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고백으로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평안이 자신의 마음을 챙겨 주시고 생각을 지켜 주시는 그런 놀라운 삶을 지금 주 안에서 살고 있음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간증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 두번째 간증은 주 안에서 자족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억울한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주 안에서 크게 기뻐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기뻐할 것 하나 없는 감옥에서 크게 기뻐하는 삶 그 자체가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기적의 삶이지요. 감옥 안에서 크게 기뻐한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남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 같이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헌금을 보내주고, 에바브로 디도 같은 사람을 자신에게 파송하는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놀랍게 자라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을 주님 안에서 생각한 성도들이 실제로 싹이 나게 했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지켜 주신 생각과 행동이 삶을 통해 싹으로 나오는 것을 보며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크게 기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삶 속에 주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바라보며 크게 기뻐하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주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바라보면서 크게 기뻐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능력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그 기적의 삶, 환경을 초월하여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로, 감사 충만으로 나가는 기적의 삶,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 챙김과 생각 지킴으로 누려지는 기적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삶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이 큰 기쁨이 채워지는 것이 기적의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역사 하시고 일하시는 교회, 주님의 뜻이 열매 맺는 교회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가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성도의 삶을 믿습니다. 두번째 사도 바울의 간증은 주님 안에서 자족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자족이라는 건 스스로 만족하는 것인데,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자유하거나 감옥에 매였거나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자족하는 삶을 배웠다는 간증입니다. 배웠다는 건 내 천성은 원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천성은 원래 그렇게 자족하는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모든 상황에 자족했던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삶의 굴곡을 통하여 훈련하고 빚어 가시며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낼 능력이 전혀 없는 천성을 거슬러 완전히 다른 그 자족의 삶을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 몸에 습득하고 익히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구체적인 예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역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의 심각한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그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정말 간절히 여러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말씀을 주시며 육체의 가시를 품고 그냥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평생 그 병에 시달렸지만, 그 병을 달고 사역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삶 가운데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매달리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입니다. 내 몸이 약하면 약한 대로 주님이 쓰시는 것이며, 내 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 감옥에 갇혀 있는 대로 쓰시는 것이며, 내 삶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쓰시는 것이며, 모든 비결을 사도 바울은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 가운데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확신하기에 어떤 형편에 처한든지 자족하는 것을 배우는 훈련의 기간,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 기간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믿었고 저와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믿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평탄하게 아무 문제 없이 직선으로 가기 원하지만 이 깨지고 아프고 문제 많고 하나님과 대적하며 거스르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계속 굴곡이 있는 삶을 살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배부르고 어떨 때는 배고프고, 어떨 때는 건강하고 어떨 때는 아프고, 어떨 때는 궁핍하고 어떨 때는 어려운 것이죠. 이럴 때마다 내 마음이 요동치고 내 마음이 염려와 근심 충만하고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이라면 세상과 환경에 철저히 길들여져 지배 당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족하는 삶은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내 삶 속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할 때는 부유한 대로 감사하고 어려울 때는 어려운 대로 감사하고 건강할 때는 건강한 대로 기뻐하고 아플 때는 아픈 상태에서 기뻐하는 삶, 그게 어떤 상황에도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놀라운 삶이자 기적적인 삶입니다. 이 자족하는 삶을 주 안에서 배우며 말씀을 통해 조율되고 교정되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정신없이 살지 않는 비결, 걱정/근심 충만에서 자유 하는 비결, 상황에 같이 흔들리지 않는 비결을 주님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4장 말씀을 통하여 아무것도 근심하지 않는 삶, 근심 충만 대신에 기도 충만으로 나아가는 삶, 감사로 주님께 기도하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이 내 힘을 넘어서는 영적인 능력이자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초월적인 삶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능력의 삶을 간구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며 주님께서 내 마음을 챙겨 주시고 내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요즘에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마음 챙김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을 챙기고 돌보는 많은 책들과 강의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마음을 챙기고 스스로 마음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은 내 스스로 마음을 지키고 챙기는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마음을 챙기고 돌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챙겨 주시는 분이 있고 내 생각을 지켜 주시는 분이 계심을 믿는 게 복음입니다. 내가 깨진 내 자아를 통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깨진 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깨진 이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나,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내 이웃,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이 세상을 통하여 내 생각이 주님 은혜 가운데 조율되는 삶, 이것이 놀라운 영적인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연장선상에서 결론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담고 채워야 하는 생각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마음에 채워 놓고 담아야 하는 생각들이 있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켜 주심을 분명히 믿으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런 것들을 마음에 담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생각하라” 고 명령하는 그 원어의 의미가 “마음속에 품으라,” “생각을 매어라.”는 뜻입니다. 내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 이렇게 단단하게 매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 마음대로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게 하지 말고 내 생각이 그리스도 십자가에 단단하게 매어 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내 마음과 생각이 지켜질 때 이런 생각들이 내 마음의 채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들이 채워지는가 하면 첫번째로 참된 생각입니다. 참된 생각이라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진리가 채워지는 겁니다. 가짜가 채워지는 게 아니라, 비슷한 유사품이 채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참된 진리의 말씀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경건한 생각인데 경건한 것이란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함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이 땅이 아닌 하늘의 가치와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에 매인 생각들이 나에게 채워지는 게 거룩한 생각입니다. 계속 말씀에 등장하는 생각들—옳은 생각, 청결한 생각, 사랑받을 만한 생각, 칭찬 받을만한 생각, 덕이 있는 생각—이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이 내 생각의 주인이 되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생각을 하게 될 때, 생각에 파트너가 예수님이 될 때 내 마음의 채워지는 생각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내가 단단하게 매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에든지” 이런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에든지…”입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이런 바른 생각, 예수님에게 단단히 매여 있음으로 나오는 생각들이 무엇을 하든지, 즉 내 삶의 어디를 가든지 일상 생활 가운데 이런 것들을 경험하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새벽기도 하는 시간에만 하는 생각이 아니라, 주일 3시간만 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와서도 이런 생각을 안 한다면, 교회에 와서도 머리에 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선은 교회에 올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각에 단단히 매여, 이런 바른 생각들이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을 넘어 우리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무엇에든지 이런 생각들이 내 삶을 지배하고 주도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생각을 다 하면서 합니다. 심지어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잠을 설치는 경우가 있는 게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 생각 중에 일부가 아니라 내 생각의 전부가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히는 사람,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서나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챙겨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내 생각을 지켜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내 속사람이 주님 앞에 조율 되면서 채워지는 귀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님이 주시는 생각들을 절대 무시하지 말고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내 마음에 채워지고 채우고 이런 생각들에 단단하게 매어질 수 있도록 늘 주님 앞에 내 마음을 지켜 주시도록 내 생각을 지켜 주시도록 기대하고 갈망하고 간절히 구하는 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생각들, 이 세상에 쏠려 있는 생각들,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생각들, 이 모든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며 이 시간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게 하는 삶,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되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삶 또한 내 힘을 넘어서는 사건이고 내 힘을 넘어 하늘의 힘이 부어지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조율 되어야 이런 생각의 변화가 될 수 있는 초월적이고 기적적인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그분에게 내 생각이 단단하게 매여 있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에 조율되어 매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그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증언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것도, 근심 충만 대신 기도 충만으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하는 것도, 그 기도를 감사함으로 주님께 아뢰는 것도 모두 내 힘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삶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 영적인 부어지는 능력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열망하고 이런 삶을 구하고 이런 삶을 매달리며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힘주시고 능력 주셔서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그리하면…” 다음에 나오는 약속이 뭐냐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부어 진다는 약속입니다. 근심 충만 대신 기도 충만과 감사 충만을 열망하고 간구하며 주님의 은혜와 힘을 구할 때, 주님께 부르짖고 나아갈 때 하늘에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는 걱정 충만 염려 충만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는 근심 충만 대신 기도 충만과 감사 충만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을 구하며 주님 앞에 매달리며 간구할 때 하늘에서부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기적과 같이 초자연적으로 성도들의 삶에 부어지는 겁니다. 즉 내 인생의 평안의 근원은 내 스스로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그냥 환경이 잠잠해 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평안, 내 풍랑을 다 덮은 평안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평강이 나에게 부어지는 삶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풍랑 가운데서도 염려와 걱정을 묶어 두고 잠을 청할 수 있는 전천후 평강을 하늘로부터 부어 주신다는 것이죠.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전천후 평강을 주님은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것을 실체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평강이 내 마음에 부어 지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기적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 마음을 지키시고, 예수님 안에서 내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조율되는 것이죠.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요즘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마음을 지키는 것이 요즘 시대의 화두입니다. 마음 챙김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챙기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과 열망을 가지고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마음을 챙기고 지치고 아픈 내 마음을 바라보며 스스로 내 마음을 위로하고 내 마음을 챙기는 게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일상에서 내 마음을 지키고 내 마음의 챙기는 것을 인식하고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은 귀합니다만,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챙기는 것이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시작 이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내 마음을 지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챙기는 것을 넘어서는 게 복음입니다. 주님 안에서 내 마음이 챙겨 지는 것 주님 안에서 내 마음이 지켜지는 것을 경험하는 게 복음입니다. 내 스스로 마음을 지키고 챙기는 게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마음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주님께서 부으시는 평안으로 주님이 내 마음을 챙겨 주시고 내 마음을 지켜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마음을 챙기고 마음을 지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챙겨 지는 것이며 마음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 있고 내 마음을 챙겨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게 복음입니다. 두번 째는 주 안에서 내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내 마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 계시고 내 생각을 챙겨 주시는 분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챙겨 주시는 것을 넘어 예수님이 내 마음속 생각을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근심 충만이 왜 그렇게 익숙하고 활성화되며 최적화된 삶을 살게 되냐하면 내 마음속 생각이 염려에 활성화되고 염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의 모든 생각이 염려를 중심으로 모든 게 왔다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최적화되고 활성화된 내 마음속에 생각의 틀이 내 삶의 모든 것을 염려 충만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내 마음속에 생각은 끊임없이 상처 받고 왜곡된 내 자아와 생각을 하면서 생각이 타락하고 변질되어 갑니다. 나의 마음속에 생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상처받고 왜곡된 내 주변의 사람들과 생각하면서 생각이 타락하고 변질됩니다. 내 마음속 생각은 끊임없이 상처와 왜곡으로 점철된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며 생각이 타락하고 변질됩니다. 그런 왜곡되고 타락한 생각이 반복되게 되면 그 염려와 근심이 고착화되고 익숙해져서 생각의 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건져 주셔서 나의 마음속의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내가 스스로 내 자신과 생각하지 않고 내 주변의 사람이나 환경과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하는 것,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생각의 파트너를 예수님으로 바꾼다 이렇게도 표현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 로 바꿔 주심을 통해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나,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세상,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이웃으로 내 생각을 바꾸어 주고 내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 이게 진정한 마음 챙김입니다. 평화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주님이 부어 주시는 하늘의 힘입니다. 그 하늘의 평화가 나에게 임하고 나에게 덮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마음을 지키는 것을 넘어 내 마음속 생각을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간 내 삶 가운데 주 안에서 내 마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 계시며 내 마음을 챙겨 주시는 분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내 마음속 생각까지도 지켜 주시는 그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 이심을 선명히 믿으십시오. 하늘에서 부으시는 놀라운 은혜로 내 마음을 챙겨 주시고 생각을 지켜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십자가 밑에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내 마음을 챙겨주시고 내 생각을 지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아래서 하늘의 평안이 임하고 나의 생각과 마음이 지켜지며 살아가는 이 초 자연적인 인생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며 하늘에 매여 살아가는 삶을 선명하게 살아 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염려를 중단하는 힘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 능력입니다. 큰 병을 기적적으로 고침 받는 것만큼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 염려를 중단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치는데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는 삶, 그것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염려를 중단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이 딱 맞닥뜨렸을 때 인생의 풍랑 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결국 염려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 충만과 기도 충만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이죠. 본능적인 삶에 끌려다니면 결국 익숙하고 활성화된 염려와 걱정충만으로 확 몰입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염려를 중단하는 놀라운 비결은 내 본능을 거슬러, 나의 익숙함과 활성화된 삶을 넘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는 겁니다. 예정에 없는 인생의 풍랑이 찾아올 때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근심과 염려를 멈추고 기도할 수 있는 삶,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주시는 영적 능력이 고 내 힘을 넘어서는 기적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기적의 삶은 오직 기도와 간구하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매여 산다는 것은 내 몸과 생각이 어디에 활성화되고 어디에 최적화는 것인가 하면 염려를 멈추고 기도하는데 최적화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면 우린 자동적으로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 하는데 활성화되어 있고 최적화 되어 있는데, 이런 우리의 삶 속에서 풍랑 속에서 근심과 염려를 멈추는 말씀과 기도에 최적화되고 활성화되는 삶, 모든 일을 기도와 간구로 매달리는 이 영적 능력을 부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혼자 그것이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에서 중보기도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하며 몸에 베어 활성화되고 최적화 될때까지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기도의 태도입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해 기도할 때 태도가 중요한데 바로 감사함의 태도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염려를 멈추는 기도의 비결, 근심 충만 대신 기도 충만으로 나아가는 비결은 바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어려움과 풍랑 가운데 기도할 때 감사함의 태도가 아닌 협박의 기도나 거래의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막 협박하며 이렇게 안 들어주시면 나는 교회를 떠나고 신앙 떠난다고 부르짖거나, 이거 해주시면 저거 드리겠다는 거래를 하려 하기도 합니다. 까딱 잘못하면 인생의 어려움과 풍랑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막 깨우며 예수님 여기서 뭐하시는 거냐고 예수님을 책망하고 협박하듯이 기도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거래하려는 태도, 예수님을 협박하려는 태도는 은혜가 하늘에서부터 담기는 데 적합하지 않은 태도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은혜가 담기는 태도는 이 모든 것을 구할 때 염려를 멈추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할 때 감사함의 태도로 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은 영적 태도이고 영적 능력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풍랑 가운데 감사함의 태도로 기도하는 것, 이것 또한 놀라운 삶이자 내 힘을 넘어서는 기적의 삶, 초자연적인 삶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매일 매일 기적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기적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초자연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인생 근심을 멈추는 인생도 기적의 삶입니다. 근심 충만 대신 모든 것을 기도하는 기도 충만의 인생도 기적의 삶입니다. 큰 풍랑의 절박함 가운데 기도를 거래와 협박 대신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도 기적의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 하고 내 힘을 넘어서는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역사와 은혜로 살아내는 영적인 능력임을 믿습니다. 이런 놀라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간절히 사모하며 열망하며 주님께 찾고 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구하고 찾고 부르짖는 자들에게 그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암송하는 분들도 많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고, 특별히 응답받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나눌 때 자주 인용하며 마음에 새기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통치와 다스림, 삶의 방식이 아닌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 하늘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어제 배웠던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 하는 삶은 내 힘을 넘어서는 삶이자 기적적인 삶입니다. 오직 주님께 공급 받아야 되는 삶이자 영적인 능력으로서 기쁨과 관용의 삶이라는 것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 주먹 쥐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나를 다그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 이런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영적인 능력을 하늘로부터 부음을 받고, 주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삶입니다. 같은 선상에서 오늘 말씀을 깊이 들어가기 원하는데 첫번째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살아가는 삶, 이게 나의 힘으로는 100% 불가능한 삶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염려 충만의 삶을 당연한 삶으로 여기고 자연스러운 삶으로 여 깁니다. 자신의 삶 속에 염려 충만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의 염려들도 모아 모아 가지고 내가 다른 사람 것들도 염려해서 밤잠을 설치고 쉬지를 못합니다. 근심과 염려가 그냥 내 삶의 습관이 되어, 염려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되어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첫 번째 반응이 계속 염려가 되도록 염려를 활성화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염려와 더불어 살고 염려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것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에 최적화된 인생을 살고 염려가 활성화 된 인생을 살며 모든 것을 염려하면서 내 모든 것을 염려 가운데 헤매게 만드는 삶에 익숙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는 것이죠. 근심과 염려의 삶이 비정상적이고 불편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어색해져야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염려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염려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내 몸과 마음만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염려가 영적 질병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습관적으로 걱정하고, 염려에 활성화되고 최적화 되어 근심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게 큰일날 일이고 잘못된 일이며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염려 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권유하신게 아니라, 아주 강한 명령어로 “ 근심/염려 하지 말라.” 명하신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이것은 강한 명령형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 있어서 “염려를 중단해라.” 명하는 것입니다. 염려와 불안에 눌리고 우리는 염려와 불안에 최적화되고 활성화된 삶에서 깨어나 염려를 지금 당장 중단하라…명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이 말씀을 들으면 이미 마음속에 이건 실천 불가능…이라고 여기고 접어 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접어 두면 안된다는 거예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도 기적적인 삶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드러내는 삶도 초자연적인 삶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도 초자연적인 기적의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내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그 기적의 삶을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주님께서 다스림과 통치 가운데 부어주시는 영적 능력입니다. 염려를 중단하는 힘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 능력입니다. 큰 병을 기적적으로 고침 받는 것만큼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 염려를 중단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염려를 중단하는 영적 능력을, 하늘의 뜻과 다스림이 임하는 이 놀라운 삶을 우리가 먼저 갈망하고 간절히 구하고 간절히 두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기도제목을 간절히 아뢰며 “주님 내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 낼 수 있도록 하늘의 은혜를 부어 주시고 영적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간절하게 구하고 갈망 하십시오. 항상 기뻐하는 삶,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염려를 중단하는 삶은 내 힘으로 절대 불가능하니 하늘의 은혜에 매여 있게 하시고 이 기적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내는 영적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그 기도 가운데 이 놀라운 영적 은혜와 능력이 부어 질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삶에 대한 실천적인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기뻐하는 삶, 두번째는 관용하는 삶입니다. 두 번이나 기뻐하라는 말씀을 강조하면서 신앙생활의 본질은 기쁨임을 강조합니다. 종교나 율법의 행위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과 자발성, 열망이 이끄는 신앙 생활, 복음으로 변화한 속사람이 진심으로 기뻐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옴이 우리들의 본질적인 신앙생활의 동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은 항상 자발성을 동력으로 내 마음이 주님을 구하고 열망하며 기대하는 가운데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항상 기뻐하고 기쁨 충만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뻐하긴 기뻐하는 데 그 기쁨이 지속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인해 기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잠깐 반짝하다 사라지는 기쁨들을 찾아 헤메기에 하루이틀 기뻐하지 결코 지속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고갈 되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기뻐하고 하루이틀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겉에 환경의 변화나 사람들을 통하여 잠시/반짝 기쁨을 누리고 삽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성도들의 기쁨이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겁니다.내가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될 때 누리는 놀라운 신비는 겉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이 나를 기뻐하게 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기뻐하는 겁니다. 겉으로 봐서는 기뻐할 게 없는데 기뻐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과 같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어도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반짝하고 사라지는 기쁨, 고갈되는 가짜 기쁨, 사람들을 통한 기쁨들을 넘어서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라이프스타일로 사는 삶의 비결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기쁨은 능력, 놀라운 영적 능력인 것입니다. 기쁨은 성도인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으로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는 겁니다. 외적인 기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솟아나오는 기쁨,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누리는 삶, 그럴 때 하늘 문이 열리며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나 혼자 기뻐하는 기쁨이 아니라 하늘에서 예수님도 함께 기뻐하시며 예수님 기쁨 내 기쁨 되는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주 안에서 기쁨 누림으로 마음에 풍랑이 잠잠해지는 기쁨을 실체로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어 주시는 기쁨이 내 인생의 풍랑을, 내 마음의 풍랑을 덮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에 계시기 때문에….그래서 진짜 기쁨이란 항상 내면적이고 주님 안에서 찾는 기쁨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며,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할 때 그 기쁨이 본질적으로 내 삶의 기쁨을 지속시키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주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 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은 넉넉한 마음, 마음이 넉넉하고 관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마음이 메마르지 않고, 마음이 쪼그라 들지 않고 마음이 넉넉한 삶, 관대한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도전은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넉넉한 마음으로 관용 하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내 주변의 친한 사람 나랑 잘 아는 사람, 몇몇 사람들에게 넉넉하고 넉넉한 마음을 베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관용 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실천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넉넉하게 마음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친한 사람이나 특정한 사람에게 관용하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살도록 권면하는 사도바울의 권면은 그런 의미에서 초자연적 삶이자 기적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은 넉넉한 마음으로 사는 관용의 삶을 “알게 하라”고 권면하는데, 이 말씀이 수동태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넉넉한 마음의 가졌다고 스스로 광고하는 게 아니라, 내가 부르는 호칭 대신 내 넉넉한 마음의 삶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알려져,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찬 이란 말도 동일한 것이죠.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성도라고 스스로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크리스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스스로 살아내는 삶이 아니라 부어지는 힘과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 굳게 서면 하늘의 기쁨이 내게 부어져 덮이기에 내 마음이 넉넉해 지고 풍성해지는 것이고, 그 주님이 주시는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게 되는 것이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의 풍랑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주 안에서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붙들며 풍랑 가운데 잠을 잘 수 있는 놀라운 비결, 그것이 바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영적인 능력을 가진 천국 백성의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기뻐하는 삶도, 모든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으로 사는 삶도 다 영적 능력으로서 기쁨이자 영적 능력으로서의 관대함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힘을 넘어서는 기쁨이고 내 힘을 넘어서는 관대함입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항상 기뻐하는 삶, 우리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는 삶,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한 기쁨이고 관용입니다. 내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며 넉넉한 마음으로 그를 타자로 생각하지 않고 나와 관계없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으며 그를 향하여 넉넉한 마음을 품는 이 기적의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거룩하고 구별된 삶일 줄 믿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던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그 기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기쁨이 내 인생의 풍랑을, 내 마음의 풍랑을 다 덮어버리는 이 기적을 현재형으로 경험하기를 사모하고 기대하며, 하늘을 향해 은혜를 간구하며,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4장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축복의 말과 구체적 권면들 입니다. 성경에 가장 근접하고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여기는 초대 교회에도 외부적 핍박 외에도 내적 도전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복음을 왜곡하고 흔들려 해도, 아무리 로마 시민권이 최고 인줄 알고 힘과 권력으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깔려 있어도 여전히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면류관을 기억하며 본질에 충실히 주님 앞에 쓰임 맞는 많은 성도들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외부에서도 어렵게 하고 안에서도 어렵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 그 본질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님의 면류관이자 기쁨인 것을 잊지 말라고 권면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본질 가운데 서 있기 위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해야 될 첫 번째가 바로 “주안에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 바로 서는게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서는 게 중요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기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 것도 사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분주하게 뛰어 다니기 전에 주 안에서 예배하고 주 안에서 사역 하는 게 핵심입니다.
여기서 “주 안에서” 서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하여 내가 자리를 사수하고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내가 제대로 주님의 군사 답게 서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성도 답게 서야 될 자리가 있습니다. 성도 답게 지켜야 될 자리가 있고 사수해야 될 자리가 있습니다. 그게 예배 자리일 수도 있고 기도의 자리일 수도 있고 섬김의 자리일 수도 있고 내 세상에서 직장에 자리일 수도 있고 엄마로써 아빠로서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교회 안에서 된 교회 밖에서건 우리가 주 안에서 바로 서는 자리가 되어야 하고 절대 그것을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인생에서 신앙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절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가 주 안에서 자리를 지켜서 본질을 붙들고 주님 앞에 조율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권면이자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권면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를 사수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사명을 세우는 일임을 잊지 않으며 그 세우는 자리로 저와 여러분들이 나아가기 원합니다. 두번째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권면하는 것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겁니다. 주 안에서 바로 서기 위해서는 하나 되는 것, 같은 마음을 품는 게 참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그 당시 빌립보 교회의 아주 유명한 여선교회 회장 들이에요. 지금도 보면 교회에는 대체로 여성도들이 많지만 특별히 초대 교회 가운데 빌립보 교회는 여성 지도자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개척 당시에도 루디아라는 여인의 회심을 통해 교회가 개척되었고, 빌립보 교회에는 여성들의 비율 뿐 아니라 교회 안에 헌신된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근데 그들이 헌신하고 열심히 있는 건 참 좋았는데 그들 가운데 하나 되지 못하는 반목이 있었습니다. 봉사와 헌신으로 열심이 뛰는 것을 좋았는데,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일을 하면서 주도권 싸움과 갈등이 있어서 이게 교회 차원에서도 큰 도전과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어지간하면 이런 얘기 안 했을 텐데 성경에 남길 정도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런 권면을 했겠습니까? 이 두 여인의 갈등과 반목이 교회 전체를 휘청거리게 하는 큰 일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여인 다 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헌신된 일꾼이었습니다. 너무 소중한 일꾼이었고 중요하니까 제발 마음을 맞춰서 주 안에서 서로 등 돌리지 않고 주님 보다 앞서지 말고 주님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기를 간절히 권면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등하고 반목하는 이 두 여인을 향하여 너희들이 주 안에서 동역자임을 잊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주 안에서 동역자가 누구입니까? 주 안에서 동역자란 바로 멍에를 같이 지고 자는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동역자 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할 때 부담을 같이 메고, 멍에를 같이 메고 한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멍에를 메면 불편합니다. 멍에를 매면 자유롭지 않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사명을 위해 그 명예를 같이 매는 겁니다. 멍에와 부담을 같이 메고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제대로 서기 위해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명 가운데 선명하게 쓰임 받기 위해 목회자가 하는 것 중에 중요한 사명이 평신도 동역자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지고, 함께 부담을 지고, 같이 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마음과 한 방향이 되어야 멍에를 함께 맨 동역자들을 통해 교회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 열심히 하다가 교회 안에서 등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일한다고 하다가 갈등하고 반목 하면서 주님께 영광 가리는 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이 좀 천천히 가더라도 일이 좀 더디게 가더라도 서로 등 돌리지 않고 마음을 맞춰 하나 되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잘 이끌림을 받고 나아가는 삶, 주님께서 주도하시고 이끄심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대로 서며 그 자리를 지켜 내는 게 바로 그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복음적 질서로 살아가는 것은 절대 자연적으로 익숙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 받아야 복음적 질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주 안에서 녹아 지지 아니하면 주님이 중심이 되셔서 일하지 아니하면 내가 주님보다 앞서 가게 되고 착각하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 마음을 품지 않고 갈등 구조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함께 멍에를 지는 자, 함께 부담감을 지는 자,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함께 관심과 기도를 집중하는 자, 그 동역자들이 많이 세워져 한 마음과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교회가 왕성히 일어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주 안에서 함께 부담과 멍에를 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명이 쓰임 받는 데 함께 헌신 하시며 복음을 위하여 뛰며 복음을 위하여 함께 힘쓰는 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사시면서 눈여겨 보는 사람들이 계십니까? 일반적으로 내가 주목하고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주로 앞서 나가는 사람이라든지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 혹은 나에게 이익과 유익을 줄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닮아가고 싶고, 저 사람같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눈여겨 보게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눈여겨 봐야 되는 사람들은 나에게 세상 유익/이익을 주거나 혹은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거나 앞서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앞서 나가는 사람들을 주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을 눈여겨 보고 주목하는 삶, 그게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조율 되는 삶의 변화라는 겁니다. 내가 눈여겨 보는 사람들, 주목하는 사람들이 부자들 잘 나가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유익을 주고 이 세상에서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하게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를 본 받으라는 것은 바울의 행위나 백그라운드, 껍데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사모하는 그 기대와 갈망, 간절한 소원과 원함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눈여겨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대다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살고 있다고 강력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안타까운 현실은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 그러고 천국 간다고 얘기하는데 하늘나라에 시민 답게 살고 싶은 기대와 열망도 없고, 하늘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관심 가지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 백성으로서 소원과 원함이 없이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강력 경고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게 3 장 초반에 나오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율법주의자들 외에도 신비주의자들, 인본주의자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물 타고 왜곡하고 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냥 신사 같이 그런 걸 경계해야 됩니다 조심하십시오….이렇게 말하지 않고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강력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그들을 사도 바울은 개, 행악자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만큼 이게 심각한 문제고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미혹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가를 19절에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그들은 끝이 멸망이고, 자기 배부르게 하기 위한 신을 섬기고,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왔다 갔다 하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그들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이 있는 자들로 결국 끝에 멸망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게 지내는 게 그들의 신이 되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배를 채우기 위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만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 예수님이 거래와 이용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며 교회에 열심을 내는 왜곡과 물타기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 신앙 생활의 모든 목적은 그냥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고 그냥 자녀들 좀 잘 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 우리의 소망과 열망을 하늘에 두지 않고 땅의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이렇게 왜곡과 물타기를 통하여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율법주의, 신비주의, 인본주의를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는 겁니다. 이런 왜곡과 물타기로 십자가 복음을 흐리게 만드는 미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로마 시민권을 갖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은 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고 자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너 지금 로마 시민권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정말 중요한 건 우리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붙들고 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내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다스림과 통치가 땅이 아닌 하늘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다스림과 통치는 하늘에서부터 받는다는 것을 철저히 믿는 게 천국 시민입니다. 또한 내 소속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란 것을 분명히 믿어 이 땅에 매이지 않고 하늘에 매어 살아가는 자가 천국 시민입니다. 그 삶을 기대하고 열망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바로 천국 백성 답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눈여겨 보고 주목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하고 싶고 내가 갈망하는 것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앞서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내 삶의 기대와 갈망, 원함과 소원이 하늘을 향하는 자들로 변화되기 간절히 사모하기 원합니다. 내 안에 기대와 갈망, 원함과 소원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물질 가치에만 쏠려 있는 것이 큰 영적 문제임을 깨닫고 정신 바짝 차리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매여 사는게 불편하고 부담이고 천국에 대한 기대와 갈망은 없고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되냐고 세상을 늘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내 마음이 갈대와 같이 왔다 갔다 하는 자들이 바로 영적으로 어린아이, 육신의 열망에 끌려다니는 그런 자들을 향하여 강력하게 얘기하는 사도바울의 외침을 마음에 담아 들으십시오. 십자가 복음을 왜곡하고 물타는 것은 그리스도의 원수같이 행하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자다. 내 인생의 본질을 바꾸고 내 영생을 책임지는 시민권이 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 그 삶을 기대하며 갈망하며 주목하고 나아갈 때 저와 여러분들이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될 줄 믿습니다. 나의 시민권은 오직 하늘에 있음을 믿으며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 그리고 하늘의 소속과 십자가에 매어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는 로마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못해 로마 문화에 젖어 살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이 주는 Pax Romana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황제의 힘과 권력을 가장 중요한 선이라고 생각하며 추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문화에 젖어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그런 비슷한 문화에 젖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고 부활의 권능에 참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힘과 권력을 추종하게 되는 본질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곳에 정신을 다 쏟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서 끝을 내게 될 것이며,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낸 후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으심 이후에 부활의 권능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음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언젠가 끝일 텐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죽고 난 후에 우리에게 부활이 있고 예수님은 그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 예수님의 핏공로로 말미암아 그 부활의 함께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딱 찾아오시고 나의 영의 눈을 열어 주시면 나의 삶에 영적인 큰 시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그 천국을 실체로 믿고 보게 되는 것이고 내 삶이 이 세상에 잠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그 주님의 큰 그림 가운데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 세상에 100년 정도 보냄을 받은 자, 파견 나온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100년 정도 잠시 보내신 이유는 그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 뜻이 열매 맺는 명을 받아 온 것을 믿고 파견 받은 기간 동안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그 영원한 천국을 실체로 바라보며 죽음이 우리에게 종착역이 아니라 환승역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사후 준비를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하며 살아가는 자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함께하는 자입니다 죽음 이후에 그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함께 참여함을 믿기에 동시에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한다는 건 로마로 상징되는 이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있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이 실체하심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라고 생각하며 물질 가치를 모두라고 생각하며 힘과 권력의 Pax Romana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흐름과 가치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역행 하며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살아가는 깨진 세상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과는 방향을 반대하며 하나님에게서 거스르는 것이 극대화 된 것이 로마 시대의 문화이며 가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거스르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이 세상과 문화 속에서 죽음 이후에 영생을 확신하며 그 부활의 권능을 믿기에,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짜를 보면서 우리 삶이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하게 알며 주님과 동행하며 이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그런 삶을 사도바울은 예수님께 잡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 잡힌 삶이란 예수님께 사로잡힌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라고 고백합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을 사로잡는 분이 계시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분에게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고 복음적 질서를 가운데 두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성도들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간다”고 고백합니다. 즉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채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는데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그 부르심에 따라 그 명을 이루고 뜻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이 때가 되면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때, 본향에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받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부름의 상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것을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걸어가지 않고 달려가는 인생, 그 명확한 삶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삶이었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 또한 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부르심으로 걷지 않고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길지 않은 이 세상 에서의 삶, 비본질적인 것이 아닌 본질적인 것에 나의 인생을 두고 나의 인생의 가치를 두고 예수님이 맡기신 그 명을 따라 푯대를 바라보며 주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열매 맺는 것을 열망하며 뛰어가는 인생,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달리는 인생 살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 인 줄 알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을 착각하고 살아가는 그 삶에서 건져 내셔서 나를 온전히 사로잡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에 함께 동참하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생이 있음을 분명히 선명히 믿으며 주님께서 맡기신 그 푯대를 향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십시오. 이 시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 가운데 부르심을 향하여 그 상을 기대하며 오늘도 앞으로 힘있게 달려 나가는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 생활 가운데 주 안에서 주시는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며 내적인 할례가 외적인 할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순전한 십자가 복음에 자꾸 물을 타고 왜곡하려 하는 그 할례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합니다. 자신 또한 예전에는 율법에 올인하고 목숨 거는 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를 충족시키는 모든 거 열심이 대단했던 사람이었고 예전에는 율법 준수라는 명분으로 초대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 섰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잘 지키고 율법 준수에 열심을 내며 목숨 걸면서 구원 받으려고 그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도 받고 안식을 도 철저하게 지키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열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그런 의로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거죠. 그 어떤 외적인 것들도 십자가 은혜 외에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내게 유익했던 율법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고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그동안 내가 율법을 통해 외적인 것을 통해 의를 이루는 것처럼 착각하며 그렇게 열심히 율법에 올인 했었습니다. 자신은 율법 준수 라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열심을 냈지만, 그것은 구원을 위한 의가 아니라 자기 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나의 구원, 나를 의롭게 하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information이 아니라 예수님을 맛보아 아는 지식이자, 예수님을 대면하여 아는 관계 언어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알게 되는 그 지식,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며 그 눈이 떠진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나니까 그 모든 어떤 것들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두 주님이 하셨습니다…이것만 철저히 고백하며 주님 앞에 자격 없는 자로, 죄인으로서 서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외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구원을 이루려 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선언입니다. 종교적 열심과 율법적 열심이 유익하고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까딱 정신 차리지 못하면 복음적 질서를 놓쳐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붙들고 메이는 대신 행위가 남고 내 자신이 남게 되면서 그냥 그 자체가 목적이 되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영적으로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는 수많은 사역들과 일들이 정말 귀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종교적 열심이 꼭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칫하면 본질을 잃어버리고 율법주의로 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늘 깨닫고 조심해야 합니다. 남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 않는 것, 남는게 내 열심이 남고 내 행위가 남고 내 자랑이 남으면 그게 바로 영적으로 해가 되는 할례파들의 문제였고 우리들의 문제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벌이지 아니하고 방심하면 본질이 빠진 종교적 열심과 그 행위가 결국 영적 생활에 해를 끼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을 내고 신앙 생활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로 죄인으로 주님께 무릎 꿇으며 오직 은혜를 간구하는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 때 그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선물로 주어짐을 철저히 믿는 겁니다. 내가 가진 의는 그런 율법을 통해 나온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철저히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들어오면 이제부터 우린 전혀 다른 관점과 가치관과 프레임으로 살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능력이 될 때 우리는 바로 그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의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며 그 의를 통하여 우리는 천국 백성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영적인 눈이 열려서 진짜 의가 무엇인지, 진짜 구원이 무엇인지가 보이는 겁니다. 하늘의 질서와 하늘의 원리, 바로 복음적 질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의는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선물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받은 의가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일방적인 선물로서의 의…이 은혜만을 붙들고 그리스도만 붙들고 다른 것들은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며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며 주님 은혜 가운데 철저하게 머물러 사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4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