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하나님을 통해 이스라엘 왕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왕이 중심이 아니라 그 왕들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선지자 사무엘이 역사를 주고하고, 본질적으로는 보이지 않으시는 왕인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을 사무엘상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출생으로 사무엘상이 시작되는데, 그 아버지 엘가나의 이름은 “하나님이 소유하셨다 (God possess).”의 의미이고, 어머니 한나의 이름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간구한다.” 는 뜻입니다. 어제 배웠지만, 엘가나의 집안은 로얄 패밀리 도 아니고, 제사장 집안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집안이자, 예루살렘이 아닌 저 시골 변방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가문, 사람들의 주목받지 않는 변방의 가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바꾸는 역사를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나마음에는 큰 짐과 기도제목이 있었는데 바로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한나가 자녀를 낳지 못하니까 집안을 살리기 위해 두번째 아내 브닌나를 데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브닌나는 자녀를 쑥쑥 잘 낳는 겁니다. 그러니 한나가 집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이라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었겠죠. 특별히 그 당시에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흠과 불명예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전체적인 불명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고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1년에 한번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와서 감사드리는 제사를 드리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기뻐해야 하는 그때의 기뻐할 수 없는 한 여인이 바로 한나습니다.
그런 어려움과 눈물과 아픔을 가진 한나, 그럼에도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였습니다. 화목제를 드리면 남은 제물을 가족이 나눠 먹게 되어 있는데, 남편은 한나에게 그 제물 분깃을 2배나 주었습니다. 그 말은 남편인 엘가나가 받아야 될 분깃을 다 한나에게 나눠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엘가나는 그렇게 한나가 힘들고 어려워 하며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퍼 하니까 뭐라 위로하는가 하면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내가 낫지 않느냐…” 지금 시대에 봐도 정말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아들 보다 나은 남편, 나를 보고 괜찮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위로하는 엘가나, 지금 시대에 봐도 대단한 남편이고 참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입니다. 근데 문제는 한나에게는 남편이 그렇게 잘 위로해줘도, 아무리 남편이 그렇게 내 옆에서 함께 해줘도, 마음의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주고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맙고 감사한데, 그들의 응원과 그들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는 여전히 슬퍼하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 깊은 고난과 답답함이 나에게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렇게 자기를 잘 해주고 그렇게 자기를 로맨티스트 응원해줘도, 그 모든 것들이 한나의 마음에 실제적인 눈물과 아픔을 덮어 주지 못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 번째는 한나의 고통과 어려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고요. 두번째는 한나의 고통과 어려움이 영적인 것을 태어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나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 하면 함께 있는 대적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하여 번민케 하였다.”고 증언합니다. 두번째 부인인 브닌나가 애들을 그렇게 쑥쑥 낳아도 남편 엘가나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가 하면 오직 한나에게만 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낳아도 남편의 총애를 받지 못하니까 한나를 그냥 밟는 것입니다. 대적이라는 히브리 원어 의미는 “라이벌”이라는 의미인데, 상대를 죽이기 위한 라이벌로 대적인 것입니다. 브닌나가 애를 낳지 못하여 마음이 안 그래도 힘든 한나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입니다. 물론 칼을 들고 창을 들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말을 통해 한나의 마음을 죽이려고 후벼파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그 말을 사람들의 마음에 후벼 파고 격동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어떤 말로 후벼 팠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히 다 짐작이 되실 거예요. 브닌나는 한나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번민으로 마음을 후벼 파고 있는 거예요. 안 그래도 상황 자체도 너무 힘든데 주변에서 이렇게 마음을 후벼 파면 사람들의 위로로 해결되지 않는 아픔이 됩니다. 두번째,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지금 한나가 아기를 못 낳게 된 것은 그 여인이 부정해서도 아니고 한나가 저주를 받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큰 일을 준비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성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무자한 이유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시대를 바꾸시는 역사를 준비하고 계시는 거룩한 지연 (intentional delay)이었지만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인생의 어려움이 너무 컸지만 한나의 어려움은 거룩한 어려움이었고, 거룩한 목적이 있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하고 번민케 하는 것은, 한나의 가슴을 후벼파는 악행이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대적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한나에 대한 대적의 일을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사람들의 위로와 사람들의 격려가 힘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위로에도 마음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그런 깊은 어려움 가운데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이 한나를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사람의 위로가 도움 되지 않아 힘들고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는 한나와 같은 자들에게 가슴을 후벼파는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정답을 얘기한다고 함부로 그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남의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 말로 가볍게 뭐라고 하는게 아니라, 대적하는 자가 본인도 모르게 되어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위로에도 해결되지 않는 내 마음이 있음을 깨닫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마음 챙김을 소중히 여기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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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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