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들이자 세번째로 왕이 되는 여호람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남유다는 계속해서 여호사밧 왕이었는데 북 이스라엘은 아합왕에 이어 세번째로 왕에 세워집니다. 여호람 왕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평가인 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지는 아니하였으니…” 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분명히 여호람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악한 자였기에 부정 평가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 만큼 악하지는 않다는 평가, 긍정 평가라고 할 수는 없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평가가 끝나면 되는데 하도 북 이스라엘에 불순종하고 배반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그 악한 자들 가운데 이 여호람은 좀 좋은 편에 속하는 악한 자였다고 어떻게든 좀 좋게 평가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한 왕이라도 말씀 가운데 정신차리며 본질로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녹아져 있습니다. 여호람 왕이 그 부모보다 그래도 낫다고 하나님께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주상을 다 없앴기 때문입니다. 주상을 북 이스라엘에서 모두 없앤다는 건 왕이어도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 백성들의 함께하는 뿌리깊이 내려오고 있는 우상숭배 근원이 되고 상징이 되었던 것이 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상을 없앤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과 반발을 직면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놀라운 결단을 통해 그렇게 주상을 모두 없앴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람 왕은 부모보다 훨씬 나은 존재이고 훨씬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왕들에 대한 일관적인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이 잣대로 우리 모두를 평가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내 인생 평가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 천국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분명히 실체로 함께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분명한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 인생은 어떠한가…를 늘 인식하고 내 삶을 돌아보며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바라보고 계시고 평가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한가…세상 기준으로 어떠한가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정말 중요한 인생 가치로 두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평가를 민감하게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내 삶을 두며 살아갈 때, 아합왕와 같은 부정 평가, 여호람과 같은 씁쓸한 평가를 받지 않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님의 길을 동행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 하나 여호람 왕의 평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배반한 모압을 향한 연합군의 전쟁입니다. 여호람 왕이 직면하게 되는 모압과 전쟁, 남유다 여호사밧 왕에 함께 연합군을 조직해 모압과 전쟁을 벌이려 합니다. 모압은 원래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는데 모압이 배신을 하고 나니까 여호람 왕은 그 모압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전쟁이 하나님의 뜻에 옳은 지 아닌지, 하나님이 함께 싸우시는 전쟁인지 아닌지 고려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 생각에 배신한 자들을 가만 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앞서 전쟁을 밀어 부치고, 하나님을 찾는 대신 눈에 보이는 이웃이었던 남 유다 여호사밧왕을 함께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그 초대에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 심사숙고하거나 하나님께 분별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대신,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전쟁 참여를 결정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성은 당신의 성과 같고, 내 말들은 당신의 말들과 같다면서 적극적 전쟁 참여를 결정합니다. 여호사밧왕의 인생 후반전의 문제는 아합왕으로부터 좋지 않은 영향이 그에게 흘러 들어와서 변질과 왜곡을 지속하게 하는데, 또 한번 실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유다를 끌어들여서 함께 전쟁하면 겉으로 보면 세가 커져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국 망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전쟁에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주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은 이렇게 연합군을 조직해 모압을 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전쟁의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 가운데 척척 계산대로 진행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모시지 않은 전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아가는 전쟁길 앞에 그들은 생각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가 하면 떠난지 7일 만에 군사들도 가축들도 먹을 물이 딱 떨어져 목말라 죽게 생긴 겁니다. 전쟁에서 보급은 필수인데 먹을 것은 고사하고 먹을 물이 없으니까 사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여 위기 속에 갑자기 찾아온 것은 왜곡되고 과장된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당하는 겁니다. 아 슬프다….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모압의 손에 넘기려고 하시는구나…전쟁은 해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목말라 죽겠구나…탄식합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을 그렇게 찾았다고…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 두려움에 빠지니까 다 하나님 탓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자문도 구하지 않고 전쟁에 뛰어 들고서는,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과 위기 속에 하나님을 배제한 자신들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에 보냈다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모압의 손에 죽었구나…벌벌 떨고 두려움에 압도당하는 그 때, 남 유다 여호사밧은 또 한번 정신을 차리고 다르게 반응합니다.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지금 물이 떨어져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말라 죽을 것 같은 전쟁터의 절박한 상황 가운데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우리는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말고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볼 수 있는 선지자가 가까이에 있는지를 먼저 찾아야 한다며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 당하여 벌벌 떠는 대신, 늦었지만 회개하는 마음으로 먼저 이 주변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직 살 길임을 외치는 것입니다. 아합 가문과의 결혼을 통하여 안 좋은 영적 영향력이 계속해서 여호사밧 왕에게 젖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의 왕보다 훨씬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민감한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때가 늘 한발 늦습니다. 전쟁 하기 전, 일이 터지기 전 먼저 하나님께 자문하고 갈 길을 어쭙는 영적 겸손이 있어야 사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붙드는 타이밍이 꼭 일이 터지고 나서, 위기와 복병을 만나 두려움에 압도 당하고 나서 찾게 되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여호사밧 왕과 같이 믿음의 반응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상황에 압도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눈에 보이는 문제나 어려움을 뛰어넘어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며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십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시고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지 못했다면 인생의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것 만이 회복의 길이고 살 길이며 승리의 길입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죽겠다고 포기하는 인생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두려움과 낙심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구하며 붙들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엘리사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 한 직후 직면한 한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여리고에서 물을 달게 하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엘리사를 모욕하고 놀리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의 수제자이자 후계자는 엘리사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외에도 소위 말하는 엘리야의 제자라고, 내가 엘리야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엘리야가 승천한 후 그의 시신을 찾는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찾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굳이 며칠씩 헤메면서 엘리야의 시신을 찾는다고 돌아다녔습니다. 왜 그렇게 그들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는가? 엘리아의 시신을 찾으면 본인들은 엘리야의 후광을 좀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왜 꼭 엘리사만 엘리야의 직속 선지자냐….우리도 다 엘리야의 제자들이니, 본인들이 리더십을 주장하고 영향력을 주장하면서 엘리사를 압박하기 위함입니다. 엘리야의 시신을 찾아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 뭔가 해보려는 인간적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찾아 헤멘 것입니다. 마치 모세의 가족들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만 하나님이 부르셨나...우리도 부르셨다면서 그의 지도력에 도전을 가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논리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가 봐야 쓸데 없는 일이라고 알려준 엘리사의 말 대로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시신을 찾을 필요도 없고, 엘리야를 기념할 필요도 없고 엘리야를 높일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때 잘 쓰임 받고 천국에 들려 올라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냐가 아니고, 엘리야와 엘리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 쓰임 받고 떠난 엘리야를 이제는 뒤로 하고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쓰시는 선지자인 엘리사를 쓰고 계심을,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되지 말아야 되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만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면,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게 되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내려놓고 가지치기 하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높이고 사람들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자꾸 기념비를 세우면서까지 기억하려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에서 물을 달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의 첫 정복지민 여리고 지역의 문제는 뭐냐면 위치도 좋고 여러 조건들이 좋은데 물이 안 좋아서 농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그 물을 고쳐 주셨습니다. 엘리사가 분명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엘리사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게 아니라 엘리사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라는 물에서 엘림의 단물로 바뀌지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그 땅에 물을 고쳐주고 그 땅의 물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시는 엘리사를 통해 그 땅에 물을 고쳐 주시고 치유하며 생명을 얻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생명을 주며 쓴물을 단물로 치유하시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기에 이 새벽에 은혜 가운데 우리가 말씀을 먹기 위해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으며 말씀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정반대의 역사인데 엘리사를 놀리고 저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했는데, 이 작은 아이는 어린이기 아니라 청년이라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합니다. 젊은이들과 청년들이 엘리사는 대머리라 놀리고 조롱하며 엘리사의 사역을 방해하는 겁니다. 대머리라고 놀리는 것은 단순히 엘리사에게 머리가 없다는 것을 조롱하는 외모 비하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머리는 부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머리를 놀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모욕이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대머리라고 놀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족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조롱하며 선지자의 사역을 가로막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지만 저주하고 모욕한 젊은이들을 수풀에서 곰들이 나와 42명을 찢어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모욕하고 저주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가로막은 그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비극적 사건은 마치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의 역사로 즉사한 비극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흔드는 사건을 저질렀기에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큰 일이 아는 거 같지만 그 일이 얼마나 교회 공동체에 큰 악영향을 미쳤는지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하는 것도 바로 성령의 역사였다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엘리사를 통한 이 두 기적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치유받고 복과 구원을 얻는 역사가 있었던 반면에 그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고 거절하면서 화와 심판을 얻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말씀으로 죽은 땅을 살리며 쓴물을 단물로 바꾸며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축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끌기도 하고, 동시에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치는 자들을 향하여 이런 화와 심판에 역사를 이끌기도 함을 잊지 마십시오. 본질을 붙들고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사람들이 대단한 게 아니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대단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고 주어진 시간 잘 쓰임 받는 사람들을 높이는 대신, 사용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엘리야가 하나님의 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놀라운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기로 직전에 그의 사랑하는 제자인 엘리사에게 마지막으로 사명을 맡기고 떠나갑니다. 엘리야가 떠나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은 엘리사를 통해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복은 사람은 떠나가지만 사명은 남겨져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내가 그 자리에 충성을 다하다가 떠나가도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워 그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신비입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야는 지금 곧 하늘로 들려 올라가기 직전인데 그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인 엘리사에게 맡기는 겁니다. 내가 지금 떠나기 일보직전인데 내가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즉 너가 나에게 진짜 원하는 것을 구하라 말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 한가지가 있다면 진정 복된 인생입니다. 엘리사가 정말 원하는 한 가지는, 진정으로 구한 한 가지는 성령의 갑절의 능력과 역사입니다. 내 삶에 가장 큰 복은 창세기 창조 사역을 통해 배웠지만 말씀이 말씀 그대로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은 두 번째이고 내 인생의 가장 큰 복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풀어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성령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이루어지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 그 통로가 되는 것만큼 귀하고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내 뜻으로 살다가 신앙이 깊어지면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되고요. 처음에는 내 힘으로 애쓰고 열심히 살다가 신앙이 깊어지면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 직전에 그토록 간절하게 성령의 갑절의 능력과 역사를 구했을까…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엘리사의 간절함과 열망, 즉 내가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동시에 이 엘리사의 고백은 나는 엘리야 당신보다 너무나 작고 약한 사람입니다…그렇기에 나는 정말 갑절의 부으시는 역사와 능력이 없으면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고백하는 겁니다. 지금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가나안 정복 여정을 되돌리는 듯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입니다. 그만큼 시대가 악한 때에 엘리야와 같이 목숨 걸고 사람들의 충돌과 부딪힘을 이기며 담대하게 주신 말씀을 선포하며 내미신 하나님의 손을 그들이 붙들어 구원받게 인도하려면 나는 주님이 주시는 갑절의 은혜와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간절히 구하는 성령의 갑절의 능력과 역사는 두 가지가 다 포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 그 능력과 역사를 간절히 사모함과 동시에 나의 능력 없음에 대한 처절한 인정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일수록 내 힘을 붙들고 겸손한 사람일수록 하늘의 능력을 구하며 하늘의 역사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엘리사의 고백을 마음에 새기게 하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는 게 아니라 내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능력에 맞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사명 가운데 내 능력에 맞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하나님께서는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맡기시는 겁니다. 내 힘으로 안되는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 사명을 너희 힘으로 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능력을 구하며 그 사명에 맞는 능력을 구하고 받으며 살아가는 자가 되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힘과 능력이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내가 하늘의 능력과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한 자입니다…그렇기에 주님의 역사와 능력이 저에게는 갑절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하늘의 힘을 붙들고 하늘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구했던 기도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구해야 되는 간절한 기도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엘리야가 영광스럽게 하늘로 승천하게 됩니다. 병거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회오리 바람 타고 하늘로 들려 올라갑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대단한 선지자였는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가면서 이 땅의 삶을 마친 자였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역사를 보여준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하늘의 놀라운 모습으로 변하신 후에 거기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두 사람 모두 이 땅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서 들림을 받은 놀라운 사람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인생의 끝이 가장 복된 인생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시작은 미약하고 중간은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날지 모르나 내 인생의 끝은 이렇게 영광스럽고 찬란하다…주님이 나를 이렇게 놀랍게 받아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는 인생이라는 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늘에 소망을 두는 성도입니다. 새벽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 인생을 주님 앞에 조율하며 하늘의 힘과 능력을 구하는 성도들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나의 소망을 하늘에 두는 것이며 그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내 인생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나의 인생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도와 주옵소서…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와 같이 우리 인생도 주님 은혜 가운데 영광스럽게 천국으로 올라가 주님께서 품에 맞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의 인생의 끝에 펼쳐지게 도와 주옵소서…그것을 정말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임계점이 넘어가고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역순으로 모든 것을 여정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 말은 엘리야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역순으로 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며 광야로 내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하고 그 축복의 땅에서 우상과 불순종과 반역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물러나게 하시며 광야로 내 모시는 그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가 바로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이 시대가 점점 악하고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지만 끝까지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임계점이 넘어가면 그것이 끝내시는 때가 있고 심판이 오는 때가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이 시대를 분별하고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통해 이 세상을 깨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내 능력에 맞는 일이 아니라 내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며 내 힘이 아니라 하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어깨 힘을 빼며 하나님이 주신 힘 붙들고 그 하늘의 능력을 구하며 살아가십시오. 엘리야가 놀랍게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을 바라보며 나의 인생의 끝도, 내가 맞이하게 될 죽음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복된 인생이 되도록 사모하기 원합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 놀랍게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환승역임을 내가 분명히 믿고 확신하는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끝이 그 엘리야와 같이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라가며 예수님이 나를 맞아 주심을 분명히 믿으며 이 땅에서의 여정이 천국을 준비하는 여정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올릴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 같지만 하나님이 돌아오라 부르시는 때가 곧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않고 주님의 때에 민감하게 살아가는 자가 성도입니다. 성도로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하나님의 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하나님의 때를 늘 준비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돌려보내실 때가 다가왔음을 알고 엘리야가 엘리사와 하는 마지막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첫번째는 끝까지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복,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까지 끝까지 함께하고 떠나지 않겠다는 엘리사의 결단은 오늘 말씀에서 세번이나 반복됩니다. 하늘로 올라가기 전 하나님께서 가게 하신 곳들을 방문하기 위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하자, 엘리사는 어디를 가도 떠나지 않겠다며 끝까지 함께할 것을 약속합니다. 2절에도, 4절에도, 6절에도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반복 강조합니다. 사실 엘리야에게는 엘리사만 제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50명이나 있었다는 것을 7절에서 증언합니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제자들은 가만히 있었는데 이 엘리사는 끝까지 선생님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으로 엘리야를 쫓아가는 것입니다. 것이죠 지금 이 세상에서의 별세가 임박하고 헤어질 때가 임박한 이 때에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와 함께하기를 동행하기를 결정하며 끝까지 함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예수님 믿고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고 동행하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왔다 떠나가기도 하고, 가만히 있다가 변하기도 하고, 믿을만 한 것 같다가도 언젠가 배신하고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나는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겠습니다…결단하는 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신앙생활도 혼자 신앙 생활하면 오히려 편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혼자 신앙생활 하지 않고 같이 신앙 생활하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로 묶어 주셨습니다. 그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체득하게 하시고 그렇기에 내 힘이 아닌 하늘의 힘을 붙들고 신앙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소중한 이유는 우리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공동체라는 데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소중한 이유는 나보다 나를 더 먼저 사랑하시고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공동체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도 함께하고, 죽어서 천국가서도 영원히 함께할 끝까지 함께할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우리보다 먼저 천국에 올라간 지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맞아준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그 끝에 자들이 예수님이 서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끝까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바탕은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기에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기를 결정하고 동행하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스스로 예수님과 함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이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가 믿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 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등돌리고 배신하고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른다 할지라도 주님의 나를 향한 사랑은 끝까지 변하지 않음을, 끝까지 함께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한 것임을 믿습니다. 성도로서 예수님께서 나와 영원히…끝까지…함께하심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엘리야가 하늘에 올라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이곳 저곳을 가게 되는데 그 도시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하나님은 엘리야를 길갈로 보내셨고, 그 다음에는 벨엘로, 그 다음에는 여리고로, 마지막에는 요단으로 부르셔서 가게 됩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기 전,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엘리야를 보내시는 장소들을 특별한 영적 의미들이 있는데, 그 장소들을 모두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 주셨던 여정들의 도시들입니다. 문제는 순서가 요단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요단으로 끝이나는 역순의 도시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엘리야가 가는 이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하며 차지했던 도시들을 하나님께서 역순으로 거꾸로 가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 거꾸로 가는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무엇을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지금 너희가 얼마나 타락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에게서 떠났는지 아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걸어왔던 이 가나안 땅의 역사를 하나님이 거둬 가실 때가 속히 올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성취로 주셨던 가나안 땅에 주셨던 축복들을 거꾸로 역순으로 돌아가게 하실 정도로,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이렇게 임박했다는 것을 엘리야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선포하게 하시는 겁니다. 엘리야가 역순으로 나아가는 가나안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스라엘을 향하여 끝까지 경고하시는 것, 그게 엘리야가 했던 마지막 사명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에는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지막 여행도 해야 하고 주변 정리도 해야 하고 가족들과 맛있는 거 먹으며 시간도 보내야 하고…많습니다. 하늘로 올라갈 때가 임박했던 그 때, 엘리야는 떠나기 직전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세상과 별세하기 전까지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주신 사명 감당한 자가 엘리야였던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함께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떠나가는 것입니다. 한때 쓰임 받고 버려지고 잊혀지는 인생이 아니라 내 삶에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선명히 쓰임 받는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나의 이 땅에서의 삶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잠시 살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 날이 속히 옵니다. 그 속히 올 그 때를 준비하며 오늘도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엘리야의 시대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경고의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여 있음을 깨달아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명인 어둠의 백성들이 돌아와 회개하고 주님의 손을 붙잡고 건짐 받기를 주님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나의 인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며 멸망과 어둠에서 건짐을 받고 새 사람 되는 역사가 우리 주변에 풍성히 경험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견디며 함께하며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하지 않음을 믿으며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 이 엘리사의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결단, 떠나지 않겠다는 결단이 예수님을 향한 나의 결단이 되기 원합니다. 천국에 가기 전까지 하나님께 선명이 사명자로 살아가며 주님이 맡기시고 보내신 이유를 끝까지 감당하며 살아가십시오.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믿으며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만 붙들고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하시아 왕에게는 두 가지 큰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속국인 모압이 배반과 반역을 한 일이고, 또 하나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중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아 왕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는 이런 저런 문제들과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인생에 직면한 어려움과 문제들, 주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엎드려 은혜를 구하는 것 외에 살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것 외에 어떤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아 왕은 처한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고 처리하는 방법이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따라갔고, 이런 왕을 찌르고 깨우기 위해 찌르기 위해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너 지금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찾아가서 문제 해결하려는 것 때문에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쓰리고 아픈 진리에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그 진리에 직면해 변화해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말씀 앞에, 빛 앞에 직면했을 때, 아하시아왕은 어떻게 하면 사는가? 바로 엎드리고 돌이켜서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아하시아 왕이 진리의 말씀에 직면한 후 보인 반응은 말씀 앞에 엎드리고 은혜를 구한 게 아니라 귀를 막고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진리의 소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오십명의 군대를 엘리야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한 마디 하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군사 모두를 살라 버렸습니다. 그러자 또 다시 50명을 보내는데 이번에도 동일하게 엘리야가 하나님의 불을 내려 그 사람들이 다 타 죽었습니다. 이 부분은 묵상하다가 잘못하며 시험 들기 딱 좋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100명이 되는 사람을 그렇게 한번에 불을 내려서 죽이시는가…이런 잔인하고 끔찍한 하나님이신가…라고 잘못 이해하며 성경을 덮어버리는 이런 오해를 갖게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아하시아의 왕명으로 보낸 군대는 진리의 말씀 앞에 그의 불순종과 반역의 반응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아하시아가 믿음의 반응을 보였다면 엘리야에게 군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사신을 보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군대를 보냈다는 말은 군대가 왕명으로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엘리야를 체포하러 것입니다. 네가 감히 왕의 명령을 거절해? 당장 그 놈을 잡아 내 앞에 데려오지 못할까… 하는 왕명을 받고 군대가 온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진리의 말씀을 거절하고 충돌하는 불순종, 진리의 소리를 잡아 죽이려 하는 아하시야 왕의 악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군인들이 하늘의 불이 내려서 다 타 죽은 것은 아하시아의 불순종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자기가 보낸 군인들이 그렇게 모두 하나님의 불로 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아하시야는 믿음의 반응을 했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나를 찌르시고 깨우시는 말씀이구나…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사는데 아하시야 왕은 또 다시 군대를 보내는 겁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두번째 보냄 받은 오십 부장은 지금 당신은 왕명을 거절하면 직결 심판 받을 자라는 거 모르냐… 지금 당장 빨리 내려와라…고압적인 자세로 엘리야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다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 명의 군인들을 다 태워 버립니다. 그렇게 두 번이나 큰 일을 당하고도 아하시아는 또 다시 군대를 보냅니다. 세번째 오십 부장이 또 50명의 군사를 데리고 엘리야에게 찾아오는데, 이번에는 매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오십 부장이 엘리야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앞의 두 오십 부장들과 같이 왕명으로 내려진 체포 영장을 일방적으로 내미는 게 아니라, 엘리야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간구했고 거만하게 엘리야에게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불이 내려 군인들이 태우지 않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강압이 아닌 자발적인 모습으로 엘리야가 아하시아 왕 앞에 나아오게 했습니다. 사실 이 세번째 오십 부장의 겸손한 모습, 진리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구하는 겸손함으로 은혜를 구하는 태도가 아하시아 왕이 가져야 할 태도임을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세와 태도로 주님 앞에 엎드리면 그가 살 수 있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아하시아 왕을 살리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세번째 오십 부장의 호위 아래 엘리야는 내려가 왕 앞에 서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아하시아를 살리려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강력하게 경고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네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찾아 물어보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우상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침상에서 절대 내려오지 못하고 너는 반드시 죽을 거라 선포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경고를 하시는 이유는 이 경고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건데 그 하나님의 마음은 뭐냐면 이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산다… 하나님이 내미신 그 손을 붙들면 산다는 마지막 초대입니다. 너 지금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반드시 죽고 반드시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니까 마지막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잡아라…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 하나님의 초대 손길을 붙들지 않은 아하시아 왕의 안타까운 결론으로 끝납니다. 죽을 때까지 마지막 경고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끝까지 잡지 않은 채 말씀대로 이루어져서 그는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아 왕은 끝까지 돌이키길 거절하고 붙들기를 거절하면 결국 멸망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될 말씀으로 나를 찌르고 깨우며 내 심령 골수를 쪼개시며 내 마음을 때로는 쓰리고 아프게 하시는 이유는, 그 말씀에 직면해서 진리의 소리를 들어야 내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소리 앞에 내가 엎드려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며 주님이 내미신 손을 붙잡아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그 진리의 소리에 귀를 막고 닫아버리면, 결국 아하시아 왕과 같이 결국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비극이 우리 가운데 경험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 심판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초대의 손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들어야 될 말씀을 통해 진리에 직면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달아 이 시간 그 말씀 앞에 엎드리며 그 말씀 안에 손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십시오. 경고와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 가운데 내미시는 그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은혜를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심판에서 건짐을 받고 죽음에서 건짐을 받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열왕기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열왕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망하고 무너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돌아서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으며 멸망으로 가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돌아오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서는 왕의 이야기 같지만 왕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이며, 더 본질적으로는 선지자를 통해 드러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인공입니다. 열왕기서 말씀을 통하여 끊임없이 실수하고 무너지고 자빠지는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그런 어두움과 암흑 시대에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 돌아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험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이 때에 열왕기서를 통해 한줄기 빛과 같이 계속해서 손을 내미시고 돌아오기 원하시는 그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붙들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임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열왕기하는 아합의 아들이었던 아하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하시아 왕은 두가지 큰 문제를 직면했는데, 모압이란 나라의 배신과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어려움입니다. 보통 낙상을 하게 되면 웬만해서는 그것이 중병으로 가진 않는데 아하시아 왕은 상태가 점점 좋아지지 않고 병이 위중해 졌습니다. 아하시아가 그렇게 병이 들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방법이 더 큰 문제였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의 위중해지는 병 가운데 하나님이 아니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불에게 찾아갔다는 것, 그게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찾아오고 문제가 있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문제였다는 것이죠.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는 아합왕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대표적인 악한 여자인 이세벨이었으니 당연히 이런 엄마 아빠 밑에서 아하시아는 하나님을 찾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방 신이었던 바알세불에게 가서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아하시야가 혹시 하나님을 몰랐고 하나님의 사람을 몰랐는가…생각해보면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왜냐면 늘 8절에 보게 되면 외모 설명을 듣고도 그가 엘리야인 줄 알았을 정도로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몰라서 하나님께 안간 게 아니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하시아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이방 신 바알세불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물어봤을까? 이유는 분명한데 들어야 될 말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갔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하시야 왕이 듣고 싶은 말은 뭡니까? 왕이시여 이 병 곧 났습니다…조금만 있으면 곧 쾌차합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은 겁니다. 잘된다…병 낫고 문제 해결된다… 이런 말씀만 듣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들어야 될 진짜 말이 아니라 내 귀를 즐겁게 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기에 하나님의 사람 대신에 이방 우상의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는 게 인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에 이런 문제들과 어려움들이 찾아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려움과 문제 가운데 여전히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이런 생각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하시아의 비극이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이 빠지는 비극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들어야 될 말씀을 사모하며 그 앞에 엎드리는가,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오늘도 사람들을 찾아가며 눈에 보이는 우상을 찾아가는지… 지금 그 하나님의 손을 붙들어야 산다…그 손을 붙들고 돌아와야만 산다…는 말씀을 무시하고 듣고 싶은 말씀을 쫓아가는 비극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이 말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는 일어나 올라가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여러분들이 새벽기도 오실 때마다 붙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일어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며 성전을 향해 오는 그 발길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이 기도 자리를 지키며 내가 기준을 붙드는 새벽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왕의 신하들이 바알세불에게 가는 길을 막아서며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불에게 가느냐…너가 아버지가 없어서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느냐…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누구에게 가서 물어보느냐는 겁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안 계신 분처럼 여기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고, 다른 것들을 붙들고 물어보려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하시아 왕이 들어야 될 진리를 알려줍니다. 내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내가 반드시 죽으리라…정확한 답을 주시는 겁니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라 들어야 될 말씀을 정확히 주시는 겁니다. 이 말씀은 네가 뭘 해도 죽으니까 노력하지마…이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와 살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하나님 외에는 답이 없으니까 하나님께 돌아와야 살아… 이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죽어…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하시아왕 개인에게 대한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와 백성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다급한 문제가 생겼을 때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내가 누구에게 제일 먼저 찾아가고 묻는가…이게 내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붙드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들어야 될 정확한 답을 붙들고 주님 앞에 나아와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 그 사람들이 건짐 받는 자이고 살아나는 자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룩한 자이며 그 사람들이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라는 것을 말씀을 판에 새겨서 내 영혼을 살리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우상들을 찾아다니느냐…경고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의 시작은 크고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믿음으로 반응하여 살아가는 일을 경주하십시오. 바라기는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소생하며 깨어나며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나는 귀하고 복된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유다 여호사밧 왕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판관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전반적 삶이 하나 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간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물론 곁길로 빠지기도 했고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돌아왔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했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며 여러 업적을 이룬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큰 실정을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는데 첫번 째, 산당을 폐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적 미신적인 신앙에 빠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복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며 백성들은 온전하게 주님 앞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통하여 결국 그것이 나중에 큰 문제의 씨앗이 되어 버립니다. 또 하나는 북 이스라엘 아합왕과 더불어 화평한 문제입니다. 북이스라엘 왕과 화평했다 것은 단순히 전쟁을 버리지 않고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통하여 인척 관계를 맺는 큰 실수입니다. 하나님 앞에 악하고 영적으로 어둡고 타락하기로 유명한 아합왕과 이세벨 가족을 결혼으로 연을 맺게 되니까 그들의 좋지 않은 영적인 무질서와 우상숭배가 여호사밧왕 개인 뿐 아니라 남유다 백성 전체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했다는 이 부분을 아주 심각하게 부각합니다.
여호사밧왕은 북이스라엘 아합과 연을 맺은 까닭에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 같이 참여해 휘말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그 전쟁에서 패배하고 아합왕은 비참하게 죽고 여호사밧왕 본인도 거의 죽을 뻔 하였습니다. 죽을 뻔한 그를 하나님은 구사일생으로 건져 주셨고, 그걸 통하여 여호사밧왕은 정신을 차리고,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셨음을 생각하며 다시는 북 이스라엘과 연을 맺으면 안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아합왕이 전쟁에서 죽은 후, 여호사밧 왕은 그 아들인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아 왕돠 또 다시 연을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합을 꼭 닮은, 심히 악을 행하며 무너진 아들 아하시아 왕과 교제를 하고 가까이 하니까 결국 여호사밧 왕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무너지는 어리석은 왕이 되었고 그 인생의 마지막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는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아하시아 왕과 합작해서 만든 배를 만들어 다시스로 금을 구하러 가는 배를 보냈는데 그 배가 완전히 박살났다고 증언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연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 결과 여호사밧 왕은 이름 값을 못하는 왕으로 역사에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패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전쟁에서도 건져 주시고 위험에서 여러 번 건져 주셨음에 불구하고 그의 이름과 같이 하나님은 나의 판관 되신다는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완주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산당에서 미신적 예배로 하나님을 수단화 도구화 하는 잘못된 예배가 고착화 되며 나라 전체가 영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뭐랑 똑같은가 하면 기적적으로 암에 걸린 자 환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의사도 포기한 그 죽을 암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죽다 살아난 사람, 하나님의 기적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 기적의 치유를 경험하여 죽다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을 병에서 건강을 기적적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을 모르고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고 아무거나 몸에 해로운 것을 먹으면서 결국 암에 다시 걸렸다 그게 바로 남유다 여호사밧왕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아합왕과 같이 전쟁터에서 죽었어야 당연한 인생을, 기적적 건지심으로 구사 일생으로 살려주셨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는 북 이스라엘과 연을 맺으면 안되는데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여 아방의 아들 아하시야 왕과 또 가까이에서 교제하며 화해하는 겁니다 결국 죄에 쩔어 살게 되고 영적 불순종이 넘어와 여호사밧 왕의 인생 후반전을 망가지게 하고 더 넓게는 남유다 전체의 삶의 영적으로 망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여호사밧 왕에 대한 안타까운 결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판관자 되신다는 그 이름 고백대로 살지 못하고 이름에 걸맞지 않은 삶을 산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기 전까지는 죄성을 가진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불순종과 반역, 상함과 깨짐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물들지 않아야 되는 거룩하고 구별된 영적 전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한 순간만 정신을 차리지 않고 망각하게 되면 이 세상과 갈등 없이 화평하게 되며 이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 가며 젖어 들어 나에게 스며들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같이 무너지는 여호사밧 인생 후반전의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이것이 나의 인생 되지 않기를 반성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이 이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나님 말씀에 나를 늘 비추어야 합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이름값 하지 못하는 인생으로 끝나지 않도록 늘 근신하고 깨어 있으며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춰 보며 살아가는 영적 전쟁을 지속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끝자락이 어떠했는가를 평가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선명히 새기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 끝까지 주님만 붙들고 주님의 기준 가운데 신실하게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합왕의 마지막 일생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사실 열왕기상에서 가장 길게 등장하는 왕 중 하나가 바로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벌이는 것도,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일도, 질 수 밖에 없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두번이나 승리하게 되는 것도 다 아합 왕이 등장합니다. 불순종하고 악한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에게 여러 번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의 인생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뜻대로 막 나가게 되고 전쟁터에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게 오늘 말씀입니다. 분명히 선지자 미가야는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했습니다. 이번 아람과의 전쟁에 올라가는 것은 이기러 올라가는 전쟁이 아니라 죽으러 가는 전쟁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왕 옆에 있는 400명 가까이의 예언자들은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미혹된 자들로서 듣지 말아야 되는 이야기라는 것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이 주시는 진실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그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주신 말씀을 무시하고 지금 길르앗 라못에 전쟁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합왕은 자신 마음대로 내 뜻대로 전쟁하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내 기분에는 지금 전쟁에 가서 싸우면 이길 거 같거든요. 옆에서 주변에 소위 말하는 아첨꾼들은 지금 올라가면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막 분위기를 부추키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불순종하며 아람과의 전쟁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아합왕 본인이 전쟁에 올라가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왕이 전쟁에서 최전선에 나가서 나를 따르라….소리치며 앞서 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합왕의 이중성과 교활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호언장담한 아합왕이 왕복을 안 입고 변장하고 남유다의 왕이자 사돈인 여호사밧 왕에게 전쟁터에서 왕의 복장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전쟁은 그 당시에 누구를 찾아 죽이는 전쟁이냐하면 왕을 찾아 죽이는 전쟁입니다. 그럼 결국 모든 아람 군대가 누구를 죽이려 하겠습니까? 여호사밧 왕을 죽이려고 하겠죠. 본인은 왕복을 입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변장하고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왕복을 입으라는 거예요. 왕이 전쟁에서 맨 앞에 백성을 이끌고 나가서 싸워도 이길까 말까 인데 이렇게 왕이 뒤에서 숨어버리고 변장하고 있는 모습, 이게 아합왕의 교활한 이중성이고 안타까운 이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가 미가야가 예언한 거 같이 아합왕과 같은 이런 지도자는 있으면 있을수록 백성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없으면 없을수록 오히려 백성들에게 평안이 되는 그런 함양 미달의 지도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제안이 여호사밧 왕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서 올라와 전쟁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하러 올라와서는 자기는 혼자 살려고 변장하고 나만 왕복을 입어서 죽으라 그러니까 이게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혼자 왕복을 입고 있으니 적군들이 이스라엘 왕인 줄 알고 여호사밧 왕에게 몰려들었고, 그 때 여호사밧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증언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어떻게 소리를 질렀을 것 같다 생각하십니까? 죽이려는 적군들을 향하여 아마도 “나는 이스라엘 왕이 아니야…번지 수 잘못 찾았어…” 이렇게 소리를 질렀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아는 상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렀다는 것을 평행 본문인 역대하 18장을 보게 되면 여호사밧이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이스라엘 왕이 아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른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외침이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남유다 여호사밧왕은 전쟁터에 가서야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전쟁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전쟁 전에 미가야의 예언을 통해 여호사밧 왕은 이게 잘못된 전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멈추지 못하고 같이 전쟁터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함께 온 아합왕이 자기만 살겠다고 변장하고 자신에게만 왕복을 입고 모든 적군이 자기를 향하여 죽이려고 오는 것을 보면서 그때서야 드디어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른 내용입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 두 손 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고 매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에게서 적군이 떠나가게 도와주시고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에 전쟁터에 가서야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두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여호사밧의 전쟁터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기적적으로 보호하시고 목숨을 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고 불순종한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중요한 단어는 무심코…인데, 적군이 왕인지 모르고 조준한 화살에, 그것도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빗맞은 화살을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왕이 바로 죽는 게 아니라 빗맞아서 피를 계속 흘려 낮부터 계속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밤이 되서야 결국 죽게 됩니다. 변장해서 스스로 살려고 발버둥 쳤지만, 왕인지 모르고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서 죽은 비참한 죽음, 그게 바로 아합왕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변장하면 살 수 있을 것 같고 머리를 쓰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미가야가 말한 예언대로 하나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며 그 전쟁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합왕의 죽은 피는 개들이 핥아 먹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말씀이 성취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여러 번 참으시고 인내하시지만 영원히 돌아올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합의 비극적 죽음을 통해 깨닫기 원합니다. 아합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마음의 찔림과 부담감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고 돌아서기를 거절하고 마지막까지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고 불순종한 처절한 결과를 직면하게 되는 아합왕을 우리는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여러 채널을 통하여 다양한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중하게 여기며 그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며 순종하는 은혜가 있을 때 아합과 같은 비참한 결론을 맺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합왕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계속 날려버리며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어느 선에 가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잊지 않고 그 말씀을 붙들고 말씀의 기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유다 여호사밧 왕의 요청으로 전쟁에 나아가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만한 선지자를 찾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선지자는 바로 아합왕이 미워하는 미가야 선지자였습니다. 미가야는 아합왕이 굉장히 싫어하는 자였는데 왜냐면 왕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400명의 어용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선언하다 보니 굉장히 듣기 거북하고 마음이 불편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돈인 남유다 왕의 부탁으로 말미암아 그 미가야를 마지못해 데려와서 미가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 좀 잘 말해 달라고 부탁하는 아합왕에게 미가야는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시는 것만을 말하겠다고 대쪽 같은 대답을 합니다.
먼저 미가야는 북 이스라엘과 아합왕에 대한 영적 상태에 대해 직언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성 모두가 없이 양같이 산에 흩어져 있는데 사실 주인이 없어서 더 평안히 그 집에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합왕은 차라리 없는 게 백성들에게 더 평안하다고 직언하여 아합왕을 찌르고 깨우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차라리 없는 게 더 좋을 정도로 못된 왕이라고 지적하니 당연히 왕으로서 기분이 나쁘고 불편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듣고 아합왕이 바로 미가야 선지자를 향해 따지듯이 말합니다. 나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니까 저렇게 안 좋은 이야기만 하는 나쁜 선지자라고, 길하지 않은 흉한 얘기만 하는 선지자라고 미가야를 몰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충돌하고 부딪치는 아합왕을 보면서 미가야는 목숨을 거는 용기를 내서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심을 더 선명하게 선언합니다. 지금 가서 아람군대와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말씀에 따라 선포합니다. 지금 올라가면 아람 군대와 싸워 당연히 이길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 전쟁터로 나가는 게 죽으러 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400명의 어용 선지자들 과는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와 전쟁하러 가는 길은 아합왕에게는 올라가 죽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400명의 어용 선지자들이 아합왕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는 문제는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거짓의 영에 사로잡힌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는 문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로 하나님 말씀을 포장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술에 있어서 그것이 결국 악한 자의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심각한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합왕 주변에 이렇게 아첨꾼들만 가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고 있는 것이 결국 거짓말하는 영에 미혹되게 만드는 심각한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가야는 아합왕에 대해서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아첨하는 400명의 어용 선지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합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게 하심을 그대로 전하는 미가야의 말씀 선포를 향하여 충돌하며 부딛힙니다. 그 말씀을 듣던 400명의 어용 선지자 중에 하나였던 시드기야는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후려 칩니다. 이런 얘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네가 뭔데 감히 이런 얘기를 하냐고 막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하게 하신 말씀을 선포하는 미가야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붙들고 나아갈 때 사는데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나를 찌르고 내 심령 골수를 쪼갤 때 그것에 감정적으로 화가 나고 분노하며 그것을 통하여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옥에 가두고 충돌하고 부딪히는 것, 이것이 아합왕의 비극이자 북 이스라엘의 비극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냥 오케이만 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을 비추어 보며 받아 자기를 돌아봤으면 무너지지 않았을텐데 미가야 같이 진리를 선포하는 훌륭한 선지자의 말을 들으며 엎드리는 대신 그 하나님 말씀에 충돌하고 부딪고 거절하는 아합왕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듯,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때로는 내 마음을 찌르고 비추어 변화되기 원하시는 그 진리 앞에 서서 나의 현주소를 대면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어두워지고 타락할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바꿔야 되는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려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고 하는 이 심각한 문제를 바라봐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엄중한 진리가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뜻에 맞게 내 귀에 듣기 좋은 것으로 변형시키고 변질시키는 이 심각한 영적 문제를 우리는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영이 나를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내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듣고 내 귀에 듣기 좋은 사람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게 하신 것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듣기 좋은 부분만 듣고,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이런 거짓의 영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 나에 비칠 때 때로는 입에 쓰고 내 마음을 찌르는 말씀을 주심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죄가 드러나며 나의 어둠이 물러가며 그 빛가운데 내가 굴복하여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영적으로 민감하고 성숙하고 영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은 말씀이 나를 교정시키고 말씀이 나의 생각을 고치고 말씀이 나의 고집을 꺾는 겁입니다. 말씀 가운데 내가 변화되고 꺾이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영은 나를 변화시키는 대신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씀에만 몰입해서 아무런 변화가 필요 없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며 결국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가게 하는 미혹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향한 반응이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나를 승리로 이끌기도 하고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말씀 앞에 엎드려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순종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22장 말씀은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함께 연합군을 구성해서 아람 군대와 싸우려고 하는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은 그동안 계속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오늘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동시에 등장하게 됩니다. 왜 남유다 여호사밧 왕이 아합왕 이야기에 등장하게 되는가 하면 여호사밧 왕이 아합왕과 소위 말하는 결혼을 통해 친인척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이 하나되자는 어떤 좋은 구호로 맺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합왕은 북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악하고 타락한 왕 중에 하나였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남유다 여호사밧왕은 바알신을 멀리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며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출발하였던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세워 주시며 남유다가 강성하게 되었는데 그런 여호사밧이 곁길로 가고 변질과 타락을 가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바로 아합의 집안 북 이스라엘과 연혼 관계를 맺어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가지고 있는 세상 가치관과 우상을 품고 살아가는 것에 남유다 여호사밧이 물들고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아합왕과 가까이 함으로 여호사밧 개인의 삶 뿐 아니라 남유다 전체가 변질과 타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큰 승리를 주셨는데, 아합왕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아람왕을 죽였어야 하는데 죽이지 않고 살려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살려 보낸 아람왕이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다시 보복하러 온 것이 오늘 말씀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연합군을 이루어 아람 군대와 싸우게 되는 배경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아합왕에게 내려가 함께 전쟁을 하겠냐고 얘기하니까 아합은 교만에 빠져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습니다 이처럼 아합왕은 여전히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아람군대와 싸워 이길 때도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게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기게 하신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10만 명의 아람 군대를 죽인 게 자기의 능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통 자만과 교만에 빠져서 상황을 정확하게 읽지 못하니까 지금 아람 군대와 싸우는데 뭐든지 다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는 아합 왕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그나마 덜 타락하고 영적으덜 둔감한 남유다 여호사밧왕이 바른길을 제시하는 겁니다. 이렇게 호언장담으로 우리 생각으로 결정하기 전에 전쟁에 나가는 게 옳은 지 하나님께 먼저 좀 물어봐야 된다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아합왕, 당신 뜻대로 막 결정하지 말고, 호언장담으로 막 일을 추진하지 않고, 조금 결정을 미루고 먼저 하나님께 말씀으로 물어봅시다…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합왕은 전쟁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합왕이 누구에게 물어봤는가 하면 400명 이상의 어용 선지자들을 모아두고 물어봤다는데 있습니다. 선지자 400명이 똑같이 전쟁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니까 지금 당장 올라가 싸우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 400명이 제대로 된 선지자가 아니라 앵무새 같이 왕이 원하는 대답만을 하는, 왕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선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타락하면 항상 왕 주변에는 이런 어용 예언자들이 득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듣기 좋아하는 말 권력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앵무새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말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취하면서 권력의 핵심에 포진되어 살아가는 자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한두 명이 아니라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진리와 바른길을 제시하지 않고 왕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면서 하나같이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언자 400명이 이구 동성으로 아합왕 귀에 듣기 좋은 얘기만 앵무새 같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양심이 살아있고 덜 변질되어서 그런지, 하나님 말씀으로 주신 진리의 예언은 아님을 분별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왕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아부이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감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진짜 예언자들이 없냐며, 여호사밧 왕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의 이런 영적 안목에 아합왕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미워하긴 하지만 진짜 예언자 중에 하나인 미가야 선지자를 소개합니다. 소개하면서 아합왕 자신이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미가야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귀에 듣기 좋은 기분 좋은 이야기 대신 안 좋은 얘기만 하고 내 마음을 후벼 파는 거북한 이야기만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둠의 백성들은 빛을 미워하고 충돌하고 부딛히는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빛이 찾아오니까 싫어하고 잡아 죽이려는 모습이 복음서에 그대로 증언되는데 아합 왕이 바로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할 때 생명이 빛을 비출 때 어둠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고 미워하고 충돌하고 부딪친다는 것입니다. 미가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말하는 자는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미움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야 되는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들어야 되는 말씀은 듣기 거북한 이야기이며 마음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때문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그 미가야 선지자를 데려와 말씀을 듣기를 촉구합니다. 400명의 어용 예언자들 말고 진짜 들어야 될 말씀을 전해주는 예언자를 데려와야 된다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사밧을 통하여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왕 앞에 오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내 영적 현주소의 본질은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하고 교제하고 가까이 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가까이 있는가에 따라 내 인생이 더 신실해질 수도 있고 내 인생이 변질되고 타락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합이나 이세벨 같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가까이하면 그 잘못된 가치관이 나를 물들게 하고 변질되고 타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세워주고 민감하게 하고 바른 길로 인도할 사람들과 가까이 하십시오. 내가 좋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결국 내가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하며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는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좋은 성도가 된다는 것은 좋은 소리만 듣고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나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열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되며, 그 진리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깨우고 심령 골수를 쪼개는 그 은혜를 사모하며 그 진리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회복시키고 깨우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이 경험되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