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해서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거의 망나니였고 최악의 왕이었지만 그 아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선명하게 쓰임받은 귀한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놀랍게 쓰임받은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무너졌던 예배를 회복하고 유월절 절기의 회복이었습니다. 유월절 정신을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그 절기를 통하여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거죠. 성도로서 우리가 꼭 붙여야 될 정체성 한 가지를 꼽는다면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고 내가 왜 구원 받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 무너진 신앙을 회복한다는 건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를 다시 한번 현재형으로 마음에 새기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졌던 예배와 무너진 절기를 회복하는 시작은 그들이 어떻게 건짐을 받았는가를 기억하며 유월절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히스기야 왕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멈추었던 유월절을 지키며 나라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되겠다고 다짐하며 유월절을 회복하는 것에 최우선을 두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만만치 않은 거예요. 유월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순례가 당연했는데, 오랫동안 그런 예루살렘에 모이는 절기를 지키지 않았더니 지금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을 해도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제사장들도 부족했고 백성들도 몸이 오질 않는 겁니다. 성전의 문을 닫고 예배와 절기를 무너뜨리고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더니 막상 절기를 지키려 해도 이게 잘 되질 않는 것입니다. 꼭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참 비슷합니다. 코로나 로 거의 2년 가까이 많은 예배와 신앙 생활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이제 서서히 하나 둘 씩 풀려 가지만 오랫동안 지키지 않아서 막상 정상으로 돌아오는게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몸이 바로바로 가지 않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왕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라는 것을 깨닫고 어명을 내리면서까지 밀어붙이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 말씀이 바로 유월절 정신으로 회복되는 삶입니다.내가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어디서부터 돌아오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디에서부터 돌아오는 것인가 하면 거냐면 바로 내가 그동안 예수 하나님 안에서 살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기준으로부터 살았던 그 어둠의 삶에서 돌아오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의 종살이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결박되어 세상의 기준으로 눈에 보는 것을 붙들고 살았던 그 삶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게 유월절 정신이라는 겁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에서 내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 유월절 정신입니다. 나의 성도됨의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가 어디서 부터 구원받고 건짐을 받았는지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정신을 회복하며 나는 주님께 돌아가야 될 존재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죠. 또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씀은 멸망의 자리에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역대기는 북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거의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배경이 뭐냐면 바로 북이스라엘의 멸망 직후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에 붙인 것을 목도하는 것을 기억하며 북이스라엘 같이 멸망의 길로 가지 않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멸망의 자리이니 여호와께 돌아오지 아니하면 큰일난다….지금 여호와께 돌아오지 아니하면 나는 지금 멸망과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게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게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조와 같이 목을 곧게하지 말고 지금 당장 겸손히 엎드리고 주님 앞에 두손들고 돌아가는 것, 그것이 유월절 정신의 회복입니다. 무너졌고 멈춘 유월절 절기를 다시 지키는 것은 나를 위해서 물론 지키는 것이지만 더 본질적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자로 바로 서고 겁니다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현재형으로 회복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은 나에게도 영적 유익을 주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새벽기도에 헌신하며 하루의 첫시간에 예배당에 나온 성도들, 말씀에 기준으로 돌아가는 그 삶을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제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가 성도로써 그 동안 지키지 못하고 오랫동안 무뎌진 유월절 정신을 회복하며 우리가 주님 앞에 그 정신을 붙들고 다시 한번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통해 성도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멸망의 자리임을 직시하고 지금 당장 주님 앞에 돌아가는 것이 복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에게로 나아가고, 주님 앞에 돌아가 멸망이 아닌 생명으로, 영원한 구원으로 건짐 받은 존재임을 다시 한번 회복되는 유월절 정신이 내 마음에 선명히 새겨 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하고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기뻐하는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첫번째는 바로 오랫동안 닫혔던 성전의 문을 열고 그 성전을 새롭게 하고 정결케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한번 더불어 새롭게 갱신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성전에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며 예배 회복 이 모든 것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였음을 믿는 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언약이 경신 되며 성전에서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된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오늘 말씀은 몇 가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가 성전 문을 열고 새롭게 하고 정결케 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하는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늘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사모하며 오늘의 말씀으로 들어가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갱신되며 참된 예배로 회복된 모습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히스기야 왕이 일찍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여기서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뭐 새벽기도 가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의 말씀을 깨워야 된다…이것도 중요한 의미가 되겠지만 참된 예배 본질은 잠을 깨우며 일찍 일어날 정도로 기대하며 갈망하는 마음으로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회복된 참된 예배의 특징이라는 것이죠. 억지로 끌려 나오듯이 책임감을 가지고 나오는 예배가 아니라 자원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예배 자리에 나오는 모습이 바로 일찍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 그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예배함이 기쁨 되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죠. 왕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백성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는 겁니다. 일찍 일어나 갈망과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을 향하여 나오는 그 기쁨이 회복되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반복되는 “피를 뿌리고…” 라는 말씀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제사의 핵심은 바로 나의 죄를 상징하는 그 피가 뿌려지는 것을 통해 속죄함을 얻는 데 있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예배의 회복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 인지를 깨닫고 그 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김을 받고 회복되었다는 것을 날마다 반복하는 것이 갱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죄인임을 자각하고 주님의 은혜로 그 보혈의 말미암아 내가 회복되며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늘 깨닫고 현재형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이 참된 예배 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 본질이 무너진 예배는, 예배는 드리는데 예배 중에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이 선명하게 선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회개와 죄의 용서가 선명하게 선포되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에는 반드시 어린양의 보혈로 내가 새 사람 되고 회복되며, 천국 백성으로 변화 받았음을 붙들며 십자가의 은혜를 늘 강조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보혈이 반복적으로 강조 되고요, 그 보혈의 은혜를 통하여 내가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강조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를 붙들고 나아가는 성도들이자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세번째 회복된 참된 예배는 제사가 끝났는데도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다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기를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예배가 지속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에 딱 맞춰서 빨리 끝나고 나와야 되는게 아니라, 가능한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어떤 형식과 시간을 초월해 나의 간절함이 묻어 나게 되는 곳이 바로 참된 예배의 회복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왕과 그 함께 있는 자가 엎드려 경배하고, 온 백성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며 겁니다. 왕으로부터 백성들 모두가 엎드려 경배 했다는 것입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져 다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 하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엎드려 경배 하는 데 하나님 앞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겁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제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모습, 그 가운데 억지로 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원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예배 드리는 그 모습이야 말로 회복된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이며, 예배 회복의 삶의 질서의 회복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의 마지막 특징은 자발적인 헌신입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은 내 인생에 있어 모든 곳에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쁨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즐기는 곳, 그곳이 바로 신앙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예배의 회복은 내가 사라지고 하나님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내가 철저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영광만 보이는 게 예배인 것이죠. 이런 참된 예배의 회복이 우리의 영적 질서가 바로 회복되며 그것을 통하여 모든 것이 우리 가운데 새롭게 구축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의 문을 열었고 성전을 통하여 거룩하고 성결함을 회복했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한 준비였으며, 그 참된 예배의 회복을 통해 부어진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현재형으로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히스기아 왕은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버지는 가장 적극적인 악한 왕인 아하스였습니다. 그 악한 왕 밑에서 이런 히스기야 같은 왕이 나온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고 아버지에 죄와 그 나쁜 행실들이 상처와 멍으로 되물림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놀랍게 쓰임 받는 왕이 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환경과 부모의 영향력을 결정론이나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의 영향력을 넘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을 세우시고 사람들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으며 히스기야의 영성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사모하며 말씀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놀라운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칭찬받았던 중요한 업적들이 무엇인가를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은 일은 바로 여호와의 성전 문들을 열었다는 겁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고 대단한 일인가 할 수 있지만 그 말은 오랫동안 여호와의 성전 문이 닫혀 있었다는 것이죠. 누가 성전 문을 닫았는가 하면 그 아버지 아하스 왕이 닫아 버린 것이지요. 할아버지 요담 왕 때 이미 성전에서 멀리하기 시작해 신앙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하스 왕에 이르러 악한 왕의 손에 성전문이 아예 닫혀버린 것입니다. 성전의 모든 분들을 닫아버리고 예배 드리는 처소를 닫아버리며 예배와 성전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가 닫았던 성전의 문들을 다시 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은혜의 문을 다시 연 것입니다. 성전 문을 열고 그 안에 그동안 잘못되고 쓰지 않아서 부패하고 고장난 것들이 많이 있었을텐데 그 모든 것들을 다 수리하는 겁니다. 성전 겉모습에 모든 수리들을 마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히스기야 왕이 잘한 첫번째 업적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두번째로 잘한 것은 성전 안과 사람들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전 문을 열고 나서 수리 한 후,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 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레위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고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고 명령합니다. 그 성전을 성결케 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성결케 한다라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된 성별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 건물 예배당은 그냥 예배당 일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오는 냐에 따라 예배당이 거룩하게 구별된, 성별된 곳이 될 수 있고요, 그냥 사람들이 모이는 구별되지 않는 곳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결국 성별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건물 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똑같이 우리 겉모습은 똑같은 인간이고 삼시세끼 밥 먹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어떤 태도와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있느냐에 따라 거룩하게 성별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성별이 없는 그냥 무너진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하스로 말미암아 성전이 더러워지고 성결함이 사라지고 세상과 구별이 하나도 없어진 그 성전을 목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지금 그 모든 영적인 일을 다시 밑에서부터 새롭게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 악한 왕 아버지 때에 수많은 일들을 목도했습니다. 수많은 군인 들이 죽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는데 이게 뭐라고요?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진노하사 내리신 영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완전히 무너진 왕이 된 영적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똑같은 과거의 사건을 영적으로 재해석하는 거죠. 이 모든 것이 영적인 문제였고 하나님이 진노하신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어 버리신 결과였다 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들을 영적으로 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문을 열고 수리하며, 성전 안과 사람들을 성결하게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결하게 된 성전과 사람들 위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과 다시 한번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 언약은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거룩함과 성결함 위에 다시 그것을 새롭게 갱신하는 겁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오늘 나에게 주시는 새로운 언약의 약속으로 갱신하는 게 바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는 것이죠. 그래서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는 마음으로 이제부터 영적으로 게으르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닫혀 있는 예배 문을 열고 망가진 예배를 수리하며 예배자들을 모아 하나님 앞에 열심으로 예배하고 성결하게 나아갈 때 그 예배를 통해 나의 삶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불어 새로운 언약으로 갱신하며 신앙을 새롭게 하는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들의 근원도 영적 문제이고, 모든 문제들을 푸는 시작도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히스기야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히스기야의 위대한 점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긴 코로나 광야 가운데 거의 2년 동안 성전 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습니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성전 문만 닫은 게 아니라 신앙의 예배가 닫혀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닫힌 문을 여는 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마자 성전 문을 열었던 것과 같이, 나의 닫혀졌던 신앙을 다시 열어야 하며, 닫혀졌던 예배의 문을 다시 열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며 예배 회복을 위해 나아가기 원합니다. 성전 안팎과 사람들을 성결 하게 하기 원합니다. 예전에 우리가 묵혀 뒀던 하나님과의 언약의 약속을 새롭게 갱신하며, 지금 현재 형의 약속으로 다시 한 번 내 앞에 두기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다시 한번 그 분 안에,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며 오늘 주신 약속으로 새롭게 받을 때, 이 언약을 현재형으로 갱신하면서 신앙이 다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영적 나태함과 영적 게으름을 넘어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한번 새롭게 세워 히스기야 왕이 경험한 이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29장은 히스기야 왕에 대한 말씀을 증언합니다. 사실 히스기야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유명한 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정도가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의 이름과 함께 나오며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비슷할 정도로 좋은 평가, 대단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왕입니다. 그런데 놀랍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위대하고 놀라운 히스기야의 아버지는 가장 악한 왕, 적극적으로 악을 행했던 왕 아하스였다는 것입니다. 좋은 왕이었던 아버지 요담 밑에서 망나니 같은 아들 아하스가 태어난 것도 이해되지 않지만,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최악의 왕 아하스 같은 아버지 밑에서 히스기야 왕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좋은 아버지 요담 밑에서 말도 안되는 아들인 아하스가 나오는 것은 좀 설명이 되긴 합니다. 왜냐하면 요담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멀리 했죠. 좋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멀리하며 무너져 백성들도 악한 길로 행하고 그러니까 결과론적으로 아하스와 같은 망나니 아들, 아주 악한 왕이 태어날 수도 있다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할 정도로 악한 왕이었던 아하스 다음에 이렇게 그 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왕인 히스기야가 나올 수 있는지…이건 정말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자녀라는 게 부모를 보고 영향 받고 자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보고 따라하는 거 있어요. 자녀들에게 환경의 영향, 부모의 영향이라는 것은 자녀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이 있기에, 심지어 쓴뿌리는 되물림 된다는 말도 쉽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 말씀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런 막강한 부모와 환경의 영향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이 환경과 부모의 영향을 넘어서는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사람들, 신앙에 바로 서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내 아들 딸이 자동적으로 좋은 사람/ 신앙에 바로 서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내 부모가 불신자이고 심지어 악한 사람, 소망이 없이 사는 것 같은데 그 다음에 자녀들이 신앙을 붙드는 놀라운 사람이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이자 역사하심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부모님이 이렇게 아하스 왕과 같이 나에게 신앙의 모범을 주지 못하며 심지어 내 부모가 부끄러운 분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정말 나에게 나쁜 영향력만 많이 주고 상처와 아픔 투성이의 인생을 만들게 한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아하스 왕과 같이 나에게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상처와 아픔이 훨씬 많이 준 악한 부모라 할지라도, 그 상처와 아픔을 되물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이것 가지고 내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넘어 내가 히스기야 같이 기적으로 주님의 보혈이 덮이는 인생, 신앙의 축복의 1세대가 될 수 있음을 믿는게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은 그 부모에게서 받은 그 상처와 아픔을 되물림 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 보혈로 덮여 히스기야 왕과 같은 기적의 영성을 달라고 기도하며 부르짖기 원합니다. 히스기야의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부모님의 그 적극적으로 악한 삶과 영향력이 나의 신앙을 흔들지 않고 내 삶에 상처와 멍으로 남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보혈로 풍성히 덮히는 영성입니다. 망나니 같은, 적극적으로 악한 왕 아하스로부터 이렇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히스기야가 태어나 자라게 된 것 같은 그 기적의 역사가 나의 인생 가운데도 경험 될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그게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간절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부모의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그 잘못된 삶으로부터 물들지 않고 상처를 넘어서는 인생, 축복의 1세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부모의 입장으로서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잘 한다고 내 자녀가 자동적으로 신앙 생활 잘하고 좋은 자녀 된다고 착각하는 것도 교만한 일이고 그리고 내 자녀가 좋은 자녀 안되고 신앙 적으로 방황하는 것 때문에, 그게 모두 부모의 탓이라고 끌어 안고 죄책감 가운데 살아가는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환경 결정론자에 모든 것들을 부모 책임으로 몰아가고 자책하려 합니다. 너무나 쉽게 인과 관계를 통하여 나와 자녀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늘 자녀를 양육할 때 내 맘대로 키울 수 없음을 믿으며 내가 자녀를 소유한 게 아님을 믿으며 이 시간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신앙 생활을 잘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자동적으로 우리 자녀가 잘 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시고 간절히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나의 자녀를 붙들어 주셔서 나보다 나은 신앙을 갖도록 나를 뛰어넘는 신앙 생활을 갖도록 우리 자녀를 붙들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위대하고 놀라운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가 그렇게도 악한 아하스였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으로, 눈에 보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너무 쉽게 결정하거나 재단하지 마십시오. 최고의 부모 밑에서 최악의 자녀가 나올 수도 있고, 최악의 부모 밑에서 최고의 자녀가 나올 수 있습니다. 내 부모님이 이렇게 잘못되고 악하고 무너지고 나를 힘들게 한 부모라면 이 시간 내가 히스기야 같이 부모의 독과 상처가 나에게 되물림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온전히 덮여 놀랍게 변하는 기적이 나에게 경험되게 해달라고, 히스기야의 기적을 달라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반대로 내가 아무리 잘해도 우리 자녀가 안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부모의 책임이라며 자책하지 마시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녀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나의 자녀를 맡기며 간절히 간구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내 환경과 상황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넘어 놀랍게 쓰시는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히스기야의 기적을 맛보며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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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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