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통일 왕국의 왕이 된 다윗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나서 그에게 협조하는 주변 나라의 왕과 그를 대적하는 주변 나라의 왕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협조하고 돕는 왕이 생겼는데 두로왕 히람이고, 다윗에게 적대하고 부딪치는 왕은 블레셋 왕입니다. 먼저 다윗에게 협조하는 왕인 두로의 히람은 목수와 석수들을 보내며 다윗에게 백향목을 가지고 궁궐을 짓도록 돕습니다. 왜 그러냐면 사울과는 달리 다윗이란 왕이 지도자가 되면서 그 나라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왕 하나 바뀌었는데 나라 전체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주변 왕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주변 나라의 왕이 알았다는 겁니다. 두로왕은 무엇을 알았냐 하면 다윗이 이렇게 높아지고 세워지고 강해지는 것이 하나님 때문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협조적인 두로왕 히람은 이렇게 다윗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왕이었고, 나중에 다윗이 죽은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도 백향목을 제공하는 중요한 도움이 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워 주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나라를 높이시고 여호와께서 그를 강하게 하심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해지고 높아지고 힘이 생겼음에도, 온 통일 왕국을 세운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가 되었으며 두로 왕은 이런 다윗의 모습을 알고 봤기 때문에 그렇게 협조적인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에서 승리하고 잘 되고 높아질 때 중요한 영적 결정을 통해, 그 승리가 지속되고 더 큰 은혜가 부어지는가 아니면 그 작은 승리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망하는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싸하게 얘기해도 나의 진심 속마음은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승리의 원인, 이렇게 높아진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처절하게 고백하는 데 달린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 가운데, 나를 우겨싸고 힘들게 하는 적들이 있을 때 내 힘과 눈에 보이는 환경을 통해 계산하는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중심의 고백이 분명한 다윗에게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부어지는 것이고, 그 진짜 신앙은 주변 사람들이 다 알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신뢰하는 진짜 신앙 생활을 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서 나를 이끄시는 주인이 하나님이 분명하다면 그 고백적 신앙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전쟁터와 같이 처절한 현장에서 나의 힘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으며 나를 높여 주신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선명히 고백하기 원하십니다. 반대로 다윗에게 반대하고 충돌하고 부딪치는 왕이 있었는데 바로 블레셋이었습니다. 블레셋은 다윗을 보기에 굉장히 얕잡아 볼 수밖에 없는 게 예전에 다윗이 블레셋 왕 밑에 신하와 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밑에 와서 부하로 있던 자가 통일 왕국을 세웠다니까 다윗을 당연히 만만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네가 통일 왕국을 세웠다고? 너 이제 내 밑에 굴복 해야지 살 수 있어…그러면서 지금 쳐들어오는 겁니다. 소위 말하면 큰 형님이 길들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내려 온 것입니다. 그때 자신을 얕보고 쳐들어오는 블레셋을 향해 바로 진격하는 대신, 자기의 힘과 능력을 과신하지 않고 엎드리며 하나님 앞에 먼저 여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것을 다윗이 아주 어렸을 때 골리앗과 싸울 때도 지금 왕이 되어 블레셋과 싸울 때도 변하지 않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다윗이 위대한 점이며 우리가 다윗을 통해 본받고 붙들고 기도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 결과 블레셋 사람이 모두 패배하게 됩니다. 심지어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사울왕과 그 군대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부적과 같이 하나님의 궤를 앞서서 싸움에 나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궤도 빼앗기도 크게 패하고 도망 왔는데,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미신과 같이 들고 나온 우상을 다 버리고 도망간 것입니다. 왕이 제대로 신앙 가운데서 있으니까 나라가 이렇게 변하는 것이며 그 전쟁을 통하여 그 우상 숭배하는 나라들이 패배하며 그 하나님 은혜 가운데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끈질긴 블레셋은 한번 크게 패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두 번째 전쟁을 걸어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 전쟁에서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승리했다가 그 다음 자만하고 나서 아이 성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의 위대한 점은 승리 이후에도 다윗은 한번 이겼다는 것 가지고 자만하지 않고 엎드립니다. 자만할 만도 한데, 이제는 내 방식대로 내 힘을 의지하여 할 만한데, 다윗은 동일하게 하나님께 여쭈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보다 절대 앞서 나가지 않겠다는 그의 분명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직접 나가서 싸우지 말고 숨어서 기습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또 놀라운 승리를 부어 주십니다. 이 모든 결과가 바로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세운 통일 왕국이 자기 능력으로 세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나라이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세웠다는 것을 선명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이 되라고 기름을 부으신 이유는 자기 자신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백성들을 세우고 그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항시도 잊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고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다윗을 세우고 높이며 이 모든 게 다윗왕 때문이라고 귀에 듣기 좋은 얘기들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때 다윗은 흔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있음을 붙들었습니다. 나를 세우시고 나를 높이시는 것은 하나님이고 나의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선명히 붙들고 있었기에 그 주변에 돕는 두로왕이 나오게 되고, 그를 대적하는 블레셋을 물리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잘 되고 있을 때, 승승장구하고 평탄할 때 다윗의 영성을 배우기 원합니다. 조금만 승리하고, 조금만 잘 되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나 때문에 그런 것처럼 공로를 찾으려 하는 악한 습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이 시간 세워졌습니까, 치유를 받았습니까, 높아졌습니까, 강해졌습니까? 다윗과 같은 영성을 붙들고 그 모든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주님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끝까지 더 사용하시며 더 큰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초심을 잃어버리지 말고 내가 높아져 있을 때 내가 잘나갈 때 내가 힘이 있을 때 더 하나님을 강하게 믿고 선명하게 분명하게 믿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성취되는 통일 왕국의 왕이 되는 다윗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추대 되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을 부음 받은 것은 아주 오래전 사무엘을 통해서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새로운 역사의 키를 맡기시며 왕이 될 거라는 것을 이미 말씀해 주셨고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름부음 후에 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것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도망자의 신세, 자신의 목숨이 왕에 의해 쫓김을 당하는 아주 위험한 시간을 계속 보내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사울왕이 전사한 후 남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도 7년 6개월이 지난 후에야 다시 통일 왕국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이처럼 많은 기다림을 허락하신 이유는 왕이 나의 힘과 사람들의 조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힘의 균형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온몸에 체득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어야 이스라엘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도록 다윗을 오랜 기다림 속에 두셨습니다.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를 있을 때도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절호의 기회에도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죽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기쁨 되시는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남 유다의 왕이 되어 7년 6개월 동안이 북 이스라엘과 갈등 관계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그 길을 신뢰하며 조급해하지 않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뜻과 방법 주님의 시간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했기에, 오늘 말씀은 그가 통일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는데 민심의 지지를 얻고 천심의 도우심으로 붙들고 왕이 되는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북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와서 스스로 왕이 돼 달라고 부탁하며 백성들을 통해 추대되는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 힘들게 했던 사울 왕가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치리하는 것을 통해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백성들이 보았고, 백성들 마음속에 쌓인 오해를 다 녹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방법과 때를 신뢰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되고 덤으로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철저히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 왕이 되기에 백성들의 마음도 얻는 것입니다. 힘을 통하여 짓밟고 무너뜨려서 정복해서 통일 왕국의 왕이 되는 게 아니라 민심의 지지를 기반으로 백성들을 통하여 추대되는 것입니다. 이건 주님을 향한 전적 신뢰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나에게 성취되는 것을 믿으면서도 내 때와 나의 방법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만 늦어지고 지체해도 조급해지고 내 생각과 방법을 이끌려 흔들리고, 눈에 보이는 방법을 붙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우리들의 연약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우리와 달리 끝까지 하나님께 신뢰하며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붙들고 나아가는 신실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은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방법과 사람의 때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주변 환경과 사람들을 봐서는 불가능하고 이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너무 많았는데 그 모든 것이 나는 할 수 없고 내 환경은 불가능하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를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그 믿음을 계속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인생에서 강조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고, 내가 주어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된 인생입니다. 내가 했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 강조되는 인생이기에, 이렇게 끝까지 아름답게 통일 왕국을 이루며 왕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통일 왕국의 왕이 되고 나서 첫 번째로 한 것은 뭐냐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수도 천도입니다. 근데 그곳은 가나안 정복때에도 정복하지 못했던 여부스 사람들이 여전히 건재한 땅이었고, 사울의 조상인 베냐민 자손들은 이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여부스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은 가나안 정복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를 위해 결국 믿음을 붙들고 영적 싸움을 통해 뺏어 와야 되는 땅이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은 싸움 상대가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 정도 과소 평가를 했는가 하면 우리가 모두 절뚝발이와 소경이어도 너희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몰랐던 건 뭐냐면 다윗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결과는 일방적 승리로 마무리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게 됨을 통해 오래 전에 주신 약속을 다윗을 통하여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합한 왕이었던 이유는 그가 문제가 없고 실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께 기쁨 되는 것을 끊임없이 최우선순위에 두고 살았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는 다윗… 그게 통일 왕국이 이루고 왕이 된 비결이고 그가 여부스 백성을 쫓아내며 그곳을 예루살렘을 수도로 만들었던 비결이며 다윗이 점점 강해지는 비결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들이 강해지고 승리하고 약속이 성취되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강해지는 비결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신뢰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강함이 경험되기 원하십니까? 그 하나님의 나의 강함으로 취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시간 내가 주목하고 바라봐야 될 분은, 믿음으로 붙들 분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순종의 믿음으로 그분의 임재 앞에 살아가시기를 열망하십시오. 그럴 때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를 들어 쓰시며 더 놀라운 일과 능력을 맡기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실 줄 믿습니다. 다윗의 고백이 나에게 실체로 고백 되고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열망하며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인생, 하나님으로 인해 점점 강해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스보셋은 거의 허수아비와 같은 왕이었고 모든 실권은 군대 장관인 아브넬이 가지고 있었음에도 사실 그 실권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세이자 자신의 보호막이었던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생각에…이제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곧 내가 살해당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다 풀렸습니다. 나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게 된 건, 다윗 왕과 요압 군대가 곧 쳐들어 와서 자기를 죽일 거라고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왕을 죽인 것은 다윗왕과 요압 군대의 칼이 아니라, 내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사울왕이 승승장구 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환경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결과 사울왕과 그 집안에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사람들의 배신이었습니다. 바로 배신과 등돌림, 등에 칼을 꽂는 냄새나고 추악한 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힘냄새를 맡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철새와 같이 옮겨 다니며 배신을 일삼는 삶,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은 육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보셋 왕이 다윗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자들의 배신에 의해서 살해 되는 것을 보면서, 육적 반응으로 배신에 배신을 일삼는 이런 추악한 인간의 모습은 예전 사울 왕가의 모습만이 아니라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현재 모습일 수 있음을 성경은 엄중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보셋왕을 배신하고 살해한 측근은 바아나와 레갑입니다. 왜 측근이 배신한 겁니까? 이스보셋 왕은 이제 힘이 다 떨어진 허우대 왕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이미 모든 게 기운 사울왕가에서 새로 뜨고 있는 다윗 왕가로 갈아타기 원하는 자들의 배신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침실에서 왕을 살해하고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헤브론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보셋 왕을 살해해 죽인 이유는 명확합니다. 다윗 왕에게 가져가 바치기 위해….자신의 왕이자 충성해야 될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측근이 살해해서, 그 머리를 들고 밤새도록 다윗 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슨 냄새를 맡았냐면 힘 냄새를 맡은 것이죠. 지금은 다윗에게 줄 서야 이득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새로운 힘인 다윗에게 줄 서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철새와 같이 갈아타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측근들이 왕을 배신하고 살해해서 그 목을 들고 다윗왕에게 달려가는 이 모습…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위해서도 아닌, 대의 명분을 위해도 아닌, 자기의 유익을 위해….끊임없이 육적 반응을 하는 인간의 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다윗 왕에게 가서 새로운 힘 아래 붙어서 공로를 인정받아 내가 한 자리쯤은 차지할 수 있겠다 생각했을 겁니다. 밤새 달려가 다윗 왕에게 엎드려 이스보셋의 머리를 바치며 그들의 하는 말을 주목해봅니다. 사울 왕가는 다윗에게 원수였고 그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왔으니 이런 우리를 거둬 주고 칭찬해 주고 우리가 잘 딸랑딸랑 아부할 테니까 자리 좀 달라고…간청하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아부에 하나님의 이름도 빌려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와서라도 다윗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그 새로운 힘에 줄을 서서 자신들의 인생이 새롭게 펴기를 원하면서 머리를 굴리고 다윗에게 엎드린 겁니다. 그 속내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힘냄새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갖다 쓰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이 육적 반응으로 일상화된 인간의 죄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하나님을 의식한 영적 반응에 근거한 판단과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간적인 판단을 했으면, 정치적인 판단을 했으면 이런 사람들을 당연히 받아주고 거둬 줘야 합니다. 자기 편이 되겠다고 오는 사람을 거두어서 충신이 되게 만들어야죠. 그런데 다윗은 이미 사울 왕의 죽음을 소식을 복된 소식이라 착각하며 가져온 아말렉 전령을 치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육적 반응으로 찾아오는 자들의 내 귀에 듣기 좋은 말들에 흔들리지 않는 거죠 사람들은 힘 냄새를 맡고 오는 철새들이기에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며 가까이 오는 자들은 다 의도와 목적이 있음을 직시하는 겁니다. 내 생명을 여러 환란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두 사람도 여호와의 이름을 가져왔고 다윗 여호와의 이름을 지금 말하는데 실제로 여호와께 합한 자는 다윗왕이었습니다. 그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은 내가 도망자와 환란 가운데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그 여호와께서 지금 내 앞에 살아 계신다는 겁니다.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맹세하는데, 내가 하는 결정은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는 인간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합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온 것은 나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이고 잘못된 소식이라는 겁니다. 이스보셋이라는 의인을 그렇게 죽이고 내부 고발자로 온 너희들은 악인이라는 것이죠. 그들은 한 자리 찾아오려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어 다윗 왕에게 바쳤는데 하나님의 이름도 팔아가면서 아부를 했는데 그들의 끝은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두 사람을 처단하고 손발이 다 잘리는 비참한 모습으로 그 시신을 매어 달았습니다. 나의 생명을 건지시고 구해주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하는 겁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성도를 통하여 주님은 역사하시고 일하시며 주님께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육적 반응을 하며 나를 통해 이득을 얻기 위해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높아지고 힘이 좀 생기면 이렇게 냄새 맡는 사람들이 내 편에 서려고 몰려들고, 내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하며 나를 흔들 때, 흔들리지 말고 나에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오늘도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철새와 같은 사람들, 냄새 맡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잘 분별하는 비결은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분명히 믿고 내 유익과 득실을 따지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늘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내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들을 할 때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근거로 결정하는 다윗의 영성을 본받기 원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 잘 되고 힘이 올라가도 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있었던 다윗, 그렇기 때문에 배신의 역사를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그 나라에 은혜를 부어 주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바르고 옳은 것을 선택하며 내 삶을 인도하시고 건져 주시는 그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내 마음과 눈이 하늘을 향해 열리고 열리며 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편에 선명히 서 있는 다윗과 같은 삶을 저와 여러분들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종종 오해를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살면서 한두 번 정도는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거나 억울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나이가 들고 지위가 올라가고 지도자의 위치에 가게 되면 우리에게는 참 말도 안 되는 오해와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기도 합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일로 오해 받아 억울한 일을 당해 속병을 앓는 경우가 많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게 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풀기 원하시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의 배경은 다윗이 전혀 계획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는데 그 밑에 있는 부하, 군대 장관 요압이 혈기와 복수심에 불타서 다윗과 상의하지 않고 아브넬을 살해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측근 중에 측근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과 의중을 가장 가까이에서 달고 그 마음을 대변하는 자와 같이 행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힘을 얻고 왕이 되고 나니까 가까이에 있는 측근들이 사고를 치고, 자꾸 일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명령도 없이 측근인 요압이 사고를 치고 일을 그르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도 아브넬이 다윗왕이 베푼 식사 잘하고 평안히 돌아가는 길에 거짓으로 돌아오라고 전령을 보내서 살해하면서 다윗왕이 큰 어려움과 오해를 받게 됩니다.
다윗왕은 요압이 가까운 측근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넬의 살해 소식을 듣고 화가 많이 났습니다. 가까운 측근이지만 입에 담을 수 없는 강한 말로 요압에게 경고와 저주의 말을 합니다. 요압이 사고 치고 일을 그르친 것은 개인의 복수심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의 큰일, 하나님이 이루시는 길을 막고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백성들이 다 아브넬을 살해한 것이 다윗의 명령과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죽은 것이 나와 내 나라는 하나님 앞에 무죄하다고 딱 선을 긋습니다. 다윗왕이 명령해 가지고 명을 받아 가지고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한 게 아니라, 요압 개인이 복수심을 가지고 사고 친 일이라고 분명한 거리를 둡니다. 문제는 이렇게 다윗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진정성을 가지고 말해도 백성들에게 쌓인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남 유다 백성들과 특별히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믿고 있냐면 이 사건은 다윗이 다 사주하고 명령했으니까 요압이 저렇게 나서서 죽인 것인지…요압이 대신 모든 걸 뒤집어쓰고 저렇게 아브넬을 살해한 것이다…요압 뒤에는 다윗왕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아무리 진정성을 가지고 말해도 백성들이 왕의 말을 오해하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자다가 눈만 뜨고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다 나를 향하여 비난하고 다 내 책임이라며 몰아세우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해 받고 억울 할 때 사람들이 믿지 않고 여전히 오해할 때에, 다윗왕은 세 가지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 다윗이 한 행동은 아브넬의 죽음을 마음 다해 슬퍼했습니다. 정말 나에게 슬픈 일이라는 것을 알고 아브넬의 장례를 왕이 직접 참여하고 주관하는 국장급으로 장례를 치러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울 왕이 죽었을 때 다윗이 기뻐했을 거라고 여겼고 다윗의 기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아말렉 전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의 죽음을 다윗은 기뻐한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을 다해 슬퍼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압은 어떤 생각을 가졌냐면 내가 혈기와 복수심으로 이 아브넬을 죽이지만 결국 동기가 어찌 되었든간에 아브넬을 죽이는게 다윗왕과 이 나라를 위해 분명히 좋은 일이고 다윗 왕은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뻐하기는 커녕 마음을 다해 슬퍼하며 아브넬을 위해서 국장급으로 장례를 치르는 겁니다. 육신이 주도하는 인생과 영이 주도하는 인생의 결정적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했던 건 아브넬을 위해서 슬픈 노래 애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넬을 위해서 국장급으로 치는 것도 충분했지만 다윗왕은 더 나아가 마음을 다하여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지었습니다. 사울 왕이 죽었을 때도 다윗은 슬퍼하는 것을 넘어 그 사울 왕을 위하여 애곡하며 애가를 불렀습니다. 소리 높여 울었고, 애가를 지어 노래함으로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왕이 애가를 부르는 것을 추모의 분위기를 주도하니 백성들이 보면서 백성들도 함께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왕이 눈에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형식적으로 슬퍼하는 척 하는게 아니라 정말 슬퍼하는구나…라는 것을 점점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국장이 다 끝났고 애가로 마음 다해 슬퍼했습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 그렇게 울음을 쏟아내니까 얼마나 배가 고프겠습니까? 그러니까 백성들이 나와서 다윗왕에게 식사 좀 하시라고 권합니다. 그때 다윗왕은 그 식사 마저 거절하는 겁니다. 나는 지금 슬퍼하고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를 변호하고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혼자 말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열고 소통하기 위하여 반복된 진심 어린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이런 반복된 진정성 있는 행동을 통해 어떤 결과가 드러납니까? 남 유다 백성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쌓인 오해가 풀렸다는 거예요. 다윗에 대해서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북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윗의 진정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억울하게 오해를 당했을 때, 자기를 변호하고 끝난 게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마음을 다해 백성들과 소통하며 그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의 마음이 녹고 오해가 풀렸으며 더 나아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나중에 통일 왕국의 왕이 되는데 초석이 되었습니다. 열심보다 먼저 가야 되는 것은 진심입니다. 진심 없는 열심은 나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그렇기에 오해와 억울함이 있을 때 스스로 변호하고 나는 잘못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반복적으로 나의 진정성 있는 태도와 행동을 지속하면 오해가 녹는 기적이 열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오해를 진정성을 가지고 푸는 법을 아는 사람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품는게 아니라 나를 싫어하고 별로로 여기는 사람들도 품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소통하며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이런 소통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믿습니다. 쌓인 오해들이 진정성 있는 소통을 통하여 녹아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이런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데 민감하며, 이익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감정이 확 쏠리는 민감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봐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그것은 포장지인 경우가 훨씬 더 많고 더 본질적으로는 내 이익과 불이익의 감정과 훨씬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익과 불이익을 통해 나에게 감정이 확 먼저 들어오고 거기에 이성과 논리라는 것을 끼워 맞춰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내 이익을 지키는데 아주 천재적이 재능이 있으며, 반대로 내가 불이익을 당하면 거기에 내 감정이 확 몰입되는 존재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익과 불이익에 따라 감정이 확 몰입되어 혈기를 따라 살아가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사울 왕가의 군대 대장이었던 아브넬과 다윗 왕가의 군대 대장인 요압입니다. 이 두 사람이 움직이고 결정하고 나아가는 모든 것들은 이성과 논리로 포장된 자기의 이익과 불이익에 모든 감정들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력욕과 이익을 위해 허수아비 왕을 세워놓고 모든 실세를 누리는 아브넬, 자신의 복수를 위해 다윗의 말을 듣지 않고 몰입하는 요압은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현주소일 수 있음을 직시하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아브넬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며 온 게 아니었습니다.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이유는 자신의 이익에 근거한 감정과, 허수아비왕 이스보셋에게 감정이 폭발해서 혈기로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와 다윗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는데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되는데 협력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브넬의 입에서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미 하신 말씀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는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었는지 알았습니다. 아브넬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오래 전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누리기 위해 오랫동안 그것을 모른 체하고 불순종해 왔던 것이죠. 죄는 모르고 짓는 죄가 있고 알면서도 짓는 죄가 있습니다. 모르고 짓는 죄보다 알면서도 죄를 지는 것이 죄가 중한 것입니다. 자신의 뜻과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그것을 모른 체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하나님을 뜻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 지기를 원하기를 사모하며 나온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포장지로 자기의 혈기와 감정을 정당화하는 도구 삼아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넬의 결정적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브넬과 결은 다르지만 패턴이 거의 동일한데 바로 자신의 복수심의 감정에 몰입하여 큰 일을 그르치는 문제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이 찾아온 것이 그냥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구나…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차곡차곡 퍼즐이 맞춰가고 있다는 다윗은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의 실세인 아브넬을 잔치를 벌이면서 아주 잘 환대합니다. 그리고 축복하면서 평안히 돌아가게 배려합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요압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요압이 전쟁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자신의 철천지 원수인 아브넬이 이곳까지 왔는데 다윗왕이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심지어 잔치를 배설하고 평안히 돌려보냈다는 것을 들은 겁니다 요압은 다윗왕 앞에 나아가 아브넬을 그렇게 돌려 보낸 것이 잘못된 것이며, 아브넬은 왕을 속이려 온자라고 간언을 합니다. 겉으로 봐서는 굉장히 요압이 충신과 같이, 나라를 생각하고 왕을 생각하며 하는 말 같습니다. 근데 요압이 이렇게 강하게 다윗왕에게 말하는 이유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아니고, 다윗왕을 위한 마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하여 이루어 지기를 원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요압이 어떤 동기로 움직이고 어떤 동기로 다윗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다윗왕을 향한 충성심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거, 전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떻게 포장했을지 모르나 지금 요압이 하는 모든 것은 개인의 원한이며 적개심이자 복수심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다윗에게 나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자기 마음에 불타고 있는 복수심 때문입니다. 원수 아브넬을 죽이려는 복수심에 모든 마음을 쏟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이 그를 강하게 이끌고 있고 적절하게 이성과 논리로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람이 육적으로 자기 감정에 휘둘리며 자기 혈기로 일하게 되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결국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압이 그렇게 다윗왕에게 자신의 생각을 직언하는 것을 넘어 왕명 없이, 상관의 명령없이 자신의 혈기로 일을 추진하고 결정하는 일이 등장합니다. 그게 뭐냐면 다윗의 환대를 받고 평안히 돌아가고 있는 아브넬을 사자를 보내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타오르는 복수심에 불타 다윗왕의 명 없이 요압이 스스로 명을 내려서 일을 추진하고 그렇게 돌아온 아브넬을 비참하게 죽이게 됩니다. 아브넬은 교만해서 왕을 허수아비로 세웠던 자입니다. 그 결과 그는 이렇게 비참하게 칼에 찔려 죽게 되며 자신이 교만함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압은 하나님의 뜻이나 왕의 명령이 아닌 자기의 혈기와 복수심에 불타 모든 것을 어긋나게 만들며 대사를 어렵게 하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복수심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을 죽여야 되겠다는 감정이 자기를 이끄는 것입니다.이것을 통하여 동족인데 서로 원수가 되어 결국 복수가 복수를 낳고 원수가 원수를 낳고 자기 동생을 죽인 원수를 자기는 죽이고 결국 요압도 나중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렇게 물고 물리는 세상 가운데 서로와의 복수심과 감정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거룩하고 구별된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을 이끌고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이런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나, 복수심이나 분노, 혹은 나의 이익이나 불이익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입니까? 내 마음을 이끌고 내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복수심과 같은 감정이 되지 않도록, 이익이나 불이익에 대한 반응이 되지 않도록 이 시간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이렇게 이익과 불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감정을 포장하기 위해 이성과 논리를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말씀 앞에 직시하기 원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온전히 임하여 말씀이 나를 이끌고 말씀이 나를 멈추게 하며 말씀이 나를 결정하게 하는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이끌고 움직이게 하며 나를 결정하게 하는 그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이 나를 붙들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도록 꼭 붙어 있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3장 말씀을 통하여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지는 세 가지 이유를 함께 말씀으로 나누기 원합니다. 이 세 가지의 이유를 말씀을 통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 나와 내 가정과 우리 교회를 세워 가시고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는 귀한 시간 되길 원합니다. 첫번째, 다윗은 점점 강하여 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하나님 역사의 추가 다윗에게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집이 군사력과 능력이 많아서 강해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이 강하게 하심이 본질임을 성경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권을 주시기로 결정한 것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은, 매우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이미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은 예전이었지만, 당장 왕이 되는 대신 인내와 기다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을 통해 다윗을 세워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윗 집안의 강하여짐과 사울 집안의 약해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강하게 하신 본질은 하나님의 강하게 하심에 있음을 선명히 증언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이 여러 아내들을 두고 아들들이 태어나는 성경의 증언은 다윗이 점점 강해져서 다윗 아들들이 이렇게 많아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고일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다윗이 점점 강해지는 증거가 이렇게 아들들이 많이 태어난 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강하게 하심이라는 관점으로 보게 되면 다윗이 하나님이 강하게 하심을 망각할 수 있는 경고의 사인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신명기 17장을 보게 되면 모세가 나중에 왕이 될 사람은 아내를 많이 두거나, 은금을 많이 쌓아 그의 마음이 미혹되지 않게 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심을 의지해야지, 이렇게 아내를 많이 두거나 재물에 미혹에 빠지면 어려움에 직면할 수 밖에 없음을 미리 경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통일왕국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내가 여러 명인 것입니다. 이걸 통하여 다윗이 점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강하게 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언젠가는 떠나서 그것이 불행의 전조가 되는 복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다윗의 집안에 어떻게 보면 불행의 씨앗이 하나하나 심기우고 있다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지는 이유는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권세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뜻과 질서를 거스르고 무너뜨리는 사람 때문에 사울의 집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겉으로 보기에는 왕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인데, 그는 허수아비였고 실세와 주도권은 누가 가지고 있었냐면 군대 장관인 아브넬이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다윗의 집에 아내가 여럿이고 아들을 많이 낳으며 점점 강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를 강하게 하신 것과 똑같이 겉으로 봐서는 지금 사울의 집에 왕은 이스보셋인데 실제로 모든 실세와 주도권은 뒤에서 아브넬이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넬은 그렇게 실세를 가지고 권력을 흔드는 것도 모자라 사울왕의 첩이였던 한 여인과 통간하며 부인으로 데려오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마치 왕처럼 행세한 겁니다. 사울왕의 첩을 데려오면서 스스로 왕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넬의 실세가 얼마나 컸냐 하면 잘못된 것을 보고도 왕인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런 아브넬의 모습은 하나님의 질서와 뜻에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이 있었지만 아브넬이 권세가 너무 커서 왕이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 사울의 집을 점점 약하게 만드는 비결이었다는 것이죠. 가정도 교회도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뜻과 질서가 세워져 있는데 그것을 죄로 말미암아, 교만으로 말미암아 무너뜨리게 되면 결국 이렇게 약해지고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아브넬의 배신입니다. 아브넬이 허수아비왕 이스보셋에서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자신의 감정과 혈기가 주도하여 아브넬이 갑자기 다윗에게 화친조약을 맺는 겁니다. 지금 전쟁이 계속되는 중인데, 사신을 보내서 내가 당신을 돕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넬이 다윗에게 제 발로 찾아오게 되면서 큰 싸움이 없이 이스라엘 전체에 왕이 되는 기회를 점점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그때 다윗이 자신의 아내인 사울 왕의 딸 미갈을 다시 데려올 것을 요구합니다. 이걸 통하여 다윗이 사울왕의 사위라는 것을 부각하고 사울 왕가와 무관한 자가 아니라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울왕에게 쏠려 있는 민심을, 다윗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품는 중요한 역할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이끄심이었으며 동시에 아브넬의 연약함을 통하여 다윗에게 큰 도움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지는 3가지 이유를 묵상하며 내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점점 강해지고 점점 약해지는 이유를 영적으로 묵상하기 원합니다. 어떻게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집니까? 은금이 많아서도 아니고 그의 정치력이나 군사력이 많아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언약으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심과 하나님이 세워주신과 하나님의 강하게 해주심이 강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강해지고 높아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하여 이루어 주셔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의 강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세워 주신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붙들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과 질서, 권위 가운데 순종하며 하나님 안에 때 강해지는 것이지 교만과 불순종으로 거역하고 거스르게 되면 결국 약해지고 무너질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강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는 힘이 외부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고백하며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무엘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울왕이 죽은 이후에 다윗은 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먼저 7년 반 동안 헤브론에 머물며 남쪽 유다 지역의 왕이 되었고 여전히 열한 지파는 사울왕 후손들의 수하에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 주위에 힘 냄새와 돈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여러 사람들의 도전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말렉 전령이 가짜 뉴스를 들고 찾아왔었고, 길르앗 야베스 백성들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끊임없이 다윗을 흔들고 다윗에게 무언가를 얻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오늘 말씀은 다윗에게 그동안 충성했던 신복들의 문제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왕 아들에게는 아브넬 장군이 있었고 다윗에게는 요압이라는 충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에서부터 함께하고 어려울 때 다윗에게 충성했던 자가 요압인데 다윗이 힘이 생기고 나니까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겸손하게 있기 보다는 감정과 혈기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움직이고 전쟁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울왕이 죽은 이후에도 분명히 다윗은 하나님이 올라가라 그러면 올라가고 멈추라고 그러면 멈추면서 여전히 하나님께 자문하고 엎드리는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충신들과 수하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족인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을 치열하게 싸우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패배만을 남기는 비참한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 집안과 다윗의 집안이 여전히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데, 아브넬과 요압으로 말미암아 싸우지 않아도 될 전쟁을 하면서 진흙탕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동족이 서로가 서로에게 원수 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두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데, 전체가 싸우기 전에 12명의 대표들을 뽑아서 먼저 싸우게 합니다. 전부가 다 싸우면 너무 서로에게 큰 피해가 나니까, 대표 선수끼리 나와서 싸우게 하자… 이런 전쟁 축소의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대표를 뽑아 싸우게 하는 것은 전쟁을 축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족임을 망각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개심을 갖게 하기 위해 먼저 맛보기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동족이고 어제까지는 한 팀이었는데 오늘 원수가 되는 거 한순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원수가 됩니까? 내 앞에서 피를 보게 되거나 내 앞에서 큰 손해를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을 향하여 적개심을 가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12명을 뽑아 먼저 싸우게 하는 것은 전쟁을 축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적개심의 불을 붙이기 위함 이었습니다. 어제까지는 동족이고 한 백성이었는데, 오늘 내 앞에서 피를 보니까 원수가 되고 죽여야 될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동족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심히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개심에 불타 원수가 되어 치열하게 싸우는 전면전 양상이 돼 버렸습니다. 그 치열한 싸움의 결과는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는 결과였습니다. 아브넬의 북 이스라엘은 360명이 전사했고 요압의 남 유다는 20명이 전사했으니 통계적으로 상황적으로 북 이스라엘의 패배였습니다. 분명히 이 전쟁에서 남 유다의 군대가 승리한 것 처럼 보입니다. 근데 그것은 상황적이고 통계적인 승리이지 실제로는 남유다가 이긴 것도 아님을 증언하는데, 그 이유는 숫자적인 통계로 잡을 수 없는 한 사람, 바로 요압 장군의 동생인 아사헬이 그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기도고 이기지 못한 패배한 전쟁이 되 버린 것입니다.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늘노루 같이 빨랐다고 증언합니다. 이 말은 그가 단순히 다리가 제법 빠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특별하게 빨랐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그는 빠른 하나님이 주신 장점과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빠른 발로 북 이스라엘의 장수인 아브넬을 막 추격하는데 문제는 그 재능을 멈출 줄 몰라도 컨트롤 할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빠른 추격할 때 분명히 아브넬이 아사헬에게 쫓아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같은 동족이고 내가 너를 죽일 수 없으니 나 쫓아오지 말라고, 너가 죽게 되면 형 요압과 문제가 생긴다며 경고를 합니다. 그런데 아사헬을 멈출 줄도 모르고 들을 귀도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혈기로 앞서나가, 죽여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사로잡혀 통제되지 않는 감정으로 쫓아가다가 결국 너무 깊숙히 들어가 아브넬의 창에 찔려 그 자리에서 죽게 되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통계적으로는 분명히 북 이스라엘이 패배했는데, 아사헬이 전사함으로 남유다 또한 패배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준 채 모두 패배한 전쟁, 그게 동족인 이 두 백성들의 치열한 전쟁의 결과입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패배만 안겨준 전쟁은 나팔을 불면서 멈추게 됩니다. 남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서로 동족이 치열하게 싸운 결과는 이기고도 진 전쟁, 그리고 지고도 진 전쟁이 되 버리는 겁니다. 이걸 통하여 다윗의 충신인 요압도 사울의 수하였던 아브넬도 자기 감정과 혈기로 일하고 전쟁하다 결국 문제를 일으키며 눈에 보이는 현실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악한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 요압은 분명히 충성스러운 신복이었지만 두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다윗이 힘을 가지면서 권력에 대한 탐욕과 힘에 대한 남용과 혈기와 감정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도 어려운 일들을 계속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영적 진리가 있는데요. 무엇보다도 우리가 같은 팀인데, 동족 하나님의 백성인데, 서로가 원수 되어 싸우게 되면 승자가 없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진 전쟁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족이지만, 같은 팀이지만 사단의 미혹으로 우리가 피를 보거나 손해를 보게 되면 서로 등 돌리고 원수 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 감정대로 마음대로 브레이크 없이 사용하게 되면 망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머리 아래 모두 굴복하고 순종한 백성들입니다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도, 이 지역에 수많은 교회들도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한 팀이 되어야 하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끼리 싸우게 되면 승자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 패자가 될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고 등 돌리며 원수 되게 하는 것을 통해 사단만 기뻐하고 박수 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시간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상황을 파악하고 멈출 때 멈추고, 나아갈 때 나아가며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귀하고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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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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