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말씀에는 다윗의 두 사람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대조되고 있는데,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 다윗과 사울왕의 만남입니다. 어제 1-4절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이 얼마나 복된 만남이었는가를 배웠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은 자기의 군복과 칼을 주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놀랍게 사용되는 다윗을 보았습니다. 요나단은 세자저하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사울왕에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단의 입장에서 다윗이 잘 되는 것은 불편하고 마음에 껄끄러울 수도 있었지만, 요나단은 진심으로 다윗을 사랑하고 지지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만히 있으면 올라갈 왕의 자리도 중요하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울왕의 공허하고 빈 마음을 보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쓰임 받고 있는 낮은 자리의 다윗을 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지위와 위치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심이 있는가 없는가 가 더 중요하다 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은 자가 요나단이었습니다. 이처럼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은 복된 만남이고 귀한만남 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만남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말씀에서 다윗과 사울왕의 만남은 마치 잘못된 만남과 같은, 끊임없이 어긋나고 부딪치는 안타까운 관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골리앗을 물리친 전쟁 영웅인 다윗에게 군대장을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온 백성이 그것을 합당하게 여겼고, 요나단을 포함한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도 합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도 합당하게 여겨진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오직 한 사람에게 마음이 안 맞고 한 사람과만 부딪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사울 왕이었습니다. 왜 사울왕과 다윗에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오늘 말씀은 사울왕의 시기와 질투임을 증언합니다. 질투하고 시기해야 될 요나단은 아무런 문제 없이 진정으로 다윗을 사랑하는데, 이미 왕의 자리에 있었던 사울왕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윗을 질투하고 시기 하며 그 마음에 분노를 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질투의 정의는 남이 잘 될 때 내가 더 불행하고 슬픈 인생입니다. 질투에 사로잡혀 있으면 남이 잘 될 때 내가 더 불행하고 슬픕니다. 질투의 사람은 남이 안 될 때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게 지금 정확하게 사울왕의 모습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내 자신이 초라하고 내 자신이 비어 있기 때문에 나보다 조금만 잘나가는 사람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이 외치는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사울왕의 마음이 확 상한 겁니다. 그 말에 붙쾌하여 심히 노했다고 증언합니다. 솔직하게 얘기해 보면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데 사울왕이 공헌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천천은 커녕 백백도 안되는 공헌을 한 게 사울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상금도 걸고 자기 딸과 결혼해서 왕족이 되게 하겠다 해도 한 사람도 나가서 싸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온군대와 사울왕은 완전히 골리앗에게 압도당해 전의를 상실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도 아닌 그 소년 다윗이 돌 들고 나가 싸웠습니다. 혼자 나가서 그 골리앗을 싸워 이기고 그 목을 베며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게 다윗의 공헌이었으며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에 선명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그것을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던 사울왕이 지금 자기에게는 천천만 돌렸다고 화를 내고 분을 내는 겁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자기는 한 게 없는데 왕이기 때문에 내가 다 한 것처럼 착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갇혀 버리는 겁니다. 더 나아가 다윗의 나이는 그 아들인 요나단 보다고 어리다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자기 아들보다도 훨씬 어린 소년과 같은 다윗에게 지금 시기 질투를 하는 사울왕을 보십시오. 지금 사울 왕이 주목하고 있는 것,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 어린 소년 다윗이 잘 되는 게 나에게 불행이고 슬픔이라는 질투와 시기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심이 없는 왕이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왕의 자리는 비참하고 불행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높은 자리를 다 좋아하고 선호하며 열망하지만 하나님의 붙들림 없는 높은 자리는 우리를 흔들고 우리 인생을 사울 왕과 같이 망가뜨린 다는 겁니다. 사실 다윗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당당하게 그 전쟁터에 나가 골리앗과 싸운 죄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나가서 싸우지 않을 그 전쟁의 혼자 나가 싸워 이긴 죄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사울에게는 눈에 가시가 돼 버리는 것이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습니다. 사울왕에게 다윗은 요주의 인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 승리 가운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거나 하나님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커녕 그 전쟁의 승리가 자신 때문이었다고 착각하며 실제로 하나님께 사용 받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를 요주의 인물로 블랙 리스트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다윗의 대비를 통해 어둠에 헤메고 있는 사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울왕과 같이 자신 때문에 생긴 승리이며 복이라고 착각하고, 나보다 좀 더 잘 되는 사람들을 보며 질투하고 시기하고 있다면 영적 하향곡선을 걷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깊이 새길 원하는 것은 내 인생의 눈과 마음이 쏠리는 곳이 과연 어디인가를 마음에 깊이 새겨보기 원합니다. 나는 과연 하루 종일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에 대해 마음과 눈을 쏟고 있는지…깊이 반성하기 원합니다. 내가 정말 주목하고 마음을 쏟아야 되는 것은 내 위치나 내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 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리와 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가가 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관점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주목하며 하나님에게 합한 자가 되며 하나님의 영의 사로잡혀 주님이 주신 승리 가운데 주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만 바라보는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다윗과 요나단의 유명한 만남이 소개되는 말씀입니다. 다윗과 요나단 하면 성경에서 가장 친한 사나이…우정의 사람들로 대표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은 그냥 친구로서 좋은 관계, 서로 그냥 사랑하고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그런 친한 친구의 관계를 넘어서는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기 원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만나는 배경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겨 블레셋에게 큰 승리를 이룬 직후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였고 다윗은 요나단을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고 증언합니다. 사실 요나단은 다윗을 생명과 같이 사랑할 수 없는 위치해 있는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소위 말하는 말하는 세자 저하입니다. 사울 다음에 왕위를 잇게 될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다윗이 급부상 한다는 것은, 다윗이 인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마음이 불편한 일이자 시기하고 질투할 일이고 다윗을 싹부터 잘라 내야 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며 그렇게 승승장구할 때 가장 마음이 불편 해야 할 사람이 바로 세자저하 요나단 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요나단은 다윗에 대해서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흔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다윗을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요나단도 다윗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 이끄시는 영적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장본인들 이기 때문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과 조건이 그들을 이끈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이 그들을 이끄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자 저하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은 사울과 같이 경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놀라게 쓰임 받는 다윗을 마음을 다해 서포트 하고 생명 다해 사랑하는 겁니다. 요나단도 블레셋과 전쟁할 때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을 맛본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단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신 그 은혜를 경험했던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인생을 던지고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사용 받아 놀라운 승리를 목도하는 그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목도한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사로잡혀 보니까 눈에 보이는 자리나 이익에 대해 목숨 걸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고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는 다윗을 바라보며 시기나 질투 대신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본 것입니다. 지금 놀라게 쓰임 받는 저 다윗이 하나님께서 일 하시며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역사의 축 이라는 것을 요나단은 감을 잡은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그렇게 용 감히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목을 베는 이 모든 과정을 보면서 요나단 자신을 통해 일하셨던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을 다윗을 통해 본 것입니다. 나보다 훨씬 크고 강력하게 일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다윗을 통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이라면 내가 아버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사람이 아니라 다윗이 그 자리에 가더라고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면 포기하고 내려 올 수 있다는 영적 겸손함과 결단을 부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오늘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행동을 하는데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고, 요나단이 자기 입었던 군복과 칼과 활을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울왕을 이어 왕이 될 세자저하인 요나단이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주고, 갑옷과 칼과 활을 주었다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이미 요나단의 마음에는 무엇을 결단한 겁니까? 아 하나님께서 이 시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 다음 사람으로 준비된 자가 내가 아니라 바로 다윗이 구나…라는 것을 감을 잡고 고백하며 주는 겁니다. 이런 요나단의 행동과 결단은 인간적인 눈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생각해보시면, 가만히 있으면 내가 왕이 될 사람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왕권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차기 왕 세자저하 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모든 특권을 스스로 내어놓고 다윗에게 이것을 다 주는 이 요나단, 인간적인 생각과 계산과 눈으로는 도저히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죠. 오직 하나님의 영이 요나단에게 일하시며 그 놀라운 은혜와 순종의 힘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영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놀랍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일하시는 사람들의 특징 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지 않는 그 왕의 자리, 가만히 있으면 앉게 될 그 왕의 자리에 자신이 가지 않고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으며 그 자리에 다윗이 가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는 자가 바로 믿음의 사람 요나단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의 아버지 사울은 어떻습니까? 겉으로 왕권을 유지하고 왕의 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이미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고 악신이 그를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아버지 사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왕이라는 것을 요나단은 알고 있는 것이죠. 그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하나님의 영적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영적 큰 그림을 가지고 사람과 환경과 시대를 볼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입니다. 요나단이 가진 영적 시각을 저와 여려분들도 가지고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요나단이 다윗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바라보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다윗을 바라보는 그 영적인 눈을 갖도록 기도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껍데기와 지위와 환경, 내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은혜안에 없으면 소용 없는 것들이며 다 안개 같이 덧없는 것임을 깨달으십시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선명하게 쓰임 받고, 하나님의 때와 경륜의 흐름에 맞춰 나아가고 있는가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영적 결단과 순종이 요나단에게 있었기 때문에 결국 다윗이 그렇게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상황과 사람과 어떤 조건이 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이끄는 자 하나님의 때와 일하심이 이끄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고 그 영적 시각을 갖고 살아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인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놀라운 역사적 승리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이길 수 없는 블레셋과의 전쟁, 거인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적을 이끈 자는 왕인 사울이 아니라 어린 소년인 다윗이었습니다. 사실 골리앗과의 전쟁은 다윗이 가진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 자기 힘으로는 100%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장면은 다윗이 훈련을 잘하고 준비를 잘 해서 전략적으로 그 골리앗을 잘 쓰러뜨렸다는 데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다윗과 함께한 하나님에게 방점이 있는 겁니다. 그 가능성 없고 희망이 없는 전쟁을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 이름 붙들고 나가 싸워 이긴 기적에 방점이 있는 겁니다. 골리앗과 싸워 이긴 기적의 승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간 다윗을 놀랍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눈에 보이는 상황만 바라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간 다윗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이 싸워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승리를 볼 수 있는 큰 영적인 시야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이 놀라운 결단과 믿음, 다윗이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자체가 이미 기적이 시작된 것입니다. 위기와 전쟁 앞에서 그 분명하고 선명한 믿음을 주님께서는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 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떼는 순간, 하나님이 뒷감당은 해 주신다는 것이 영적 전쟁이 승리 공식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만을 바라보고 풍랑 가운데 배 밖으로 자신의 인생을 던지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떼는 순간 그는 물 위를 걷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블레셋과의 영적 전쟁의 승리 공식은 요나단이 블레셋을 싸워 이길 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적을 이길 수 없는 절체 절명의 위기 가운데 요나단이 그 부하 한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 만을 붙들고 적진으로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겁니다. 그 믿음의 결단과 순종의 걸음을 떼는 순간, 그 블레셋 사람들이 서로 싸워 스스로 죽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블레셋을 싸워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하게 박혔습니다. 골리앗의 이마에 그 돌이 박히게 하신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수 년간 선한목자로서 맹수들을 쫓기 위해 수 많은 훈련을 거듭했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런 하나님의 건져 주심을 경험한 분명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이 앞서 싸워 주신 영적 전쟁의 승리임을,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돌을 통해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는 다윗의 힘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게 하심으로 다윗의 승리가 아니라 그 다윗을 들어 쓰신 하나님의 승리였음을, 하나님이 싸워 이기게 하신 전쟁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다윗이 이길 것을 예상하지 못한 그 전쟁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간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립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데 다윗은 칼도 들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마에 돌이 박혀 쓰러진 골리앗을 골리앗이 가지고 있는 칼을 빼서 골리앗의 목을 베는 놀라운 역사적 승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렇게 비겁하게 벌벌 떨고 있었던 이스라엘 군대가 갑자기 용감해 졌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들은 그제서야 함성 소리를 내며 블레셋 사람들을 향하여 돌진하게 되고, 도망가는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블레셋을 모두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사울왕이 이렇게 영적 전쟁에 앞서 나가 싸워 승리를 경험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사울왕, 전장에 앞서 나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골리앗의 압도 당한 사울왕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소년인 다윗이 역사의 현장에서 선명하게 대비되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다윗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고 버림받은 사울왕이 나란히 서 있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놀랍게 쓰고 계심을 바라보며 그냥 그것을 구경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린 다윗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사울은 구경하며, 자신은 더 이상 쓰임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그 빈자리를 그대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하나님만을 붙드는 믿음을 가진 자가 진정한 왕이고, 결국 하나님의 추는 그렇게 옮겨졌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렇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선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바라보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기 원합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들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그 담대함을 달라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다면, 그건 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싸워 이긴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 나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승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를 사모하며 나의 인생을 들어 쓰시며 주시는 하나님의 승리들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승리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아주 극적인 장면, 특별히 다윗의 골리앗을 향한 영적 전쟁 선포이기도 하고, 인생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을 담은 고백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골리앗을 향한 선포를 통해 우리가 영적 전쟁을 임하는 자세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하여 깨닫기 원합니다. 첫째로, 영적 전쟁은 내가 싸우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싸우심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소년이고 골리앗은 거인 장수, 골리앗은 최신 무기를 무장하여 나오고 있으며 다윗은 막대기와 돌 몇 개 가지고 나오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는 상황과 조건을 봤을 때는 백전 백패로 다윗이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붙들고 나아가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조건과 상황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골리앗은 최신 무기인 칼과 단창으로 무장하고 전쟁에 나오고 있는데,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는 전쟁을 자신이 싸우는 전쟁이 아닌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으로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나 무기나 조건들을 들고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가는 싸움입니다. 내가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앞서 싸우시는 전쟁이 되기에, 그 하나님의 이름이 권세가 있음을 철저히 믿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봐야만 승리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이 있어야만 영적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여러 가지 영적 전쟁이 등장하는데 시대에 따라 사람들과 적들이 달라지기는 그 패턴과 원리가 늘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아말렉과의 영적 전투를 벌일 때 눈에 보이는 전쟁터에 여호수아가 나가 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전쟁의 승패는 전쟁터가 아닌 모세가 손들고 기도하는 기도터에서 갈렸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기도의 현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손으로 올리면 전쟁에서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지는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죠. 다시 말하면 여호와 이름을 붙들면 승리하고 여호와 이름을 붙들지 않으면 패배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원리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직면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그 영적 전쟁의 현장에 우리는 늘 도전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과 같이 영적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늘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내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면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승리의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 영적 전쟁에서는 거인 골리앗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가지고 있는 칼과 단창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붙드는 것만이 승리의 비결임을 믿는 것입니다. 즉 위기 상황과 어려움 속에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영적 전쟁 승리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왕을 위시한 이스라엘 군대는 대부분은 골리앗에게 압도당해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전쟁에 나가 싸울 전의를 다 상실했습니다.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비교 불가한 거인 골리앗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그렇게 용감하게 골리앗과 나가 싸울 담력을 얻으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었는가? 그는 거인 골리앗을 집중하지 않았고, 골리앗이 가진 무기나 협박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집중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무섭고 두려운 거인 골리앗에게 집중하는 대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에게 집중할 때 다윗은 골리앗과 맞장 뜰 수 있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눈에 보이는 골리앗에게 눈이 가고 마음을 빼앗기며 두려움에 압도당해 좌지우지 되는 연약한 죄성을 넘어 믿음을 붙들고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며 환경과 거인 골리앗에 휘둘리지 않으며 믿음을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을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세번째 영적 전쟁은 칼과 창의 힘에 있지 않음을 철저히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군사력의 힘, 돈의 힘에 승패가 좌지우지 되지 않음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힘에 있음을 철저히 믿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여호와의 손 안에 있는 전쟁임을 믿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으로 싸워 이기는 칼과 창으로 승패가 나는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는 전쟁 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전쟁에서 칼과 창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 눈에 보이는 껍데기를 의지하는 자들은 다 무너지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승리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가는 자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 안에 있는 영적 전쟁은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전쟁이기에 하나님 이름만을 붙들고 그분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승리한다는 것을 철저히 믿고 믿음으로 골리앗 앞에 나아간 자가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영적 전쟁 뿐 아니라 내 인생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철저히 믿어야 눈에 보이는 칼과 창의 힘, 돈과 사람들의 힘을 붙들고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의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열매도, 영적 전쟁의 승리도 다 눈에 보이는 칼과 창과 돈과 사람들의 힘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힘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고 붙들어야 다윗과 같이 믿음으로 골리앗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두렵고 불안하고 벌벌 떨게 만드는 골리앗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를 압도하는 수많은 골리앗들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세상에 함께 계심을 믿고 고백하며 이 세상을 알게 하기 성도로서 존재하며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체로 믿으며 붙들고 여호와의 이름만을 붙들고 나가 싸우는 비결을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영적 전쟁과 내 앞에 딱 서게 되는 이 거인 골리앗을 바라보며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이 전쟁 가운데 다윗과 같이 믿음을 붙들고 믿음의 영적 전쟁을 선포하며 창과 단 창으로 나오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 여호와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가는 담력을 얻게 되는 것, 그것이 성도가 경험하는 영적 승리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그때마다 그 전쟁은 칼과 창의 힘에 있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 이름을 붙들고 나아가야 승리한다는 믿음의 고백이 입술에서 터져 나와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선포하며 온 땅에 그것을 알게 하는 귀한 용사로 선명하게 쓰임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 왕의 비참한 모습과 다윗의 쓰임 받는 모습이 선명히 대비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현상금도 걸고, 자기 딸과 결혼할 수 있는 특권도 걸었지만 그 어떤 사람도 거인 골리앗 앞에 나가 싸우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진 카드는 미덥지 못하고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소년 다윗 밖에 없었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다른 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에게 골리앗과 나가 싸우는 것을 허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힙니다.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 골리앗과의 전쟁을 내보내는 사울왕의 모습, 이게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에서 가장 앞서 싸워야 할 사람은 누구냐 하면 사울왕 자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블레셋과의 영적 전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라…명령하며 앞서 나가서 싸워야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은 골리앗에게 압도 당하여 두려워하고 벌벌 떨며 이 전쟁에서 내가 앞서 싸워야 된다는 것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사울왕이 나가 싸워야 되는 자리에 다윗이 나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갑옷을 입고 싸워야 되는 전쟁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문제의 본질이 뭔지 모르는 사울왕은 이 어린 다윗에게 왕의 갑옷을 입히고 대신 나가 싸워 달라고 부탁하는 비참한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왕과 대비되는 한 사람이 떠오르는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전쟁이 시작됬을 때 많은 뉴스들은 수도 키이우가 3일 만에 함락 될거라고 대부분 예상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가족에게 피신을 권하고 망명의 길로 마련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망명을 거절하고 3일만에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쟁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대통령 하나가 바로 서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승패가 결정 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무너지지 않고 계속 전쟁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겉으로 봐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고 3일만에 무너지는 100% 승산이 없는 전쟁이라 그랬는데 대통령 한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앞서 싸우기로 작정하고 나아가니까 그 백성들이 함께 지금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보게 됩니다. 왕으로서 자리는 유지하고 있고 아무런 영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비참하고 불쌍한 사울왕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히고 대신 나가 싸우라고 하는 사울왕의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더 나아가 앞으로 다윗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복선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키가 월등히 컸기 때문에 당연히 사울의 갑옷이 다윗에게 맞을 리가 없습니다. 다윗은 맞지 않는 사울왕의 갑옷을 입고는 나가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맞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사울왕의 갑옷과 무기를 벗어 버립니다. 대신 자신에게 익숙한 옷을 입고 익숙한 무기를 가지고 나아가는데 그게 돌 다섯 개와 막대기입니다. 다윗 자신이 사자와 곰과 싸워 이길 때 썼던 익숙한 것들이지요. 영적 전쟁을 싸우러 나갈 때 세상 것 들고 나가지 말고 다른 사람 갑옷 입고 나가지 말고 나에게 익숙한 도구와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영적 전쟁의 도구, 세상에서 위기와 어려움을 당할 때 여러분들이 들고 나가 싸워 이겨본 익숙한 도구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과 기도에 익숙해서 기도로 싸워 이겨본 경험과 말씀으로 싸워 이겨본 경험이 있기 원하십니다. 말씀과 기도가 익숙한 도구가 되어야 문제가 탁 터졌을 때, 일이 딱 생겼을 때 제일 먼저 붙들 수 있는 것이 말씀과 기도가 되며, 이 세상에 전쟁에서 나가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골리앗에게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 나에게 익숙한 도구 되기 원하십니다. 다윗이 그렇게 돌 다섯 개와 막대기를 들고 나오니까 골리앗이 보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어의 없어 하고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나에게 익숙한 영적 도구를 가지고 나가 싸우는 것을 보고 것을 보고 업신여기고 비웃고 저주합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 가 영적 전쟁을 벌였던 방법은 칼과 활이 아니라 항아리와 불이었습니다. 전쟁의 도구로는 어떻게 보면 말도 안되는 것이지요. 말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나와 싸운다고 멸시합니다. 영적 전쟁은 말도 안되는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나의 힘과 눈에 보이는 무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나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무런 전쟁 도구도 없이 목숨 걸고 나아가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나아가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씀을 붙들고 기도를 붙들고 나아가는 다윗을 멸시하고 비웃고, 저와 여러분들을 멸시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영적 전쟁임을 믿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드는 다윗과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 시간 사울과 같이 내가 나가 싸워야 되는 전쟁인 것을 모른 채 벌벌 떠는 비참한 인생 되기 않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적 전쟁을 나가 싸우지 못하며 싸우기를 포기하고 벌벌 떨고 있는 이 세상에 다윗과 같이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 하나님만을 철저히 신뢰하고 그 이름을 붙들며 이 세상을 향하여 다윗과 같이 기도와 말씀의 돌을 골라 나갈 수 있는 영적 담대함이 있기 원합니다. 영적 군사로 부름받았음을 잊지 않고 그러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말씀과 기도로 공급받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익숙한 일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인생을 풀고 기도로 인생을 푸는 것이 익숙한 도구가 되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군대와 골리앗이 이끄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말씀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사실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군대가 압도당하며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심지어 도망가는 비참한 현장입니다. 다급한 사울왕은 골리앗에 나가 싸우는 사람은 큰 현상금과 자기 딸을 아내로 주어 왕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도 걸었지만 아무도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영적 전쟁에서 나가서 싸우려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현실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울왕 자신이 앞서 이 영적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하는데 나가 싸울 마음도 의지도 없는 사울왕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골리앗 앞에 싸우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죠. 그 사람을 당장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아마 사울왕은 굉장히 실망했을 겁니다.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이 누구냐면 소년 같이 보이는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이 수금을 잘 연주해 악령에 시달리는 사울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 장본이기에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눈에 다윗은 그냥 양치는 목동이자 소년이었을 뿐이지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장수는 아니었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가서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한 칼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소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은 겁니다.
중요한 것은 사울이 영적 전쟁의 원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성경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영적 전쟁이라 말씀하셨고 요나단을 통하여 그 영적 전쟁의 원리를 통해 큰 승리로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울왕이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조건과 환경들입니다. 다윗이 나가 싸우겠다는 것을 말리며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는 능치 못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울이 생각하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기준은 뭡니까? 눈에 보이는 외적 환경과 조건입니다. 다윗은 너무 작고 골리앗을 너무 큰 용사니 절대 나가서 싸울 수 없다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과 나가 싸우기를 주저하며 아무도 인생을 걸고 싸우려 하지 않는가? 그들 모두공동체적으로 열등감에 빠져 골리앗은 용사라고 생각하기 있기 때문에 백전 백패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겁니다. 영적전쟁의 원리가 뭡니까? 눈에 보이는 힘이나 군사력으로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신뢰 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린 다는 것은 그렇게 반복적으로 알려 주셨는데 사울왕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니까 그런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외적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싸우려고 하면 이 세상에 나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늘이 나가서 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백전백패 이지요.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근거는 나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양을 칠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어 갈 때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건지셨었는지를 간증하며 고백하는 겁니다.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물어가려 하면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냈다는 겁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요한복음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정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는데,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양들을 지켜 주신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죠. 그 모습을 지금 다윗을 통해 보는 겁니다. 다윗의 고백은 그렇게 사자나 곰으로부터 어려움과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 내어 주셨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선한 목자로 내 양을 위해서 목숨을 걸며 지키겠다고 직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 에서 건져내 주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렇게 담대하게 나와 골리앗과 같은 큰 거인과 싸우려는 담력을 얻은 이유가 뭐냐면 자기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건져 주신 간증이 있는 겁니다. 그게 아주 거대할 필요는 없지만 구체적으로 일상에서 경험된 것입니다. 우리가 큰 영적전쟁을 싸워 이기기 위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신 구체적 고백과 체험이 있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풍랑을 바라보고 물에 빠져 헤멜 때 주님이 즉시 그를 번져 주신 경험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어떤 확신이 있겠습니까? 나는 분명히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돼. 예수님만 붙들어야 돼. 설령 내가 흔들리고 넘어질 때 주님이 나를 건져주심을 믿는 고백이 분명한 겁니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거기서 건져 주실 거 아닙니까? 작은 어려움과 작은 시험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고 건져 주시는 경험이 있을 때 다윗과 같이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체험한 그 구체적인 고백에 있을 때 골리앗이라는 큰 적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골리앗에게 압도 당하지 않고, 벌벌 떨고 두려워 하지 않으며,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가 싸우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마음에 담기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 영적 전쟁에 눈에 보이는 것에 압도 당하지 마십시오. 가진 게 없지만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가 싸우는 것이 영적 전쟁의 원리라는 것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나에게 선한 목자이시기에 이렇게 목숨을 걸며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건지시는 분임을 믿으십시오. 나의 일상의 삶에서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시는 그 작은 경험들과 고백들을 늘 마음에 담으십시오. 그래야 내 인생에 큰 골리앗이 찾아왔을 때 내가 압도 당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벌벌 떨지 않으며 주님이 건져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골리앗과 능히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건져 주심의 은혜를 붙들고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우는 게 아니라 거의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과 군대들은 골리앗을 보고 벌벌 떨었으며 그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것을 듣고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싸우러 나왔는데 골리앗을 보고 골리앗이 말하는 협박을 듣고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골리앗에게 완전히 압도 당해 버렸습니다. 어느 정도로 이스라엘 군대가 전의를 상실 했는가 하면 사울왕이 큰 현상금을 걸고, 자기 딸을 아내로 주어 왕족이 된다고 해도 나가서 골리앗과 대항할 자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반면 싸우러 온 자가 아니라 아버지 심부름으로 도시락 배달 온 다윗이 똑같이 골리앗을 보았고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윗의 반응은 이스라엘의 군대와는 정반대 반응입니다. 할례받지 아니한 언약 밖의 골리앗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바라보며 거룩한 분노 (holy discontent)가 올라오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다윗이 용감하고 베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 다윗은 블레셋 사람과 골리앗을 하나님의 눈으로 하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믿음의 눈이 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대단해 보이는 골리앗이라도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엔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으며 하늘의 시각으로 골리앗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분명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왜 사울과 그 이스라엘 군대는 다윗과 같이 위에서 아래를 보는 하늘의 시각이 없었는가? 왜냐하면 골리앗과 상황에 압도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땅의 시각 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비슷한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들어가는 입구에서 정탐을 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10명의 정탐꾼의 보고와 2명의 보고가 천지 차이였습니다. 상황과 환경에 압도당한 보고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들어가면 메뚜기와 같이 다 죽는다….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군대가 골리앗을 바라 봤던 모습이었죠.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치러 올라가자고 독려한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들었는데 왜 그들은 전혀 다른 고백을 하는가 하면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그들이 보았느냐? 아니면 땅에 시각을 가지고 그들이 보았는가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다윗은 그 똑같은 골리앗을 보고 그의 모욕하는 것을 들으며 하나님의 시각과 하늘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듣는데 우리는 압도당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거기서 도망가지 않는 비결을 갖게 되는 것은 내가 용감하고 내가 능력이 있고 베짱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의 시각으로 상황에 압도 당하지 않고, 상황에 매몰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 가지 않는 영적인 감격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놀랍게 하늘의 시각으로 골리앗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거룩한 분노를 내고 있는 시점에 찬물을 끼얹고 발을 거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다윗의 친형 엘리압 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큰 형 엘리압이 하는 모든 말들은 정말 말도 안되는 오해입니다. 막 화를 내며 니가 여기 전쟁터에 왜 내려왔냐며 몰아 세웁니다. 아버지가 형들에게 도시락 배달 시켜서 심부름 시켜서 온 거 아닙니까? 그리고는 마음에 교만과 완악함을 안다며 네가 전쟁 구경 왔다고 막 몰아세우고 있는 겁니다. 형 엘리압의 열등감 폭발에서 나온 말들은 하나같이 다 말도 안되는 오해들입니다. 내가 하늘의 시각을 붙들고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압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박수치고 야 저 사람 되게 영적이다…이럴 것 같은데 그게 착각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딴지를 걸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발을 걸고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뭐냐면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할 수록, 앞에 선두로 나가면 나갈수록 정말 말도 안되는 오해를 우리는 당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오해를 당할 때 일반적으로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에게 와서 오해 하느냐며 형 혹은 가까운 사람과 맞받아 치고 싸우는 겁니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하면서 싸움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한 점은 그렇게 오해하고 열등감 폭발한 큰 형 엘리압을 향해 상대하지 않는 겁니다. 형의 말이 옳아서가 아니라, 형이 한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오해였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형을 상대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지금 싸워야 할 주적은 형이 아니라, 골리앗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워야 할 주적 골리앗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나와 한 팀이 된 형과는 오해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는 겁니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안에 오해가 있고 불편함이 있고 섭섭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상대하여 내 옳음을 증명하고 싸우다가 내가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인 사단 마귀, 골리앗을 놓치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싸워야 될 주적을 놓치지 않고 잊지 않고 나에게 딴지 걸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그냥 흘려 보내고 무시하는 그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공급 받기 원합니다. 내가 감정이 상해서 형들과 가족들과 성도들과 대판 싸우게 되면 진짜 싸워야 되는 주적인 골리앗과는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세상의 수많은 사건들과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보고 듣는 것은 무엇이며 여러분들은 어떤 시각으로 그 사건을 해석하는가가 인생을 바꿉니다. 주님이 부어 주시는 능력이라는 것은 바로 하늘의 시각으로 나의 상황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입니다.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나의 주변에 사람들과 상황을 판단하고 압도 당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영적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적과 싸우기 위해 주적을 향하여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주변에 발 거는 사람들은 무시하는 영적 담대함이 하늘로부터 부어지기 원합니다. 진짜 싸워야 되는 나의 주적인 골리앗을 향하여 나의 싸움의 모든 것을 거는 거룩한 백성 되게 도와 주옵소서. 이 거룩한 영적 진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선명히 부어 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버지 이새가 바라보는 다윗과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다윗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현실과 보이지 않는 하늘의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지금 막내아들인 다윗에게 한 명령은 집안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큰 형 세 사람의 전쟁터에서 안부를 묻고 오고 형들에게 도시락 배달하라는 것입니다. 이새는 사무엘이 모든 아들을 데려 와서 다음 왕이 될 사람을 선보일 때 다윗을 초대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눈에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는 확률은 0%라고 생각했기에, 올 필요가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한 자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초대 받지 않았던 아들인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이 자가 바로 이 나라를 구할 자라는 것을 집안 모든 사람들이 목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새는 여전히 다윗을 중한 일을 맡길 수는 없는 집안 막둥이 정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이 집안에서 목숨 걸고 중요한 일을 하는 자들은 큰형 세명이 목숨 걸고 나라를 위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러 가지 다윗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에게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나라를 구하는 현장에 갈 수도 없는 아들로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런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 명령을 순종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는 말은 마음을 결단하여 신중하며 나아갈 때 잘 쓰는 관용어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바치려 모리아 산에 갈때도 성경은 아침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말은 단순히 그냥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이해되고 용납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님의 말씀이니까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다윗은 그 아버지 이새의 명령을 순종과 결단으로 형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러 아침 일찍 가는 것이죠. 지금 아버지 이새의 눈에도, 다윗의 눈에도 전쟁에 싸우러 갈 계획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윗이 가는 길은 뭐냐면 아버지 명령을 받아 형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고 형들이 안부를 묻고 돌아오려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면, 지금 이끄시는가 하면 도시락 배달 가는 다윗의 길이 아니라 집안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는 다윗의 길이 아니라 그 싸움터에서 민족을 구원할 자리로 이끌러 가시는 겁니다. 이 때는 사람이 준비한 때가 아닙니다 이 때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 라는 거예요. 사람들 중에는 이 것을 준비한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다윗이 도시락 배달하러 전쟁터의 자리에 가는게 아닌 겁니다. 다윗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도시락을 가지고 전쟁터에 가지만 하나님의 때는 다윗이 민족을 구하러 가는 때라는 것을 다 준비하신,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 사명을 받아 전쟁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야 사람은 형들이 아니라, 사울왕이 아니라 바로 다윗이었다는 겁니다. 다윗은 이 하늘의 현실은 전혀 모른 채 그냥 형들에게 안부 전하고 도시락 전하려고 그 길을 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로 전혀 다르게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 곳에 도착해 마침 다윗은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중인 이스라엘 군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 이새와 전쟁터에 없었던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터에서 수많은 군인들과 우리 왕 사울이 블레셋과 목숨 걸고 치열하게 잘 싸우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체는 어떠했습니까? 양군이 서로 대항해서 잘 싸우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모습이죠. 사실 다윗이 본 현실은 치열하게 적인 블레셋과 싸우는 모습이 아닌 블레셋 앞에 철저하게 압도 당하고, 일방적으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전의를 상실한 모습이었습니다.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며 싸우는 중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밀려 전의를 상실하고 벌벌 떨고 죽기 일보 직전인 게 이스라엘 군대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마침 도시락 전달 간 다윗이 보게 된 것입니다. 사울 왕을 포함해 어떤 군사도 지금 골리앗에게 나아가 싸우지 못하는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사울이 마침 보는 것이죠. 또한 다윗은 마침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소리도 듣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그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뭐냐면 겉으로 봐서는 우연히 마침…보고 듣게 되는 것이지만 사실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룻기에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되는 모든 과정이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었던 것처럼…. 혹시 나의 눈이 이새와 같이 눈이 닫혀 하늘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땅의 현실만 바라보지 않습니까? 이 땅의 현실로만 바라보면 다윗이 전쟁터에 가는 것도, 전쟁터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다 어쩌다 일어난 우연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현실로 바라보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계획이었고, 놀라운 역사를 준비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연히 어쩌다 새벽기도에 나왔을 수 있지만, 오늘 그 일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인생에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와 계획은 훨씬 더 깊고 중요한 일을 우리들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맡기도 계신지도 모릅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어쩌다가 마주친 일이 아니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현실과 하나님의 때에는 미리 준비된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현실로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녀들을 바라보고 우리 교회를 바라보는 이 놀라운 영적 시각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되기 원합니다. 하늘의 현실과 하나님의 때를 붙들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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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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