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왕의 역사를 통해 증언하는데 두 나라 공통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멸망을 향한 내리막길로 질주합니다. 남유다는 요아스와 아마샤로 이어지는 용두사미, 즉 처음에는 하나님에게 신실했다가 나중에 변질되고 타락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면 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악한 모습으로 우상숭배와 타락에서 떠나지 않고, 결국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으로 결론짓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동명이인이기에 보통 여로보암 2세로 부르는데, 41년 동안 왕으로서 있으며 받은 하나님의 평가는 아주 냉정합니다. 여로보암의 이름값을 하듯이 조상 여로보암의 악한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악한 왕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로보암 2세로 말미암아 경제 재건과 나라를 확장시킨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41년동안 왕으로 있으며 겉보기에는 굉장히 대단했고 놀라운 업적을 많이 세운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가 따라간 여로보암의 죄는 여러 가지로 우리가 표현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현실적으로 유리하면 그 유리한 길을 기쁨으로 선택하며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 여로보암 2세의 선택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으냐 옳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잘 지내는데 현실적으로 더 유리하냐, 유리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죠. 대표적 예로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 없으니까 여기 가까운 곳에서 편하고 쉽고 간단하게 예배 드리라며 북 이스라엘에 산당을 만들고 우상을 만드는 것이 여로보암의 실용주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안정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은 언제든지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 이게 북 이스라엘의 신앙 타락과 우상숭배로 변질된 여로보암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 신앙적 선택보다는 현실적인 결과가 항상 중요하게 살았던 실용주의 노선을 갔던 사람이 여로보암 2세이고, 그런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시는 겁니다. 사실 이 모든 업적들은 여로보암 2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하여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약속해 주신 결과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선지자 요나에 대해서 굉장히 좀 미숙하고 불평 많은 선지자로 여기지만 사실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특별히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재건과 확장의 약속을 대언한 훌륭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때 그렇게 놀라운 축복으로 경제가 부흥하고 나라가 커지고 확장하게 되는 것을 통하여 정말 원했던 것은 영적인 재건이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재건을 넘어, 나라의 안정과 재건을 넘어 하나님만을 섬기는 시간으로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신앙의 재건을 정말 원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이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 때 경제가 부흥하고 이스라엘 영토를 많이 회복하게 하시며, 북 이스라엘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랍게 영토가 확장되며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삶이 윤택해졌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신앙의 기준이 분명히 서 있는 왕이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나같이 부족한 것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면서 이렇게 복을 주셨구나….믿으며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와 기회로 삼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대단해서, 나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 이루어진 결과라고 착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안정으로 먹고 살만 해지고 영토 확장이 형통이라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국토는 확장되고 경제는 나아져서 백성들은 살만 해졌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전혀 형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제 재건이 전혀 신앙 재건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부국강병과 경제 재건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형통은 바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늘 누리고 살아가는 것임을 철저히 망각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로보암 2세의 겉보기에 수많은 업적들과 경제 재건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형통을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간 왕, 하나님을 바라 보지 않은 왕을 하나님께서는 왜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부국강병과 영토확장, 경제 부흥이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이것은 형통이 아니라 재앙이고 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삶이 어렵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도구가 되어 은혜를 구한다면 그 잠시의 어려움과 고통의 눈물이 곧 지나가고 결국 우리에게 하늘의 축복이 이어지게 하는 도구가 되는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기를 계속하며 온 나라를 영적인 내리막길로 걷게 만들고 영적 재건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다가올 파멸과 멸망의 길로 질주하게 하는 나쁜 왕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이런 똑같은 문제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눈에 보이는 열매들이 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가 될 때만 진정한 형통입니다. 이 모든 게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게 축복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열매들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한다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의 거울로 삼아 그 어떤 것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부유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나의 형통의 기준이며 나의 신앙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내 삶의 생사 화복이 내 삶의 모든 기쁜 일과 슬픈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관심사와 초점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맞춰져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형통임을 믿으며 주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
아카이브
1월 2025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