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예후와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던 예후의 아들이었던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였던 요아스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은 예후로 의해 모든 것이 변하고 완전히 새로워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 받으며 예후는 아합 가문은 철저히 진멸하고 바알 우상들과 선지자들을 모두 무너뜨리며 새롭게 북 이스라엘을 세우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통째로 변화되는 것을 통하여 이제 이 나라가 새롭게 되며 새 출발 할 것 같은 큰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모습으로 북 이스라엘이 탈바꿈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후 이후 그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정말 그렇게 몰라보게 달라졌는가? 정말 그 나라가 그렇게 새롭게 되었는가? 안타깝게도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후 이후에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새로운 왕으로 바뀌자마자 옛적 모습으로 뒤돌아가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여호아하스의 의미가 “여호와가 붙들었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얼마나 이름이 좋습니까? 그런데 여호아하스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 예후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허무하게도 정반대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죄를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렸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름값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려 타락했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여호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람 군대라는 경고의 채찍을 보내셨습니다. 그 경고의 채찍을 통해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기 원하시는 아비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쳐들어왔고 북이스라엘은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공격과 수치를 당했는가 하면 마치 조선시대에 몽고가 세운 청나라로부터 받은 공격과 수치와 비슷합니다. 조선 시대 역사를 보게 되면 몽고가 청나라를 만들고 조선을 쳐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병자 호란으로 승리하고, 왕이었던 인조가 땅에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대고 그렇게 비참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청나라가 승리 후 돌아가서 끝난게 아니라 계속 조선의 조정에 내정 간섭을 하게 됩니다. 자꾸 이래라 저래라 위에서 자꾸 지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람 군대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해 승리한 이후,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 바로 내정 간섭을 심하게 하며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여호아하스가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또 하나님은 그를 불쌍하게 보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자를 북 이스라엘에게 보내셔서 아람의 공격과 수치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을 건져 주십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으면 여호아하스 왕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하며 이름값 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조율 받는 인생으로 하나님에게 붙들려 사는 삶을 살아가고, 아버지 예후의 모습으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기회를 더 주시고 은혜로 건져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아하스는 하나님에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에 묶여 떠나지 아니하고 심지어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큰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고 구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붙들려 사는 삶 대신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악한 삶을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주셔서 그 죽을 위기 가운데 아람의 손에서 건져 주셨는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가 완전히 그들을 박살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이번엔 아람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것입니다. 비행기 다섯 대, 탱크 10대 정도만 남기고 모두 박살이 나는 큰 패배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후의 손자이자 여호아하스의 아들이었던 요아스가 등장하는데, 그 또한 역시나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따라가는 삶을 답습했습니다. 아버지 여호아하스의 안 좋은점을 그대로 닮아 따라하는 겁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에 뒹굴며 사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는 죄악의 삶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이 북 이스라엘 왕들에게서 다시 한번 삶의 패턴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며 죄에 붙들려 죄에서 떠나지 못한 왕이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 요아스였습니다. 예후가 이루어 놓았고 닦아 놓았던 모든 개혁과 새로운 물결이 끊어지고 예전 모습으로 회귀하는 안타까운 모습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에게 묶이는 대시 죄에 묶여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이 악한 모습으로 왜 자꾸 회귀하고 돌아가려 합니까? 인간의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붙드는 대신 나를 의지하고 붙드는 삶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옛날 이야기로 끝나면 안되고, 우리 또한 이런 똑같은 패턴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이제는 새롭게 나라가 다시 새 출발 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실망스럽게 옛적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북이스라엘 왕들을 바라보면서 사실 이게 우리의 모습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정신 못 차리고 가만히 있으면 죄에 묶여 떠나가지 않고, 죄에 머무르며 죄를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죄에 묶여 머물러 있는 것을 거절하는 삶이고, 죄를 따라가는 대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이란 죄에 붙들리지 않는 삶입니다. 죄 문제를 그 어떤 것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삶입니다. 이 시간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고,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죄에 붙들려 사는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 붙들려 사는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죄에 붙들리고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처절히 절망하며 이 시간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여호아하스와 요아스를 반면교사 삼아 죄에서 떠나가며 단절하며 죄에 붙들리는 대신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유일한 다윗의 혈통 요아스는 40년동안 남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의 전반기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행했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정직하고 신실했던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성전 수리를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 낡고 초라해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요아스 왕에게 성전은 그냥 신앙을 재건하는 하나님을 향한 봉헌의 의미를 훨씬 넘어섭니다. 요아스가 태어나서 한 살에 도망가 일곱살이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성전에서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마음의 고향이자 자기를 살려준 특별한 장소이기에 그 성전에 대한 애착이 남유다의 다른 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으로 그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고 나서 요아스 왕은 성전 중수하고 재건하는데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됩니다. 성전을 수리하는데 있어 모든 결정과 헌금 사용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성전을 잘 수리하는데 사용됐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 정직하게 행하게 되는 참으로 중요한 업적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동시에 이 말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요아스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실패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에 요아스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 후반전에 무너지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요아스 왕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큰 화근이 되는 것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일입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성들의 일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그 산당들을 놔뒀다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 무엇으로 변질되는가 하면 우상숭배의 현장으로 왜곡되고 변질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강조하셨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불순종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되는데, 이 분명한 기준 앞에 그가 끝까지 온전히 전심으로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은 후 결국 이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 때문에 나중에 백성에게도 왕 본인에게도 바른 길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삶의 스승이자 멘토였던 여호야다가 죽고 나서 요아스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왕이 되었고,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이 자리까지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니까 내가 잘해서 왕이 되고 내가 잘해서 이 나라가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전 수리했던 요아스가, 인생의 후반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펼쳐 보려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각하지 않고 나를 부각하려고 하니, 내가 대단해 보이는 것을 부각하는 산당을 통해, 바알 우상숭배의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수하고 재건하고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보이지 않는 신앙을 더 분명히 세우기 위한 고백으로 나아가게 했어야 하는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 왕은 이 본질을 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강조했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순종으로 나아 갔어야 하는데 정반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성전은 수리되어 겉모습을 괜찮게 세워졌는데, 실제로 보이지 않는 성전은 점점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전은 멋지게 세워졌는데 보이지 않는 성전은 무너져서 그 틈으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성전을 재건했던 놀라운 업적을 뒤로 한 채, 요아스 왕 통치 후반에 산당을 중심으로 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들이 확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 열왕기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평행 본문인 역대기를 보게 되면, 이렇게 변질되고 내리막길로 질주하는 요아스 왕을 건지시기 위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게 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경고합니다. 그런데 요아스 왕은 이미 들을 귀를 상실해서 자신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평생 멘토이자 스승이었던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를 죽여버립니다. 그러니까 요아스 왕의 후반전에 안타까움은 그렇게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이상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말씀을 들을 귀가 없어진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내가 너무 높아진 겁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나락과 내리막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질되고 무너진 요아스 왕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그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살해 당하며 그 인생이 비참하게 끝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말 칼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인생을 살려서 성전에서 그렇게 숨겨서 7 살까지 키웠고 거룩한 쿠테타 이후에 드디어 왕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40년을 통치했는데 그의 말로는 결국 가까운 심복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끝나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결론은 인생을 어떻게 끝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요아스 왕은 유일하게 남은 다윗 혈통으로 기적과 같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는 대표적인 왕이 돼 버렸고, 그의 인생 결론은 용두사미로 끝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높는 대신 보이는 우상을 붙들고 나를 높이고 참 신앙에서 이탈하는 요아스 왕, 그래서 그의 인생 후반전은 완전히 변질되고 타락하는 내리막길로 가게 됩니다. 처음이 아무리 좋았어도 우리의 끝이 이렇게 무너지면 심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첫사랑을 기억하고 나를 끊임없이 돌아오기 원하시고 교정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들려질 때 외면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엎드릴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며, 보이는 성전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성전을 끝까지 지키며, 끝까지 주님을 향하여 순전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결론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한 여인 아달랴의 손에 모든 다윗의 씨앗이 진멸당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남은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 요아스는 극적으로 피신해서 성전에서 6년 동안 숨겨 몰래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거룩한 쿠테타를 통해 아달랴는 죽게 되고 7살된 유일한 다윗의 혈통 요아스가 왕위에 올라 새 시대가 열리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정말 꺼지기 일보직전인 다윗 가문의 혈통이 일곱살 된 요아스가 살아남아 왕이 됨으로서 다시 한번 불이 붙어서 소망의 불을 다시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7 살짜리가 왕이 된다는 것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왕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이 아이가 죽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그런 요아스를 잘 보필하고 끝까지 그가 잘할 수 있도록 도은 사람이 바로 제사장 여호야다입니다. 여호야다가 없었으면 요아스는 살아남지 못했고 왕이 되지도 못했으며 그 시대에 그렇게 쓰임 받지도 못했을 겁니다. 일곱살의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이런 여호야다의 든든한 후원 덕에 40년 동안 남유다의 왕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 눈에 보기에는 모든 게 끝난 것 같고, 소망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을 이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혈통이 내려가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꺼져 가는 등불을 살리듯 여러 우여 곡절과 기적을 통과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 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요아스가 일곱살에 왕이 되며 마지막 남은 다윗 왕가의 혈통이 계속 계승되는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 환경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세상은 불법과 악한 여인인 아달리 같은 세상의 문화와 흐름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우리 스스로는 지켜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어둡고 절망스러운 때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를 구하시고 건지시는 분이 계시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고 내 스스로는 버틸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호해주시고 지켜 주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성도로서 우리가 여전히 서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남유다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다윗 혈통 요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하게 되듯이 복음에 이르는 말씀을 통해 기적과 같이 나를 세우시는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남유다를 40년동안 통치한 요아스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등장하는데,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모든 날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전반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좋은데, 거기에 전제조건이 붙은 게 뭐냐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 앞에 좋았다는 겁니다. 그만큼 여호야다가 요아스 왕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겁니다. 영적인 멘토이자 스승이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여호야다가 그를 가르치는 동안에는 하나님 보시게 정직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교훈하고 가르치며 나를 바로잡아줄 영적 스승이 있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의 미성숙의 시절에 나를 이렇게 바로 잡아주고 나를 깨우쳐줄 그런 영적인 스승과 어른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복 중의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아스 왕은 제사장 여호야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 안에 바르게 잘 자라 하나님 앞에 남유다를 잘 통치했다는 것이죠. 요아스가 인생의 전반기에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바로 그의 성전 수리를 향한 열망을 증언합니다. 요아스 왕이 하나님께 신실한 왕으로 쓰임 받았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마음의 뜻이 성전을 다시 한번 수리하고 변화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세워졌던 성전이 너무나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나서 방치되어 예전에 그 모습이 사라진 채 이곳 저곳이 낡고 부서져 초라하다 못해 안타까운 상태였습니다. 잘 고쳐지지 않아 흉물과 같이 방치되어 버린 성전을 바라보면서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 이 성전을 잘 수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성전 수리하는 그 뜻을 그가 품고 구체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전 수리에 대한 일을 추진하려고 보니까 제사장들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그 일이 잘 진척되지 않는 겁니다. 제사장들이 건축이나 건물 수리의 전문가들도 아닌데다가 그 책임에 대해서 오랫동안 방임하고 있었기에 성전 수리의 길이 지지부진한 겁니다. 그래서 요시아 왕이 무슨 명령을 내리냐 하면 제사장들이 직접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은 제사 업무에만 집중하고 헌금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대서 일이 원활하게 추진되도록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드려진 헌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성전 수리의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제사장들은 제사장 본의 일을 감당하면서, 구체적 실무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면서 그 일이 속히 추진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사도행전이 있었는데 초대교회가 은혜롭게 잘 성장하고 부흥하는 가운데 교회 안에 구제 문제로 분란과 다툼,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 일로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는데 그때 초대교회가 기도로 한 결정은, 사도들은 그 일을 더 잘해야 한다고 책임을 모는 대신, 책임을 배분하고 나누는 결정입니다. 사도의 일을 정확하게 구별해 말씀과 기도에만 집중하게 하고 실무적인 일들은 집사들을 세워서 그들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와 집중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한 이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선명하게 일하게 된 것입니다. 요시야는 그 낡아진 성전을 보수하고 바꾸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성전도, 마음의 성전 속에 자리잡은 나의 낡은 신앙도 새롭게 된다는 것을 믿으며 성전 수리에 뜻을 두고 추친 하면서 하나님께 기쁨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고 세우는 것을 보이지 않는 성전이 새롭게 수리되며, 마음이 새로워짐을 통하여 예배가 회복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망과 순전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 것이고 그것이 요시야 왕이 하나님께 정직하다 평가받는 본질적 이유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작은 촛불 요시아를 통해 왕위가 계승되어 다윗의 혈통을 이어가는 기적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이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며 그 신앙이 계승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꺼져가는 것 같은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선 그 약속을 이어 가시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워 가심을 신뢰하십시오. 그런 요시아 왕이 있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동시에 그를 가르치고 보호하며 바로 잡아줄 영적 스승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도 그런 영적 스승을 가까이 두기를 열망하고 그런 스승을 찾아 가까이하며 신앙 생활하기 원합니다.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는 열망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 마음속 성전을 새롭게 수리하는 열망이었음을 잊지 말고, 내 마음이 새롭게 수리되고 내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새롭게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달랴라는 여인 하나가 남유다 전체를 영적으로 파괴시키고 영적 파탄이 오게 만들었는지를 성경은 경고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남편도 비극적으로 죽고 자기 아들도 1년만에 죽었는데 슬퍼하거나 애곡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숨겨 놓은 본색을 드러내며 나머지 왕족의 씨을 다 말리며 자기 손자들을 다 죽이고는 왕위에 오른 자가 바로 이 악한 여인 아달랴입니다. 정통성 없는 북 이스라엘 이세벨의 딸이자 스스로 불법적으로 자리에 올라 남유다를 완전히 장악한 악한 여왕이 되어 6년이나 남유다를 완전히 영적으로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이세벨과 그 딸인 아달랴를 단순한 한 개인의 일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의 대표로 바라보고 있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악한 여인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황폐하게 만드는가를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들어 쓰시며 지나치리 만큼 바알 우상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진멸하며 제거하는 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땅인 아달랴와 결혼한 철저한 대가를 남유다는 혹독히 치르며, 피비린내 나는 가족 학살을 통해 다윗의 씨가 완전히 말라 모든 것이 끝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딱 한 아기, 1살된 요아스를 살려서 성전에 숨겨서 6년을 잘 키운 상태에서 7년째가 되는 해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악한 여인 아달랴가 불법적으로 왕위에 올라 여왕 행세를 하는 7년 째, 제사장 여호야다가 목숨을 걸고 말씀을 의지하여 용기를 내는 겁니다. 그 목숨을 걸고 용기 내는 것은 지금 아달랴 여왕은 불법으로 스스로 올라간 정당성 없는 여인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다윗 자손 가운데 남유다 왕위를 이어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따라 다윗 가문에서 왕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는 그 다윗의 혈통에서 장차 약속하신 메시야 예수님이 태어 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남은 아이 하나를 지키는 것이, 그 남은 아이가 왕을 계승하는 것이, 바로 제사장이 목숨 걸고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제사장의 선포였지만, 사실 아달랴에게 완전히 찍히기를 각오하는, 목을 내 놓는 반란을 일으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아달랴 입장에서는 펄쩍 뛸 말인데, 자기 생각에는 모든 다윗의 씨앗을 다 진멸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다윗의 후손이 있다는 선언이자, 아달랴 정권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목숨 건 용기었던 것입니다. 아달랴 여왕에게 그동안 숨겨 놓은 다윗의 씨앗이 남아 있다는 선포이자,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아달랴 여왕은 불법임을 선포하는 그 놀라움….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제사장 여호아야는 용기를 낸 개혁과 바른 길에 서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 봤을 때는 그저 목숨을 걸고 기존 정권에 대항하는 반란밖에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여호야다는 이 하나님의 질서를 남유다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생을 던졌고 목숨 걸고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게 됩니다. 그 성공의 이유는 목숨을 건 결단을 놀랍게 쓰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전 안에는 무기도 있었고, 호위하는 군인들, 특히 뜻을 같이하는 부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다윗 왕가의 왕실 호위병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 그 바른 길로 나아가는데 쓰임받겠다는 열망으로 이 일에 함께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한 이 반란이 기적과 같이 성공하며 아달랴 여왕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세우며 일곱살이 된 그 아이를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 가문의 씨가 모두 말라 버려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질 것만 같은 풍전 등화의 위기 가운데, 제사장 여호야다를 들어 쓰시며 목숨 걸고 남은 아기를 지키게 하셨고, 불법으로 왕의 자리에 올라간 아달랴를 처단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향한 반란이 성공될 때, 아달랴가 했던 말 “반역이다…반역이다”를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반역은 본인이 제일 먼저 저지른 장본이었는데 말입니다. 악한 자로서 자기 손자들의 다 죽이면서까지 다윗 가문에 씨를 말리며 왕위에 올라온 반란의 주범인 아달랴 여왕이야 말로 반역 중에 반역이었는데, 막상 자기가 쫓겨날 때가 되니까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반역이라고 외치는 이런 말도 안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반역이다…반역이다…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아달랴는 왕궁에서 칼에 죽임을 당하는 비참하게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처럼 아달랴 여왕이 칼에 죽음으로서 소위 말하는 거룩한 쿠데타가 성공 하게 됩니다. 이처럼 꺼져가는 등불인 다윗 자손 하나를 지켰고, 그 어린 소년을 왕으로 세움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한 번 세우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왕위를 다윗 가문으로 세우는 정통성의 회복일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었던 바알 우상을 철저 깨뜨리는 성전 정화이자 부흥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하여 다윗 왕가가 사라지지 않고, 그 씨앗이 보존되어 나중에 말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일곱살 아이를 왕으로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곱살 짜리 왕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사장 여호야다가 과도기에 정권을 가지고 있다가 요아스가 좀 장성하면 왕을 물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는 거룩한 반란이 끝난 후 굳이 일곱살 된 왕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겁니다. 여호야다는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왕이 돼야 된다고 떠미는 그때에 스스로 왕이 되기를 거절하며 일곱살 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겁니다. 이 말은 자기 스스로 왕위의 욕심을 갖기 위해 이 일을 벌인 게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자신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과 같이 자기는 한때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있다가 소리와 같이 사라지는 자로 내가 머물겠다는 그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적 질서를 다시 세워짐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씨가 계속 전승되게 되며, 그 결과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떻게 보면 이세벨과 그 딸 아달랴 같은 자들이 불법으로 왕위에 올라 권세를 휘두르는 어둠과 타락의 시대입니다. 이 어둠과 타락이 고착화 되면 이게 문제라는 건 알지만 문제를 고칠 능력도 그리고 그거에 대한 용기도 없이 그 영적 파탄의 시대를 그냥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때로는 목숨 걸고 용기를 내야 할 일이 있음을 깨워 주십니다. 이런 불법과 어둠과 타락이 가득한 때에 한 사람이 말씀에 목숨을 걸고, 한 사람이 말씀에 용기를 내어 나아갈 때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동시에 여호야다의 유일한 관심은 다윗 왕가의 씨가 끊어지지 않으며 그것을 복원시켜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쓰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지 왕이 되려고 욕심을 내지 않았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렇게 자기 것에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 지는 데만 쓰임 받기를 사모하며 기꺼이 낮아진 자를 놀랍게 사용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여호야다와 같이 준비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 걸고 용기 내는 자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암흑과 어둠의 시대의 역사를 바꾸시기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는 인생이 되어, 이 어둠과 타락의 시대에 주님의 영적 질서와 기준을 다시 회복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데 우리 인생이 선명하게 쓰임 받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의 악행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유다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아달랴의 악행은 한 개인의 일탈과 끔찍한 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악한 세력이 다윗 가문에 씨를 말리는 영적 전쟁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예후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아 아합 가문과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진멸하는 일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신속하게 모든 것이 정화되며 하나님의 심판 이후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북 이스라엘에는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남유다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다윗 가문의 씨가 말라 버리기 일보 직전의 큰 위기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아합 가문과 바알 선지자들이 진멸을 당하고 있는데 반대로 남 유다는 다윗 가문이 악한 세력의 대표인 아달랴로 인해 진멸을 당해 지금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겁니다. 남유다의 정략 결혼으로 왕가에 들어오게 된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아달랴가 이세벨의 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세벨도 아달랴도 그냥 악한 여인 정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의 대표로 등장합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악하면 북 이스라엘도 남유다도 영적 파탄을 가져오게 되고, 다윗 가문의 씨를 다 말려서 하나님 언약의 통로가 막혀 나중에 장차 오실 예수님이 그 씨로부터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단순히 아달랴가 정권에 욕심이 있어서 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끔찍한 악행 정도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오시지 못하게 막으려는 악한 세력의 끔찍한 전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악한 여인이지를 성경은 선명히 증언합니다. 자기 남편도 비극적으로 죽었고, 자기 아들 아하시아 왕도 북이스라엘 왕과 함께 같은 날 비극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어미로서 인간이라면 슬퍼해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달랴는 자신의 아들 아하시야 왕이 죽을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모든 자손들을 모두 처단했습니다. 남유다 왕인 자기 아들이 1년만에 객사에서 죽은 것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왕궁에 남아 있던 모든 왕족 후손들, 즉 자신의 손자 손녀를 다 죽이는 겁니다. 할머니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자기 손자 손주들을 자기 손으로 다 죽이는 만행은 사극이라고 생각해도 상상이 안되는 끔찍한 피바람이 왕궁에 불어 닥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달랴라는 존재는 이세벨 못지 않고 어찌보면 이세벨 다 더 끔찍하고 악한 여인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아달랴의 끔찍한 만행은 단순히 한 여자의 악한 기행이 아니라 사단 마귀를 대표하는 악한 세력이 다윗 가문의 약속의 자손들을 진멸하고 그 씨를 말리는 영적 만행인 것입니다. 그 아달랴의 만행과 피바람 속에 모든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1살짜리 아이요아스를 고모가 몰래 빼내어 구출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어가는데 그 한 살 아기를 빼내서 몰래 숨기고 그 아이를 여호와의 성전으로 피신시키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그 1살짜기 아기를 숨기고 목숨을 걸고 그 아이를 여호와의 성전에 6년 동안 숨기는 겁니다. 아시아의 누이이자 고모인 여호세바가 없었으면 다윗의 가문의 씨는 모두 말라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왕위가 계승되지 아니하고 더 이상 그 다윗 왕가를 통하여 장차 예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꺼져가는 등불을 하나님께서는 끄지 아니하시고 이 한살짜리 아이를 살리심으로 희망의 불씨를 살리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 6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남유다의 여왕으로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한살 짜리 아이 요아스가 목숨을 건지고 성전에 6년 동안 자라는 동안이 악한 여인 아달랴가 여왕으로 등극해 남유다에 깊은 암흑시대를 맞게 하는 것입니다.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여왕은 유일하게 이 아달랴가 여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관점은 이 아달랴를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윗 가문의 자손도 아니고 정통성도 없고 그리고 자기 본색을 드러내 다윗의 가문에 씨를 말린 악한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로 대표되는 이런 악한 세력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며 흔드는 전략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과 결혼하게 만드는 겁니다. 세상과 결혼하여 세상의 기준에 물들어 젖어 살게 만드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 망각한 채 그저 나 혼자 건사하기도 어려운 인생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복음의 씨앗을 다 말려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일들을 계속 방해하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북 이스라엘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정략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세벨과 아합이 결혼한 것도, 그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남유다의 왕이 결혼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세상과 결혼한 겁니다. 세상에게 자신을 다 내어준 결과가 바로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신 남유다와 다윗의 씨가 진멸 당하기 일보 직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포로기 이후에 에스라가 시대에도 귀환한 사람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왜 그렇게 심각한 영적 타락으로 받아들였는가를 말씀을 통해 이해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에스라가 성전을 재건하여 지을 때도, 나중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지을 때도 계속 등장하는게 그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 세력입니다. 개인적으로만 방해하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방해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언약 신앙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흔들고 훼방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이 모두 악한 자와 악한 세력에 의해 계속되는 하나님의 언약 신앙을 방해하고 흔드는 훼방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다윗 왕조가 이미 끊어진 거 같이 씨가 다 말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멈춰선 거 같고 이미 그 불은 다 꺼져버린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박한 위기 가운데서도,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1살 아기를 살리시며 그 아기를 통해 다윗 가문을 다시 세우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방법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데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가 왕이라고 떵떵거리고 있는 악한 여인 아달랴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 일을 방해하려는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일들을 방해하고 흔들고 훼방하는 이런 악한 세력,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세력이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꺼질 거 같은데 꺼지지 않는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지속되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처한 상황들이,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때로는 이렇게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반드시 성취하시고 이루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절망과 낙망을 넘어서 소망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예후에 대한 인생 평가입니다. 사실 열왕기서 전체가 계속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시는 왕에 대한 평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걸 통하여 우리 인생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평가받는 인생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평가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삶이 없습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고, 하나님 앞에 audit 받아야 하는 인생임을 잊지 않을 때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좋습니다. 예후에 대해서 너의 인생 참 잘살았다….말씀하시며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일했고 하나님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는 신실한 자였다는 평가입니다. 영적으로 파탄의 지경에 난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시는데 선명히 쓰임 받은 도구,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행한 자가 바로 예후였습니다. 예후의 담대함으로 말미암아 남유다의 왕과 북 이스라엘의 왕이 심판으로 하루에 죽게 되었습니다. 아합의 70명 아들들이 모두 하루에 목베어 죽임을 당하고, 남유다 아하시야 왕 형제들 42명도 모두 죽게 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모아서 처단했고, 바알 산당 허물고 그 자리를 화장실로 만들었습니다. 바알이 주는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것을 선포하며 예후를 통해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고, 이런 종교개혁을 담대하게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4대, 약 100년 정도를 가장 장수를 누리는 그런 왕조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후가 안타깝게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 마이너스가 있었다는 것도 동시에 평가하십니다. 전반적으로 하나님께 칭찬받고 정직하고 행하며 바알 우상을 제하는 귀한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건 참 좋았는데 온전하지 못한 하나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북 이스라엘을 시작하게 한 여로보암의 죄인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바알 우상은 그렇게 철저하게 다 무너뜨리고 진멸했는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못한 겁니다. 금송아지 신앙은 사실 북이스라엘을 지탱하는 힘이자 정체성이기도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려면 아무래도 남쪽으로 내려가 예루살렘 성전을 가야지, 거기서 예배 드리는 게 진짜 예배지…라는 그런 마음의 열망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 백성들의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만든 게 자체적으로 예배 드리는 처소들이고, 그 안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여 드리는 예배와 제사 대신 쉽고 편하고 간단하게 드리도록 대체물을 만들었고,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북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신앙이었습니다. 사실 바알 우상이나 금송아지 우상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할 정도로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며 집착하게 만들고, 거기에 절대 가치를 두는 위험성을 가지는 이런 왜곡되고 변질된 신앙, 얄팍한 영성에서 떠나지 않다는 겁니다. 그게 만약에 없으면 나라 자체가 흔들린다는 불안함 때문에 그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는 멀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많은 업적과 하나님 앞에 신실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예후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못했고 결국 예후는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켜 행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한 것 같은데, 전심 즉 내 온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며 말씀을 붙들고 살진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열심도 없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과는 차별되게 예후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갈망과 열심을 하나님께서는 들어 사용하신 것이고, 예후는 하나님께 선명히 쓰임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나아가지 못했냐는 전심으로는 나아가지는 못한 겁니다. 열심은 분명히 있었으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예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예후는 그렇게 전심을 다해 이루지 못했고 그것을 하나님은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는 겁니다 말씀의 통해 주시는 예후에 대한 평가를 마음에 새기는 지혜가 있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된다…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열심과 갈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그 뜻을 행하며 살기를 원하는 갈망과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없는 사람들은 먼저 이 갈망과 열심을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갈망과 열망을 힘써 나아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늘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있고 열심은 있었는데,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라 행하지 못하고 아쉽게 끝난 인생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힘써 나아가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안타깝게도 바알을 멸하고 다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다 진멸한 거 같은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한 예후, 열심은 있었지만 전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예후의 신앙이 가져온 결과가 뭐냐 하면 자꾸 북 이스라엘이 전쟁에 휘말리고 나라의 영토를 점점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이때부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땅을 잘라내기 시작하심…이라고 증언하는데, 하나님이 땅을 잘라냈다는 건 나라 영토를 빼앗기게 하시는 겁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금송아지를 떠나지 못한 결과가 주변 나라들이 계속 공격을 하며 땅을 빼앗기게 되고,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황폐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는 삶을 사모하십시오.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기뻐하는 삶에 내 인생이 집중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늘 깨닫고, 하나님과 같은 방향과 같은 목적지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살아가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잘 행하며, 특별히 하나님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며 살아가는 인생, 이런 삶을 사모하시면 좋겠습니다 나의 인생이 하나님에게 카운트 되는 시간, 하나님 앞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간에 더 인생을 쏟는 지혜로운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먼저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갈망이 사라졌다면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갈망이 분명한 인생이 되기를 간구하십시오. 더 나아가 내가 평생 힘써 나아가야 될 삶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열심을 넘어 전심으로 나아가는 그 복된 인생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내용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며 아합의 집안에 대한 심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왕과 북 이스라엘 왕이 심판 받아 한날에 죽었습니다. 아합의 부인이자 악한 여인의 대명사 이세벨이 심판을 받아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을 통해 아합의 70명 아들들이 모두 목베임을 당하며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하게 심판하신 거 같은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남유다 아하시아왕의 형제들을 심판하시고, 아합의 잔당들을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바알 선지자를 진멸하며 심판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치리만큼 계속 죽고 진멸하심이 이어지는 이유는 아합 집안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의 죄가 이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것과 함께, 그들의 죄는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남유다 아하시아 왕의 형제들이 심판 받습니다. 남유다 왕 아하시아의 형제들이 지금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에 왔습니다. 찾아온 이유가 이미 심판 받아 죽은 아합의 70왕자들을 만나러 남쪽에서 단체 방문 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시아 형제 42명이 예후의 손에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들이 심판 받아 죽은 이유는 정치적 계산을 통해서 북이스라엘과 맺은 정략 결혼을 해서 북 이스라엘에 해로운 불순종의 죄가 남유다에 다 흘러들어 남유다도 영적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엄중히 물으시면서 남유다 아하시아 왕의 모든 형제들도 다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은 운명을 같이하는 겁니다. 좋은 운명도 나쁜 운명도 한배를 타고 가는 게 결혼이요. 그래서 결혼을 성경에서는 영적인 일이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있고 정략 결혼과 같은 결혼의 문제를 계속해서 구약에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합의 70 왕자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아합에게 속한 자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다 씨를 말리는 겁니다. 아합에게 속한 사람들은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는 겁니다. 진멸하듯이 모든 것을 싹 쓸어 버리시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그것이 이스라엘을 또 한번 무너뜨릴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민족 전체를 영적으로 파탄 나게 한 책임을 물으시며 이렇게 엄중히 심판하시는 겁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합 집안을 심판하는 도구로 예후를 쓰고 계시고, 그 예후와 함께 솜을 잡고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들을 정화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준비되는 인생입니다. 언제 어떻게 쓰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늘 쓰임 받기 위해 우리가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후를 하나님께서 쓰신 이유가 여러가지 있을 겁니다. 그에게 지혜도 있었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담대하게 추진하는 용기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넘어 이렇게 쓰임 받기 위해 준비된 예후의 마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 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예후에게 준비되었던 것은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을 남에게 보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분명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새벽 예배를 지키며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올 때 내 마음에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쓰임 받고 싶습니다… 주님 손에 내가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 원합니다…사모하는 그 열심이 나를 사로잡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쓰임 받고 싶어하는 열심과 갈망을 반드시 선용하신다는 겁니다. 두번째로 남아있는 바알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며 모두 진멸하는 이야기가 길게 증언되고 있습니다. 바알 우상이 옛날에 나와 상관없는 우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있는 여전한 큰 영향력을 주는 도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알 우상은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물질을 절대 가치에 두고 하나님과 천국을 상대적 가치에 두는 삶입니다. 내가 정한 절대 가치를 위해 두고 하나님을 필요한 존재로 끌어다 쓰는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게 바알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바알 숭배를 겸하며 양다리를 거치는 겁니다. 이 세상의 번영과 성공과 물질에 절대 가치를 두고 하나님 나라와 뜻은 상대화 시키며 도구화 시키는 것을 우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바알 우상은 우리 삶 가운데서도 심각하게 직면하는 도전입니다. 그 바알 우상숭배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통해 북 이스라엘에 들어왔고, 정략결혼을 통해 남 유다에 들어와 온 민족을 무너뜨리게 만든 겁니다. 여호와를 섬긴다 그러면서 바알 우상에 기웃기웃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수많은 여호와의 종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알 우상을 굉장히 성경은 심각한 죄로 여기며 모든 바알 선지자들을 아주 철저하게 배격하며 진멸하고 무너뜨리는 얘기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배격하며 진멸합니까?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처단해 진멸했고,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을 불사르고 바알의 신당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큰 승리 이후 모든 바알 선지자들을 진멸한 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잡초와 같이 금방 바알 신앙이 올라와 이렇게 많은 바알 선지자들이 다시 양산되었고, 백성들을 영적 파탄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바알 우상에 절절 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바알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바알 산당을 다 허물고 심지어 그 자리에 화장실을 만드는 겁니다. 바알 우상이 주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나칠 정도로 모든 것을 뿌리 뽑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처절하고도 철저한 심판을 통해 죄에 대해 분명한 경각심을 갖기 원합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들이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남은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잘못된 우상숭배를 정화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나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 늘 준비하며 예후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이 나의 인생을 이끄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영적 어두움을 가져오게 한 아합 가문을 향한 심판을 즉시 임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와 남유다의 왕이 한 날에 죽었고, 아합의 아내이자 악한 여인의 대표인 이세벨도 심판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아합 집안에 남은 70명의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아합 집안에 대해 계속해서 심판 하시는 이유가 뭐냐면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지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우상 숭배하며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간 삶을 심각하게 다루신 것입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는 한 두명 뽑아내서 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합의 70명 왕자들을 계속해서 예후를 들어 심판하시는데, 예후가 얼마나 비상한 사람인가 하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들을 처단합니다. 예후 자신이 직접인 사람은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 밖에 없습니다. 이세벨도 내시들이 창문에서 내던져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합의 아들들의 70명을 직접 상대하면 어려가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주변 사람들이 움직여 아합의 아들들을 심판하도록 몰아갑니다. 먼저 아합왕 70명의 왕자들과 함께 있었던 장로들과 그들을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로 압박을 가합니다.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들으려면 아합 왕자들의 머리를 다 가져오는 것으로 증명하라고 압박을 한 겁니다. 그 압박 속에서 왕자들의 측근이었던 장로들과 가르치는 사람들의 손에 아합의 모든 아들들이 다 한날에 죽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가까웠고 가장 믿을 만하다는 사람들의 손에 모두 아합의 아들들이 배신을 당하며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권력이 이렇게 허무한 것이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가장 위험해지는 것이 우리의 인간사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씁쓸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에 모두 목베어 죽은 아합의 아들들 시신을 두 무더기로 쌓아 그 다음 날까지 문 어귀에 두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끔찍한 일이기도 한데 그만큼 아합 집안에 죄가 심각했던 것이고, 하나님은 모두를 없애며 진멸하시는 심판의 엄중함을 그대로 보여주시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소위 말하면 시청각 교육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직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하시며 죄를 좌시하지 아니하심을 백성들에게 선명하게 시청각 교육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섬기며, 이 세상의 권력과 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죄로 물들게 했던 아합 집안은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결말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이렇게 모두 비참하게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예후가 그 두 무더기의 시신들 사이에서 이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힘을 온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이제 너희는 알지어다…하나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게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집안에 대해서 심판을 말씀하셨고 그 심판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어둡고 죄가 관영한 세상에 하나님이 마치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심판이 내가 원하는 때에 즉각적으로 바로 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주목할 것은 아합에게 속한 자들은 모두 남기지 않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 세상 안에 세상 소속으로 있는 자들을 생명과 소망이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 소속,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어야 생명과 소망이 있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선명히 믿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바로 성경 말씀이 그냥 좋은 얘기가 아니라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기에,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자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거 같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거 같고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거 같은 이 시대 속에 그 보이는 대로 살아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대신 멀리 바라보고 끝을 바라보고 결론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산다는 겁니다. 침묵하시는 거 같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때가 임할 때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일로서 심판이 이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믿으며 이 모든 말씀들이 이루어가는 것을 신뢰하며 살아가십시오. 성도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며 이것이 이 험하고 악하고 깨지고 눈물나는 세상에서 여전히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하나도 떨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믿으며, 끝을 보고 결론을 보면서 살아가는 귀한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세벨과 아합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왕 중에 하나였고, 북 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영적으로 타락과 불순종에 물들게 한 왕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악행과 불순종을 다 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렇게 분명히 심판하시고 계심을 오늘 말씀은 계속 증언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이 예후의 손에 살해 당하는 것으로 아합 집안의 심판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유다의 아하시아 왕도 죽게되고 아합의 부인 이세벨도 비극적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도, 남유다의 왕도 한 날에 죽게 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도 심판하시고 남유다도 심판하시는 경고를 보게 됩니다. 왜 남유다 아하시아 왕도 아합 집안과 마찬가지로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북 이스라엘과 정략 결혼을 하며 그걸 통하여 자신들의 안정을얻으려 했던 불순종이 결국 남유다도 우상 숭배로 물들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남 유다도 북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우상숭배로 무너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합법이고 별 문제 없어도, 사람들 보기에는 큰 문제가 아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는 심각한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무너지면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던 북 이스라엘의 왕도 남유다의 왕도 한날에 비극적 죽음을 직면하는 것을 통해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과 남유다의 왕이 한 날에 죽는 것으로 아합 집안의 심판이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이세벨의 비참한 죽음으로 심판이 계속됩니다. 이세벨은 자기 아들이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소식도, 남유다의 왕도 한 날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한 이세벨은 지금 화장을 하고 머리를 가꾸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여자이기도 하고 섬뜩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끝까지 오만한 태도로 자신의 가면을 쓰고 화장을 하고 있는 우매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직감하며 죽음이 내 앞에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우리가 해야 되는 건 하나님께 회개하고 살려 달라고 마지막 기회를 붙드는 것입니다. 인생에 가장 안타까운 일이 뭐냐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악을 행하며 불순종하고 무너지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데 회개의 감각이 사라져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절하며 인생의 끝을 이렇게 비극으로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회개로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돌아오는 대신,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오만하게 가면을 쓰고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신만 신경 쓰며 임박한 심판에 그대로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세벨 인생 마지막에 직면한 끔찍한 죽음을 성경은 가감없이 증언합니다. 이세벨의 비극적 죽음은 이세벨은 예후의 손에 살해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가까웠던 내시들에게 배신 당하여 창문에서 던져서 죽게 됩니다. 내시들은 가장 가까운 신하들이였고 가장 믿을 만한 신복들로 이세벨을 끝까지 보호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웠고 믿을만했던 심복들인 내시들에 의해, 이세벨은 배반당하며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 끔찍했던 이세벨의 마지막을 성경은 이세벨의 피가 박과 벽에 다 튀었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가장 믿었던 내시들에 의해 배신 당에 창문에서 던져져서 피가 다 터져 나온 이세벨의 비극적 죽음, 그리고 그 시신을 예후가 밟아버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세벨의 시신은 개들이 와서 다 먹어 버려서 두개골과 발과 손 외에는 찾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걸 통하여 이세벨의 비극적 죽음은 단순히 끔찍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세벨의 죄를 엄중히 물으시며 치신 심판이었다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인은 그 당시에 나라를 들고 흔드는 권력의 핵심이었습니다. 왕이 있었지만 왕 뒤에서 모든 것을 쥐락 펴락하는 사람이 이세벨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막강 권력 이세벨에게 사람들이 와서 벌벌 떨며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누리며 떵떵 거리고 살았던 이세벨, 그 인생의 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장 처참하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비참하게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비극적이고도 끔찍한 죽음은 하나님께서 나봇의 포도원을 불법으로 빼앗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하고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악한 나라로 만든 것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악한 여인 이세벨은 아합왕을 흔들어 조종하며 북 이스라엘을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된 것도 모라서 남유다도 물들게 만들어 한꺼번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신약에도 계속 등장하면서 악한 여인의 대표로, 더 나아가 악한 세력의 대표로 등장할 정도로 악한 여인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런 악한 여인 이세벨의 끝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끔찍하게 심판을 받으며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의 마지막이 다가 오는데도 회개하며 돌아오는 대신, 끝까지 화장하며 머리를 꾸미며 그 가면을 벗지 못하고 오만한 태도로서 있었던 이세벨의 비참한 죽음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세벨의 비극적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정말 붙들어야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 악한 여인 이세벨의 비참한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세벨과 같은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결코 좌시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심판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인생이 어떻게 끝나는가가 나의 인생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우리는 언제나 인생의 끝을 대비하고 준비하십시오. 인생의 앞과 중간이 아무리 좋아도, 인생 끝이 이렇게 비참하다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잘나고 대단해 보여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인생의 끝은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서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소망은 나의 인생의 끝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름답다는 것을 선명히 믿고 살아가는 소망임을 선명히 붙드십시오. 이세벨의 비극적 죽음을 반면 교사 삼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의 인생 끝이 아름다워야 내 인생이 아름다움을 확신하며 오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조율되며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이스라엘의 깊은 암흑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십니다. 왕부터 백성까지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쩔어 살며 모두가 절망하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심으로 준비하시는 겁니다. 사실 예후를 왕으로 삼는다는 명은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언약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야가 살아 생전은 그 일이 이어지지 않고 15년이 지난 후에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를 통하여 그 예언이 오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시대를 바꿀 그 중요한 명령을 전달하는데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면 이름도 모를 제자 중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손에 가지고 예후를 찾아 골방에 몰래 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기름으로 그의 머리에 붓고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후 그 다음에 지체말고 얼른 도망가라는 겁니다. 도망가는데 뒤도 돌아보지 말고 지체하지 말고 도망가라는 겁니다. 그 악한 왕들이 가득한 시대에 예후에게 왕으로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잡히면 죽는 쿠데타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은밀하게 골방에 들어가 기름을 붓고 그것이 끝나면 빨리 도망가라는 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음으로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고 이것을 통하여, 그 악한 왕 왕조를 심판하시고 새 시대를 여시겠다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예후를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시기를 구체적으로 원하시는가? 바로 예후를 왕으로 세워 아합 왕가 가문 전체를 치시고 진멸하심으로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합 가문에 속한 모든 남자들을 다 치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엄중히 심판하시는 겁니다. 아방 왕가는 그 당시에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강했던 시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군사력이 강해 든든해 보이고, 경제가 활성화되어 백성들이 잘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가는 그 대가로 하나님을 떠나갔고 우상에게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대로 살아가야 사는 건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성공과 경제적인 안정의 번영을 절대 가치로 추구했던 것이 아합 왕가가 가져왔던 삶의 패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거절한 채 자신의 번영과 성공만을 추구한 대표적인 사건이 우리가 잘 아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사건입니다. 아합왕이 원하는 번영과 성공을 위해, 이세벨을 동원해 악한 방법으로 나을 죽여버리고 그 포도원을 불법으로 빼앗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번영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뜻 같은 것,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 같은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삶의 패턴이 바로 이세벨에게 물든 아합 왕가의 삶의 패턴이었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성공과 번영이라는 목적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통해 자기들만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만들었으며, 북이스라엘만 그렇게 범죄하게 만든 게 정략 결혼을 통하여 남유다도 변질되게 만들어 함께 망하는 길을 따라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엘리사의 명을 받아 제자 한 사람이 몰래 예후를 찾아가 골방에 들어가서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 왕으로 세웁니다. 그렇게 은밀히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후가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명 받았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옷을 다 바닥에 까는 겁니다. 자기 옷을 깐다는 것은 내가 당신을 존경하고 충성합니다…당신의 권위에 복족하겠다…는 상징이라 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깔고 호산나 호산나…하며 외쳤던 것과 거의 비슷한 일입니다. 많은 장군들과 무리들이 예후에 이렇게 곧바로 겉옷을 깔고 충성을 맹세하며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현재 왕에게 얼마나 백성들의 마음이 멀어져 있는가를 우리가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기초 위에 성공과 번영이 올라가야 되는데 하나님을 따르지도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지도 않으면서 번영과 성공을 삶의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며 살았기에, 아합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멸하기로 결정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후를 통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합 왕가의 삶의 패턴을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들어 심판하지 않으시면 안될 정도로 타락한 이 아합 왕가의 이 악한 모습은 사실 매일매일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도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야 되는 자들인데, 이 땅에서의 내 성공과 번영을 위해 말씀을 도구화 하고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겁니다. 성공과 번영이라는 것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우리는 복음을 우상과 같이 도구화 하며 우리에 원하는 만큼 변질과 왜곡을 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드는 말씀만 선택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에 풍성해지고 성공도 하고 그러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생각으로 복음을 성공과 번영의 수단으로 변질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합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며 우상숭배를 했던 영적인 어둠의 모습이자 우리들의 영적 어둠의 모습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의 때와 다른 하나님의 때, 타이밍에 대한 신뢰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억울하게 빼앗을 때 바로 예후를 세우지 아니하시고 오늘 말씀과 같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세우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너무 느린 것 같은 하나님의 타이밍,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이 차야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라봐야 될 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아합 왕의 악행과 우상숭배, 백성들을 향한 타락의 길을 인도하는 잘못들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지금 아무리 악하고 아무리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이는 것 처럽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며 심판으로 무너진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지금 당장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너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기력한 그 마음을 잡고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오늘도 기다림으로 인내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과 우상 숭배로 어둠 속에서 신음 할 때,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시며 예후를 왕으로 세우십니다. 이 일은 바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임을 말씀을 통해 믿는 것입니다. 나의 간절하고 심각한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한 일과 같이 보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때에 분명히 성취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취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 생활의 진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늘 현실이 더 중요해 보이고, 당장 변하고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 절망하며 신음할지라도, 심각해 보이는 현실 앞에 십자가가 능력이 없어 보일 지라도, 내 현실에, 지금 당장 해답을 주지 않을 것 같은 그 답답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의 관점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인내함으로 하나님을 믿고 주님과 교통의 시간으로 내 영혼이 주님 앞에 더 깊어지고 단단해지며, 마침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때를 기다리며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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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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