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어떤 교회가 있습니다. LA에 있는 그 교회는 한 장로님이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담임 목사님이 그 장로님에게 잘못 보이면 찍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툭하면 그냥 목사를 쉽게 갈아버리는 교회로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 건물주가 바로 그 장로님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장로님에게 잘 보여야만 그 교회는 목회자가 버틸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되니 늘 그 교회는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있으며 목회자는 버티지 못해 떠나던지 아니면 있는 동안 철저히 그 건물주 장로님의 허수아비가 되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의 미가의 집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엄마의 큰 돈을 훔친 아들인 미가, 회개와 돌이킴 없이 그냥 여호와께 내가 원하는 복받기 원하는 엄마, 그리고 그런 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신상,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이 모든 것들이 타락한 예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건 영 모양이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치 장로님이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자기 개인 교회에 허수아비 목회자를 세우려 하는 것과 동일한 생각으로 자기 아들 대신에 그 신상을 섬길 레위인을 찾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온 레위인에게 연봉을 제시하고, 우리 집안에 있는 신상을 위해 제사장으로 섬겨달라 제안을 합니다. 은 열과 의복과 먹는 것을 다 해결해준다는 연봉을 제시하며 나를 위한 제사장이 되달라는 겁니다. 레위인과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의 논리와 육신의 욕망이 합쳐져서, 연봉 줄테니 우리 집안을 축복하고 내 자식들을 축복하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제사장이 되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레위인은 그렇게 개인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게 옳은지, 허수아비로 있는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냥 넉넉한 연봉 준다니까 들어가 섬겼습니다. 돈 주니까 그 집안을 위해 존재하는 그 신당에서, 원하는 대로 적절하게 축복하면서 그 집안에서 잘 지내면 되겠다 생각을 한 거예요. 그 집안 신당에서 허수아비 목회자,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 집안의 충성된 애완견 같이 된 겁니다. 그냥 미가의 말 잘 듣고 원하는대로 졸졸 따라다니는 제사장이 됐다는 거예요. 더 안타까운 말씀이 등장합니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 아느니라.” 레위인이 내 제사장, 내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복을 내가 정해 받기 위해 누구를 지금 사용합니까? 말 잘 듣고 개념없는 제사장을 세우는 거에요. 하나님을 나를 위해 조종하고 제사장을 나를 위해 조종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 충성하고 나 위에 복 빌어 주고 내 말 잘 듣고 나에게 그냥 굽신굽신 거리는 그런 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걸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실 줄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그게 지금 이 미가의 집에 세워진 신상을 섬기는 허수아비 레위인을 둔 타락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를 내가 낸 돈으로 내가 고용해 월급받는 직원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졸졸 따라오는 애완견 같은 목사를 좋은 목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길에 내가 도구로 쓰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을 수단으로 만드는 겁니다. 계속 우리는 하나님에게 내 길을 주장하고, 나를 위해 존재해야 되고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복을 부어 줘야 되고 그리고 그것을 위한 매개체로 그냥 허수아비 같은 목회자를 세운다는 겁니다. 그렇고는 거기서 그냥 우리는 예배 잘 드리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적절하게 나를 위해 축복하고 적절하게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목사, 그 가운데 나를 위한 예배당을 세우는 이 미가의 모습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타락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예배드린다 말하며 그 안에서 회개 없는 신상을 세우고는 그 앞에서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 영적 타락의 부끄러운 자화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타락한 예배의 본질이고 타락한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사사기는 증언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도구 된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지 아니하면 미가 와 같이 자기가 원하는 신상을 만들어놓고 회개와 돌이킬 없이 내가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나님의 복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타락한 예배의 주범이 뵐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을 만들거나, 나를 위해 존재하는 허수아비 제사장을 만드는 게 결국 타락한 예배를 만들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족한 하나님의 종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쪼개시고 변화시키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로 무릎 꿇지 않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 하심이 절대 경험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는 회개와 돌이킴이며, 내가 하나님께 도구로 엎드리는 것이며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내가 변하고 내가 맞춰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내가 예배에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내가 변하며,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내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이 본질을 붙드는 싸움을 지속하십시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하여 모든 영적 타락의 끝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수단과 도구로 만드는 우상숭배가 있음을 잊지 마시며 본질을 향해 깨어지고 변하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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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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