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예후와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던 예후의 아들이었던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였던 요아스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은 예후로 의해 모든 것이 변하고 완전히 새로워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 받으며 예후는 아합 가문은 철저히 진멸하고 바알 우상들과 선지자들을 모두 무너뜨리며 새롭게 북 이스라엘을 세우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통째로 변화되는 것을 통하여 이제 이 나라가 새롭게 되며 새 출발 할 것 같은 큰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모습으로 북 이스라엘이 탈바꿈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후 이후 그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정말 그렇게 몰라보게 달라졌는가? 정말 그 나라가 그렇게 새롭게 되었는가? 안타깝게도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후 이후에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새로운 왕으로 바뀌자마자 옛적 모습으로 뒤돌아가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여호아하스의 의미가 “여호와가 붙들었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얼마나 이름이 좋습니까? 그런데 여호아하스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 예후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허무하게도 정반대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죄를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렸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름값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려 타락했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여호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람 군대라는 경고의 채찍을 보내셨습니다. 그 경고의 채찍을 통해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기 원하시는 아비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쳐들어왔고 북이스라엘은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공격과 수치를 당했는가 하면 마치 조선시대에 몽고가 세운 청나라로부터 받은 공격과 수치와 비슷합니다. 조선 시대 역사를 보게 되면 몽고가 청나라를 만들고 조선을 쳐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병자 호란으로 승리하고, 왕이었던 인조가 땅에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대고 그렇게 비참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청나라가 승리 후 돌아가서 끝난게 아니라 계속 조선의 조정에 내정 간섭을 하게 됩니다. 자꾸 이래라 저래라 위에서 자꾸 지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람 군대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해 승리한 이후,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 바로 내정 간섭을 심하게 하며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여호아하스가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또 하나님은 그를 불쌍하게 보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자를 북 이스라엘에게 보내셔서 아람의 공격과 수치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을 건져 주십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으면 여호아하스 왕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하며 이름값 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조율 받는 인생으로 하나님에게 붙들려 사는 삶을 살아가고, 아버지 예후의 모습으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기회를 더 주시고 은혜로 건져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아하스는 하나님에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에 묶여 떠나지 아니하고 심지어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큰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고 구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붙들려 사는 삶 대신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악한 삶을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주셔서 그 죽을 위기 가운데 아람의 손에서 건져 주셨는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가 완전히 그들을 박살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이번엔 아람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것입니다. 비행기 다섯 대, 탱크 10대 정도만 남기고 모두 박살이 나는 큰 패배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후의 손자이자 여호아하스의 아들이었던 요아스가 등장하는데, 그 또한 역시나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따라가는 삶을 답습했습니다. 아버지 여호아하스의 안 좋은점을 그대로 닮아 따라하는 겁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에 뒹굴며 사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는 죄악의 삶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이 북 이스라엘 왕들에게서 다시 한번 삶의 패턴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며 죄에 붙들려 죄에서 떠나지 못한 왕이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 요아스였습니다. 예후가 이루어 놓았고 닦아 놓았던 모든 개혁과 새로운 물결이 끊어지고 예전 모습으로 회귀하는 안타까운 모습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에게 묶이는 대시 죄에 묶여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이 악한 모습으로 왜 자꾸 회귀하고 돌아가려 합니까? 인간의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붙드는 대신 나를 의지하고 붙드는 삶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옛날 이야기로 끝나면 안되고, 우리 또한 이런 똑같은 패턴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이제는 새롭게 나라가 다시 새 출발 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실망스럽게 옛적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북이스라엘 왕들을 바라보면서 사실 이게 우리의 모습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정신 못 차리고 가만히 있으면 죄에 묶여 떠나가지 않고, 죄에 머무르며 죄를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죄에 묶여 머물러 있는 것을 거절하는 삶이고, 죄를 따라가는 대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이란 죄에 붙들리지 않는 삶입니다. 죄 문제를 그 어떤 것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삶입니다. 이 시간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고,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죄에 붙들려 사는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 붙들려 사는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죄에 붙들리고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처절히 절망하며 이 시간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여호아하스와 요아스를 반면교사 삼아 죄에서 떠나가며 단절하며 죄에 붙들리는 대신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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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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