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려 하는 좋은 마음과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웃사가 죽는 큰 사건을 통해 타산지석으로 삼아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통해 추진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 하시는지를 정확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일이어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렇게 인간적인 쉽고, 편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그것을 심각하게 처리하심을 뼛속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오벧에돔의 집에 있었던 법궤를 드디어 가지고 다윗성으로 옮겨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마치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아간의 잘못을 처단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에 다시 한번 아이성을 치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다윗 왕은 비장한 마음으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가 그렇게 원했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실패를 넘어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방법을 철저히 지키는 다윗 왕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번이나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법궤 운반의 책임을 이번에는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수레로 편하고 쉽게 가져오려 하다가 어려움을 겪은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불편하고 번거로워도 철저하게 주님이 명하신 방법으로 궤를 메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요구하시는 방법은 때로 이렇게 불편하고 번거롭고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길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을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가져오려고 하고 편하게 부담없이 가져 오려 하는 자세,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져오려 하는 이 태도 자체가 하나님을 하찮케 여기는 자세이자 태도임을 뼈속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철저하게 굴복하여 하나님의 궤를 힘들어도 불편해도 번거로워도 메어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법궤를 가져오는 것 또한 블레셋과 전쟁을 하듯 내면의 영적 전쟁 일부임을 정확하게 깨달아 주님만의 의지하며 주님의 뜻 가운데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마침내 들어오는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며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이 너무 좋아서 기뻐 춤을 추었고, 다윗왕 자신도 얼마나 좋았냐면 다윗왕이 하나님 앞에서 뛰놀고 춤추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춤추며 기뻐하는 모습, 하나님 은혜 안에서 기뻐 뛰노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왕인데 그래도 사람들 앞에 백성들 앞에 체면을 지켜야 되는데 이 시간 다윗은 그런 체면 같은 거, 사람들 시선 신경 쓰지 않는 것이죠.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왕이라는 신분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뛰놀고 춤추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왕이 된 것, 통일 왕국이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높아진 것,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는 왕이 될 조건도 없고 실수도 많고 부족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을 왕으로 삼으신 그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는 겁니다. 그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그 하나님 앞에 은혜에 감격하여 기뻐 춤추며 뛰놀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다윗의 순전한 모습, 하나님을 향한 열망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결국 다윗왕 자신을 살리고 모든 백성들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은혜 안에 춤추며 기뻐하고 뛰노는 것을 통해 이 시간 우리들의 주님을 향한 감격과 열망이 되기를 사모해봅니다. 사실 성도로서 우리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주일 성수 해야 됩니다. 구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바쁨에도 하나님을 위해서 주일 성수 한다고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주일 성수가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 성수의 예배를 지키는 게 아니라 주일 예배가 내 인생을 지켜주는 복이 되는 겁니다. 나의 그 구별된 시간과 나의 구별된 예배를 통하여 그 예배가 나를 살리고 나를 지키고 나를 보호하는 겁니다. 이 험한 세상에 혼탁한 세상에 어두운 세상에 내 영혼을 깨우고 신앙의 기준을 바로 세워지고 지켜주는 게 바로 주일 성수입니다. 새벽 기도의 은혜가 뭡니까? 내가 새벽 기도에 헌신하는 게 귀합니다. 새벽에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하루에 첫 시간을 드리며 헌신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게 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벽 기도를 지키는 게 아니라 새벽 기도가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가 결국 나를 지키는 도구가 되고 나를 살리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믿을 때 그 새벽 기도가, 그 주일 예배가 나의 기쁨과 감격의 통로가 되는 것이죠. 이걸 깨달을 때 의무와 책임감을 넘어 주일 성수가 새벽기도가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다윗과 같이 기쁨과 감격으로 예배 자리에, 기도의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감격과 기쁨을 혼자 나누기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 그렇게 은혜 안에 춤추고 기뻐한 후 그 감격을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떡과 고기와 포도주 포도 한 덩이씩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걸 통하여 온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뛰노는 은혜의 도가니가 되기를 다윗은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다윗도 기뻐 춤추며 은혜 안에 뛰놀고 있습니다. 온 백성도 기뻐 춤추며 뛰놀며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은혜 안에 뛰놀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뛰놀지 못한 유일한 한 사람이 바로 미갈입니다. 오히려 다윗이 이렇게 은혜 안에 뛰놀며 기뻐하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업신여겼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체면도 다 팽개치고 왕이 저럴 수 있는가….그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와 온 백성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큰 아들만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밖에서 화가 나 있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미갈이야 말로 이 시간 우리가 조심해야 될 대표적인 모습이 아닌가 마음에 새겨봅니다. 우리가 다윗과 온 백성들과 함께 주의 은혜 가운데 기뻐 뛰며 즐거워 할지, 미갈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뛰놀지 못하고 은혜 안에 뛰는 자들을 멸시할지…이 시간 결단하기 원합니다. 다윗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의 삶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오심을 기대하고 바라며 은혜 가운데 기뻐 뛰놀며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머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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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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