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권면하는 옥중서신인 빌립보서가 오늘 말씀으로 끝나게 되는데 “문안”으로 마무리됩니다. 문안이란 문안 인사로, 안녕한지를 서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인사가 “안녕하세요.”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안녕하지 못한 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문안 인사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국과 비슷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였고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헤매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안 인사가 “샬롬,” 평화…잘 살아 있는지를 물어보는 게 그들의 습관적인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문안이란 겉으로 전쟁이 없고 어려움이 적고 문제가 적은 외적 평화가 있는 상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외적 평화와 안녕의 상태를 물어본 거라면 지금 사도 바울은 전혀 안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외적 평화와 안녕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내적 평안이 외적 어려움을 통해 빼앗기지 않는 놀라운 기적의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문안”은 외적인 안녕을 넘어서는 내적인 평안과 안녕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상황에 빼앗기지 않고 누리는 것과 같이 성도들이 이 내적 평화를 서로 체크하며 문안 하라는 것이죠. 안녕을 넘어서 내적인 안녕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에 처음이자 끝이라는 것을 결론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문안 하는 것을 4장 말씀 전체로 확대해 보면 주님 안에서 평안하고 기뻐한지를 묻는 것이 문안입니다. 주님 안에서 염려를 넘어서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문안입니다. 기도 염려 충만 대신에 기도 충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물어 보고, 주님 앞에 나올 때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로 나아오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문안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챙겨주시고 주님께서 내 생각을 지켜 주심을 실체로 경험하고 있는지를 묻는 게 문안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외적으로도 변화와 외적으로도 풍성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고 적절하게 안정적인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녕을 어느정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 외적 안녕을 넘어서 내적인 안녕을 추구하고 이 내적 안녕은 오직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하고 주인 되셔야 되는 것임을 끊임없이 붙들고 조율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내적 평안의 끝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과 가운데 사로 잡히지 않고 죽음을 넘어 있는 천국을 바라보며 안녕한 것입니다. 분명한 초점이 내가 죽음 앞에 섰을 때 두려움, 걱정과 염려에 압도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안녕을 누리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차별성이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탄할 때 매일매일 서로가 문안 하며 주님 안에서 이 시간 나는 준비되어 있는 자입니까? 라는 것을 묻고 체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그 문안의 대상은 명확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내적 안녕과 평안을 묻는 문안의 대상은 모든 이웃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내가 잘 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있으며, 주님의 보혈과 은혜 안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해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도로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에서 잘 살고 있고 내 인생이 안녕한지는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을 통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이 이루어지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만 오면 다 성도라고 불러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자, 그리스도로써 내 삶의 중심과 통치와 다스림이 변했음을 고백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백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교인됨을 넘어 마음을 담은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내가 지금 예수님 자녀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런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마지막 사도 바울의 결론적인 권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끄는 삶”입니다. 우리의 심령, 마음 깊은 곳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머무는 삶을 살기를 권면하며 빌립보서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우리 생각에는 가장 성경적이고 이상적인 초대 교회 중의 하나 였습니다. 우리가 돌아가고 회복해야 될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적이고 가장 성경적으로 근접한 빌립보 교회도 여러가지 도전과 문제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교회 안에 세속적으로 물든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 잘못된 교리를 가리키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교회 안에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한마음 되지 못해서 실제로 여선 교회 가운데 서로 싸우고 갈등 하는 문제들도 있었고 외부로부터 핍박도 있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문제와 도전들을 안고 살아갔던 자들이 초대교회 성도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상황 가운데서 좌절과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에 거하고 주장하는 게 오직 살 길임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도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갈 때 우리 안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담고 살아갑니다. 내적인 문제, 외적인 문제, 관계적인 문제, 세상과의 문제등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를 세울 정도로 여러 가지 도전과 문제를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늘 변하고 사람들은 늘 퇴색하고 늘 사람들은 한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환경과 상황도 늘 변하고 낙심 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의 심령을 주장하는 것이 오직 살 길임을 믿고 붙들어야 합니다. 성도로써 우리의 삶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의 심령을 담고 주장하는 삶을 사모하며 그 은혜 가운데 머무십시오. 자격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살 길임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심을 붙들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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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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