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한 비와 이슬이 하나도 내리지 않는 기근이 3년 지난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3년에…라는 말씀을 통해 그 3년간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지 고통이 많았는지를 짧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고 힘들었던 그 날이 지나고 3년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먹이시고 물을 공급해 주셔야 살 수 있는 백성인데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께 등 돌리고 바알우상에 정신 팔려 인생을 걸고 있으니 그렇게 황폐해진 것입니다. 3년의 죽을 것 같은 기근은 물론 물과 이슬이 없어 모든 땅이 메마른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눈으로 보게 되면 3년 기근은 단순히 물이 없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이 말라버린 영적 기근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사마리아의 3년 기근은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3년 동안 찾아온 기근 가운데 철썩같이 믿었던 풍요와 번영의 우상 바알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고 결코 비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3년간의 기근은 바알 우상이 자신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주는 신이 아니라 그저 껍데기 우상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보여주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죽음의 고통 속에서 아합왕과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우상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3년간의 기근 속에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말씀의 기근을 깨닫지 못하고, 바알 우상의 결박에서 풀려나지 못한채 자신을 깨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온 백성이 고통 당하는 3년의 기근 속에서 아합왕은 얼마나 백성들과는 괴리가 있는 악한 왕이었는지, 동시에 그 악한 아합왕과 함께 일하는 신하인 오바댜는 얼마나 신실한 자였는지가 대조하듯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종 이라는 뜻의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렇게 신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하가 악한 왕 아합 밑에서 일하니 얼마나 부대끼는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의 보스인 아합왕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바알 숭배자였으니 말입니다. 마치 다윗이 느브갓네살 왕 밑에서 있었던 것처럼, 요셉이 마치 바로 왕 밑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이 오바디아는 아합왕 밑에서 신하로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이렇게 부대끼며 살듯 오바댜의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위에 내가 섬기는 상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면 그 일 자체가, 직장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런 아합왕과 오바다의 관계와 같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세상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런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 고통을 직면하며 사는 삶일 수 있다는 겁니다. 아합 밑에서 이런 고통과 도전의 삶을 버티고 있는 오바댜를 통해, 그 삶을 버텨내며 견디는 것도 하나님의 사명을 살아내는 삶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신실한 신하 오바댜에게 하나님을 떠난 악한 왕 아합왕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는지 보십시오. 얼마나 그가 악한 왕인지 3년 기근 가운데도 얼마나 백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등한히 여기는 왕인지를 한번 보십시오. 3년 기근으로 말미암 모든 백성들이 매일 피가 말라가는 애타는 삶과 지옥을 경험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아합왕이 신하 오바댜에게 내리는 명령이 뭡니까? 물이 있는 데를 좀 찾아오라…얼른 그 물 있는 걸 좀 찾아보라 명합니다. 물을 찾으라는 명을 내린 이유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죠. 자기 집안에 재산인 말과 노새들을 먹이기 위해 그 물을 찾으라 명한 겁니다. 백성들의 신음과 고통을 듣지 못하는 왕, 백성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왕, 자기 집안에 말과 노새만도 백성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왕이 바로 아합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살리려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을 죽도록 방치하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안중에 없는 왕이기에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는 꿈쩍하지 않다가 집 안에 말과 노새들이 죽어가니까 신하를 통해 물을 찾으라고 명령하는 악한 왕 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바알을 숭배하는 것도 모자라, 백성들의 신음과 고통 소리에 귀를 막은 아합 왕, 이런 왕을 두고 있는 백성들을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지도자와 어떤 왕이 오느냐에 따라 그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증언되는 말도 안되는 아합왕, 그 밑에서 신하로 있는 신실한 오바댜가 얼마나 고역이고 고통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렇게 버티며 신앙을 지키는 삶을 오바댜를 하나님은 귀히 여기셨고, 그 버텨내는 순교적 삶을 통해 오바댜는 놀라운 일을 이룹니다. 3년 기근 중에 왕의 부인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찾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계속 죽였습니다. 그 고통과 칼바람 부는 아합왕 밑에서 신실한 오바댜는 그저 버티기만 한게 아니라 놀라운 소명을 이루어냈는데 그 선지자들 중에 100명을 이 오바댜가 살려내는 겁니다. 50명씩 굴에 숨기고 몰래 떡과 물을 먹여 그들을 살리는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죠. 이세벨의 칼바람 속에 100명의 선지자들을 살려낸 오바댜, 그게 엘리야의 사명과 비교했을 때 결코 작은 사명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는 엘리야의 소명이 있는 것이고 오바댜에게는 오바댜의 소명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 북 이스라엘에 찾아온 기근은 물이 말라버린 기근이자 말씀이 말라버린 영적 기근이었습니다. 죽음의 고통과 같은 3년의 기근이 있을 때, 내가 믿고 의지하는 돈신, 바알 우상으로는 내 인생의 본질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고, 기근의 어려움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기회로 만드십시오. 악한 아합왕의 이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반면 교사로 삼아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듣고, 마음을 헤아리는 자가 되십시오. 오바댜 같은 사람이 악한 아합왕 밑에서 견디며 그 신앙을 지키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은 결코 가볍게 보지 않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심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도 오바댜와 같이 사람을 살리고 그들을 건지는 그 사명을 위해 쓰임 받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는 엘리야만큼이나 귀한 사명임을 잊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합왕은 북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역사적으로 가장 악한 왕인 이유는 뼛속 깊숙히 바알 숭배 가문이었던 이세벨과 결혼했기 때문이고, 바알을 추종하는 것을 넘어 바알 제단을 쌓았기 때문이고, 아세라상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깊은 영적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주시며 희망의 싹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아합왕의 시대에 선지자 엘리야가 경험하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 사르밧 과부와 그 집이 경험하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일들이 아니라 그 시대 영적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 숨겨져 있습니다. 엘리야가 경험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과 고기로 그가 살았던 것도, 가장 가난한 과부의 집에 머물며 생존하며 버텼던 것도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동시에 사르밧 과부가 굶어 죽기 직전의 절대 빈곤에서 허덕이며 신음하는 모습 또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안타까운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언어 입니다.
오늘 말씀은 굶어 죽을 위기에 빠진 사르밧 과부 집을 건져 주신후 그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증언합니다. 절대 기근, 절대 빈곤의 상태였는데 때에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르밧 과부 집에 임해 기근 가운데 가루가 끊어지지 않고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때를 따라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이 과부의 집이 잘 지냈다, 엘리야로 말미암아 그 집이 축복을 받았다 이렇게 계속되면 좋은데 또 다른 비극이 그 집에 찾아온 겁니다. 굶어 죽지는 않게 되었는데, 그 과부의 유일한 소망이자 희망인 그 아들이 병들어 신음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굶어 죽는 걸 살려 주시더니 굶어 죽는 대신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과부로 사는 것은 어렵지만 그 당시 과부로 산다는 것은 정말 말할 수 없이 고통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삶입니다. 남편이 일찍 죽으면 그 죽은 이유가 그 부인 때문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몰아가는 그런 사회적인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고개를 들고 살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런 과부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은 누구냐 하면 그 아들입니다. 아들을 사랑해서도 중요했지만 아들이야말로 이 과부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버팀목이 되는 겁니다. 그 여인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 아들을 통해서였죠. 그런데 그 과부의 아들이 지금 병들어 죽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사르밧 과부에게는 모든 소망이 무너지는 처절한 절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두 마음이 동시에 있는 거죠. 아들이 굶어 죽는 대신 병들어 죽으니까 첫 번째는 자신의 탓이라고 느끼는 겁니다. 이 아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하는 마음, 이 못난 애미 만나 가지고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다고 가슴을 치는 겁니다. 남편이 일찍 죽은 것도 서러운데 아들마저 죽게 된게 다 내 탓으로 느끼고 내 죄 때문이라 느끼는 겁니다. 동시에 엘리야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있는 거죠. 당신이 왜 우리 집에 들어와 가지고 내 아들 죽겠했느냐는 겁니다. 당신이 들어와서 멀쩡했던 내 아들이 지금 죽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큰 어려움을 당하면 이 두 마음이 동시에 들어갑니다. 한번은 자책이 들고 한번은 원망이 들고 이 두 마음이 계속 사르밧 여인에게 탄식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의 유일한 소망인 아들을 죽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그 아들을 굶어 죽는 것을 건져 주시더니 그를 병들어 죽게 하셨는가? 그렇게 병들어 죽이시려면 차라리 굶어 죽이시지… 이러면서 하나님에게 질문하고 탄식하는게 우리의 당연하면서도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아들이 왜 병들어 죽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라는 대답에 생각보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답을 안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건 뭐냐면 지금 이 말씀은 단순히 사르밧 과부와 엘리야의 개인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에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임을 깨닫게 되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처한 모든 상황은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임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아합왕으로 인해 모든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기근은 물이 없는 기근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메말라 사라진 말씀의 기근이라는 것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가 처한 절대 빈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북이스라엘이 말씀이 말라 헤메며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영적 상태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에서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다는 것은 동시에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기근이 있었고 그들은 영적으로 병들어 죽었다는 겁니다. 말씀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이 바로 그들의 영적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떠나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 때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찾아오는 영적 현실은 말씀의 결핍으로 영혼이 메말라 죽는 거고 병들어 죽는 겁니다. 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통하여 그 당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자책하고 원망하며 탄식하는 사르밧 과부 앞에서 그 죽은 아들을 바라보며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침상에 죽은 아들을 뉘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두번이나 반복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음을 강조합니다. 굶어 죽는 대신 병들어 죽은 과부의 아들 앞에 엘리야의 기도는 그의 기도는 부르짖음의 기도였습니다. 저도 침묵 기도를 좋아하고 때로는 말을 멈추고 침묵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런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 불가능의 상황에 놓였을 때는 하늘을 향하여 나의 간절함이 토설하듯이 나오는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내 입술을 벌려 나의 가장 큰 소리로 주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 살려 달라고, 이 아들과 같이 영적으로 죽어간 북 이스라엘을 살려 달라고 엘리야는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겁니다. 인생에 사노라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상황에 소망이 보이지 않고 답이 없고 내가 풀 수 없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 시대의 어둠과 죄악을 바라보며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 성도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기 원하십니다. 동시에 엘리야가 했던 기도는 죽은 아이 시신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 기도했다 그랬습니다. 아이 시신 위에 자신의 몸을 엎드렸다는 건 그 죽은 시신과 자신의 몸을 똑같이 대는 거죠. 내 생명과 아이의 죽음이 맞교환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서 저 아들 살기를 원합니다…간절한 행동과 기도입니다. 세 번이나 내 생명이 끊어지더라도 저 아이를 살려 주시옵소서… 죽음을 각오한 기도였습니다. 엘리야의 부르짖는 기도, 죽음을 각오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과부의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이걸 통하여 이방신전과 바알 숭배가 가득했던 땅에서 사르밧 과부의 입을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안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왕과 백성들은 말씀의 결핍으로 메말라 죽어가고 병들어 죽어갑니다. 아합의 시대에 어둡과 죄악된 세상 속에서 그 영적 기근과 영적 질병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원합니다. 끝까지 북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기근과 병듦을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깨우시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영적 기근을 해갈하시고, 영적 병듦에서 구해주시고, 죽음에서 살리시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북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우리 공동체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게 했음을 믿고, 하나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소망의 백성,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붙들고 영적 기근과 영적 병듦에서 해방되어 살아가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겨 주시며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하여 주셨는데, 그건 낭만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근 속에서 얼마나 백성들이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선지자가 몸으로 체득하는 처절한 과정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까마귀가 시냇물이 마르다 보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를 통해 엘리야를 먹이시며 영적 현실을 직면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참 너무하신 것 같은게, 음식을 좀 줄 수 있는 집에 가서 어떻게 비비게 하시면 좋겠는데 굳이 가난하고 어려운 과부의 집에 가서 엘리야의 음식을 주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에게 가라는 것은 결코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가혹한 일입니다. 그 가난하고 가련한 과부집에 가서 빌붙어서 과부에게 비빌 언덕을 제공하라고 얘기하는 것은 엘리야에게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과부집 말고 좀 비빌수 있는 집에 가면 안 됩니까? 제가 왜 굳이 과부집에 가서 그렇게 빌어먹어야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엘리야는 하나님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했고 그 사르밧 과부집에 가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 가난하고 힘든 과부집에 가서 음식을 먹으라고 명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과부집에 가게 하셨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과부가 살고 있었던 지역이 시돈에 속한 사르밧입니다. 시돈이 어떤 곳이냐면 이세벨 왕비의 고향이기도 한 곳으로 우상숭배가 가장 만연했던 극성 부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르밧 과부가 직면하는 기근과 피폐함은 단순히 물이 없고 음식이 없어 겪는 피폐함을 넘어 영적 피폐함으로 고통당하는 백성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죠. 풍요와 번영을 주는 우상이라고 바알에게 모든 것을 걸었는데 그들이 처한 영적 현실은 메마른 정도가 아니라 피폐해서 죽기 일보 직전인 상태까지 간 것을 이 사르밧 과부의 처절한 현실을 통해 부여주시는 것입니다.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먹게 하신 것도 사르밧 과부를 통해 음식을 먹게 하신 것도 물론 엘리야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고 은혜였지만 동시에 엘리야로 하여금 바알숭배가 극성한 그곳에 영적으로 피폐해서 죽기 일보직전인 과부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 집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먹고 사는게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절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한끼 먹을 것 밖에 없는 집, 이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 먹고 아들과 죽으려고 기다리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벼룩에 간을 빼먹는 것도 아니고 그 집에 가서 물을 달라 그랬고 떡을 달라 요청합니다. 엘리야는 정말 한 끼 식사밖에 남은게 없는 절대 빈곤에 있는 그 과부에게 먼저 자신을 위해 떡을 만들라고 요청합니다. 정말 한 끼 먹을 것 밖에 없는데, 그거 먹고 나서 아들과 나는 죽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엘리야는 딴 집에 알아보는게 아니라 그 남은 한 줌 그 밀가루와 기름으로 먼저 나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먼저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내 아들을 위해서 먹으라는 건데 그 후에 너와 내 아들을 위해 만들게 없는데, 그 말은 선지자 대접하고 죽으라는 말과 같이 여겨지는 그런 요청을 하는 겁니다. 왜 엘리야는 이렇게 무정하게 이기적으로 이 사르밧 과부를 시험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렇게 무리한 말도 안되는 요구하시는 건 이 과부의 집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지금 어차피 한 끼를 먹고 죽으나 한 끼 안 먹고 죽으나 죽을 예정이었어요. 어차피 남은 건 한 끼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르밧 과부가 사는 방법은 자신이 열심히 뛰고 발버둥 친다고 사는게 아니라 하늘의 축복이 임해야만 사는 집입니다. 그 하늘의 축복이 임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자가 누구냐면 바로 엘리야입니다. 이 엘리야의 요구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남아있는 그 한끼 식사를 먼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가져오고 드리면,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정말 비빌 거 하나도 없는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한 끼 먹을 거 밖에 없는 그 집에 들어가 그 한 끼 남은 거를 나를 위해 먼저 대접하면 너에게 하늘의 복이 부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머리로는 믿을 수 없는 약속이고 이해되지 않는 약속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입장에 한번 서보셨습니까 뭐 저런 선지자가 다 있어…이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과부에게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축복으로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 그 하늘의 축복이 이 집에 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될게 뭐냐면 믿음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넘버원인 집에 하나님의 말씀이 넘버원인 집에 하늘의 축복이 임하기 때문에 지금 그 믿음의 순종으로 반응하도록 엘리야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늘의 축복과 은혜를 기도하고 간구하는 제목들은 대부분 그 기도 제목이 내 힘으로 스스로 풀 수 없는 것을 놓고 기도하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뛰고 발버둥쳐도 되지 않는 나를 넘어서는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 내가 열심히 뛰었고 노력했고 발버둥 쳤는데 내가 스스로 상황을 풀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우리는 하늘의 축복과 은혜를 구해야 되는 기도 제목이 되는 거죠. 그래서 기도할 때 믿음의 반응이란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내가 이것을 풀 수 없으니까 주님께서 이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 주시기를 전심으로 간구하는 것이고 동시에 기도하면서 내 안에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내려놓는게 믿음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도 제목은 근심 걱정으로 해결되지 않고, 내 노력과 힘으로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이 하늘의 축복과 개입하심이 없으면 어차피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심 걱정을 통해 염려를 통해 전혀 문제를 풀 수 없음에도 내 마음에 가득채우고 기도하려 하니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쌓인 근심 걱정은 언제나 내 삶에서 기도를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이 기도제목을 풀어 주시리란 믿음과 함께 기도를 통해 내 근심과 걱정을 밀어내는 것이 내려놓는게 믿음의 반응이라는 것이죠. 기도를 붙들고 내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는 것이고 기도를 통해 내 염려와 근심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사르밧 과부는 믿음의 반응으로 순종합니다. 한끼 식사밖에 남지 않는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넘버원으로 드리며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전적으로 믿어 머리를 굴리지 않고 올인합니다. 엘리야의 믿음도 크지만 사르밧 과부의 믿음이 훨씬 더 클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듣기라도 했지…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말씀을 듣는데, 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머리를 굴리거나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이것을 내려놓고 엘리야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해서 한끼 남은 식사를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자기의 간절한 필요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먼저 드렸는데 실제로 이것은 자기의 생명을 드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거 전부를 드리며 하나님은 제 삶에 넘버 원임을 온맘다해 순명으로 고백했습니다. 그 믿음의 반응 가운데 사르밧 과부의 집이 놀라운 하늘의 기적이 부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기근 중에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기적이 그 사르밧 과부 집을 살린 겁니다. 하늘의 축복이 임하며 그 가족이 죽음 가운데 건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결핍과 기근은 본질적으로 영적 결핍과 영적 기근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필요한 자이고 부어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사르밧 과부와 같이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늘의 축복과 개입하심이 나에게 임하기를 사모하십시오. 주님의 말씀과 명령이 순종하며 자기는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고백하며 말씀에 인생을 걸고 드린 믿음의 반응에 하늘의 축복으로 임하여 그 가족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종의 결단을 통하여 그 집이 오히려 건짐을 받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나의 상황 가운데 어차피 안 되는 나의 삶에 기도를 통해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맡기는 여러분들의 믿음의 반응이 있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나의 마음 쏟는 기도가 근심을 밀어내고 염려를 밀어내는 기적을 체험하며 주님께 순종하며 응답받는 놀라운 삶이 우리 인생에 펼쳐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배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말씀이자, 끊임없이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사랑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할 만도 하실 것 같습니다. 남북 갈등으로 서로가 원수세어 싸우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북북 갈등으로 서로 내전을 벌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자리를 자기 마음대로 힘과 권력을 통해 차지하려고 하는 그 피비린내 나는 타락의 극치, 불순종과 우상숭배가 만연해지는 북 이스라엘을 바라보면 정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북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내시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그 위대하고 놀라운 엘리야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가장 시대가 어둡고 가장 왕이 타락하고 악할 때 입니다. 아합이라는 왕은 북 이스라엘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가장 악한 왕이 지배하는 가장 힘든 영적 암흑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하고 센 선지자를 보내 주십니다. 이 어두운 역사를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배반하고 등 돌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원하시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사랑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 엘리야는 누구인가? 이 정도 위대한 선지자면 그의 출생 이야기를 하든지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하든지 어느 백그라운드가 증언될 것 같은데, 집안에 혈통도 어머니 아버지 이름도 전혀 없습니다. 길르앗지방 디셉 사람 엘리야…가 끝입니다. 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이유는 엘리야에게 집중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일하시는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은 엘리야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던진 선포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 없으면 앞으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합왕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말입니다. 뼈속 깊이 바알 숭배자인 이세벨과 결혼한 것과, 바알 제단을 만든 것과, 아세라상을 만든 이런 악하고 어두운 왕이었으니 이런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 듣고 회개하겠습니까? 전혀 들을 귀가 없는 것이고, 들을 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진리를 죽이려고 하는 왕이기에 엘리야의 선포는 목숨을 거는 선포였습니다. 시대가 악하면 항상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그 진리를 죽이려 하려고 합니다. 마치 모세가 바로 왕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 바로 왕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 모세를 죽이려 했던 것과 동일한 겁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듣던 듣지 않던 아합왕 앞에 가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막지대를 살고 있습니다. 거기 자라는 많은 식물들은 새벽에 내리는 이슬로 자라게 되는데 비가 안 오면 당장 식물들이 말라 붙습니다. 그러니까 비도 이슬도 며칠 내리지 않으면 그 땅은 다 메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그런 척박한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하늘에서 주시는 비와 이슬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 은혜 없으면 망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매일 알려주시며 철저히 하늘만을 바라보고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도록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대신 눈에 보이는 바알 우상에게 달려가고 절하고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며 심지어 그 바알의 딸과 결혼하는 왕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고는 뭡니까? 지금 네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보이는 풍요와 번영의 우상 바알에 매달리고 살아간다면 그 우상에게 한번 구걸해 봐…거기 인생 한번 걸어봐 어떻게 될지….이 시간 경고하는 것이죠. 네가 잘 먹고 살아가는 것이 네가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바알이라는 우상이 너를 도와줘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매일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어서 네가 살아가고 있는 건데 지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그렇게 붙들고 바알을 붙들고 살아간다면…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거야….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아합왕은 깨달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연히 진리를 선포한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피할 곳을 마련하셨고 그 곳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살도록 이끄셨습니다. 엘리야는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지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가 주시는 음식으로 내가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참 많이 하는 말씀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까마귀가 엘리야를 먹인다는 것은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그가 그 기근과 어려움을 몸으로 경험하는 때임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동물이 가져다주는 음식이 좋겠습니까? 까마귀가 드론으로 해가지고 요리된 불고기를 가져다 주는게 아니라 그 새가 물어다 주는 고기들이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죠. 정말 겨우 먹고 살만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부정하다고 말씀하신 동물입니다. 까마귀가 먹어 가져다주는 음식은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는 먹으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정하다고 여기는 까마귀가 물고 오는 음식을 먹으면서까지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이시는 그 절박한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부정한 동물이 가져오는 음식을 먹이면서 하나님은 버티라는 거예요. 까마귀가 물어다니는 음식으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서 목숨 거는 그 절박한 상황에 엘리야가 처하게 만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까마귀를 생각하라…심지도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는게 바로 엘리야가 처한 상황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그 부정한 동물인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기르시고 먹이시는데 너희가 이 부정한 새인 까마귀보다 얼마나 더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까마귀가 아니라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입히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걸 통하여 먹는 것이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게 하시며 그 백성의 탄식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자가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아합의 시대가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일 수 있습니다. 그 어둡고 죄악된 시대만 바라보고 있으면 절망하고, 뉴스를 바라보면 절망만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선지자들은 대부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들입니다.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배반하는 백성들,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어둡고 사람들이 악하다는 것으로 절망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기에 가장 어두운 때에 가장 위대한 사람을 보내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렵고 악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 보내심으로 돌아올 기회를 계속 열어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한 시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그 가운데 보내시는 빛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기대하는 것,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빛을 어둠에 비추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동시에 엘리아를 바라보지 말고, 엘리야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까마귀에 집중하지 않고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선명히 바라봐야 합니다.나의 일상이 사람과 상황을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받으며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북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내리막길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세워 주시고 든든하게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기 원했지만 북 이스라엘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남이 되고 원수가 된지 수십년이 흘렀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이제 남과 북은 동족이라 하기에는 너무 달라진 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남과 북만 갈라지고 나누어진게 아니라 남한 땅에도 수많은 갈등들이 존재합니다. 남과 북으로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남남의 갈등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빈부 갈등,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 갈등, 이런 남남의 갈등들도 굉장히 큽니다.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눠져 원수되어 싸우는 것을 넘어서서 북북갈등이 일어나 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이 둘로 나뉘어 국민 절반은 디므니를 따르고, 나머지 절반은 오므리를 따르며 북북 갈등이 4년간 내전으로 번집니다. 서로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빼앗고 집안의 씨앗을 다 말리듯이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던 북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서로 원수 되는 것도 모자라 북북갈등이 시작되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으로 쪼개져 서로 내부 총질 하며 자멸하듯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면하는 안타까운 영적 현실이고, 좀 더 크게 보면 항상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를 향하여 던지는 미혹과 덫에 말려들 때 이런 일이 있게 된다는 것을 경고의 말씀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사단이 오랫동안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했던 동일한 미혹 방법은 뭐냐면 divide and fight입니다. 같은 민족, 같은 신앙 공동체가 나눠져서 서로 싸우게 만드는게 항상 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되면 주적인 사단 마귀를 잃어버리고 서로 나눠지고 서로 원수되어 싸우게 되는 것이죠. 한 백성이 남과 북이 갈라지는 것도 모자라 이제 북과 북이 갈라져 이제 그 안에서 원수되어 싸우고 모두 망하고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흑역사를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이런 일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현재형으로 찾아오는 도전임을 경고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divide and fight이라는 사단의 미혹에 우리가 걸려 넘어지지 않기 말씀을 통해 깨어나며 분별하고 경계해야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바라보며 주적을 정확하게 깨달아 사단의 미혹에 빠지지 말고, 북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반복되지 않기 원합니다. 북북 갈등의 내전을 넘어 왕이 된 오므리와 그 아들 아합에 대해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먼저 오므리가 북북의 내전 갈등을 봉합하고 4년 만에 왕이 되는데,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굉장한 경제적 부흥과 회복을 이룬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한 절 말씀으로 되어 있지만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성읍을 건축하고 사마리아라는 나라가 시작하게 된 큰 기틀을 세운 왕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오므리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겉보기에는 많은 일과 업적이 있었고, 백성들의 삶의 상황은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좋아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열심히 일했고 경제적으로 백성들을 살 만하게 했으며 소위 말해 업정이 많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매우 악한 왕,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하고 헛된 것들로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왕으로 평가합니다. 겉으로는 사람들 보기에는 대단한 왕이었는데, 속으로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다르며,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것은 다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으나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시선을 늘 붙들고, 겉보기가 아닌 속으로 보이는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시선에 내가 어떤가를 본질로 발견하는 것이 살아있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므리에 이어 완이 된 그 아들 아합은 어땠습니까? 아합은 22년 동안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아합은 이전에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한 왕, 심지어 여로보암의 죄가 가볍게 여겨질 정도로 심각하게 무너진 왕, 더욱 영적으로 악하고 어두운 왕으로 평가 받습니다. 역사적 문헌을 보게 되면 아합왕 또한 아버지 오므리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부강한 사마리아 북 이스라엘을 만든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아버지보다 더 악하고 어두우며 악한왕의 대표선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합왕이 왜 그렇게 나쁘고 악한 왕이었는가에 대해 대해서 세 가지 이유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뼈속 깊이 바알 숭배자 가족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해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바알을 섬기는 것을 넘어 바알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알을 위한 제단을 왕이 쌓아 앞장서 바알 우상에 예배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아세라상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돈 문제가 제일 큰 문제야,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큰 문제야. 그걸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어… 그래서 바알 신전에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은 겁니다. 그러니까 아합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겠습니까? 바알을 추종하고 바알 우상을 절대 가치로 두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최근에 여기 어번 지역에 아주 큰 카지노가 새로 생겼습니다.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카지노 건물이 지어졌는지 번쩍번쩍 하고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길 건너에는 크게 빙고샵이 또 크게 있었고, 그 빙고 건물 옆에는 스모크샵이 있었습니다. 그 세 군데에 가득한 차들로 인해 거기서 수많은 경제적인 부와 이득이 있을 겁니다. 근데 결국 그걸 통하여 영적으로 피폐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아합왕이 했던 악한 일이 정확하게 이거구나라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좀 먹고 살게 하고 경제적으로 좋아지게 했는지 모르지만 돈문제가 제일 큰 문제라는 가치 아래 바알 우상을 섬기며 백성들의 영적인 삶은 완전히 황무하게 만들고 피폐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 문제는 잘 풀었는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한 어둠과 타락으로 백성들을 몰아가는 왕이 아합왕이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나아지고 백성들은 잘 살게 됐는지 모르지만 아합 왕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이런 평가들을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교회들과 백성들도 동일하게 평가하고 계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인생도 언젠가는 예수님 앞에 서서 평가받는 때가 있음을,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과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있고, 하나님의 평가와 사람들의 평가가 동시에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평가와 안으로 보이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먼저 붙드시는 백성, 겉으로가 아닌 안으로는 어떠한가를 먼저 붙드는 백성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지금 이순간도 내 인생은 하나님 앞에 평가되고 있으며 그 평가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식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평가를 망각하면 우리는 늘 사람들에 묻혀서 사람들의 평가만 민감하게 바라보고 살다 끝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시선을 의식하며, 하나님께 민감하게 깨어나기를 원합니다. 겉보기에 어떠한가가 아니라 내가 이룬 업적이 아니라, 속으로 어떠한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늘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입니다. 말씀에 엎드리는 주의 백성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이 될 줄 믿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나와 내 집안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결단하며 이 시간 순종과 말씀 가운데서 든든하게 서 이 세상에서 기준이 되며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치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콩가루는 웬만하면 서로 뭉치지 않기 때문에 보통 떡을 만들 때 떡이 들러붙지 않도록 콩고물로 쓰이는 것이 콩가루입니다. 이런 뭉치지 않는 성질 때문에 하나되지 못하고 안되는 집을 콩가루 집안이라 말합니다. 비정상적인 것이 반복되어 정상적인 것처럼 고착화 된 집이나 공동체를 콩가루 집안 혹은 콩가루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비정상적인 것이 가득한 콩가루 나라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백성들이 이런 모습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정말 갸우뚱하게 만드는 콩가루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가의 정통성도 없고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자리인 왕을 힘과 무력으로 스스로 올라가서 뺏고 뺏기는 그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북 이스라엘의 콩가루 나라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북 이스라엘의 세 왕이 등장을 합니다. 바아사, 엘라, 시므리가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콩가루 집안을 대표하듯 비정상적이에요.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자가 없으며 하나같이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쿠데타가 일어나며 하나같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집만 골라서 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모습들이 반복되니까 북 이스라엘은 콩가루 나라가 되고, 비정상이 고착화되는 영적 어둠이 지속되는 소망 없는 시대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대가 어둡고 힘들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 한 번 그대로 끝나야 되는데 그 비정상적인 일이 반복되니까 이것이 고착화되어 더 이상 소망이 사라지는 깊은 어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왕은 바아사왕입니다. 여로보암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의 기회를 주셨던 이유는 솔로몬과 그 모든 집안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무너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을 깨우시며 경각심을 주시기 위해 여로보암에게 잠시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오히려 솔로몬보다 훨씬 더 악한 모습으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집안을 모두 쓸어버리시겠다고 경고를 주셨고 그 말씀대로 바아사가 일어나 여로보암의 모든 집을 쓸어 버렸습니다. 왜 여로보암의 집안을 진멸시키며 모든 씨를 말려 버렸습니까? 다시는 그 집안에서 왕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있고, 그런 여로보암의 죄악을 완전히 말려 버려 북 이스라엘이 다시 한번 하나님에게 돌아오기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집안을 모두 진멸시키고 왕이 됐는데 아니러니 하게도 여로보암의 길로 동일하게 행했다는 것이죠. 여로보암과 같이 똑같이 불순종하고 똑같이 우상숭배하며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후를 들어 바아사 왕을 꾸짖고 경고하십니다. 내가 여로보암의 집안을 진멸시키고 다 망하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너는 몰랐느냐…그런데 너는 동일하게 그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죄하게 하느냐고 질책하십니다. 그래서 바아사 왕에게 동일한 징계를 내리십니다. 바아사의 집안도 여로보암 집안과 같이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두번째 왕은 바아사 왕 아들 엘라입니다. 바아사가 죽은 후 왕위에 올라 엘라는 겨우 2년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2년 만에 자신의 신하 중 하나인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엘라왕을 쳐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쿠테타로 왕권을 차지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좌는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하나님의 정통성이라든지, 하나님이 이 자리를 세우셨다는 믿음이라든지 이런 거 하나도 없는 겁니다. 내가 저 왕의 자리 원하니까 힘으로 무력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가겠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고 내가 취하겠다… 인본주의 시대에 하나님이 없는 백성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왕의 자리를 내가 원하면 내가 싸워서라도 죽여서라고 올라가겠다 생각하니 이런 피바람이 계속 몰아치고 쿠테타가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그렇게 정통성과 정당성이 없이 시므리가 왕이 되고 나니까 단순히 엘라왕만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죠. 엘라의 모든 집안 사람들을 진멸하고 심지어 친족도 죽였고 친구들도 다 죽였습니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리는 피바람이 몰아치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말문이 막히는 건 시므리가 왕위를 차지하고 얼마 동안 왕이 되었는가 하면 고작 7일이었습니다. 일주일, 칠일 천하…그게 시므리가 왕위에 있었던 시간입니다. 일주일 동안 왕이 됐는데 그 일주일 동안이 시므리가 왕으로 한 건 뭐냐하면 바아사와 엘라의 모든 집안의 남자들을 죽이는 걸로 시간을 다 보낸 겁니다. 그리고 나서 7일 천하를 보내고 어떻게 끝나는가 하면 오므리라는 사람이 시므리의 왕권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반하며 성을 에워싸게 됩니다. 시므리가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 불타 죽었습니다. 왕궁과 함께 불타 죽으면서 시므리의 7일 천하가 끝나버리게 됩니다. 하나같이 세 왕 모두 비정상적이고,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으로 무너졌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세 왕 바아사, 엘라, 시므리, 하나같이 그 밥에 그 나물이었습니다. 똑같이 범죄하고 똑같이 불순종하고 똑같이 무너졌습니다. 여기서 정상적인 왕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비정상적이고 모두 반역과 배신, 살인과 피바람으로 점철된 콩가루 나라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신하에게 배신 당해 죽고, 스스로 불질어서 자살하고 마무리하는 이런 끔찍한 결말을 바라보며 백성들이 무슨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비극의 역사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북 이스라엘었습니다. 바뀌면 좀 나아질까 하는데 바뀌어도 낫지 않고요. 점점 하나님을 더 모욕하고 점점 하나님을 버리고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는 북 이스라엘의 민낯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북 이스라엘의 타락과 불순종과 그들의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비정상을 반복하는 콩가루 나라의 모습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가 나를 깨우는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은 거의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반복되고 고착화 되었습니다. 콩가루 나라가 되어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 땅의 백성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뭐라 그러시냐면 “내 백성 이스라엘… 내 백성 이스라엘…” 이라 말씀하십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세울 왕, 내 백성 이스라엘을 살릴 왕,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왕을 계속 찾으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내 백성 교회 성도….내 백성 새벽을 깨우는 성도…. 저들을 붙들고 다시 시작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면 비정상이 반복하여 콩가루 나라가 고착화되는 깊은 어둠의 시대, 암울한 시대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북이스라엘의 콩가루 나라, 비정상적인 것이 반복되는 영적인 어둠과 암흑 시대일 수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은혜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 깨어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말씀의 은혜를 담으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반복되는 콩가루 나라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며 어둠에 빛을 비추며 소망을 품고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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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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