과 잘못된 결혼하러 가는 것의 경고, 포도원은 가까이도 가지 말라는 경고일 수 있었든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특별한 능력과 힘으로 갑자기 그에게 나타난 사자를 염소 찢듯이 죽여버렸습니다. 찢듯이 죽였다는 말은 쌍쌍바 같이 양쪽에서 두개로 자르고 쪼갰다는 의미이지요. 오늘 말씀 보면 염소를 찢듯이 짖었다 했습니다. 토끼 같은 작은 동물도 양쪽으로 잡아 찢는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자를 그렇게 찢었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은 힘이 특별히 그에게 부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진 초자연적인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 경고를 찢어버리고, 사명과는 전혀 상관 없는데 지금 힘을 쓰고 있는 거예요. 두 번째는 그 죽인 사자 가운데 꿀을 생각없이 먹는 사건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자기가 찢어 죽인 사자의 시체의 지금 꿀벌과 거기에 꿀이 있는 것을 발견한 거죠. 그 죽은 사자 시체를 보며 하나님의 경고를 생각하며 이 사자가 나에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으면 좋은데 삼손의 눈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 고민의 눈이 하나도 없었고 영적인 깨우침이 없었습니다. 삼손에 눈에 들어온건 고작 그 죽은 사자 시체에 있는 꿀이었습니다. 저기 맛있는 꿀이 있네….이거만 본 거예요. 나실인으로서 절대 죽은 시체를 만지면 안되는 구별된 자인데, 삼손은 그런것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그 바운더리를 너무나 쉽게 깨는 겁니다. 이유는 뭐에요? 내가 먹고 싶으니까…그냥 그 시체를 만져서 맛있는 꿀 먹는 거예요. 특별한 고민도 없어요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마음대로 행하는 거에요. 삼손은 지금 블레셋의 여인과 결혼 하며 자신의 눈에 보이기에 좋은대로 결정하는 삼손을 기쁘게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을 볼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나실인의 boundary를 깨고 무시하는 것을 근심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볼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지금 삼손은 전혀 개의치 않은 것이죠.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데 누가 신경쓰냐…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 무너지고 있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지 말라 명령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뭐 십계명 같은 게 대표적이죠. 우리는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으로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삼손과 같이 이런 질서와 원리를 내 눈에 보기 좋은 어떤 것 때문에 너무 쉽게 깨버리지 않는지요. 이 시간 저에게 여러분들에게 갑자기 확 나타나는 어린 사자의 경고를 묵상하고 들을 수 있기 원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인 줄 알고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가는 길과 선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가…그것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준과 하지 말라 말씀 하신 바운더리 를 쉽게 무시하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 꿀이라는 이익이 있지만, 하나님이 만지지 말라는 명령과 부딛힐 때, 이익이 됨에도 그 것에 가까이 가지 않고 돌아서는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삼손과 같이 구별됨 을 아무렇지도 않게 깨 버리며 내 마음대로 꿀을 먹어 버리는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원합니다. 타산지석의 지혜를 배우며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원리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시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장의 삼손은 시작부터 굉장히 특별했으며,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실인으로 구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자라면서 하나님의 복이 부어졌으며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는 아주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삼손은 정말 놀랍게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으며 사사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놀랍게 일하겠구나… 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압제를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일을 삼손을 통해 하시겠구나…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14장을 넘어오면 그런 큰 기대를 날려버리는 삼손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특별하게 태어난 삼손, 잘 준비된 삼손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큰 실망을 하게 됩니다. 13장에서 그렇게 놀랍게 준비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을 통해 놀랍게 예비된 삼손 같았지만 그가 하는 결정과 행동이 결코 영적이지 않고 세상적이며 자기의 육신의 욕구를 따라가는 아주 잘못된 방법으로 그의 인생을 결정하면서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4장에 들어서는 삼손은 사명과는 거리가 먼, 여자에 빠져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 반복되는 표현은 “여자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딤나에 삼손이 내려가 제일 먼저 본 것이 여인이었습니다. 그것도 블레셋 여인을 본 것이지요. 결국 삼손이 여자를 제일 먼저 봤다는 것은 그의 관심사와 마음에 열망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이죠. 내 눈에 꽂혔다 그러죠. 내 마음의 열망하고 소망하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삼손이 여자를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명이 가득 차 있었으면 그가 제일 먼저 보는 것은 하나님이 보기 원하시는 것을 제일 먼저 보았을 것입니다. 그 블레셋 여자를 보고 바로 충동적인 결심을 하게 됩니다. 결국 내 눈에 보는 게 모든 판단 기준이 되는 거예요. 결혼과 같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정 또한 자기 눈에 보는 것으로 다 판단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즉흥적으로 판단 기준을 삼겠다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삼손의 눈에 꽂힌 여자를 블레셋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살게 하신 이유는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의 눈에 꽂힌 여인이 누구냐면 블레셋 여인입니다. 지금 자신의 사명과 배치되는 거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의 사명은 블레셋을 적으로 두고 싸우고 이겨야 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그에게 주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눈에 블레셋의 여인이 눈에 들어오니까 금세 사랑에 빠지는 소위 금사빠가 되어서 사명이고 뭐고 내 눈에 좋은 이 여자를 아내로 삼겠다는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에서 백성을 구원해야 할 특별한 사명을 부음받은 나실인이, 적군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매력에 빠져서…. 삼손은 더 나가 부모의 조언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 당시에는 연애 결혼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데려오는 여인과 결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삼손은 부모에게 떼를 쓰는 거죠. 내가 한 눈에 반한 여인이 있으니까 이 여인 데려와서 내 아내 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부모가 분명히 삼손에게 조언을 합니다. 이 결정이 잘못된거 모르느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블레셋에서 여인을 취하려 하느냐….부모가 분명히 직언했고 바른 얘기를 했습니다. 근데 삼손은 들을 귀가 없죠. 내가 좋아하는 데 내눈에 좋은데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부모의 훈계와 조언을 경시하고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 말을 듣지 않아요 내가 좋아하니까 상관 마시고 이 여자 데려오세요… 말합니다. 이게 바로 삼손의 영적 하향곡선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능력과 특별한 힘을, 특별히 구별된 사명에 사용하도록 부름 받은 나실인이 이렇게 잘못된 길로 지금 한 발 두 발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손에 눈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패턴을 그 영적 지도자이자 사사인 삼손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말씀에 아브라함과 그 조카 롯이 서로 갈라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네가 좌 하면 내가 우 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 한다. 롯이 제일 먼저 보고 주목한 것은 뭐냐면 눈으로 보이는 환경과 땅의 조건이었습니다. 눈에 보기 좋았던 소돔과 고모라가 그의 눈에 확 들어 왔고 그곳을 선택해서 먼저 떠났습니다. 즉 롯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 판단 기준은 겉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이 전부였으며, 그 땅이 좋다고 찾아갔습니다. 그 눈에 보기 좋은 땅에는 전쟁과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을 따라 선택한 것입니다. 그 땅이 멸망과 심판의 땅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영적인 맹인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롯이 그렇게 떠나고 나니까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나의 영적 상태입니다. 결국 우리가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기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기 원하시는 것을 내 마음에 두고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믿으며 보이지 않는 가치와 보이지 않는 천국과 다스리심을 믿으며,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주목하며 나아가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 무엇을 먼저 보시며 무엇에 주목하고 있습니까? 결국 무엇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무엇에 갈망과 열망으로 바라보는 것을 제일 먼저 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오셔서 무엇을 제일 먼저 보시며 무엇을 가장 오래 보십니까? 집에서 무엇을 가장 오래 가장 먼저 보십니까? 그게 여러분들의 믿음의 대상이며 그것이 여러분들의 열망과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런 믿음의 눈, 영적인 눈을 완전히 놓쳐 버렸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저버리면서까지 블레셋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부모의 훈계를 경시하면서 떼쓰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이 모든 것이 짧은 네 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롯과 같이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 이쁜 여인에게 그냥 모든 것이 꽂히며, 그것을 가지고 판단에 모든 기준을 삼아 사명도 다 저버린 채 블레셋의 여인에게 직진하고 있는 그 모습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타산 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삼손과 같이 그냥 그 길을 직진해서 나아가 실패와 실수로 나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내가 열망하고 집중하며 바라보는 것이 혹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며, 사명과 충돌한다면, 멈추고 내려놓는 결단이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구별된 받은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실인인 삼손을 임신한 엄마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먹고 마시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명령하셨습니다. 엄마의 먹고 마심 이 태아에 가장 치명적인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에 좋은 것을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가 부모로써 자녀를 위해 영적 준비를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삼손이 드디어 태어나는 장면인데 그 삼손이 태어나서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가 무엇인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 자녀들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자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집중해서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삼손이 태어난 후 그 아이가 자람에 따라 두 가지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삼손에게 부어졌습니다. 첫번째, 여호와의 복을 받으며 자라난 것이고 두번째,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인 거입니다. 여호와께서 삼손에게 주신 특별한 복이 바로 하나님이 복주시는 아이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라면서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부어진 자녀였다는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주신 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사기는 구체적으로 증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삼손이 자라면서 하나님의 복을 계속 받으며 자라난 것이죠. 우리가 신앙 생활하며 우리 자녀들을 위해 정말 간구해야 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을 아이들이 받고 자라는 겁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가는 것, 결혼 잘하는 것, 다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고 기도할 제목입니다. 세상 복은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복받는 것이 인생의 중심이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그 아이의 평가에 전부가 되면 안되고 이런 기도에만 머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자라 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자녀에게 주시는 복의 본질이 뭡니까? 너가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게 아니라 너를 보내신 이, 하나님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이 세상에 보내진 자라는 분명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자라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부모가 기뻐하는 구나…라는 것을 알고 자라야 되고요. 아이들이 그 하늘의 복을 귀하게 여기며 여호와께 복 받는 게 나에게 축복이 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라는 것이죠. 제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할 때, 콜럼버스라는 도시에 목회하시는 한 목사님이 계신데 참 목회를 잘하시고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목회중에 저에게 큰 도전을 주셨던 것이 뭐냐 하면 주중에 아이들이 오면 매주 안수기도를 해주신 것입니다. 어른들에게는 안하고, 아이들에게 매주 안수기도를 받으러 오는 겁니다. 애들이 어려서부터 목사님에게 머리에 안수기도 받는 것을 훈련받는 거예요. 그 목사님으로부터 어려서부터 머리에 축복의 기도를 받으며 자란 아이, 그래서 나는 목사님께 축복받으러 오는 거구나, 이걸 알고 체득하며 자라난 아이들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관을 형성할까…깊게 마음에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자녀를 위한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인생의 두 번째 복은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stir…흔들어 깨우고 움직이는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삼손을 움직이는 동력이 여호와의 영이라는 거예요.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힘이 삼손을 움직이는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여러 개가 있어요. 제일 쉬운 것이 돈으로 움직이는 인생입니다. 사람 움직이게 하는 제일 쉬운 방법이지요. 돈 주면 사람들이 움직이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에 움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분노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어려서부터 훈련이 되고 몸에 배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입니까?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주님의 말씀과 성령 하나님의 그 이끄심이 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이 두 가지의 은혜가 나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며 우리 자녀들을 위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자녀가 자라면서 여호와의 복이 그들에게 임하는 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을 받으며 우리 자녀가 자라게 도와 주옵소서. 그래서 바라기는 우리 자녀들이 자라면서 여호와께서 복을 부어 주시는 그 아이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여호와의 영, 되기 원합니다. 내 마음의 내주하시는 여호와의 영이 나를 이끌고 나를 움직이시도록 드리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두려움으로 움직이는 자들 아니라, 불안과 걱정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움직이는 힘은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영이심을 믿으며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이 삼손에게 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자녀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서 수태고지와 출생이 증언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큰 획을 긋는 사람이자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 출생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 삼손은 성경에서 출생 이야기가 증언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수태고지와 함께 어머니의 임신, 출생까지의 모든 과정이 다 기록된 사람이 바로 삼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삼손의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가장 힘이 약했던 단지파의 사람, 어머니는 자식이 없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의 집안은 가장 힘이 없고 미천하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집안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집안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임신이 안되던 태를 열어 아들이 생길 것을 예언하고, 그 아들이 아주 특별한 나실인, 태어나면서부터 바쳐진 나실인임을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삼손은 하나님의 그 구속사의 역사에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특별한 아들이자 기대감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게 될 아들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나실인으로 태어날 아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아들임을 알게 되면서, 마노아의 부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소서” 아주 지혜롭고도 놀라운 기도를 하고 부탁을 합니다. 사실 그게 우리가 부모로서 해야될 기도이기도 합니다. 자녀를 선물로 주셨는데 그 선물로 주실 아이를 어떻게 키우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죠. 이 요청이 오늘 말씀에 두번이나 반복됩니다. 가장 중요한 부모됨의 교육을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이죠.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이뻐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이를 잘 기르고 양육하는데 있어, 낳은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부모로써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영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아이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임을 분명히 믿는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키우고 양육하는 방법을 말씀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 영적 준비는 바로 뭐냐면 이 아이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낸 선물이라는 분명한 믿음,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를 어떻게 잘 양육할지를 하나님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가정이 항상 자녀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부모가 영적으로 하나님께 그것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손 부모의 요청에 하나님의 사자는 임신했을 때 그 엄마가 하지 말아야 될 걸 알려주고 있는데요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규제였다는 거예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먹지 말고 마시지 말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가 자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그게 다 태아에게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자녀를 키우기 위해 태어나기 전부터 먹고 마시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 바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는 방법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좀 저희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적응해 보면 결국 부모가 먹고 마시는 것이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신다는 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적용해보면, 우리 몸과 마음에 해로운 말들과 생각들, 이게 포도주와 독주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포도주와 독주 같이 나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 시키며 독이 쌓이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 마음의 차곡차곡 쌓여 있는 죄, 차곡차곡 쌓여 있는 분노, 차곡차곡 쌓여 있는 두려움과 불안함, 그 모든 것들이 내 몸과 마음을 해롭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게 누구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는 겁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특별히 어린아이들에게 태아에 있는 아이에게….자녀를 위해 그걸 먹지 말고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걸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죠. 먹지 말고 마시지 말라는 것을 중요한 원리로 알려주고 있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계십니까? 부모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자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양육할지 어떻게 바른 가치관을 키울 지를 가르쳐 달라 부르짖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가능하면 매일 말씀을 먹으십시오. 매일 기도로 호흡하십시오. 그래서 내 삶이 주님이 주신 거룩하고 순전한 것들이 내 몸과 마음의 채워지며 그것이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며 다른 기준과 가치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영적 부모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며 우리 자녀들을 축복하는 제일 좋은 방법임을 잊지 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27장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신 죄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이었으며 온 인류의 역사에 획을 긋는 가장 중심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그 삶 가운데에 가장 핵심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죄의 속성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며 그런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라 실체 이자 능력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며 다 감당하신 죄의 속성을 마지막으로 드러내는데 바로 어둠과 단절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빛을 완전히 잃은 어둠, 완전히 하나님에게 등돌이고 멀어진 상태가 죄의 결과이지요.
온땅에 임한 어두움이 예수님이 해결하시는 죄의 속성임을 드러냅니다. 주일 예배 강해 설교 시리즈인 요한 복음을 통해 배웠듯이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임을, 생명과 말씀이 결여된 상태가 결국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둠의 상태에서는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마땅히 봐야 될 것을 보지 못하고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알지 못하며, 결핍 되면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그냥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어둠의 결과,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진리와 진실을 알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죠. 그래서 내 인생에 가장 본질적인 영적 문제는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어두운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그 어둠이 온 땅에 온 세계에 임한 것입니다. 그 어둠이 완전히 압도한 거에요 또 하나 어둠과 함께 나타나는 죄의 결과가 단절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유명한 절규의 기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로 부르짖으십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커서도 소리를 지르셨겠지만, 이 절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단절에 대한 고통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버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반대로 예수님이 경험하신 것은 처절한 죄의 결과인 단절을 온몸으로 체험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에게 단절을 경험하는 사건, 세상 죄를 다 지고 가는 십자가에 어린 양을 하나님은 버리신 거에요. 그 하나님과의 단절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성자 예수님의 탄식이 말로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하는 절규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현실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영적 어둠과 그리고 진리와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 단절이 가장 큰 문제임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빼앗긴 채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과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빼앗긴 채 어둠 가운데 헤매게 있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가 전부가 아니라 는 진리를 빼앗기며 단절 가운데 방황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현재가 나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 진리를 빼앗긴 채 어둠과 단절 가운데 헤매고 있는 게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진 이후 그 죄의 단절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것이 막히고 어두운 영적 존재가 되었으며 지금 예수님은 그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부르짖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얼마나 큰 일임을 묵상해야 하고, 그것이 결국 사랑과 사람 사이의 단절, 내 자신과의 단절로 이어지며 모든 관계가 다 망가지는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주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 부르짖으며 이 시간 새사람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어두운 내 마음과 세상에 빛과 생명과 말씀이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이 나의 연약한 모습 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지고 뒤로 말미암아 단절된 나의 이 부끄러운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십자가 앞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인정해야 그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내가 새사람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건지 시며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 공로 아니면 영원 형벌을 받으며 십자가의 공로로 눈과 같이 되었다는 이 놀라운 십자가 찬양을 통하여 이 시간 나의 삶이 선명하게 고백 되며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7장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모든 죄, 그 본질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역사의 중심에 서셨습니다. 내 인생의 중심일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의 중심으로 계셔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후가 이 세상의 역사와 온 우주 역사를 구별합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십자가에서 지신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선명히 드러내며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키시는 보혈의 능력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죄는 우리를 결박해 묶어 버리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들며 죄의 종으로 살게 만들어, 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억지로 끌고가는 파괴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죄가 쌓이면 쌓일수록 죄는 더 무겁게 우리를 결박하고 더 억지로 원하지 않는 곳으로 질질 끌고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은 이 결박으로부터 해방을 주시고, 억지로 끌려가는 사망의 힘으로부터 권세로 부터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신 놀라운 사건이기에,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고 나에게 능력이자 실체가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죄의 속성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모욕하고 희롱하고 비웃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고 계시는 상황은 고통과 피비린내가 가득한 비참한 상황입니다. 사형당해 단두대에서 한 번에 그냥 목이 잘려 나가는 것도 직접 보면 끔찍합니다. 그런데 그런 끔찍함과는 비교할 수 없게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게 바로 십자가형 입니다. 가장 극도의 고통을 느끼고 신음하면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게 십자가형이지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들어 가시는 그 현장 그 피비린내 나는 고통과 아픔 가운데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 아들 되심을 모욕하고 비웃고, 희롱하고 있는 것이죠. 제가 군생활을 할 때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대 회식을 위해 돼지를 잡는 작업에 차출을 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돼지 한 마리를 손수 잡았습니다. 맨손으로 해머와 긴 칼을 들고 돼지를 싣고 가는데, 4분의 5톤 트럭에 올라 가는데 돼지가 안 올라가려고 그냥 발버둥을 치는데 얼마나 짠하던지요. 그렇게 끌고가서 맨정신으로 잡기는 어려우니까 나머지 병사들은 다 술을 마시고 그 다음 그 돼지를 죽이는 데요. 그 돼지 이마에 해머로 먼저 강하게 때립니다. 그러면 돼지가 큰 소리를 내며 정신 못차리고 쓰러집니다. 그때 목 밑에 긴 칼을 찔러 피를 내는 겁니다. 그러고도 한번에 죽는게 아니에요…그 돼지 한 마리를 5명이 정말 힘들게 잡았는데요. 제가 실제로 동 큰 동물을 그렇게 살생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 돼지를 죽이는 그 모습 그 돼지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밥맛이 싹 사라져서 한동안 돼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지요. 심지어 동물을 죽일 때도 그 동물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미안해하고 안타까 하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적인 마음이죠. 그런데 지금 십자가에서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지금 피흘리며 신음하며 소리를 지르며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그 십자가 앞에서 사람들이 농담하고 웃고 떠들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옷을 다 찢어 발가 벗깁니다. 완전히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신음과 고통, 피흘림의 십자가 앞에서 옷을 제비 뽑아 나눠 가집니다. 인간성 이 완전히 파괴된 군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잔인함의 극치 이게 바로 죄의 속성이 라는 것이죠. 인간성이 완전히 파괴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나 눈물과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전혀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과 신음을 오히려 즐기고 재밌어 하는 모습, 이게 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화인 맞아 양심이 마비된 모습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보면 길가와 같이 딱딱해지 마음에는 말씀이 뿌려져도 마음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린다 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사단이 딱딱해진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는 이유가 구원을 얻지 못하기 위해서 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어요. 구원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오늘도 사단은 사람들이 죄에 빠져서 마음에 화인 맞게 만들어, 다른 사람의 눈물과 고통 과 통과 신음에 공감하지 못하면 말씀을 빼앗아 버리는 이런 끔찍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이죠 군인들만 이런게 아닙니다. 39절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모욕했습니다. 41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했습니다. 44절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 또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욕했습니다. 이게 다 뭐냐면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죄의 속성이 라는 것이죠. 지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희롱하고 모욕하는 내용이 다 하나님의 아들 내심을 모욕하고 희롱하고 욕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그 고통과 신음과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그 죽어가는 현장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그 모습….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여진 죄패가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렇게 낙인 찍고 규정해버려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척 하는 유대인의 왕 예수, 너는 이런 존재다 라는 죄목을 붙여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지금 욕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단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반응 하지 않으셨고 거기서 화도 안 내셨습니다. 이유는 십자가 앞에 그 모든 것들이 다 내려져 해독 때고 치유 받아야 되는 것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욕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서 다 녹아져야 할 죄임을 알고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끝까지 흔들고 모욕하고 희롱하는 사단 마귀 의 계획을 끝까지 거절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온전히 선포하며 이 모든 죄에서 온전한 자유함과 해독을 이루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인간성이 다 파괴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문제라는 것을 알고 늘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그 도둑들이 다 해독의 역사 그게 바로 십자가 우리 해주는 능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꼭 붙들고 십자가에서 주시는 보혈의 능력으로 모든 악한 독이 해독 되며 자유함을 누리며 십자가에 꼭 매이기를 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말씀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치유와 해독을 누리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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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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