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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셉 목사의 새벽묵상

​새벽묵상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 고린도전서 15,9-11 | 4-17-2026

4/17/2026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알려져 있고, 14장은 은사장으로, 15장은 부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 보물과 같은 말씀들을 고린도전서에는 품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우주적이고 역사적이며 언약적 사건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놀랍게 선포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놀라운 사건을 바라본 증인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부활 후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보이셨고 500명의 형제에게도 보이셨고 나같이 미천한 자에게도 보이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부활 신앙은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믿는 게 아니라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나를 구원하시고 생명 주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부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 생활과 영적 환경이 무엇인가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근거로 한 영적 생활은 바로 나 자신이 지극히 작고 자격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는 영적 겸손입니다. 그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나를 바라보니까 나는 지극히 작고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자라는 것을 절감하는 것, 이게 영적 겸손입니다. 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내 자격과 조건은 모두 무너뜨리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영적 겸손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착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으며, 나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천국 간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나에게는 구원받음에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가 바로 신앙 생활 제대로 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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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정말로 자기가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여겼고 사도로 불림을 받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격과 조건이 없는 자라고 철저히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 본질적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라는 것을 평생 마음의 짐으로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에게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왜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자격도 없는 것이죠.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게 영적 겸손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영적 겸손의 태도가 있는 겁니다. 부활 신앙을 철저히 붙들면 붙들수록, 내가 작은 자이며, 자격도 조건도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깨닫게 합니다. 반대로 내가 자격이 있고 조건이 있고 내가 이렇게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 겸손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자가 되는 겁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의 연수가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나에 대한 소망을 내려놓고 나는 자격도 조건도 없음 작은 자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당연함을 넘어서는 영적 겸손을 견지하며 신앙 생활 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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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사도 바울이 증언하는 부활 신앙을 기초로 할 때 나오는 영적 환경은 바로 은혜의 환경이라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유명한 고백과 함께 10절 한 절에 은혜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 수고하고, 내 수고도 내가 한 수고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철저히 고백합니다. 겸손과 은혜, 이게 부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 본인의 고백을 통하여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은혜로 영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환경에 나를 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고 한결같은 그 사랑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을 때 자유로운 거지, 물밖에 나오면 조금 있다 숨 막혀 죽게 되는 것처럼, 성도인 내가 은혜의 바다 가운데 있을 때만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면 영이 아닌 육이 활성화되며, 육적으로 민감한 삶이 되어, 영적인 것이 모두 마비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경시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바다에 내가 있으면 끊임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전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일방적인 사랑을 내가 취하며 맛보며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영적으로 눌리지 않고 결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영적으로 깨어나며, 그 은혜의 바다 가운데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 환경을 은혜로 두고 사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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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이란 이 겸손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자격 없음 조건 없음을 바라보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자를 살리시 고 건지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의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사랑을 바라보며 내가 은혜 가운데 뛰놀고 살아가는 영적 환경에 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에 집중하게 되는 게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집중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부름받은 증인의 삶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파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무엇에 집중하게 되는지 압니까? 내가 한 일에 집중하게 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모든 내 삶에 관심이 되어 버리고 내 생각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내가 한 일, 내가 이룬 일,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압도당해 그 안에 결박되어 살아가는 겁니다. 부활신앙을 철저히 붙드는 성도는 이것을 넘어서 어떤 삶을 사도록 부름받았습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넘어 하늘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목하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내가 한 일을 넘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자꾸 바라보지 말고 하늘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내가 한 일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집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영적 겸손과 은혜의 삶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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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영적 훈련을 한다는 것은 나를 이 은혜의 환경 가운데 두는 의도적인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환경 가운데서만 마음껏 헤엄치고 뛰놀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은혜의 영적 환경을 조성하십시오. 내 마음과 생각을 자꾸 세상에 빼앗기지 말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 내가 한 일에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늘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고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열망하십시오. 하나님이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고 지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앞으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에 집중하며 관심을 가지며 주목하는 삶, 바로 영적 겸손과 은혜의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유일한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들고 그의 은혜를 의지하여 가는 것이죠.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내 모든 삶의 수고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이 고백이 사도 바울의 고백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실체적인 고백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약속대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를 깨고 나를 부활하신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너무 작고 자격도 조건도 없는 정말 소망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영적 겸손으로 엎드리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와 그가 하신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영적 선순환이 우리 삶에 풀어지며 영적 겸손과 은혜의 영적 환경 가운데 나를 두면서 오늘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고린도전서 15,1-8 | 4-16-2026

4/16/2026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3장은 사랑장, 14장은 은사장, 15장은 부활장…모두 보석과 같이 귀한 말씀들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가장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선포되는 말씀 한 군데를 뽑으라 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꼽을 정도로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그리고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절대 가치와 진리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과한 모든 것이며 또한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선명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핵심으로 말한다면 바로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부분 진리들이 있고 부분적인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의 공통적인 그런 요소들이 분명히 있는 것이죠. 그런데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 하면 바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다른 종교와의 차별점, 그리고 기독교를 기독교로 되게 하는 핵심이 뭐냐?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 이끄는 그 놀라운 복음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5장에서 집중적으로 부활에 대해 증언하며 강조하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굳게 지키고 분명히 믿지 않으면, 그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선명히 붙들지 않으면 우리 믿음의 기초가 헛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믿는 고백과 그분이 약속대로 다시 사셨음을 믿는 고백,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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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 내내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로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는 놀라운 우주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치르시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다 찢어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관계가 다 예수 이름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오래전부터 예언된 언약의 성취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요나의 예를 들면서 자기가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나가 불순종으로 도망가다가 바다에 빠져 큰 물고기에 들어가 3일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요나의 사건을 예를 드시며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마태복음 12장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흘 후에 다시 요나가 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울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의 요나 사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표로 주신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복음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사건도 십자가의 사건도 성경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며 일어난 하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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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예수님은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모든 구원의 선물을 완성하신 후에 바로 승천하신 게 아니라 40일 동안 부활의 증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증인들을 남겨 두시기 위해 부활하시고 그 부활하신 것을 보이셨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강조합니다. 수제자 게바를 위시해 11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다른 500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였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하는 제자들은 사실 증인으로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들은 하나같이 숨거나 배신하거나 도망간 자들이죠. 그러니까 증인으로 내세우긴 참 부족한 자들입니다. 사실 증인으로 가장 중요하게 먼저 나와야 할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배신하지 않고 한결같이 자리를 지킨 여인들이죠.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여인들이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 시대에는 여자의 증인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에 모든 여인들에 대한 증거들을 다 빼고 이 부끄러운 제자들과 남자들만 전면에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목도했던 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이름 모를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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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모든 신앙과 말씀의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집니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옛 언약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히 성취하시는 그 언약을 위한 밑그림 작업이고 그림자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약속대로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은 우주적 사건이자 역사적 사건이자 실체적 사건이라는 것을, 또 약속과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초대교회의 초석은 바로 이 예수 부활의 증인들로부터 시작한 겁니다. 배신자, 겁쟁이, 숨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바라보고 직면하면서 놀랍게 변했고,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 가운데 그들이 완전히 뒤집어진 겁니다. 마지막으로 나 같은 사람에게도 보이셨다는 것이죠. 부활하신 주님을 머리로만 안 것이 아니라 직접 대면에서 알고 그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뒤집는 능력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했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의 간증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이고 능력이며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역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메시지 하나를 붙들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가 된 역사였다는 거예요. 초대교회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Christ is risen…예수 부활하셨다..인 이유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의 선포가 초대교회를 탄생하게 했으며,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한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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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부활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과 핵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인이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명히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분명히 믿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감당하셨다.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영생을 주셨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계시며 지금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 죽음은 환승역임을 분명히 믿고 예수 이름으로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게 바로 부활의 증인으로서 저와 여러분들의 성도의 고백되기 원합니다. 그 고백 위에 지금 이 시대에도 그 부활의 증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교회라는 존재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기초로 삼고, 기독교 신앙의 흔들리지 않은 복음인 십자가와 부활이 내 삶에 분명한 고백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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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 고린도전서 14, 37-40 | 4-15-2026

4/15/2026

 
오늘 말씀은 방언의 성경적 사용에 대한 결론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가 풀어졌던 많은 성도들, 특별히 여자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분명한 권면을 결론의 말씀으로 주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내 유익과 자랑을 넘어 교회에 덕을 세우며 주신 분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겁니다. 품위가 있다는 것은 은사를 사용하면 할수록 주변 사람들과 교회에 덕을 세우는 도구가 되는 것이고, 질서 있다는 것은 은사를 사용함에 무질서를 넘어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영적 우선순위가 깨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교만과 자기 유익을 세우려 하면 망하게 되고 반드시 다른 사람과 교회의 덕을 세우며 질서와 품위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방언만 하면 갑자기 자기가 마치 신령한 자가 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소위 말한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가 은사를 받아서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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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이 말씀이 한 번에 딱 해석이 잘 안 되는데 원문을 가지고 직역을 해 보면 이런 말씀이에요. 지금 편지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권면은 단순히 개인적인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시는 분명한 명령임을 믿느냐는 겁니다. 이 사도 바울의 권면을 주의 명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그 또한 인정받지 못하는 자가 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본인들은 은사가 있다고 여겨 교만과 자기 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영적 교만을 허물어 주기 위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주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누구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에게 인정 못 받게 되겠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시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경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명령으로 여기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 또한 너희 인정 안 하신다는 겁니다.하나님 말씀을 주의 명령이라는 분명하고도 겸손한 태도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태도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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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문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시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를 받은 말씀, 내가 좋아하는 말씀은 있는데, 그것을 취사선택해서 그것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나에게 힘이 되고 나에게 위로가 되고 내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는 게 왜 잘못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만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며 다른 것들은 다 배제하고 나아가는 삶, 이런 취사선택의 말씀이 그들의 신앙을 흔들고 무너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 말씀 같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런 말씀이 가시와 같이 해석이 어렵고 불편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내가 평가하거나 재단하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면 갑자기 스스로 신령한 자가 된 것 같이 착각하며, 그런 체험과 경험을 절대 같이 두며 심지어 말씀의 통제를 벗어나 말씀 위에 올라가서 자빠지고 넘어져 결국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민감하다…스스로 신령하다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단, 삼단에 그렇게 잘 빠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질서 가운데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체험과 경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내 판단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유입니다. 이 본질적인 성경적 우선순위와 적용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꼭 들어야 할 권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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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 누구에게 인정 못 받게 되는가 하면  함께 신앙생활하는 지체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활기차게 살 수는 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사느냐 아니냐는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일 수는 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묶여 사는지 아닌지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다 주변 사람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좋다고는 인정할지 모르나 그 사람의 신앙은 인정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스스로 신령한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 가운데 굴복하지 않고 말씀보다 내 이성이나 내 경험이나 내 체험을 계속 더 우선순위에 두고 절대 가치에 두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안다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 말씀은 별거 아니구나. 저 사람은 말씀의 사람은 아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굴복하지 않는구나. 이거 다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변에 함께 있는 지체들이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선 좋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좋은 사람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것이죠. 그 신앙이 진짜인 자들을 사람들은 찾고 그 진짜 신앙인 자들이 계속 세워져 나가는 곳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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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중요한 건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 방언으로 인해 문제가 있습니다. 방언의 무질서와 덕을 세우지 못한 이런 문제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방언 말하지 마…이건 안 된다는 겁니다. 은사 사용으로 문제가 생겨서 어떤 교회들은 방언을 금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문제와 무질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덕이 좀 세워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걸 성경적 원리로 잘 개선해 가지고 이제 다시 조율되면 되는 것이지, 그것 때문에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동시에 방언을 금하지 말되 예언하기를 더 사모하라는 겁니다. 은사보다 방언보다 말씀을 더 사모하라는 겁니다. 체험과 은사를 향한 그 사모함이 말씀을 사모함보다 넘어서면 우리는 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분명한 말씀의 통제를 받는 은사가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늘 내 체험과 경험만 사모하지 말고 제일 먼저 사모해야 할 건 하나님 말씀, 우리 삶의 절대 방점은 말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임하기를 사모하며 그 예언의 말씀을 먹고 내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단 그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품위와 질서가 생기며 교회의 덕을 세우며 이걸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생활이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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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령의 선물로 주시는 방언의 은사,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금하지 않고 그것을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그것이 항상 말씀에 분명한 통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1번이고, 그 말씀을 통과한 기도로 말씀을 붙든 은사가 풀어져 하나님 앞에 폼이 있고 질서 있고 덕을 세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엎드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것을 주님의 명령으로 믿으며 내 머리에 담기지 않고 수용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씀을 내가 굴복하고 그 말씀에 언제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믿으며 순종하는 말씀의 사람입니까? 특별히 내가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이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1번 되셔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고 이게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말씀을 취사 선택하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께도 인정받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말씀의 권위 앞에 엎드리며 말씀이 하나님 명령이자 하나님의 말의 숨결임을 믿으며 그 말씀을 먹고 순종하며 그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갈망이 나에게 절대 기준과 가치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주의 명령과 말씀으로 대하며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순종하며 엎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때 주님이 주신 그 뜻대로 때로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교회의 덕을 세우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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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가시 같은 말씀도 잘 발라서 해석하라." 고린도전서 14, 32-36 | 4-14-2026

4/14/2026

 
오늘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고 ​ 또 여자 성도들에게는 가장 거북하고 불편한 말씀으로 꼽히는 그런 대표적인 말씀인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여러 가지 해석과 적용을 통하여 여러 교단과 교파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논란이 되고 상반된 해석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이런 말씀은 불편하고 거북하다며 빼어 버리고 성경을 취사선택해서 읽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고, 말씀을 시대 상황과 맥락에 맞춰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먼저 이 말씀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면 안 되고 그냥 잠잠히 무조건 침묵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분명히 여자 성도들을 향하여 심지어 기도도 하고 말씀의 강단을 세우는 그런 파격적인 일에 대해서 권면한 말씀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 어느 곳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는 분명한 계급적인 차이가 있는 그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을 대표 기도와 강단에도 세웠다는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권면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없고 종과 주인 사이에 차별이 없음을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선포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이 말씀 자체가 일반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되고 침묵해야 되고 어떤 발언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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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이 말씀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교회의 상황과 배경하에서 이 말씀을 바라보는 것과 말씀의 큰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합니다. 먼저 14장 전체 말씀이 방언의 은사에 대한 큰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잠잠하라는 권면은 방언 사용에 대해 여인들은 남용하지 말고 절제하며 침묵할 때는 침묵하라는 해석이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상황은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마찬가지로 여성도들이 훨씬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여성도들이 과거에만 많은 게 아니라 지금도 일반적인 교회를 보면 여자 성도들이 많습니다. 왜 여자 성도들이 많은가 하면, 여자 성도들이 남자보다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에 더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만 아이를 갖고 생명을 잉태하는데 그 아이의 생명이 껍데기의 육신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이자 육인 존재를 품고 그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도구로 쓰임받는 게 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부터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영적으로 민감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를 사모하고 은사를 사모하는 분들을 보면 여자 성도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주도적으로 많았던 곳은 군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군대 교회만 남자가 많고, 일반적으로는 어느 교회나 여자 성도들이 더 많습니다. 동시에 고린도 교회는 여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충만했던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은 발언권도 없었고 참정권도 없었고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사회에서 오늘 말씀과 똑같이 그냥 잠잠하고 오직 복종하며 있었어야 했던 것이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에게 유일한 해방구, 탈출구, 그들이 존재 그 모습 그대로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어디였냐 하면 교회였습니다. 오직 교회에서 복음으로만, 십자가 사랑으로만 그런 일들을 허용하고 허락한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많은 여성들도 있었고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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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에게 교회가 유일한 탈출구, 해방구였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반작용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게 바로 14장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방언의 은사의 문제입니다. 여자 성도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에 너무 심취하여 방언을 받은 것을 절대 가치에 두기 시작하고 그것 때문에 예배 질서와 예배 자체가 드려지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꾸 중간에 끼어들고 특별히 예배 중에도 큰 소리로 방언 기도를 함으로서 예배 중간에 끼어들고, 대표 기도 중에도 방언으로 막 기도하면서 그것이 자기의 교만과 자랑이 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교회 안에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 강조하는 겁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고린도 교회는 방언으로 말미암아 무질서와 화평이 깨지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은사는 있는데 교회가 화평이 깨지고 예배의 질서가 무너지고 방언이 교회에 덕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사도 바울이 강조했던 건 방언은 항상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방언은 교회의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항상 영적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적 질서와 권위를 따르지 않는 일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강한 어조로 권면한 것으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여기서 여자는 보편적인 모든 여자를 말한다기보다는 고린도교회 성도 가운데 특별히 은사가 풀어지는 것을 통하여 교회에 덕과 화평을 무너뜨리고 무질서에 빠져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방언으로 자기 교만과 자랑거리가 되며 교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이 여인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거예요. 요한 복음에서 유대인들이란 인종적인 이스라엘 사람 모두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대항하고 거절하고 충돌하는 어둠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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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예배 중에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예배 중에는 순서를 맡은 자들이 성도들을 대표해 말을 하는 것이지, 회중석에 앉은 사람들이 갑자기 손 들고 끼어들어 막 얘기하면 예배의 질서가 다 깨집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서는 자꾸 예배 중에 벌떡벌떡 일어나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막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고 그들 대다수는 여자 성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들이 예배 중에 질서를 깨며 끼어들어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3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예배 중에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습니다. 소위 말한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이런 얘기들을 예배 중에 큰 소리로 말하는 겁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모였는데 예배 중에 여러 여인들이 막 손 들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벌떡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면서 막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예배 질서를 깨고 분란을 일으키며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 일들이 빈번해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더구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영적 혼란이 가중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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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하에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권면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민감하고 영적 은사를 사모한다는 여인들이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며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하며 화평을 다 깨며 무질서하게 만들어 교회 문제를 일으키는 그들을 향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권면하는 겁니다. 여기서 잠잠하라는 건 뭡니까?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아서 절제하라는 거죠. 그들의 방언의 은사를 그들이 소위 말하는 좀 영적으로 깊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려는 절제하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에 덕이 세워지도록, 교회 공동체에 질서와 화평이 생기도록, 절제하고 침묵할 때는 침묵하라는 겁니다. 공적 예배 가운데 함께 모여 있을 때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화평과 질서를 잊어버리지 말고 절제하라는 게 바로 잠잠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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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이 말씀의 배경 또한 은사를 좀 받았다는 여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나오냐면 계속해서 자기 영적 지식을 교만으로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판단하려고 하고, 영적인 사람과 아닌 사람을 본인들이 판단하면서 이걸 가지고 교회에서 소위 말하는 소모적인 논쟁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주인과 종은 여전히 분명한 계급이 있었고 경계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 주인과 종이 모든 담을 허물고 함께 예배 드렸지만 그들의 일상 생활에선 주인과 종의 구별은 여전히 명확했기에 사도 바울은 종에게 주인을 향해 복종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형제자매가 됐지만 그 사회는 여전히 그 구별이 분명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전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듯, 그들은 복음 안에서 분명히 하나가 되고 형제자매이지만,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분명한 질서 가운데 순종하라는 겁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순종하고 복종하며 남편에게 물어보는 이것이 그 당시의 사회 질서였고 그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화평과 평안과 질서를 가지고 나아가야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배경하의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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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주신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예수 생명을 모르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우린 놀라운 자유를 누리며 하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자유를 누리되 그 자유가 하나님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화평을 깨는 덕을 무너뜨린 대로 간다면 그것은 남용이 되며 그것은 부작용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난제가 있고 가시와 같이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늘 존재합니다. 이 말씀들을 함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내가 중심이 되어 옳다/틀리다를 판단하지 않고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영적 겸손이 있기 원합니다. 말씀으로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그 당시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며 그 말씀을 말씀대로 풀어가려는 그 부단한 노력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부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말씀을 취사 선택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말씀을 붙들고 해석하며 말씀을 통하여 여전히 난제를 통하여 가시와 같은 말씀에도 은혜를 받으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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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모든 일을 교회에 덕을 세우며 질서 가운데 하라."고린도전서 14,26-31 | 4-10-2026

4/10/2026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의 은사와 사용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굉장히 소중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미성숙하며 교회가 분쟁과 분열을 계속하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의 본질 중에 하나가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주신 분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내 개인적으로 은혜 받는데는 굉장히 좋았는데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는데 이것이 교회 무질서를 가져오고 교회 안에 계층을 나누게 되며 특별히 자기 자랑이나 교만으로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며 교회 안에 분란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런 문제에 빠지지 않고 성경적 원리로 방언의 은사를 잘 사용하는 전제 조건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에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덕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의 덕을 세우면서 방언의 은사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공예배로 모여 있을 때 그 예배에는 중요한 순서들이 있지 않습니까? 찬송, 즉 경배와 찬양이 있고, 가르치는 말씀인 성경 봉독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의 말씀인 설교 시간이 있고, 방언과 통역하는 이런 예배의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 텐데, 그 예배의 모든 순서와 방언의 은사를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아무리 풍성한 은사가 있고 내가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공 예배 가운데 그것이 무질서하게 사용되면 예배에 폐가 되고 방해가 되며 교회에 덕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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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은사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잘 사용하는 두 가지의 실천적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차례와 순서를 지키면서 방언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용할 때 차례와 순서를 따라하라고 명할 정도로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공예배 중에 방언의 은사가 순서와 차려도 없이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며 무질서하게 남용되었습니다. 대표 기도를 하러 올라왔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기도로 하는 겁니다. 혼자 기도할 때야 은혜 받으니까 좋은데 교인들을 대표해서 대표 기도를 하는데 방언 기도를 하니까, 대다수의 성도들은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르고 소외 당하는 겁니다. 그것도 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방언 기도로 대표 기도하니까 여기저기서 갑자기 차례와 순서도 없이 방언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교회가 질서가 없어지고 이것이 공예배 가운데 은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덕이 안 되는 겁니다. 더구나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파벌이 많아져 있었습니다. 전임 목사파, 후임 목사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막 나눠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그 계파에 따라 또 이 방언의 이해와 색깔도 다르고 방언의 목소리도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는다는 명분 아래 경쟁하듯이 내가 더 영적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방언기도를 쏟아내는 이 무질서가 교회의 공예배 가운데 만연했던 것입니다. 이런 영적 혼란과 무질서 가운데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지침을 제시합니다. 공예배 중에는 반드시 차례와 순서를 따라 하라는 거예요. 지금이 방언 기도를 할 때인지 안 할 때인지, 내가 말할 때인지 잠잠해야 할 때인지, 나아갈 때인지 물러갈 때인지를 분별하며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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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은 회의하면 본인만 얘기하고 본인만 손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만 말하면 된다는 마음에 배려가 없는 것이죠. 내가 두 번 말했으면 옆에 있는 분이 말할 수 있게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남을 위한 배려도 덕을 세우기 위해 차례와 순서가 있음도 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무질서해지고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스럽지 못한 은사 사용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흔드는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차례와 순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겁니다. 나에게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는데, 그 은사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해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신 은사가 나에게 은혜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넘어, 내 유익을 넘어 주변 사람과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데 잘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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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 반드시 통역을 세우라는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때 방언의 기도는 회중석에 앉아서 혼자 기도하는 게 아니라 대표 기도 순서를 맡았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대표 기도로 올라와서 굳이 방언 기도를 그렇게 하고 싶으면 누구를 세우라는 겁니까? 옆에 통역을 세우라는 겁니다. 대표기도라면 회중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 기도는 교인들을 대표해서 하는 기도인데,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를 한다면 이거 안 된다는 겁니다. 회중석에서 같이 통성 기도할 때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기도할 때, 그렇게 방언 기도하고, 대표성을 가지고 순서를 맡아서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를 전하는데 성도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전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때도 대표성을 가지고 대표 기도를 할 때도 중요한 것은 내가 은혜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교인들을 대표해서 내가 기도하고 있느냐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덕을 세우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잠잠하라는 겁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 기도를 그렇게 하고 싶으면 자기와 하나님께, 즉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교회에서는 잠잠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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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방언 은사가 성령님으로 받은 은사라는 것이 분명하면 그분의 뜻에 맞춰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방언,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방언,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방언을 사도 바울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소음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 겁니다. 방언이라고 얘기한 것이죠. 나만 은혜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넘어서 내 주변 사람들도 같이 은혜를 받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덕세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질서 가운데 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방언의 은사는 항상 예언의 은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이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사 사용은 기록된 말씀. 성경을 벗어나지 않고 말씀의 권위 아래 통제를 받으며 바른 질서와 우선순위 가운데 은사가 발휘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비롯한 공예배의 순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되며 잠잠할 때면 잠잠하고 말할 때는 말하고 나아갈 때는 나아가고 물러설 때는 물러설 줄 아는 분명한 영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방언의 은사가 나에게 은혜가 되며 주변 사람과 교회에 덕을 세움으로 성령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은사를 통하여 주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나만 은혜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위험하다." 고린도전서 14,23-25 | 4-9-2026

4/10/2026

 
​계속해서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성경적 사용의 권면을 말씀의 은혜로 나누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굉장히 소중한 성령 하나님의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주신 분의 원칙대로 사용되지 아니한다면, 특별히 방언이 예언보다 위에 올라가게 된다면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은사가 충만했지만 은사 사용의 부작용으로 인해 문제도 충만했고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가 가득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그 방언의 은사가 성경대로 사용되지 아니하면 전도와 선교의 길이 막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예언보다 위에 올라간 부작용은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 바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고 새생명과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초대교회는 가정 교회 형식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가정에 모이는 곳에 어떤 계기로든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일들이 많이 있게 되는 것이죠. 주변 사람들이 가다가도 들릴 수도 있고, 물건을 주려고 들릴 수도 있고 그렇게 복음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예배 중에 그 가정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불신자들이 들어와서 모두 그냥 방언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걸 통해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복음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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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골방에서 한 두 세 명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같이 모여서 공예배 현장에서나 이렇게 온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말하게 되면 교회 밖에 있는 자 불신자들은 집단적 방언기도를 바라보며 ​ 크리스천들은 미친 사람들이다…라고 규정해 버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아니 교회 밖에 있는 사람까지 뭐 그렇게 신경 쓰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교회의 사명과 존재 이유가 새생명들을 얻게 되는 사명에 집중한다면 교회 밖에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민감하게 바라보는 것은 필요하다는 겁니다. 특별히 초대교회는 안 그래도 핍박과 박해가 있는데 수많은 루머들 때문에 더불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성만찬이었는데,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먹고 마신다고 그러니까 실제로 인육을 떼서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이런 루머들이 돌기 시작하여 소위 말하는 가짜 뉴스를 돌리며 미치광이 집단과 같이 모함하는 일들이 종종 있어 왔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신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오해와 비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있다 보니, 방언 기도를 그렇게 집단적으로 하게 되면 또 이것을 통해 누가 어려움을 당하는가 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가 소중하고 귀하지만 모든 교회 성도들이 다 모여 이렇게 방언으로 기도하게 하게 되면 이것이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증인의 사역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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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불신자들을 향하여 주신 새 생명을 얻는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방언의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바로 예언의 은사라는 겁니다. 즉, 방언의 은사는 늘 어디에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하면 예언의 은사에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방언이 소중하고 귀하지만 방언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고 늘 하나님께서 주신 그 쓰임 받는 목적대로 예언의 통제를 받아야 되며 늘 다른 사람의 유익과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 예언을 듣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말씀으로 첫 번째 책망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 마음 안에 들어와서 그 말씀이 그에게 책망을 듣게 하는 것이죠.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말씀을 바르게 전하게 되면 그 말씀이 그 사람에게 책망하게 된 진리의 빛을 비추게 됩니다. 두 번째로 그 말씀이 판단을 받게 하는 것이죠. 내가 그동안 제대로 잘 살고 있다고, 나 정도면 괜찮은 인간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던 자에게 말씀이 들어오니까 뭐가 드러납니까? 나의 어두움이 드러나죠. 나의 소망 없음과 가능성 없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고 주님의 은혜 아니면 안 되는구나라는 나의 영적 실상을 말씀이 깨닫게 하는 겁니다. 마음에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아무도 모르게 자기 안에 꽁꽁 숨겨 놓았던 모든 죄를 다 회개하며 주님 앞에 그것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죠. 그게 책망을 듣고 판단을 받게 하는 말씀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불신자들에게 필요한 건 방언이 아니라 깨달은 말씀인 예언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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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별로 고민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늘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이익이냐 불이익인가만 생각하고 이것을 통해 모든 관계성을 맺으며 살았던 나에게 그런 유리/불리, 이익/불이익을 넘어 참 진리가 나를 살린다는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므로 그 예언의 말씀이 그에게 들어와 그 마음에 숨은 일을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책망을 듣고 판단을 받으며 나는 예수님 없으면 죽는 인생이구나… 주님 아니면 나는 소망이 없구나… 주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회개의 열매를 가지고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불신자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은 사명자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예언을 최우선에 붙들고 그 예언의 말씀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책망을 듣고 판단을 받고 마음에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므로 엎드려 주를 영접하는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그 영적 추수가 계속 일어나도록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데 집중하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것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방언의 은사에 몰두하게 되면 나만 은혜 받으면 된다는 착각에 빠져 이 증인됨의 사명을 망각하게 되는 겁니다. 증인의 사명을 멈추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임을 망각하고 나만 은혜를 받으면 된다는 위험한 생각에 몰입하게 되는 겁니다. 그저 나의 영성, 내가 가진 방언의 은사 여기에 매몰되어 그냥 그거 가지고 나를 위한 유익의 도구로만 삼고 사명도 잊어버리고 불신자들도 잊어버리고 이러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다 잃어버리고 회개의 열매나 새 생명을 얻는 데 전혀 올인하지 않는 이런 위험한 모습을 엄중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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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반드시 예언의 은사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삼아야 할 절대 가치는 예언의 은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은사 주신 분의 뜻을 거스르는 위험한 생각임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이 불신자들에게 전해지며 말씀을 통해 회개의 열매를 맺고 새 생명을 얻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본질적인 사명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신앙생활의 본질은 나의 유익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며 나만 구원받고 은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백성들이 회개의 열매를 맺고 구원함에 이르는 그 놀라운 일을 위해 내가 부름 받고 쓰임 받는 자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지혜에는 어른이, 악에 대해 어린아이가 되라." 고린도전서 14,20-22 | 4-8-2026

4/8/2026

 
고전 14장 말씀은 방언의 은사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성경적 기초와 실제적인 조언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주신분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대신 교만이나 자기 과시를 위한 그릇된 도구로 사용하여 많은 문제와 갈등 같은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공예배의 현장에서 어떻게 방언의 은사를 사용해야 되는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 덕을 끼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악에 대해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되겠습니까? 먼저 어린아이와 장성함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다른 정의를 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가르는 성숙의 차이에서 제일 중요한 건 누구의 유익을 구하는가에 있다는 겁니다. 어린아이 같다는 건 바로 내 유익과 이익, 나 중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미성숙의 특징입니다. 어린아이는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어린아이의 미성숙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겁니다. 반면에 이 장성한 사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유익을 넘어서 다른 사람도 바라보게 되고 전체를 바라보는 눈이 생기는 겁니다. 나는 늘 내 유익만을 구하며 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십자가의 은혜가 내 안에 들어오고 나서 나의 많은 변화 중에 한 가지를 꼽는다면 내 삶에 중심이 바뀌고 내가 바라보고 추구하는 게 달라지면서 내 유익을 넘어서는 겁니다. 내 이익과 유익을 넘어서 다른 사람의 유익과 이익도 바라보며 특별히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 유익을 위해서 내가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성숙한 어른, 장성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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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성도들이 자기 필요와 자기 유익을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주 좋은 동기로 교회에 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분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내 유익과 필요를 위해 교회를 찾아올 수 있고 예수님에게 나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뒤에도,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하고도 여전히 자기만을 위해서, 내 유익과 필요만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면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여전히 미성숙과 영적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바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데, 그렇게 간절히 구하는 동기가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그냥 내 유익과 이익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모두를 유익하기 위해 특별히 은사는 다른 사람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주신 은사인 방언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 자체가 뭐라는 겁니까? 악이라는 겁니다. 영적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성령의 은사도 나의 유익과 나의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는 게 악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잘못 사용된 성령의 은사는 결국 자기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게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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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표적 예가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보여집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에 대한 예언 특별히 앗수르에 대한 예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그들을 지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말과 방언을 전혀 모르고 말이 안 통하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명령을 하는지 도대체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가 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면서 지배하는 것이 심판이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언을 지금 사도 바울이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공적 예배 현장에서 다른 사람 앞에 말하는 게 결과적으로 똑같다는 겁니다. 나는 방언을 잘해서 대표기도 시간에 심지어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불쑥불쑥 막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게 나에게는 덕세움이 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소통이 막히고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심판과 가까운 어려운 일이 된다는 겁니다. 공예배에서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분열되며 사람들을 나누게 되며 인그룹과 아웃그룹을 찢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마치 자신만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성령의 불을 품고 사는 사람의 신앙고백 같은 그 깊은 곳에 자기만 사랑하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뿌리 깊은 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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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장성한 사람의 모습은 내 마음, 내가 받은 은사, 내가 우선이 아니라 배려와 다른 사람, 교회의 덕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 어찌하든지 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해서 나 만을 위해 내 유익과 이익만을 위해 몰두하게 되면 그 좋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가 악하게 사용될 수 있기에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게 놔두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유익을 넘어서고 내 이익을 넘어서 내가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나라와 의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더해지는 복으로 나도 잘되는 겁니다. 내 유익을 넘어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내가 헌신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나도 잘 되었음을 고백하는 삶이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어른스러워지고 성숙해진다는 건 나 혼자 구원받는 대로 만족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나 하나 구원하는 대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구원이 나 하나가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나의 구원을 통해서 주님은 구원이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산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언의 은사 같은 성령의 은사가 다른 사람의 유익과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사용되는 도구가 되며, 내가 겸손히 그 사명 가운데 나아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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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것은 100번 방언을 해도 믿지 않는 자들을 믿는 자리로 옮겨 오게 못한다는 겁니다. 불신자들의 불신 상태를 내버려 주는 결과가 된다는 겁니다. 방언으로 전도하면 전도가 되겠습니까?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반대로 예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있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는 거예요. 결국 마음을 깨달은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것이 주님께 돌아오게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구로 주신 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린아이와 같이 내 유익과 내 이익을 위한 도구로 쓰이면 나도 망하게 하고 주변 사람들도 망하게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의 은사로 영적 혼란과 어려움을 경험한 것 같이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이단과 사이비가 출몰하기도 하고 많은 영적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되는 본질은 그 은사를 나를 위한 도구로 어린아이와 같이 사용한다는데 있습니다. 주신분의 목적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나의 유익과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리기에 결국 그것이 악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사도 바울의 경고를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가 소멸되지 않고 이렇게 악한 일이 되지 않도록 늘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주신 분의 의도에 맞게 사용되기를 기도하며 지혜로운 어른,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는 이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깨달은 말씀이 일만 방언보다 더 귀하다." 고린도전서 14,13-19 | 4-7-2026

4/7/2026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주신 분의 뜻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과시를 위한 그릇된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 때문에 순기능보다는 역기능과 많은 문제들이 파생되어 왔습니다. 특별히 공예배 현장에서 무분별한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예배에 심각한 무질서와 사람들 사이에 계층을 나누고 갈등과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는 여러 부작용들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먼저 알려 주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은사들이 있으며 그 은사를 주신 데에는 목적이 하나라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주신 게 아니라 우리 옆에 있는 지체들과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주신 도구이기에 성령의 은사를 나를 위해 내 유익을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가이드라인으로 주었습니다. 또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즉 사랑 없이 사용되는 은사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후 14장에서 구체적으로 방언의 은사에 대해 심도 있게 성경적 기초과 성경적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방언의 은사가 가지고 있는 한계, 특별히 공예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상태로 남용되는 방언의 한계와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좋습니다. 문제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에게 만족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에 열매가 맺어지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내 인격이 변화하는 열매나 회개의 열매, 새 생명으로 구원받게 하는 열매가 맺어지지 못하는 겁니다. 방언 기도를 아무리 오래 해도 그것이 내 인격을 변화시키고 특별히 회개의 자리로 이끄는 데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방언 기도를 공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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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공적 예배에 방언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배 중에 대표 기도의 순서를 맡았는데, 대표 기도를 하러 올라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방언 기도를 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자기가 혼자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는 게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근데 고린도 교회에서의 문제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려고 공예배의 대표기도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방언 기도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심지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는데 중간에서 막 방언 기도로 설교를 막고 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랑 없이 사용되는 방언의 한계와 부작용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특별하고 대단해 보이기에 나에게는 흡족할지 모르나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을 깎아먹는 일이 되며,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일이 되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 기도하러 올라가서 방언 기도만 하고 있으면 그 기도가 뭔지 모르는 대다수의 회중들이 그 대표 기도를 들으면서 어떻게 아멘하겠냐는 겁니다. 본인은 대표 기도하면서 은혜받고 영적으로 만족하고 충만할지 모르지만 그 대표 기도를 듣고 있는 대다수의 성도들은 교인들을 대표해서 하는 대표 기도인데 대다수의 회중은 소외시키고 방관자가 되게 하며,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기도를 잘했어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아들 수 없으면 대표기도로서 그 방언 기도는 성도들을 대표할 수 없고 성도들을 견고의 믿음으로 세울 수 없으며 성도들에게 아멘할 수 없는 일이 되버린다는 질책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덕은 안 되고 유익은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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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방언의 은사를 잘 사용했어도 사랑이 없으면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 좋은 것도 결국 어떻게 된다고요? 잘못 사용하게 되는 일이 되며 그 은사로 인하여 오히려 교회가 시험에 들고 교회가 갈등과 분열이 생기며 교회가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 교회가 처한 현실이었고 지금도 많은 교회들의 소위 말하는 은사를 좀 경험하고 체험한다는 것은 교회를 어렵게 하는 대표적인 문제라는 거예요. 은사가 덕을 세우지 못하고, 은사가 갈등과 분열로 가게 만드는 겁니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것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덕세움을 방해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의 한계가 분명한데 자기에게 덕이 되고 유익할지 모르나 열매를 맺고 그걸 통하여 인격을 성숙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데까지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 유익과 내 덕은 세우는데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덕은 구하지는 않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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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계와 부작용이 교회에 어려움을 가져옴을 직시하며, 사도 바울은 방언 사용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제시합니다.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공적으로 기도하고 예배할 때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 현장에 있을 때 이 방언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성경적 지침을 주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은혜롭게 잘 사용하는 방언의 은사는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배려하는 자세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겁니다.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겠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지체들, 예배에 참석한 자들을 위해서 내가 공예배 가운데 대표 기도를 하게 될 때는 영으로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건 뭡니까? 함께 예배 드릴 때에는, 함께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는, 내 유익이 아닌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내 방언을 자랑하듯이 기도하지 말고 내 방언 찬양을 자랑하듯이 하지 말고 어떻게 한다고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찬송하라는 겁니다. 특별히 공예배 중에는 방언으로만 기도하는 건 안 된다는 겁니다. 방언은 통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주변 사람에게 이해되도록 흘러가야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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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의 성경적 사용을 위한 사도 바울의 결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를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분명히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더 뭐 너희들보다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골방에 있을 때 분명히 많이 방언의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공적인 상황에서 특별히 예배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더 중요한 게 방언이 아니라 예언이라는 겁니다. 깨달은 다섯 마디의 예언이 방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에 깨달은 예언이 더 좋고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뭐를 위해요?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성령의 역사는 나 혼자 구원받고 나 혼자 은혜받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확산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게 하는데 있기 때문에 깨달은 다섯 마디 예언의 말씀이 방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깨달은 말씀, 말씀으로 나를 변화시킨 그 말씀, 그 말씀이 전해져야 예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은혜를 받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데 그저 방언과 방언의 은사만 머물려 있으면 나에게 갇힌다는 거 내 유익을 위한 영성에 머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인생이 변화할지 모르나 내 주변에 아무에게도 이 생명의 역사, 회개의 역사로 열매를 맺는데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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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이 나에게는 유익이고 개인적으로 덕을 세우는데 아무리 좋은 은사라 할지라도 어떤 목적으로 쓰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역효과가 날 수 있고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 은사 받기를 사모하는데 그 은사 주신 분의 목적대로 합당하게 쓰임 받지 못하면 그 방언의 은사조차도 교회 공동체의 유익에는 도움 안 되고 다른 지체들의 덕을 세우는데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성령의 은사라도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은사로서 존재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방언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은사는 나를 위해 주신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셨다는 것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사모할 것은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다섯 마디의 깨달은 말씀임을 잊지 말고, 방언의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를 분명히 붙들기를 원합니다. 내게 주신 그 하늘의 말씀이 회개의 열매와 구원으로 이르는 새생명의 열매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은혜로 받은 성령의 은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잘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5-8 | 4-1-2026

4/1/2026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오늘과 내일은 동일한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좀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고대의 그리스 지역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나 갈릴리 북쪽에 있었던 가이사라 빌립보나 지역은 굉장히 달랐지만 도시의 특색은 거의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북쪽의 가이사라 빌립보도, 그리스 지역에 있는 빌립보도 도시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로마의 문화와 로마 정신에 쩔어 살고 있는 것은 거의 동일했죠. 로마의 가치와 로마의 그런 문화에 쩔어 젖어 살아가는 그 삶은 뭐냐? 바로 바벨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지향하며 내가 황제의 힘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여기는 게 로마 문화에 쩔어 살아가는 삶들이에요. 이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게 뭡니까? 결국 내가 돈이 많아서, 내가 힘과 권력이 많아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잘 살아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강한 자가 되고 내가 바벨탑을 쌓아 내 기념비를 높이며 살아가는 삶에 절대가치를 두고 내 인생을 던지는 것이 바로 로마 문화이자 로마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어보셨던 겁니다. 로마 문화에 쩔어 로마 한복판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구별해 내서 교회로 삼으셨거든요. 그 교회로 삼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예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선명히 증언하는 말씀이 빌립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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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마음에 품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음에 품는다….는 표현이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악감정을 품다, 혹은 원한을 품다….같이 우리 역사에서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 원한을 품고 마음에 아로 새겨져 평생 잊을 수 없는 응어리로 가지고 있는 것을 한이라고 하고 한 많은 한이 맺힌 민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정적인 악감정이나 앙심을 마음에 품는 인간의 본성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 그게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나의 과거와 부정적인 감정이 예수 이름으로 씻김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로마의 문화에 쩔어 로마의 가치관에 젖어 사노라면 당연히 마음에 악한 감정과 원한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우리들에게 불러 내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 세상에서 성도들을 불러내셔서 십자가의 길로 부르시는 겁니다. 로마의 문화와 가치관을 품지 말고, 황제의 마음을 담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가는 것이며 오늘 말씀을 빌리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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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품고 살아가야 될 십자가의 삶,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세 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증언하고 있는데 오늘 한 가지를, 내일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를 함께 말씀의 은혜로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동등됨을 취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같은 존재, 동일 본체라는 겁니다. 우리의 예수님에 대한 본질적 고백 1번은 예수님은 예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게 분명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유사 본질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동일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하나님,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하나도 차이가 없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시지 않으신 겁니다. 어제 배웠지만 교만한 마음은 나를 남보다 낮게 여기는 삶이 바로 교만한 마음이에요. 항상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며 질투하며 허영을 통하여 내가 너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교만의 삶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반면에 겸손한 마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한 마음을 넘어 우리가 품어야 되는 건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남이 나보다 낫다 정도가 아니라 내가 옆의 지체를 위해 나를 포기하겠다는 게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본질 되심을 내려 놓으신 겁니다. 이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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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십자가를 기억하고 붙든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하나님과 동등됨을 내려 놓으신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알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에게 있어서 일이 먼저가 아니고 무언가 이루어야 되는 게 먼저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먼저임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 나를 두게 되면 그 놀라운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아 부족한 내가 보이고 연약한 내가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나를 두게 되면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내가 자격이 있어 구원받은 것도 아니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주신 일방적인 선물 은혜를 내가 받은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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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로마 문화의 한복판에서 로마 가치관에 젖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불러내시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만 지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모든 동등됨을 포기한 것이 십자가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거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서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포기하며 이 땅에 내려오신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주의 자녀로 존재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붙들어야 할 유일한 소망은 십자가 사랑이며 그 십자가 사랑만이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임을 잊지 마십시오. 바라기는 이번 한 주 이 놀라운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고 붙드는 귀하고 복된 한 주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나를 지키는 힘이다." 빌립보서 2,1-4 | 3-31-2026

3/31/2026

 
빌립보서 2장 말씀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따라가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증언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실천한다는 삶은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무엇을 안 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루려는 삶이 실천이 아닙니다. 물론 내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안 하는 결단이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말씀을 실천하고 말씀을 지켜내는 삶이란 내 중심과 내 위주의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위주의 생각으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가 말씀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일하시도록 내 삶을 드리는 것이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본다…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도,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중심, 내 위주의 생각이나 행동을 멈추고 그리스도 위주의 생각과 행동으로 내가 조율될 수 있는 것이죠. 내 중심과 내 위주의 생각과 행동을 다 내려놓고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바라보고 붙드는 겁니다. 말씀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삶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있느냐?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고 있는가? 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하는 것이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본질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드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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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살게 될 때 경험하게 되는 기적 세 가지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됨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일 좀 더 살펴보겠지만 얼마나 빌립보 교회가 하나가 안 되면 이렇게 반복해서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마음을 좀 같이 해라. 같은 사랑을 좀 가져라. 뜻을 좀 합쳐라. 한 마음을 품으라. 이게 다 똑같은 말이죠. 하나 되라는 거예요. 하나가 얼마나 안 되면 이런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스스로 실천해서 말씀을 지켜서 제발 좀 마음을 좀 같이 해라. 같은 사랑을 가져라. 뜻을 합해라. 한 마음을 제발 좀 품으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면 이 기적이 교회 안에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한 마음을 가지고 한 뜻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같은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기적의 비결은 단 한 가지라는 거예요. 목회자를 표함에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뿐이라는 것이죠. 점점 성도가 하나되는 것은 기적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고요. 요즘에는 다양한 상처들을 가지고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상처를 가진 모여 있는 성도들이 한 마음을 가지고 한 사랑으로 뜻을 합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의 기적,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 뿐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 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다른 것을 녹이고 넘어서서 하나되게 하는 기적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이 하나됨의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거, 십자가를 바라보고 따라가는 증거로 우리가 삼아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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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다툼과 허영이 멈춰지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사노라면 다툼과 허영이 계속되는 이유를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각각 나를 남보다 낮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의 다툼, 집안에서의 다툼이 왜 일어나는가 하면, 내가 너보다 옳다는 거예요. 내 말이 너의 말보다 옳다는 거죠. 이게 싸우는 모든 근본적 이유입니다. 네가 틀렸고 내가 옳기에 이거 말도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모든 다툼의 근원이라는 거예요. 또한 허영은 내가 너보다 낫다는 거예요. 내가 너보다 좋은 차를 가지고, 내가 너보다 좋은 집을 가지고,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벌고, 계속 비교와 경쟁을 통해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모든 게 허영입니다. 이 다툼과 허영은 모든 인간의 죄성으로 나오는 자연적인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싸우며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하고,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허영으로 내가 너보다 낫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도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열심은 있는데 내 일만 하는 겁니다. 말로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나를 드러내고 내가 너보다 낫고 내가 너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기 일을 하게 되는 우를 범하는 겁니다. 이 다툼과 허영이 멈춰지는 기적은 오직 뭐를 통해서 가능한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 중심으로 내 죄의 본성이 드러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 결심이 약하여 늘 쓰러지고 넘어진다는 게 오늘 찬양의 고백 아니겠습니까? 자기 결단이 부족한 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낼 힘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고 끊임없이 내가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다 보면, 다툼과 허영에서 내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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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기쁨 충만한 기적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고, 겸손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늘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낫게 여기려 합니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들면 이 겸손한 마음의 기적이 풀리는 거죠. 내가 나보다 남을 더 세워 주고 높여 주는 것이고, 나를 증명하려는 삶에서 자유해지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나를 맞추라고 강요하고 내 입장을 맞추고 내 견해를 맞추라고 외치는 것, 이게 죄성을 가진 모든 인간의 삶의 방식이죠. 그런데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나에게 맞추라는 강요를 내려놓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맞춰 주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 주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늘 너와 나의 다른 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다르다는 거예요. 이래서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근데 그리스도 안의 겸손한 마음은 그 다른 점을 넘어 먼저 공통점을 찾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다른 점들을 녹이고 다 흘려 보내는 예수님 위주의 생각과 삶,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풀리는 겸손한 마음의 기적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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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겸손한 마음에 임하는 축복이 바로 하늘 기쁨 충만입니다. 또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남의 일만 돌보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성경적인 가치의 적용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의 기쁨이 다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겸손한 마음은 내 일을 돌보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 것을 내팽겨치는 게 아니라 내 것도 돌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봄으로써 내 삶에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삶의 비결이라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를 따라가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가를 함께 마음에 좀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드는 삶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해법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겁니다. 내가 항상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주님 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삶의 비결도 내가 무엇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이죠. 그래서 일보다 사역보다 해야 할 것보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을 소망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하나 되고 겸손한 마음이 누려지는 기적이 경험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나를 증명하고 내가 낫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삶이 멈추는 기적이 우리 가운데 경험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있음으로 이 세 가지 기적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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