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왕인 아합은 3년의 기근 원인이 자기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엘리야에게 책임회피와 핑계 논리로 전가하려고 했습니다. 그 엘리야의 깨우고 찌르는 진리에 귀를 막고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듣지 못하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그 유명한 영적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참 하나님이 누구시고 참 의지할 신이 누구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나기 위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하는 겁니다. 동시에 엘리야는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리는 백성들에게 깨우고 찌르는 말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바알을 섬기는 것도 아닌 이런 회색 지대에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신앙생활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길 거면 제대로 결단하기를 촉구합니다. 여호와와 바알을 겸하여 붙들고, 실제로는 바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백성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중 생활 청산과 결단을 촉구한 후 엘리야는 계속해서 백성에게 1:850의 영적 전쟁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엘리야 혼자 바알 선지자 450명과 싸우는 겉으로 보는 현실, 눈으로 보는 현실로는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등장했지만 사실 450명이 아니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400명을 합치면 850명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세벨에게서 녹을 먹고 자라는 종교 공무원들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세벨의 말에 껌뻑 죽고 거기에 길들여져 있는 종교 지도자들 그 850명과 엘리야가 지금 영적 전투를 벌이는 것을 직시하라는 겁니다. 1:450이던 1: 850이던 이미 결정난 싸움이자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마치 여리고성 전투와 똑같고,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와 똑같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엘리야가 직면한 1대 850의 영적 전투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싸움이 이렇게 늘 말도 안 되는 싸움, 내 힘으로는 100% 이길 수 없는 싸움 가운데 서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겉으로 봐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싸움을 혼자 싸우는데 23절 이후에 보게 되면 모든 그 영적 전투의 원리와 주도권을 엘리야가 쥐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송아지의 각을 떠 가지고 거기에 믿는 신의 이름을 불러서 불러 응답하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다…라는 그 영적 전투에 원리와 룰을 설명해주면서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엘리야는 지금 쫄거나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그 영적 전쟁에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담대하게 바라보는 엘리야의 놀라운 삶입니다. 그 영적 담대함의 핵심은 바로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있습니다. 내가 부르는 대상이 누구인가라는데 있다는 겁니다. 기도에서 통성 기도도 중요하고 방언 기도도 중요하고 침묵 기도도 다 중요합니다. 이것은 뭐고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닌 방법론의 문제이고, 이런 방법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은 기도할 때 내가 누구를 향하여 누구의 이름을 붙들고 하느냐 하는 것이죠. 내가 하는 기도가 정말 예수님의 이름을 붙들고 예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을 쏟는 기도일 때만 진정한 의미에 기도입니다. 아무리 크게 외치고 아무리 오랜 시간 방언 기도를 하고 아무리 겉으로는 대단해 보여도, 예수 이름을 붙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건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에게 정확하게 직언해주시는 겁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이름만을 불러야 산다…여호와의 이름을 향하여 인생을 걸어야 산다는 겁니다. 나는 여호와의 이름만을 부르며 여호와의 이름에만 인생 걸며 기도하고 살겠다 결단하면 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인 겁니다. 엘리야는 얼마나 담대한지 사람이 많은 바알 선지자들에게 먼저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먼저 그들의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방식이 네 가지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제단 주위에서 뛰놀았고, 두번 째는 큰 소리를 불렀습니다. 450명이 뛰놀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니 대단해 보였고 무언가 있어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광신과 자학의 모습으로 기도가 나아갑니다. 세번째로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며 기도하고, 그렇게 해도 안 되니까 네번째로 미친 듯이 떠들며 기도했습니다. 광신의 기도, 바알 기도의 특징은 겉으로는 대단해 보였고, 겉으로는 시끄러웠고 겉으로는 무언가 있어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텅 빈 것이 바알 기도의 특징입니다. 특별히 우상이나 잘못된 광신의 특징은 항상 이렇게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학대하고 자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바알 숭배 기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이런 학대와 자해를 했던 또다른 우상 숭배가 있는데 바로 몰렉이라는 우상입니다. 몰렉의 제사는 자기의 기도가 절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했던게 뭐냐면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던 겁니다.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의 몸을 자해하는거나 그 어린아이를 제물로 드리는거나 결이 똑같은 겁니다. 항상 학대하고 자해하고 찌르며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며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게 사이비와 우상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게 결론입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복의 은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년의 기근을 지나고 내가 비를 내릴 것인데, 그 비를 내리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회복을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동시에 그 약속은 바알 우상은 허상이고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라는 것을 드러내는 약속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450명이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 주변에서 뛰놀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몸을 피흘려 자해하며 미친 듯이 떠들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응답하지 않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풍요와 번영을 약속한다고 착각하는 바알 우상의 모래성을 철저하게 허무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시면, 우리 생각에 풍요와 번영을 약속할 것 같은 돈신, 명예신, 권력신들이 얼마나 허상이고 안개인지를 그대로 보여주시며, 그런 착각들을 다 모래성 같이 허물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쓸데없고 무의미하며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아무런 역사를 주지 않는 것들이라는 허상을 계속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 사건들을 통해 진짜 믿을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시는 것입니다. 3년의 기근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못했고 바알 우상을 버리지 못했던 그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무지함을 반복하지 않고, 아합왕과 같이 핑계 논리와 책이 회피로 무너지지 않도록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허상을 통해 우리에게도 말씀은 도전하는데 하나님 없는 850보다 하나님 붙든1명이 더 강하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당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이렇게 엘리와 같이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면 할 수록 나를 붙들어 주고 지켜줄 것 같이 생각 되는 세상 신들을, 풍요와 번영을 줄 것 처럼 붙드는 그 모든 것들을 주님은 흔드실 것이고, 주님은 무너뜨리실 겁니다. 그때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오직 믿고 의지할 분이심을 깨닫고 그 이름을 붙들면 여러분들이 살게 된다는 겁니다.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버리며 여호와의 이름만을 붙들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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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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