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하여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분쟁하는 사람들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선교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환란과 고난도 어렵지만 인생을 사노라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중에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싫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때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직장 생활에 제일 어려운 점 1순위는 언제나 인간관계이고,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의 어려움의 첫번째도 늘 사람들로부터 오는 어려움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함께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마음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가까이에서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을 오늘 말씀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라고 칭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일은 영혼들의 불쌍한 마음과 그 영혼을 건지고자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으면서 사도 바울은 라이벌로 여기며 투기와 분쟁을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올인하여 선명하게 복음을 전해서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 질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어려움과 더 이상 전도를 못하고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는 매임을 자신들을 드러내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겁니다. 사도 바울이 투옥된 그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같이 중보기도한 게 아니라 그 어려워진 고난과 어려움을 자신들에게 기회로 삼으려 하며 이겨보려고 전도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사도 바울의 투옥과 어려움을 가지고 자신들의 기회로 삼으려 하는 나쁜 동기와 의도를 가지고 지금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사도바울의 어려움을 이용해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옥 안에서 억울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복음 전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힘들게 하고 괴로움을 더하게 할 목적으로 지금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비뚤어지면 겉으로 봐서는 좋은 일을 이렇게 잘못된 동기로, 사람들의 괴로움을 더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좋은 일을 하고 선행을 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 안에 있는 동기는 이렇게 악할 수 있는 게 죄악된 인간의 모습 이라는 것이죠. 심지어 복음 전파도, 전도도 이런 잘못된 동기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하기 위해 했던 말문 막히는 일이 초대교회 안에 있었음을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행 하고 구제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하나도 잘못되지 않은 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그들의 종교 생활을 비판했던 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의 겉모습이 문제 있어서가 아니라 그 겉모습의 열심에 담긴 그들의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자기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는 그 행위의 집중된 종교 행위를 예수님은 비판 하셨음을 깊이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분명히 이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은 분명히 책망하셨을 것입니다. 나의 복음을 이렇게 잘못된 동기로 옆에 동료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기 위한 이런 악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것 잘못된 거다…책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 심판자로서 하실 일이고, 그것을 당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는가 하면 선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거예요. 힘들게 하려고 발버둥치며 전도에 열심을 내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도 바울은 열 받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괴로워하고 분을 내며 열 받아 괴로워 하는 대신 선교적으로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된 동기로, 나를 힘들고 괴롭게 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게 옳으냐 나쁘냐는 것을 자신이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면 순수한 동기로 하든지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하든지 그게 뭔 상관이냐는 거예요. 전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면 나는 그걸로 말미암아 충분히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이 수행을 많이 해서 넉넉한 마음을 가졌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인생에 닥치는 모든 삶의 일들을 상황 중심, 나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선교적으로, 영적 안목을 가지고 해석하는 겁니다. 사도바울 개인적으로 괴로움이 없었겠습니까? 인간적인 배신감이 없었겠습니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등 돌리며 자신의 투옥와 어려움을 가지고 재를 뿌리고 기회로 삼는 것이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분명히 다 그런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그런 것들이 자기 인생을 주도 하도록 놔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교적인 관점으로 그 어려움들을 해석하기로 작정한 거죠. 그래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춰 선교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내 마음의 섭섭함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나를 괴롭게 하려는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나는 기뻐한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 오면 내 마음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교회 안에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마음이 안 맞고 갈등과 어려움이 생길 수 있는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내가 경쟁하고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협력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나하고 마음이 좀 안 맞고 부딛힐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가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 밖에 있는 사단 마귀와 그 수많은 악한 세력 대신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 편을 갈라 싸울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우리가 함께 쓰임 받는다는 동지 의식이 없이, 내 옆에 있는 성도가 나의 경쟁자가 내 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눈꼴 사나워서 볼 수가 없는 것이고,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싸워 이겨야 되는 대상으로 여기며 교회 안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죠. 그런 일이 이미 초대교회 안에 왕왕 일어났었다는 것을 가감없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사도바울의 심정을 헤아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어떤 영적 준비를 하며 신앙 생활해야 하는지를 영적 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하면 왜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가 에 대한 상황 중심, 나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나의 어려움을 이용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괴로움을 더 하려는 것을 보면 정말 극심한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게 당연지사 입니다. 그게 당연한데 문제는 그렇게 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괴로움을 더해서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삶의 무게에 지쳐가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런 일반적인 반응을 넘어 놀라운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 승리하고 이기는 것이며, 그런 삶을 나의 힘을 넘어서는 영적인 은혜에 붙들려야 가능한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중단되지 말아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어렵게 하기 위해 그 잘못된 열심으로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기 만 하면 나는 기뻐 한다고 고백하는 이 놀라운 선언이 우리의 고백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다보면 종종 어려움을 당하고 배신 당하며 낙망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마음의 상처 받는 말과 행동에 낙심하고, 좋은 일을 하면 꼭 괴롭게 하려고 하는 이런 악한 자들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 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 되는 말이나 안 좋은 들으면 우리는 그냥 손을 놔 버립니다. 내가 무슨 아쉬운 게 있어서 이런 소리 들으면서 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가…그러면서 당연히 놓아 버려요. 그러면 전해져야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 중단되지 말아야 할 것이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임을 기억하는 이 선교적 관점으로 나의 삶을 해석하는 기적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맞춰 내 삶의 환란과 어려움도 내 주변에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부어지는 사랑을 끊지 못하며 내 안에 있는 복음에 대한 열망을 끊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일어서기를 소망하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최후 승리를 믿으며 모든 인생의 삶의 사건들을 선교적 의미로 풀어내고 해석해 내는 나를 넘어서는 영적인 삶, 기적적인 삶이 저와 여러분들이 고백하는 삶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살면서 혹시 당한 일이 있으십니까? 보통 “당한 일”이라 그러면 좋은 일은 당했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안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우리는 당했다고 그렇죠. 이 깨지고 죄된 세상을 살면서 여러가지 안 좋은 당한 일들이 있을 겁니다. 살면서 겪는 환란과 어려움, 사람들의 오해와 배신들로 우리 삶에는 “당한 일”을 경험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일들이 있음을 증언합니다. 단순히 그냥 감옥에 갔다 정도가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환란과 고난, 사람들의 오해와 배신들이 사도 바울이 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당한 안 좋은 일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솔직히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에게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다른 것 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 사랑해서 복음을 전파하려고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선교 여행도 다니는 데 꽃길을 기대하지는 않아도 이 정도로 가시밭길을 허락하시고 복음 전파자 못하고 이렇게 감옥에 갇히게 하면 어떻합니까? 예수님에게 분명히 섭섭한 마음을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겉의 상황과 환경을 보면 어떤 거라도 지금 사도 바울이 당한 일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증언합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당한 일들과, 감옥에 갇혀 꼼짝 못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먼저 이 “진전”이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옛날 번역에는 복음 전파의 “진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의 원어 의미는 나무가 가득한 곳에 나무를 찍어 가면서 길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를 일일이 베면서 그 곳에서 길을 내고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 제거되고 길을 내는데 내가 당한 일이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 내가 인생을 잘 살았나 못살았나 하는 기준은, 돈을 많이 버느냐 못 버느냐도, 출세를 하느냐 안 하느냐도, 고난을 당하느냐 안 당하느냐도 성공과 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 되었는가 전파되어 있지 않았는가가 인생의 성패를 가른다고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내 삶에 닥친 오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선교적 의미로 재 해석하는 놀라운 비결을 보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지금 억울하게 당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말도 안되게 당한 환란과 어려움과 오해와 사람들의 배신이 있었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일이 있습니다. 그걸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이 장애물이 제거되었다면 복음 전파에 진전이고 그걸 통하여 나는 그 선교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첫번째 예는 사도 바울의 감옥에 매인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특별히 감옥 안에 있었던 수많은 로마 사람들에게 다 나타났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매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저 사람은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왔는데 뭔가 우리와 다르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죠. 이것을 우리 상황에 좀 적용해 보면 성도들이 지금 당하는 고난과 환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는 삶을 통하여 그 사람이 망가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는 거예요. 몸이 약하고 마음이 약하고 사람들이 힘들게 하는데 그게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나가는 매달리는 계기가 되는 것을 사람들이 목도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두번째 예는 감옥 밖에 있었던 수 많은 사람들, 특별히 성도들에게 큰 도전을 준 것입니다. 그 전까지 그 사람들은 복음이 흔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이 흔들리는 자들이고 내가 이렇게 예수님 전하다가 어려움 당하면 어떻하나 하고 주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지금 꼼짝달싹 못하고 선교가 중단될 거 같은 그 상황에서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신뢰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담대하게 감옥에 매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담대하게 신뢰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은 살아계시는구나…예수님은 우리의 고난 가운데 여전히 역사 하시는구나…주님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겁 없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바울은 감옥에 매어 있는데, 바울을 대신해서 겁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 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 하셔서 주 안에서 신뢰하게 하셨고 나 대신 겁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결과적으로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고 장애물을 제거 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성도로, 천국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사노라면 이렇게 당한 일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이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렇게 일상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움이 이렇게 선교적인 의미로 재해석할 때 영적인 안목이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고난과 환란과 어려움들을 선교적인 의미로 재해석되는 삶은 놀라운 삶의 변화를 경험하며 그것을 통하여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는 놀라운 삶으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감옥 안에서 오히려 신앙의 동기를 순순하게 만들고 복음을 순수하게 만드는 놀라운 비결을 사람들이 지금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 성도의 다름과 구별됨을 바라보며 성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라기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인생에 환란과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선교적 의미를 발견하여 복음이 진보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 내 인생의 끝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마음 다해 중보 기도하는 구체적 기도 제목들이 등장합니다. 마음을 담아 사랑하기에, 내 마음에 두고 사랑하기에 옥중에서도 간절히 중보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중보 기도는 3가지인데, 첫 번째, 사랑으로 풍성해지도록 중보 기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삶에 사랑이 풍성 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풍성해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더욱 가까이 가고 십자가 앞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사랑이 점점 커 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점점 내 안에 커 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있음을 그 은혜 받은 자 로서의 삶을 기억하고 은혜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내 삶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직 그의 사랑에 매어 살아가는 자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살아가는 자로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이 풍성해지고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이 풍성해지기를 최우선으로 원하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풍성해야 되는 것을 중보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풍성해 지도록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그 은혜와 사랑 가운데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두번째,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 하도록 중보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풍성하다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고 그 가운데 우리는 그 가운데 선하거나 진실함을 놓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일 수록 그 곳에서 진실되기 말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들을 적절하게 하게 되고, 회색 지대 같이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을 품기 때문에 진리와 바른 것을 선포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나아갈 수가 있고 사람들의 눈치와 의중을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등 돌리고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풍성해지면서 동시에 선한 것을 분별하고 삶의 진실함이 타협 되지 않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가졌던 그 믿음과 사랑이 진리 앞에 늘 조율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의식하며 눈치 보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 늘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나아가며 예수님의 기준에 맞춰 선과 악을 구별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 이것을 놓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빌립보 교회는 그 당시의 황제 숭배가 만연했던 곳이자 로마 문화에 자부심이 유달리 강했던 곳입니다. 로마 황제를 왕을 넘어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던 그 시대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 가운데 수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잘 살아야 되지만 동시에 황제가 신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고 주인이라고 고백하며 그 진리를 만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왕따를 당하고 사람들이 떠나가는 도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 가운데 서 있으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 묵직한 기도 제목을 지금 나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사람들이 떠나가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그 삶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리를 말하며 그 진리를 살아내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는 절대 진리를 살아낼 수 없으며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없기에 주님께 힘과 능력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해 열매가 가득하기를 중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본성 자체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원하고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기를 간절히 열망합니다. 그런데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 의를 드러내는 그런 삶은 보편적 인간의 당연한 욕망 인데,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옳음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맺기를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옳음과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옳으심과 예수님의 의가 나의 삶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죠. 결국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맺는 의의 열매라는 것은 성령으로 사랑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내 삶의 모든 일이 예수님의 기준에 조율되는 모든 태도와 행동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자기 오름을 주장하는 이 때에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촉구한 것이 바로 이 중보기도에 일맥 상통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며 자격 없는 나에게 부어 주신 일방적신 사랑인 은혜만을 붙들고 그분에게 나아갈 때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의의 열매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로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의와 예수님의 옳으심이 선명히 드러나는 삶을 살기를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 옥중에서 중보기도한 사도바울, 그 기도제목을 붙들고 먼저 내 자신이 이것을 놓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3가지 기도의 제목을 붙들고 우리가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기에, 내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태어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가 내 삶의 풍성히 누려지기를 사모하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은혜 받은 자로 우리는 사랑이 풍성해 지며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 해지며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가득하며 주님의 영광과 찬송되는 성도가 되게 도와 주옵소서….기도 할 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사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다해 사랑하기에, 그 간절한 열망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이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적절히 사랑을 하고 적절한 관계만을 맺는 것에 익숙합니다. 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사랑할 때 적절하게 사랑하고 거리를 두며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와 달리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사이에 사랑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놀라운 사랑의 관계였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특별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는가 하면 너희를 늘 생각하고 너희가 내 마음의 있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이죠. 그냥 조금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적절히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항상 있을 정도로 사랑한 것입니다. 이 은혜에 함께 참여하며 늘 생각하고 사랑하는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사랑한 이유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에 참여한 자들이었고,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보내신 사명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동지였으며 함께 가는 한 팀, 그게 바로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 간의 관계였다는 것이죠.
은혜에 함께 참여한 자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내가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늘 현재형으로 새기며 신앙 생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에 빚진 자로, 늘 예수님께 나올 때는 자격 없는 자로 나오는 자들이 바로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 은혜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의 대표는 룻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이자 과부로 은혜를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격없는 자에게 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보아스를 통해 부어지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어떤 이유나 원인을 찾을 수 없이,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일방적인 선물, 그것이 룻기에 맥으로 흐르는 은혜입니다. 룻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인생 자체가 바로 은혜 받음의 삶 전부였습니다. 그에게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살인자로서의 과거가 있었습니다. 예수 잘 믿고 헌신했던 성령 층만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자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유와 조건과 자격으로 설명되지 않는 전적으로 부어 주시는 은혜로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럴 송두리째 변화 지키며 은혜의 선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은혜라는 말이 희랍어로 “카리스”인데, 이 말은 기쁨이라는 말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빌립보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기쁨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갈 때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내 삶의 기쁨이라는 것은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에 선물을 받았는가를 철저하게 자각하는 데서부터 오는 기쁨 이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은혜에 함께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 은혜를 기억하며 이방인의 사도로 그렇게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자신에게 이유와 조건과 자격이 하나도 없는 복음의 빚진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복음의 증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받은 은혜와 기쁨이 내 삶의 어려움을 다 덮고도 남는다고 고백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 생활 한다는 것은 결국 이 은혜 받음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이 은혜 받음을 망각하지 않고 늘 현재형으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마다 늘 죄인 됨과 자격 없음을 처절하게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자격 없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부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이 시간 내가 이 자리에서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자, 그게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룩한 무리이자 천국 백성이니 성도됨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도 바울의 고백은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고백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을 표현하는데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거예요. 심장은 몸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 기관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에게 사망 판정을 내는 것은 결국 심장이 뛰는 것을 멈췄을 때 그 사람은 사망했다고 선고를 하죠. 그만큼 심장이 뛴다는 것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할 때 심장도 내주고 내 간도 내주고 그렇게 얘기 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심장은 몸 전체를 움직이게 하고 뛰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엔진과 같은 곳으로 항상 뛰고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건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 마음이 같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 마음 속에 예수님 마음이 들어가 있어 예수님가슴 뛰는 곳에 내가 함께 가슴 뛰고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함께 간다는 것이죠. 나는 끊임없이 그것을 위해 뛰어가는 심장과 같은 자이며 그것을 위해 나의 인생을 던진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놀라운 고백입니다. 심장과 같이 뛰며 그 몸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과 같은 자로 내가 부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으며 그 엔진과 같은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는 이 사도 바울의 은혜에 대한 고백을 통해, 복음에 대한 확증과 열정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바라보기 원합니다. 내가 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내가 신앙생활 잘해서, 내가 새벽ㅍ기도를 헌신 해서, 내가 교회에서 일을 열심히 해서… 이런 것들이 귀한 일들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도 자격이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대답은 유일하게 단 한가지ㅍ입니다. 자격 없는 나에게 부어주신 일방적인 주님의 사랑의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어 주셨고 천국 백성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꼭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은혜 받은 자이며 은혜에 참여하는 자 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슴 뛰는 곳에 나도 가슴이 뛰고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 과 관심 있는 자들에게 나의 관심과 사랑이 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과 같이 그 복음의 열정을 품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뜨게 하는 심장과 같이 엔진과 같이 뛰어 가고 있는가….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어진 그 놀라운 은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 자격 없는 우리에게 부어 주신 일방적인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에게 부어진 은혜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신 일방적인 사랑임을 늘 마음에 새기고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로 신앙 생활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의 인사말을 통하여 성도의 거룩하고 구별된 삶이란 예수님을 주인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나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 눈에 보이는 어떤 지역, 시애틀에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확신으로 사는 삶임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두 가지가 분명해야만 우리의 삶에 하늘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를 통해 내 삶에 드러나는 삶이 바로 상황을 초월한 감사와 상황을 초월한 기쁨임을 증언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는 내 삶에 열매와 같이 보이는 감사와 기쁨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전천후 감사의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옥 중에서, 그것도 잘 못한 게 없는데 억울하게 잡혀 들어간 그 감옥 살이 가운데 뭘 감사할 일이 그렇게 많이 있겠습니까? 사실 옥 중에 화 안 내고 잘 참고 지내는 것 만도 대단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냥 감사한 척하는 게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이 13권인데 그 중 갈라디아서만 빼고 나머지 모든 성경은 감사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런 상황을 초월한 감사의 삶을 감옥에서 누리는 것이 복음이 주는 충격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삶의 비결은 사도 바울의 인성이 대단하고 수련을 많이 해서 아니라, 그에게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 지 맛보아 아는 자였으며, 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실체로 누렸던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이런 전천후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천후의 감사의 비결이란 늘 예수님을 기억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과 은혜, 즉 나의 자격 없음과 죄인 됨에도 불구하고 부어 주신 일방적인 선물임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를 영어로 Thanks라 하고 생각을 Think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 할수록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요.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망각할수록 우리는 감사가 사라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감사는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며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그 전천후 감사의 삶은 그의 사명이자 그에게 영적인 힘과 능력을 부어 주었습니다. 감사로부터 나오는 기도가 세상에서 주는 시험과 유혹을 다 무너뜨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은혜가 부어 지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머물러야 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감사 충만과 함께 사도 바울에게 임한 복음의 충격은 바로 기쁨 충만이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별명은 기쁨의 서신입니다. 그래서 옥중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 계속 기뻐하라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뻐했던 이유는 “복음의 일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들이 보냄을 받은 자, 부름을 받은 자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성도로 부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살아가는 게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마음이 향하는 곳에 내 관심과 마음이 가는 것이고, 예수님이 열망하는 그것을 내가 함께 열망하는 것, 그들이 복음의 일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의 착한 일이라는 것은 복음의 일인데,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빌립보 성도들은 복음의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마지막 때까지 이루실 것을 알기에 기뻐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부름 받았고 그 일에 함께 동참하는 것 분명히 안 성도들, 나의 모든 삶이 이 사명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을 분명히 알고 헌신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었기에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두번 감사하고 한 두번 기뻐하는 것으로 하루를 잘 마무리할 때가 있습니다. 그 감사도 그 기쁨도 없어서 하루종일 메마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옥문이 열렸을 때만이 아니라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서도 그는 기뻐했고, 복음이 전파될 때만이 아니라 복음으로 매맞아도 기뻐하는 전천후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런 삶으로 본인이 스스로 경험하며 누리고 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상황을 넘어서는 놀라운 감사 충만, 기쁨 충만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 부어지는 영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건에 어떤 환경에 잠깐 감사하고 잠깐 기뻐하는 거 말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나의 힘을 넘어서는 사건, 영적인 일입니다. 그런 전천후 기쁨과 전천후 감사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며 내 삶은 그 그리스도의 복음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내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붙들며 나아갈 때만 가능한 영적인 일입니다. 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매달려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의 삶이자 나를 넘어서는 영적인 일임을 잊지 않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보냄을 받은 자이고 부름을 받은 자임을 알아, 늘 우리가 예수님의 일에, 복음의 일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하늘로부터 은혜를 공급 받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자입니다. 나의 삶이 메마르도록 방치하지 않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되며 그 분 안에 머물러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공급 받으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우리 인생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고 어려움과 난관도 있고 문제도 있을지라도, 그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이끄시고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으며 그리스도 안에 꼭 붙들며 거할 때, 내 삶에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감사가 덮일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삶이 나를 넘어서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감사와 기쁨이 흘러 넘치며 눈에 보이는 상황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함을 바라보며, 내 눈과 마음이 하늘에 향해 하늘로서 공급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옥중 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쓴 위로와 권면을 전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 가운데 복 된 소식을 전하며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 복음의 충격을 알려주는 놀라운 서신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의 인사로 시작되는데,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제일 중요한 첫번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 쉬고 절대 소유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죠. 내가 가진 모든 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내 삶을 이끌고 결정하시는 분이 주인이신 예수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닌 주인의 뜻을 따라가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주인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내 소원이 아니라 주인의 소원을 품는 게 주님의 종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생각 없이, 쉽게 예수님이 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찬양하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 고백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여러분들은 주님의 종입니까…그러면 아멘이 잘 안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거북해 하고 불편해 합니다. 목회자만 예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만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성도인 여러분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내 주인이라는 고백이 내가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인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도 내 삶의 주인이고 나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늘 싸우고 갈등 하고 부딪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그래서 제일 처음에 자신에 대한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입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들을 어떻게 정의 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애틀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 살고 있는가를 정의하는데 그 정의는 두 가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고 빌립보 안에서—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지역 안에 살고 있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지역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집사님 어디에 사세요? 그러면 저 시애틀에 살아요…이렇게 말하고 끝나는 게 일반적입니다. 시애틀에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시애틀 지역 안에 산다는 것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이지요. 시애틀 안에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사는 곳은 성도라는 것은 시애틀에 살던, 한국에 살던, 어느 지역에 살던 그건 두 번째로 중요한 거고 제일 중요한 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질문이자 관심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눈에 보이는 어떤 지역 안에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느냐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거룩한 무리인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고백하는 자들이 고백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인도하고 이끄심을 실제로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살기 좋은 곳, 시애틀에서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들이 성도됨의 본질은 내가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가에 있어서 늘 언제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최우선에 두는 삶입니다. 살기 좋은 시애틀 안에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의도적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이 성도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걸 분명히 믿어야 하늘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함께 고백한 찬양과 같이 평화 평화로다….은혜와 평강이 하늘위에 내려와 내 영혼을 덮게 되는 겁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부어져 내 영혼을 적시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체로 고백하고 믿으며 이것을 내 삶의 체험하며 살아가는 삶, 이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라는 것은 나는 그분의 종이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통하여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나는 주님의 종 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선포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임을 놓치지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나아갈 때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 되심을 믿고, 내가 주님의 종임을 믿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 원합니다. 또한 성도로서 내 삶의 우선순위와 주도권이, 이끄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분명히 고백하십시오. 또한 나는 시애틀에 사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한 본질임을 믿으십시오. 그래야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그 부어지는 은혜에 공급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셔서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공급받으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가 오늘부터 빌립보서를 통하여 새벽기도 시간에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옥중 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쓴 위로와 권면을 전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 가운데 복된 소식을 전하며 은혜와 평강을 얘기하는 복음의 충격을 알려주는 놀라운 서신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를 듣는 대상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었기에,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시작 되었으며 빌립보 교회가 어떤 context 속에 있었는지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16장 말씀이 바로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지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실라와 함께 사도바울이 선교 여행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원래 본인들이 계획했던 것은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마게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통해, 소아시아 로 가려는 계획을 바꿔서 배를 타고 유럽 쪽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이게 복음이 아시아 쪽으로 흘러가지 않고 유럽 쪽으로 흘러가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선교 여행의 방향을 바꿔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도시가 바로 빌립보였습니다.
빌립보에 가서 이제 복음을 전하는데 히브리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 왔는데 빌립보에는 회당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옷감 장수인 루디아가 복음을 영접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인을 고쳐서 억울하게 감옥에 투옥되는 일입니다. 이 귀신들린 여인이 점치는 것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던 자들이 사도바울이 귀신을 쫓아낸 것 때문에 보복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그렇게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밤에 밤에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간수, 그 옥문을 지키는 자는 옥에 있었던 사람들이 도망간 줄 알고 자결을 하려고 그러는데, 사도 바울이 우리 안 도망갔다고 자결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유명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는 선언과 함께 이 간수장 가정이 모두 회개하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루디아와 이 간수장 같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두 가지의 큰 도전 가운데 권면과 훈계를 줄 목적으로 씌여졌습니다. 첫번째는 로마의 황제 숭배와 힘과 권력의 논리를 넘어서는 성도의 삶을 도전합니다. 또한 빌립보 라는 도시는 로마의 굉장히 충성 되는 도시였습니다. 자신이 로마 시민 이라는 것, 로마에 속해 있다는 것을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기에 황제에 대해서도, 로마의 힘과 권력에 대해서도 당연히 충성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고 주로 모신다는 것은 황제를 주로 모시는 삶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 충성하는 문화와 가치관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주님을 모시는 것과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힘과 권력의 논리, 황제의 논리와 정반대로 낮아지시고 포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증언하면서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도전하는 말씀이 빌립보서 말씀입니다.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종하며 목회자에 순종하며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교회를 섬길 것을 도전합니다. 초대교회가 성경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빌립보 교회 안에는 여선교회 리더들 사이에 주도권 갈등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교회 안에 헌신된 여성 리더들 사이에 알력 다툼과 갈등이 빌립보 교회에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마 기억하실 텐데 그 이름이 유오디아와 순두개인데, 헌신되고 열심인 리더인 이 두 여인이 팽팽하게 맞서고 교회 안에 주도권 싸움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들을 향하여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한 마음을 품으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순종하고, 목회자의 권위 아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권의 안에 순종하고 자기 마음대로 세를 과시하는 것을 책망하며 훈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렇게 복음으로 변화된 놀라운 증인들을 통해 생명력을 가지고 시작된 교회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들임을 잊지 않고 교회 안에 어떤 도전과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성도들의 삶 속에 어떤 도전과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그것을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이 덮이기를 사모하며 나아가십시오.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빌립보 교회가 어떤 context 속에 있었고 어떤 도전 가운데 있었는지를 알아, 빌립보서를 통해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시는 은혜와 권면의 말씀으로 큰 도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기 결론 말씀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룻기 1장은 마라와 같은 절망 가운데 쓴 물을 맛보고 쓴 물이 올라오는 처절한 밑바닥이었습니다. 이민 간 땅에서3번의 피눈물 나는 장례식을 했어야 했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그 다음 두 아들을 보내는 그 말로 할 수 없는 절망의 장례식을 경험하며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채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룻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룻기 끝에는 이 모든 것이 반전의 은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놀라운 축복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 인생의 시작과 중간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인생 끝이 해피엔딩이면 그 인생은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룻기의 해피엔딩, 쓴물이 올라오는 마라의 인생에서 단물로 변화시켜 주시는 놀라운 반전의 정점은 바로 룻이 아들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아들을 낳을 수 없었던 이방여인이자 과부, 그 남편도 남편의 형제들도 다 죽고 모든 것이 메마르고 소망 없었던 그 룻과 나오미의 집안에서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자격 없는 자에게 부어주신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준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로 말미암아 자격 없는 룻과 나오미는 놀라운 은혜를 입고 그 놀라운 사랑 가운데 법적으로 기업 무를 자가되어 그 모든 끊어진 대가 회복될 수 있는 기적을 경험하고 가문을 잇는 아들을 낳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분명히 아들은 룻을 통해 태어났는데,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축복하고 나오미의 아들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은 당사자가 아닌 룻이 아닌 시어머니에게 우르르 몰려와서 아기의 출산을 놓고 기뻐하는 것이죠. 사실 이게 서양 사람들은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동양 문화인 우리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룻이 낳은 아들은 그냥 룻의 외동 아들인 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은, 대를 잇는 기적의 아이인 것이죠. 룻을 통해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집안의 경사 이자 나오미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그 아픔과 눈물을 모두 날아가게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자 감격의 순간이죠. 그래서 지금 수많은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가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된 것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쓴 뿌리와 쓴 물이 단물로 변화하는 놀라운 비결, 놀라운 반전의 인생은 결국 나의 열심과 성실함과 겸손함이 있어야 되겠지만 더 본질적으로 나의 성실함과 나의 겸손함을 넘어 자격 없는 나에게 부어 주시는 주님의 놀랍고도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임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이끄시고 나를 건지시고 인도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분의 보이는 은혜와 보이지 않는 은혜의 손길이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반전의 역사, 반전의 인생을 경험하게 합니다.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를 통한 자격 없는 자들을 향한 놀랍고도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의 산물이 룻이 낳은 기적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만 이야기가 끝나면 그냥 우리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고 놀라운 반전의 하나님 은혜로만 끝나게 됩니다. 룻기 이야기는 개인적인 가문의 회복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회복이고,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 인류의 회복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사 시대에 정말 마라와 같이 쓴 물이 올라오는 영적 암흑기를 지나며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그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회복의 은혜로 나아가는 새 시대를 준비하셨는가?...를 봐야 합니다. 지금 이 룻이 낳은 기적의 아들, 놀라운 반전의 은혜로 주신 이 일방적인 은혜로 얻게 된 아들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 출생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성경에서 아이의 탄생은 굉장히 드물게 나타납니다. 아무리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도 출생 이야기가 기록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만큼 희귀하고 중요한 아기의 탄생 증언이 성경에서 등장 할 때는 특별히 큰 역사적인 전환점이 생기는 때임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기록이 증언 되어 있는데,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라는 새 역사와 새로운 챕터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을 통해 단순히 룻과 나오미의 집안 회복의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의 전환점이 시작되는 때를 다윗 할아버지가 태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증언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윗의 출생 이야기가 증언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준비하시는 경륜은 이미 다윗의 할아버지를 기적으로 태어나게 하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는 전혀 알 수도 없는 이 놀라운 계획, 영적 암흑기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이 이미 다윗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수대 전부터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삶의 중간에 이런 굴곡과 쓴 물이 올라오는 아픔을 경험할지라도, 결국 우리의 인생 끝에 이렇게 놀라운 반전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 주시고 높여 주시며 하나님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해주심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 초반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를 복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인생의 마지막에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룻기와 같은 결론이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소망이 보이지 않고, 우리 민족이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고 당장 망할 것 같은 영적 암흑기와 쓴 물이 올라오는 절망 가운데 서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 준비하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시대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챕터의 역사가 다윗 3대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이미 열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는 우리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도 수많은 그 보이지 않는 영적인 씨앗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준비되고 나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며 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믿음만을 가지고 늘 걸으며 보이지 않는 손길과 계획과 섭리를 믿으며 나를 세우시며, 나의 가문을 세우시며, 우리 교회를 세우시며 이 민족을 세우시는 주님의 큰 뜻을 발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개인적인 룻과 나오미의 집안의 회복 정도의 결론이 아니라 영적 암흑기를 지나 가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나오미 집안과 같이 모든 것이 망하고 소망이 없는 절망 가운데 서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어떻게 새 사람을 준비하시며 새 시대를 준비해 이 백성을 회복시키는가를 결론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보아스가 상속 1순위, 자신보다 앞서 있는 1순위의 사람과 독대한 후, 기업 무를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모든 권한을 포기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공증 받는 장면입니다. 공증을 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양하게 있는데, 한국에는 인감 도장이 대표적인 공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증을 하는 방법은 사람들 앞에서 신을 벗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증 절차로 그 사람이 신을 벗는 겁니다. 이걸 통해 사람들의 눈이 증거가 되며 그 신을 벗어 주는 것이 법적으로 공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신을 벗는다는 공증은 기업 무를자로서의 의무를 포기한다는 법적 표현이고 자신은 기업을 무를 마음도 없고 의지도 없다는 것을 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집안을 회복시키는 기업 무를 자로서 마음을 다해 나아갈 때 가지고,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인 진심을 가지고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절차를 밟아 공증을 통해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도록 클리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 공증을 밟는 보아스를 통해 법적으로 process하는 이 모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룻기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어둠 속을 헤매며 방황하고 아무런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우리 인생을 어떻게 구원의 은혜로 위대하게 바꾸시는가를 볼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영적 암흑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세우시는 방법도 자격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방법도 왕이라는 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나아가게 됨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신 십자가 사랑도 예수님의 개인적인 사랑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 법적인 효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법적인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잘 몰라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그런 가슴 뜨겁게 하는 사랑일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영원한 효력이 있는 놀라운 사랑이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법적으로도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값을 치른 법적 사건이 되는 것이고, 십자가는 개인적인 사랑을 넘어 영원한 법적 효력을 갖게 해주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그렇게 모든 법적인 절차를 마무리하고, 법적으로 공증을 다 받은 후에 그 다음 단계를 가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공식적인 절차와 법적 절차를 마무리 한 후, 룻과 정식적으로 결혼 하는 것을 통해 그 죽은 자의 기업을 자신이 사고 자신이 댓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사실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세워 주기 위해서는 결혼해서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법적으로 안에 해주고 그 다음에 그것을 통하여 그 씨앗을 줘서 룻에게 아들이 나올 수 있게 말해주면 되는 거예요. 값을 지불 해서 그 땅들을 사면 되는 것이고 아들을 나올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아스는 정식적으로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도적으로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인 룻과 결혼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은 이 결혼이 보라스에게는 흠이 될 수 있는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말론의 아내라는 말은 지금 룻이 과부였다는 말이고, 모압 여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여인이라는 것이지요. 남편과 사별한 과부,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피하는 이방 여인,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앞세우고 보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격 없는 룻을 아내로 맞이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정식적으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통해 룻을 세워 주는 것이고 룻을 회복 시켜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보아스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과 은혜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과 자격이 되지 않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고 자격 없는 룻을 세우고 회복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주시는 거죠. 그 모든 희생과 댓가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거에요. 자격 없는 과부이자 이방 여인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정식적으로 품어 주신 그 보아스의 마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에게 수많은 자격 미달의 조건들 충족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품어 주셔서 우리를 값주고 사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거죠. 더 나아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신부로 함께 모시게 하셔서 우리 같이 흠 없고 죄 많은 사람들을 품으시고 사랑하셔서 이 놀라운 영적인 언약 관계를 맺어 주시는 거에요.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세워 주시기 위해서…. 고엘 (Redeemer), 기업 무를자로서의 보아스는 자격 없는 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밑그림으로, 역사적인 경륜과 하나님의 큰 뜻을 통해 나오미의 집안이 회복되고 세워지며, 영적 암흑기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렇게 회복되고 세워지며, 어둠속을 헤매는 우리 인생도 예수님의 핏공로로 이렇게 회복되고 세워지는 것을 발견하는 놀라운 영적 진리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확증이자 영원히 법적 효력을 주신 은혜의 실체입니다. 우리 인생의 깊은 어둠을 지나가고 소망 없는 마라 같은 인생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건지시고 놀랍게 세워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이만큼 사랑하시고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자격 없는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값 주고 사시며 영원히 법적 효력을 가지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룻과 같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회복된 백성 임을 깨닫고 주님 은혜만을 붙들고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기 4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사 시대의 영적 암흑기 가운데 그의 백성을 향하여 회복의 메시지로 새 시대를 준비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 자원하는 마음과 함께 큰 희생과 헌신을 담보하는 겁니다. Redeemer의 입장에서는 별로 큰 소득이 없는 일이고, 대부분은 돈을 부어야 되고 손해가 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써서 값을 치루고도 자신의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망한 집안을 살리는 것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옷입고 손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자가 바로 기업 무를 자이고, 그 모습은 장차 오실 온 인류의 기업 무를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보아스가 룻과의 만남을 통해 기업 무를 자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이 1순위가 아니고 2 순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기업 무를 자 1순위인 사람을 찾아 나서서 독대 하는 장면이 오늘 말씀입니다. 보아스는 이 기업 무를 자 1순위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찾고 있는데 마침 그 사람이 지나다는 것으로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그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가 하면 마침 그 사람이 지나가는 겁니다. 그냥 껍데기와 상황만 봤을 때는 우연히, 마침 그 자리를 지나 가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 가운데 있어, 마침을 가장한 섭리로 그 1순위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이 만나는 순간도 우연히 만났지만 그건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그 뒤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알고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는 그 기업 무를 1번 타자를 보아스가 만나 10명의 장로들을 함께 증인으로 세우며 지금 독대합니다. 이 1순위의 친척이 처음에 이야기 할 때는 땅에 값만 지불하면 되는 줄 알고, 그 기업 무를자의 역할을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 생각에 그 당시 토지를 사고 파는 게 불가능 하니까 그냥 장기 투자라고 생각하고 돈을 지불할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땅만 그렇게 사서 지불하는 게 아니라 대가 끊긴 그 집안에 아들도 만들어 줘야 되는 것이지요. 죽은 자 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씨앗을 줘서 아들이 태어나도 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세우는 데 쓰임 받는 양자가 되는 것이죠. 돈으로 해결에서 땅을 사는 것은 한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자신의 아들도 되지 않고 값주고 산 땅이 자기 기업과 그 집안의 이름을 세우는 데 도움도 안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발을 빼는 것입니다. 결국 이 1번 타자인 기업 무를 자의 선택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그 무너진 집안과 가문을 세워 줘야 된다는 선한 마음이나 자비가 아니라, 손익관계와 이해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룻기 1장에서 룻이 나오미를 따라온 비결은 손익 관계나 이해 관계를 통해 결정한 것이 아니라 바른 관계를 더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에 나오미를 따라 갔음을 배웠습니다. 반대로 이 기업 무를 자 1번 타자는 주판을 열심히 굴려보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될까… 이익이 되지 않을까…만 가지고 생각하니까 기업 무르는 것이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보아스가 이렇게 노력하고 자신이 이렇게 뛰어 다니면서 기업 무를 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 동기가 이해관계나 손이 관계가 아니라 이 집안에 대한 순전한 사랑과 이 가족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헤세드….하나님의 자비 하심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이끌게 되었다는 것을 대비 하여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보아스가 그린 밑그림 대로 그 첫 번째 기업 무를 자가 거절하고 보아스의 차례가 와서, 보아스가 결국 룻과 나오미 집안의 기업을 무르며, 대가 끊겨 죽은 자의 기업을 그들의 이름으로 세워주는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게 보아스와 이 기업 무를자 1순위인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 건지 시며 우리를 값 주고 사신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전적으로 부어주는 자비 하심의 은혜로 대비되는 이 보아스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는 밑그림으로 결론과 말씀하고 계십니다. Redeemer에게는 손해만 나고 큰 값을 지불해야 하지만, 우리를 향한 자비 하신 마음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억지로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Redeemer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보아스의 마음이 바로 장차 오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임을 발견합니다. 그 놀라운 자비하심을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값을 지불하여 건지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그 복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있게 됐다는 것 이것을 이 말씀을 통해 깊게 묵상하기 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기쁨으로 그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신 주님의 사랑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 주님만 바라보며 선명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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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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