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왕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놀랍게 보여주셨습니다. 갈멜산에서 850대 1의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불로 임하시고 물로 임하시며 바알은 다 우상이고 허상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며 모든 허상의 모래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엘리야를 통하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다 처단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고 임하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선명하게 보이셨으면 아합왕은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왔어야 하는게 당연합니다.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렇게 놀랍게 증거하시는 역사 속에서도 아합왕은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8장의 갈멜산 역사를 목도한 후19장은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한 엘리야, 20장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은 아합왕을 증언합니다.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렇게 놀랍게 증거하시는 역사 속에서도 19장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엘리야는 위로 올라가는 대신에 밑으로 내려가서 탈진하며 우울증에 빠지며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갈멜산 큰 승리 이후에 오히려 엘리야는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하고 마음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19장이 엘리야의 그런 무너짐을 증언하고 있다면 20장 말씀은 그 놀라운 갈멜산의 놀라운 임재와 역사를 목도하고도 아합왕은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와 모든 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놀랍게 역사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물의 역사와 불의 역사로 계시하시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붙들도록 백성들을 깨워 주셨고 더 이상 미적거리는 신앙,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리는 신앙을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바알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면 아합왕은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두 손 들고 와서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갈멜산에서 불을 내리시고 비를 내리시고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데 여전히 아합왕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이게 많은 마음이 죄로 굳어진 인간들의 현실이고 아합왕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표적이나 역사를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크고 더 놀랍고 더 센 표적과 역사를 보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실제 현실은 갈멜산에서 그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어도 아합왕 같이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겁니다. 놀라운 역사와 임재를 목도하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살아가며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아합왕 같은 자는 포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북 이스라엘같이 완악한 백성들을 마음을 접고 포기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여전히 아합왕을 포기하지 않고 북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아니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도망가고 여전히 불순종하고 등돌리고 있는 아합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한번의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아합이 처한 전쟁의 위기 속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명히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아합왕이 대단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대단해서입니다. 아합왕은 갈멜산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한 후에도 여전히 무너지고 바알을 숭배하고,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데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랍기에 아합왕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합왕을 다시 한번 깨우시며 돌라올 기회를 주시는가 하면 바로 아람왕과의 전쟁을 통해서입니다. 북쪽에 있는 아람왕 벤하닷이 모든 군대를 모았고, 32명의 왕/군주들과 연합군을 이루어 북이스라엘을 치러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연합군을 조직해 내려오는 것은 국가적으로 굉장한 위기입니다. 아합왕은 아람의 전쟁 야욕으로 말미암아 큰 위기에 빠진 겁니다. 이 상황은 마치 얼마 전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영적 전쟁을 했던 1대 850과 거의 비슷한 상황인 것이지요. 한 사람이 어떻게 850명과 싸워 이깁니까? 겉으로 보이는 상황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실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죠. 상황으로는 마찬가지로 아람왕이 본인의 군대와 서른 두 나라의 왕들과 연합군을 조직해 전쟁을 걸어오는 모습은 북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겉으로 봐서는 결코 이길 수가 없는 싸움입니다. 아람왕이 전쟁에 돌입하기 전, 쳐들어오기 전에 아합왕에게 최후통첩, 한번에 기회를 주는 거죠. 너희가 나와 우리에게 다 항복하고 엎드리면 우리가 전쟁 안 걸고 그냥 조공 받아가고 중요한 것 뺏어가고 돌아갈게….전쟁은 안 일어나지만 아주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목숨은 사는데 굴욕적인 패배가 되는 겁니다. 아람왕이 전쟁 안할 조건을 제시하는데, 너의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 다 조공으로 내놓으라는 겁니다. 이런 굴욕적인 최후통첩을 받은 아합왕…이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겉으로 보는 상황과 환경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아람왕이 걸어오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을 경고하며 깨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시며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뭐냐면 그렇게 전쟁의 위기 속에서 아합왕을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이름을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엎드리거나,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아와 지혜를 구하는 모습이 일절 없습니다. 대신 스스로 머리를 굴려 상황 파악해보고 계산해보고 나서 그냥 군말없이 아람왕 앞에 굴복하려 합니다. 왜 굴복하겠냐고 말했냐 하면 아합왕의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니까 군사력과 규모를 비교해 보니까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과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결론이 난 겁니다. 그래서 그 아람왕을 “내 주여” 라고 고백하며 “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왕은 이런 고백을 누구에게 해야 되는 겁니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해야 되는 고백이죠. 내 주 하나님이여,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하나님 앞에 이런 고백을 하지 않고 세상 왕에게 굴욕적으로 하나님에게 해야 할 고백을 하고 있는 아합왕의 모습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듯이 바짝 엎드리고 조공을 수용한 아합왕을 아람왕이 만족했으면 좋는데 만족하지 않고 한 술 더 뜨는 겁니다. 원하는 거 다 가지고 가세요,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바짝 엎드렸는데, 너희가 주는 거 내가 조공으로 받는게 아니라 내가 들어가서 원하는 거 다 뺏어 오겠다는 것입니다. 조공 주는 것 받는게 아니라 노략질하러 들어가 내가 뺏어오겠다는 겁니다. 아합왕이 이건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판단이 되어, 그들의 최후통첩을 거절하고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아합왕을 깨주시며 돌아올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갈멜산에서의 놀라운 역사를 통하여, 아람왕의 전쟁 협박을 통해서, 계속 깨우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아합왕은 갈멜산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할 때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바알 선지자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목도했고, 모든 바알 선지자들이 처단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은 바알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왕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지금도 아람의 군대가 전쟁을 걸어올 때, 그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너는 지금 상황을 보면 안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돌아와야 되고 이 전쟁은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어서 나에게 돌아와야 사는 전쟁이라는 것을 계속 깨우쳐 주시는데 아합왕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 큰 위기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머리로 상황을 굴려보고 계산해보고 안 되니까 아람 왕에게 엎드리고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비굴하게 다 바짝 붙어 있는 그 모습, 그게 하나님께 등 돌리고 지금 여전히 무너져 있는 아합왕의 현주소입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만 붙들고 악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 아합왕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 없기 기회를 주시듯, 그런 우리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끊임없이 돌아올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지금 나를 여기 있게 만든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대단해서 이렇게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놀랍고 대단한 사랑과 은혜가 지금까지 나에게 부어지기에 내가 이 만큼 살아가고 있음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며 지금 이 순간 놀랍고 대단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운데 머물며 하나님을 선명히 바라보며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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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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