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장부터 8장까지 말씀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온 이스라엘 백성들 지파들의 족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족보들을 증언한 후에 오늘 9장부터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족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긴 이스라엘 백성의 족보 뒤에,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명단을 증언하는 것을 통해, 나라를 잃고 아무런 정체성이 없이 소망을 잃어버린 채 헤매고 있는 백성들의 역사의 뿌리, 신앙의 뿌리가 그 이스라엘의 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연결되어 있음을 역대기는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이름을 증언하기 전,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이유를 선명하게 한 문장으로 쓰고 있습니다. 유다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남유다가 버티다 버티다 바벨론에게 망하지 않습니까? 그 망한 비극은 단순히 힘이 없고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약해서 망한 사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망한 것이고,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영적 사건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순종하고 범죄한 남유다를 심판하시는 사건이 예루살렘 함락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쫓아가며 하나님을 불순종하며 영적인 간음을 밥먹듯이 하는 이 모든 결과물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결과였다고 회개하며 영적인 사건으로 재해석하게 되는 것이죠.
문제의 시작을 영적으로 봐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큰 일이 벌어졌을 때 특별히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린 항상 왜 하나님이 그런 어려움을 주셨을까? 왜 나는 그렇게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돈이 없었을까? 이렇게 간단히 우리는 눈에 문제만을 바라보고 원망하고 그냥 포기하기 쉬운데 문제의 현상과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이 문제가 영적인 일로 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공동체적으로 민족적으로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어그러진 관계에서 나의 불순종과 범죄로 말미암아 이런 결과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자세가 모든 문제를 푸는 지혜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잠시 살다 가는데 이 땅에서 잘살고 못살고 이 땅에서 높아지고 낮아지고 이 땅에서 뭐 그런거에 생각보다 큰 관심이 없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을 정말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법의 적용을 받고 살아가는가?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중요한 관심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 포로에서 돌아와서 이제 이스라엘의 성전을 재건하려고 모였는데, 포로에서 돌아온 명단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레위 사람들입니다. 누가 제일 먼저 와서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게 되었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이었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있다가 그들이 성전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직장도 없었고 집도 없었고 기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먼저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위해 치안도 부재하고 황무지와 잿더미 같았던 예루살렘에 제일 먼저 레위 사람들이 정착했다는 말씀을 통해 앞서 나가며 솔선수범하는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오늘 말씀 전반은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정착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대한 구체적인 명단들과 직무들입니다. 성전에서 중요한 직무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의 모든 방과 곳간을 지키는 것까지 아주 시시콜콜 한 것까지 다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깨어져 있고 모든 것이 무너져 있고 세워야 될 것이 너무 많은 그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들의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성전을 제일 먼저 세웠다는 것이죠. 예루살렘 함락과 바벨론 포로라는 이 아프고 힘든 그들의 역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는 이 지혜를 배우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시 회복되기 위해 영적인 문제가 풀리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임을 믿었기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최우선에 두었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긴 코로나 광야 가운데 끝이 저 멀리서 보이는 듯 합니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가 회복이 된 이후에 before와 after는 너무나 다른 새로운 시대가 전개 될 겁니다. 모든 것이 재편되는 그런 삶을 분명히 살게 될 겁니다. 그 새로운 재편의 시대에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하는가 하면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예배가 먼저 재건되며 내 삶의 성전이 재건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재건 되는 것을 통해 나머지 인생의 모든 것들이 재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하고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예배가 회복되며 나의 무너진 성전이 회복되는 거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관계 회복되는 것이 경제 재건과 내 인생 재건보다 더 우선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부르셨다 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나의 예배와 나의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며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모든 것을 풀었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를 삼아 우리가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모든 것을 푸는 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고백되며 실천해 나아가는 한해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역대상을 통하여 이어지는 긴 족보를 배우고 있습니다. 역대상하는 포로기 이후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폐허와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해 온 사람들이 고백하는 역사입니다. 다시 하나님 중심의 역사로 세워져야 한다는 분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다윗 언약의 시대를 황금기로 생각하며, 그 시절 놀랍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며 소망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복기하고 있는 게 바로 역대기의 관점입니다. 그래서 여러 왕들 중에 다윗 왕에 대한 내용이 중심되고, 다윗왕에 좋은 면이 부각되고 대한 부정적인 얘기는 많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또한 역대기는 이 족보들을 통해 분명한 영적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맨 처음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해 이스라엘 12지파들에게 땅을 배분 했을 때는 굉장히 공평하게 주는 듯 비슷하게 나눠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백년의 역사가 지나고 나니까 그 열두 지파에 운명에 중간과 끝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파들은 처음에 굉장히 강성해지고 뻗어 나가는 것 같았지만 그냥 사라진 지파들도 있었고 어떤 지파는 정말 명맥만 유지할 것 같이 약했지만 끝까지 살아 남으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나중에 강해지는 지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베냐민 지파에 족보는 굉장히 자세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증언하고 있는데 이 베냐민 지파야말로 정말 없어질 뻔한 지파, 꺼져가는 촛불과 같이 그 존재도 위태위태 했던 지파였는데 끝까지 살아남으며, 나중에는 오히려 중요한 지파가 되는 반전이 있는 지파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막내아들이었고, 12지파 중에 어떻게 보면 굉장히 별 볼 일 없는 항상 미약한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영적 암흑기를 지나면서 베냐민 지파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거의 사라질 뻔 한, 멸절의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지파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질 뻔 한 위기를 겪은 지파로, 나중에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인들을 보쌈해 가지고 찾아줘야 될 정도로 꺼져가는 촛불과도 같았던 지파가 바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앞가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파, 그냥 명맥만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던 지파가 베냐민 지파였는데 그 지파가 나중에는 강성해져서 역대기에서는 중요한 지파로 긴 족보로 증언하는 것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베냐민 지파 족보의 맨 마지막에 사울왕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베냐민 지파는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을 배출한 지파가 된 것입니다. 명맥을 유지하지 못할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꺼져가는 촛불 같았던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왕인 사울왕이 태어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많은 지파들이 처음에는 강해 보였고 부유하게 경제가 성장하는 것 같지만 역사가 지나면서 다 없어지고 약해지며 다 사라지는 지파 들이 되었지만, 베냐민 지파는 그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금이 약함을 끝까지 붙들고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오히려 강성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약하고 존재 자체도 어려웠던 베냐민 지파가 왕을 배출하고 나중에는 강하게 그 존재감을 가지며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바로 유다지파와 함께 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역대기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베냐민 지파가 예루살렘의 거주하였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가 대단했다기 보다 유다 지파와 함께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잘 쓰임 받는 지파가 되었다는 관점으로 역대기는 족보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는 베냐민 지파의 촛불이 꺼져 가는 그 희미하고 명맥만 유지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나라는 잃어버렸고 땅은 없고 예루살렘은 다 황폐해졌고 이곳에서 성전을 지으려 하는데 주변의 방해는 너무나 심하고, 어디 하나 가능성이 있는 데가 없어 보이는 앞뒤 좌우가 꽉 막힌 절망의 상황, 그냥 촛불을 끄면 딱 좋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긴 족보를 묵상하며 그들은 베냐민 지파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촛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끝까지 사용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폐허와 황무지에 성전을 세워 하나님 영광을 다시 보기 원한다는 그 꿈과 소망을 붙들고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도 베냐민 지파와 같이 촛불과 같이 꺼지기 일보 직전인 어려움을 겪으며 내 인생 하나도 건사 하기 힘든 미약함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꺼져가는 촛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일하신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믿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은 촛불을 그냥 꺼지게 놔두는 게 당연한 그 절망과 어려움과 메마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꼭 붙어있어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소망을 붙들고 꺼져 가는 촛불이 다시 타며 그 황무지에서 꽃이 피는 그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기 원합니다. 이 베냐민 지파의 기적,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적의 역사를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맛보아 아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북이스라엘 지파의 족보로 에브라임 지파 자손들의 족보를 증언합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의 족보는 역대기의 기록 목적의 큰 틀에서는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족보들입니다. 왜냐하면 역대기는 남유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재편하는 큰 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도,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도 대부분 남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돌아와 다시 재건하기 원했던 것은 아름다웠던 다윗 왕국의 번성, 다윗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배하고 교제하던 그 성전에 삶과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고 싶었던 겁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이 때에 포로로 돌아온 그들에게 역사를 일으키고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맺고자 하는 열망 가운데 족보를 통해 그 뿌리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 잃어버린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상 7장을 다 할애해서 북 이스라엘 지파들의 족보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분량적으로 많지 않음에도 북이스라엘의 지파들을 족보로 증언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로 어제 말씀을 통해 묵상했지만, 북 이스라엘이 훨씬 힘이 강대 했고 용맹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보다 먼저 망했던 것입니다. 물론 지리적으로 북쪽의 있었기 때문에 먼저 망한 것도 분명히 있지만,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며 그들의 힘이 더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힘을 붙들고 먼저 망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남유다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 반대 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강한 자가 강한 게 아니라 살이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것을 지금 포로기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지혜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강하고 싶어합니다. 높은 자리 올라가고 싶어 하며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약한지 허무한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 계속 배웁니다. 한번 놀랍게 올라갔다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끝까지 그 자리에서 버티고 지키는 자들은 흔치 않습니다. 결국 진짜 강함이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 버티고 인내하며 한결같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자가 강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강함을 붙들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매달릴 때 우리는 그곳에서 충성 되게 끝까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힘을 의지하고 내 나라를 꿈꾸며 하나님에게서 등 돌리는 순간 내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바람과 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일으키고 은혜 가운데 쓰임 받기 위해 내 힘을 키우는 대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매달리며 붙들려만 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며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두번째, 북이스라엘의 먼저 멸망하고 이스라엘 뿌리에서 점점 사라지는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북이스라엘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남유다의 간절한 소망이 북이스라엘의 족보를 통해 묻어나고 있습니다. 나라가 나누어져서 몇 세대가 지나게 되면 거의 남남이 됩니다. 한반도도 남북이 분단된지 100년이 안됬지만 이제는 정말 남의 나라같이 되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 이스라엘에 북쪽과 남쪽은 인종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잃어 버리고 포로로 헤매고 있는 눈앞의 자기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운 시대였죠. 포로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는 데 이미 역사에서는 사라진 나라, 분단되어 오랫동안 남과 같이 지냈던 북이스라엘의 족보를 복기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맨 처음에 계획하셨던 12지파를 통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품고 예루살렘성전을 다시 세우려 한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은 눈앞에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는 것만도 지금 버거운 비전이었지만 하나님이 회복하고자 하는 비전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회복하기 원하신다… 는 큰 뜻을 품고 북이스라엘의 족보를 함께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믿음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 주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다보면 내 가족 챙기기로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 하나 건사 하는 것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을 들어 이웃을 바라보고, 지역사회를 바라보고, 선교지를 바라보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내 인생 하나 건사 하기도 힘들고 내 가족 하나 챙기는 것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데, 나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곳이 내 눈앞의 상황을 넘어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 상황이 나에게 집중하는 순간 시야가 점점 줄어들어 내 가족 외에는, 내 교회 외에는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특별한 어려움이 찾아오면 시야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죠. 내 상황과 내 문제에 내가 압도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눈을 들어 영적인 넓은 시야, 큰 그림을 보기 원하십니다. 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라들까지 내 눈과 마음을 열어 기도로 품고 살아가는 자가 사명자입니다. 거룩함과 구별됨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이 넓은 영적 시야를 가지고 주님의 큰 품 가운데 우리가 인생을 맞춰 가는 영적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눈앞의 문제들, 눈앞의 일들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의 마음과 눈을 들을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그 영적 시야를 품고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7장 말씀을 통하여 족보가 계속 증언되고 있는데 잇사갈 자손, 납달리 자손, 므낫세 자손에 대한 족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지파들은 모두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의 족보입니다. 물론 남유다에 비해서는 분량이 작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족보로 역대상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지파들 족보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들 속에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반복하는 말씀들이 있는데 그들은 다 용사고 용감하고 힘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2절에도, 5절에도, 7절에도, 11절에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들은 굉장히 힘이 강성한 지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힘이 강했고 용사였으며 우두머리였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북이스라엘 지파들이 전쟁에서 지고 망한 원인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과 용기가 없어서 망한게 아니라, 군사력이 약해서 망한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이 영적 진리를 망각하지 아니하려고 과거를 복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큰 용사들이었고 용감한 장사였고 늘 우두머리로 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힘으로는 당할게 없는 그런 지파들이었습니다. 힘이 그렇게 있었어도 그렇게 허망하게 망한 것이 북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것이지요. 그들의 힘이 약해서 망한게 아니라는 겁니다. 힘이 약해서 망한 게 아니라 불순종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인간의 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지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인간의 착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성경은 일관적으로 증언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잿더미와 폐허 위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는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 다시 쓰임 받고 일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힘을 키우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하는 백성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를 복기하며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진리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택지의 정답을, 나의 인생의 중심을 두는 결단을 해야 되는 것이죠.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인생인지 아니면 사람의 얼굴을 구하는 인생 인지, 나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인생 인지 아니면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인생 인지, 나는 하나님의 힘을 구하는 인생 인지 아니면 사람의 힘을 구하는 인생인지,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 인지, 나는 보이는 무기를 의지하는 인생 인지…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언약의 백성으로 다시 이 신앙을 재건할 때 우리는 지금 가진 것이 없고 우리는 아무 힘도 없지만 결국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허무시는 분도 하나님을 믿으며 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무너진 그 과거를 기억하며 성전을 다시 세울 때도, 나의 신앙을 다시 세울 때도 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환경과 상황을 의지 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이 세우실 수 있으심을 마음에 진리로 담기 원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들의 얼굴을 구하며 사람들의 힘과 도움을 구하는 인생은 반드시 나중에 흔들리고 망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나를 낮추고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과 임재만을 바라보는 그 모습, 그것만이 회복과 재건의 힘, 다시 일어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좀 살다 보면 사람의 강함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습니다.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게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사람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안개와 같은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긴 코로나 광야 가운데 여러 삶이 무너지고, 여러 어려움 가운데 메마른 이 시간,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다시 힘을 키우기 전에,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 다니기 전에, 우선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 두손들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태도,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 간절한 태도가 있기 원합니다. . 내가 의지하는 분이 오직 하나님임을 고백하며 온전히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 가운데 나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내가 의지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얼굴이고, 내가 정말 의지하는 분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기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세우시는 역사가 놀랍게 경험되기를 사모합니다. 힘이 없어서 망한게 아니라 불순종으로 망했다는 이 진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서 망했다는 이 진리를 붙들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에서 찬양하는 자들의 명단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 지파는 예배와 제사를 관장하는 지파였습니다. 레위 지파는 땅 분배도 받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예배와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회막 중심,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의 명단, 288 명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예배가 중심이어야 되며 그 예배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찬양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신앙의 최전선에서 거룩하고 다름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그 신앙의 최전선에서의 첫 헌신은 결국 예배 자로서 헌신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를 통하여 내 삶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사명자로 드리겠습니다…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내 중심에 계심을 믿으며 내 삶을 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내 마음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삶으로 교정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찬양하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명단을 적으면서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이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때까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였다 증언합니다. 성전이 생겼을 때는 성전 안에서 찬송을 드렸고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회막 앞에서 찬양한 겁니다. 지금 무너진 폐허와 황무지 위에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 모인 포로된 백성들, 그들은 이 동일한 마음을 붙들고, 황무지이자 폐허인 이 땅에서 먼저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먼저 찬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 황무지와 폐허의 땅 위에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바라보며 찬양하기를 다짐하는 그 비장함이 말씀 속에 녹아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내 인생이 든든히 세워지기 전, 상황과 환경이 펴지기 전, 내 기도 제목이 응답되기 전, 그 있는 현장에서 먼저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 고백하며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믿음 생활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위대한 일을 내 입술로 예배 중에 찬앙하며, 내 삶으로 일상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 입술로 고백하고 찬양으로 드리는 삶을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게 생각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모든 일을 기쁨으로 도맡아 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 그 예배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잘 되는 공동체는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헌신자가 있는 것입니다.하나님께 기쁨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전 중심의 삶,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를 열심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삶의 관심이 늘 하나님의 일에 가 있는 거예요.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일에 가 있는 겁니다. 내 삶이 찬양의 제사를 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내 삶이 하나님께 붙들리면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거죠. 내 삶은 하나님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위해 부름받은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삶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내 삶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드려지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성전 중심의 삶이며 예배 중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살아나기 위해 보이지 않는 헌신자와 기도의 무릎이 되어 주십시오. 모든 일을 감당하며 주님 앞에서는 최전선의 용사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늘 최전선에 서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역사를 움직이는 예배자가 되는 소망을 가지시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기를 사모하며 예배자로 살아가는 그 기쁨, 주님의 모든 일을 맡아 사명자로 살아가시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6장 말씀은 레위 지파 자손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성막, 나중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다스리고 제사와 예배를 주관 하는데 전임하도록 구별된 지파입니다. 또한 레위지파는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 배분 할 때도 땅의 배분에서 제외되었던 지파입니다. 그들에게 땅을 주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모여 사는게 아니라, 한데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있는 곳곳에 흩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흩어져 지역으로 각 지파에게 들어가 승리하도록 그 백성들의 기준을 잡아 주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게 레위 지파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지요. 레위 지파와 같이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들은 모여 있으면 안되고 흩어져 사람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늘 백성들을 조율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로써 우리끼리 모여 지내고 우리끼리 뭉쳐 신앙생활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귀합니다만, 본질은 흩어지기 위해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모여 예배드리고 함께 공급받으며 교제하고 함께 삶을 나누는 분명한 목적은 결국 세상에 나가서는 흩어지는 사명을 위해 모인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모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모임은 흩어짐을 위한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모이는 걸로 끝나면 안되고 주일날 예배를 함께 모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이유는 그 모임이 세상으로 흩어짐을 위한 모임이 될 때 영적인 능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은혜를 공급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조율 되며 이 세상에 흩어지기 위해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겁니다. 주일이 귀한 이유는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로 공급받으며 하나님의 기준으로 다시 한번 조율 받으며 땅만 바라보고 살았던 나의 눈이 하늘을 향하며 우리가 함께 다시 한번 회복되어 세상에 흩어지기 위해 모이는 겁니다. 이 분명한 목적 없이 모이게 되면 우리는 우리끼리 모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주님이 주신 그 사명을 잃어버린 채 나의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교회에서 함께 모임은 세상으로 흩어짐을 위한 모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비참한 결과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레위 지파에게 주신 사명, 즉 백성들에게 흩어져 살며 그 백성들에게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준을 잡아주는 삶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만 치시고 심판하신게 아니라,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도 심판하셨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예루살렘을 망하게 하실 때, 백성들과 함께 제사장인 여호사밧도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유다가 망한 이유도 결국 그 땅 백성들과 차별 없이 하나님이 아닌 그 땅의 우상들을 간음하듯이 섬기며 불순종했기 때문이고, 그 불순종에는 레위지파와 제사장이 흩어져 기준을 가르치고 조율하는 사명을 실패했기 때문임을 엄중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불순종하고 무너질 때 레위 지파 사람들이 경고하고 백성들에게 기준을 잡아 주며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외쳤어야 하는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타락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땅만 보고 살아가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신들과 그들을 섬기며 영적으로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 타락과 영적 간음으로 무너진 책임을 레위지파와 제사장의 직무유기로 인함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죠 결국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이 왜 이렇게 타락하고 문제 많은가를 탄식하며 불평만 하는 백성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이 타락하고 무너진 그 책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음을 회개하고 주님께 두손들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사명은 이 세상에 나아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을 감당하며 흩어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붙드는 영적 전쟁을 벌이는 자들입니다. 그 사명을 잃어버리면 이 세상 사람들과 차별 없이 땅만 보고 살아가다가 결국 언젠가는 함께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만드시는 말씀 대로 이루어지리라 경고의 말씀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하는 것을 가볍게 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임은 흩어짐 을 위한 모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거룩하게 흩어지는 백성으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진리의 기준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교회에서 바른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 발버둥 과 영적 전쟁을 위해 저와 여러분들이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삶과 기준을 붙들고 이 세상에 흩어져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역대상 5장 말씀은 르우벤 지파의 족보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 유다 지파는 사실 이스라엘, 야곱의 네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아들인 유다 지파가 먼저 족보에 등장하고 첫째 아들인 르우벤 지파의 족보를 나중에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유는 1절에서 증언하듯이 장자였던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혀 장자의 명분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이 창세기 35장에 등장하는 어머니 중에 하나인 빌하와 르우벤이 동침하는 끔찍한 사건입니다. 르우벤은 혈통적으로 장자, 야곱의 첫째 아들이었으나, 장자의 명분을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던 에서와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축복인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모르고 그 장자의 명분을 스스로 차 버린 자가 바로 르우벤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적 질서에서 결국 함께할 수 없는 아들이 되면서, 장자의 명분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린 채로 기록되고 르우벤이 잃어버린 장자권은 유다 지파로 넘어가고 장자의 명분은 요셉지파에게로 넘어갑니다. 결국 역대상 말씀의 족보는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증언되고 있고, 유다 지파를 통하여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이 이어지게 되는 그 이야기를 오늘 말씀은 족보를 통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우벤과 같이 혈통적으로 모든 민족들 중에 장자로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께선 그 백성을 특별히 선택하여 뽑으셨습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 선민, 택한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럼 모든 민족의 장자 민족으로서 겸손하고 주님의 뜻 가운데 쓰임받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우벤과 마찬가지로 교만하고 자신들의 특권의식에 빠지며 그 영적 장자의 명분을 차버린 백성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성취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가장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죽은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그 놀라운 복음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혈통적으로는 이방인인 저와 여러분들 같은 자들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며 영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혈통이 아닌 믿음을 통하여 그 믿음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내 신앙이 무엇을 따라 이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혈통이 아니라, 전통이 아니라, 바로 믿음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계보는 믿음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 한다는 것, 그 신앙을 전수한다는 것은 우리 자녀들과 우리 교회의 영적 자녀들이 믿음을 통하여 신앙을 계승받고 뿌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르우벤 지파 족보는 단순히 르우벤 지파가 장자권을 박탈당한 백성을 넘어, 망하게 되는 백성의 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25절에 증언하듯,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 서면 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 하듯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경고가 전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적용된 경고이지만, 특별히 이것이 르우벤 지파가 망하게 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밥먹듯이 일상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특권인 장자권을 경홀히 여긴 지파의 끝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그 명령을 가볍게 여기며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영적인 간음을 일삼은 것입니다. 앗시리아라는 불의 도구를 일으키시며 르우벤 지파의 멸망하게 하심은, 바로 영적인 간음을 돌이키지 않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이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권위와 다스리심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영적 질서를 거절하고, 내 마음대로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하나님을 떠나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섬긴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 신들을 간음 하듯이 섬기는 이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두손들고 나아가야 되는 죄의 본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르우벤이 혈통적으로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명분을 차버리고 결국 그 장자의 명분이 다른 지파에게 나아간 것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적용하며 영적인 큰 그림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있습니다. 그 은혜로 주신 선물들이 날라가지 않도록 차 버리지 않도록 늘 우리는 나의 삶의 기준을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될 것을 들으며 따라가지 말아야 될 것을 따라가는 이 영적 간음을 멈추지 아니하면 르우벤 지파와 같이 망하는 결과가 우리에게 찾아 온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나의 신앙은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있음을 잊지 마시며 믿음의 영적 자손의 계보로 이어 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도 순결하게 주님만을 따라가며 주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오직 하나님의 권위와 다스리심 아래 살아가고,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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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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