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참 슬고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그들이 택한 백성, 선민이 된 이유는 그들이 특별하고 대단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은 선택이었고, 은혜의 도구로 열방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착각에 빠졌는가 하면 우리가 특별해서 택함 받은 줄 알고 특권 의식에 빠졌고,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겠지…하나님이 기다려 주시겠지… 하나님이 또 손을 내밀어 주시겠지…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기에 그 이름이 영원히 존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왕과 나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왕과 나라,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반역과 배신이 계속 반복되는 북 이스라엘을 향해 그 인내를 거두시고 멸망을 직면하게 하시는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천국문을 활짝 열어 놓고 예수 믿고 구원받을 새생명을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영원히 참으시는 게 아니고 영원히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호세아는 배신과 반역으로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마지막 왕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왕이 평화적으로 이양되는 것이 지나간 게 이미 오래 입니다. 분명히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인데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이 거룩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 입니다. 내가 원하면 저 높은 자리에 사람을 죽여서라도 올라가겠다는 배신과 암투가 반복되는 그 북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호세야는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왕이 몰랐던 것은 이게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의 자리라는 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다는 이 큰 그림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왕이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왕들보다는 조금 덜 나빴다는 평가를 합니다. 호세아가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으로 열심을 냈던 것이 말씀에 증언되는데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정치적 줄타기 하는 모습입니다. 호세아는 앗수르가 계속 동네 북과 같이 치고 괴롭히니까 앗수르 나라를 형님으로 모시며 매년 조공을 드리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호세아가 그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왕으로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은 앗수르에게 고개 숙일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본 겁니다. 국가적 어려움 가운데 호세아 왕이 하나님을 의지해 어떻게 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을지…하나님에게 돌아가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구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바라 봤어야 하는데 주변에 더 센 나라가 없나를 찾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버리고 택한 대상이 또 다른 강대국이었던 애굽입니다. 결국 호세아 왕이 했던 건 국제정세에 신경 서서 어디에 줄을 대야 살 수 있을까에만 머리 쓰고, 그 머리에서 나온 결과로 친 앗수르에서 친 애굽으로 노선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철저히 무관한 왕,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결정으로 파멸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친 애굽으로 정책을 바꾼 북이스라엘, 배반한 북이스라엘을 앗수르 왕이 가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3년동안 성을 포위하고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때 호세아 왕은 내가 줄 섰던 애굽이 와서 도와주지 않을까…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줄을 대고 의지했던 애굽은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호세야 제 9년에 북이스라엘은 허무하게 앗수르의 손에 완전히 박살나며 멸망하게 됩니다.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멸망을 당해서 나라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주시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의 힘과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고 있다가 하나님이 그걸 확 치우시니까 나라가 확 주저 앉고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기대고 의지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확 치우실 때 내 인생이 주저앉는가 주저 앉지 않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지해야 될 대상 넘버원이 되어야 하는데 북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기대하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것을 치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가 기대하고 의지하는 대상을 하나님이 살짝만 밀어내도 내 인생이 팍삭 주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 주저 앉게 되는 것을 통해 내가 진짜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면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북 이스라엘멸망의 이유이고 많은 사람들이 무너지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났다고 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악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함을 깨닫기 원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로 선택받은 백성들입니다. 영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 된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내 DNA가 우월해서, 내가 신앙생활을 다른 사람보다 잘해서, 내가 남들보다 좀 나은 뭔가가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망하는 길로 들어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들을 의지하는 삶을 지속한다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이렇게 북이스라엘과 같이 파멸과 멸망으로 직면할 수 있음을 경고와 같이 마음에 새기십시오. 망하는 길로 가지 않도록 우리를 이 시간 깨워 주시는 말씀 가운데 내 인생을 두고 돌이키기 원합니다. 그저 아무런 이유와 조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십시오. 망하는 길과 죽을 길에서 생명의 길과 진리의 길로 돌이켜 주님 앞에 다시 묶이고 십자가의 본질로 다시 돌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삶의 원리이자 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내 삶에 거두는 열매를 원인과 결과라는 공식으로 풀려 하는데 일조하는 속담입니다. 특별히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의 자식 농사가 내 인생의 성적표라고 생각을 해서 콩 심은데 콩이 나와야 한다는, 즉 내가 자식을 위해 이렇게 많이 헌신하고 쏟아부었으니 그것에 맞는 원인과 결과를 통해 자식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아시겠지만 그것이 일반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는 그게 맞을지 모르나 그 공식에 맞지 않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는 게 우리 인생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열왕기하 16장 말씀은 아하스 왕에 대해서 증언하는데 이 아하스 왕이 바로 콩 심은데 콩이 나오지 않는 돌연변이의 대표입니다. 아하스의 아버지는 요담 왕이었고 할아버지는 웃시아 왕이었습니다. 이 두왕 모두 인생의 후반전에 무너지는 용두사미의 인생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평가받은 왕들입니다. 어떻게 아하스는 이렇게 시작부터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가? 어떻게 신앙의 부모, 신앙의 조부모 밑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왕, 이런 망나니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가 있어도 자녀들이 이렇게 무너지고 심지어 악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하스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쫓아내셨던 이방신들과 우상을 다시 직수입합니다. 우상숭배를 하는데 특별히 어떤 우상들을 숭배하면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한 죄를 지적합니다. 시애틀 주변은 나무가 너무 많아서 푸른 나무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지만 남유다 지역에는 사막과 황무지이기 때문에 푸른 나무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푸른 나무를 보게 되면 하늘의 복을 받은 나무는 그런 미신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그 푸른 나무 안에는 풍요로움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서 푸른 나무는 항상 자신의 소원을 비는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주변에 살고 있었던 이방 나라들이 그렇게 푸른 나무 우상을 섬겼는데, 아하스는 이런 이방의 우상들을 직수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유다의 골짝과 동산마다 이 푸른나무 제사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수 있는 게 남유다에도 이런 우상과 산당 문제로 무너지고 안 좋은 왕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왕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최악의 행동을 하는 게 아하스 왕인데 바로 이방신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가장 악하고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왕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우상숭배를 넘어 자녀를 불 사이로 지나가며 불태우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끝판왕이 자녀를 불살라 자녀를 불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하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것을 골라 한 왕이 아하스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하스 왕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오늘 말씀 열왕기하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평행 본문인 역대하 28을 보게 되면 전쟁에서 12만 명의 군사가 하루만에 전사하고 20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아무리 많이 죽여도 12만 명이 한꺼번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군인 12만 명이 하루에 죽었다는 것을 통하여 이것은 사람이 죽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치신 징계의 결과라는 것을 엄중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의 악을 치시며 영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20만 명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앞에 아하스는 정신 차리고 돌아왔으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임한 전쟁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제한 채, 하나님에게 돌아오거나 회개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여전히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나라의 운명을 다 맡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하스가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와 심판으로 임한 전쟁의 위기 가운데 누구에게 처음으로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는가 하면 앗수르라는 외세의 힘입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적극적 악인이다 보니까 하나님의 힘 대신 그저 눈에 보이는 대국 앗수르의 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치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똑같이 앗수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하스는 북 이스라엘의 왕들 같이 처음부터 야예 악한 길로 질주한 왕이자, 악한 여인의 대표인 이세벨의 딸 아달라와 쌍두 마차를 이루는 악한 왕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다윗 가문에 모든 씨를 제거하고 무너뜨리며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아달랴 만큼이나 악한 왕, 적극적으로 악의 모습에 동참한 왕이 아하스입니다. 아하스 왕은 바른 신앙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하고 가장 나쁘고 가장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냥 하나님 보시게 악했던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악한 왕의 대표로 증언됩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어 왕 본인 뿐 아니라 남유다 전체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왕이 바로 아하스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잘했어도 아무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잘했어도 인생의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나는 악인 아하스가 나올 수 있고요, 반대로 망나니 같은 부모 밑에서 믿을 수 없게도 신실한 히스기야 같은 왕이 나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 우리 인생의 신비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고 설명할 수 없는 신비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녀는 부모의 인생 성적표가 아님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유다의 반항아, 적극적인 악인인 아하스 왕을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도 있고 내 인생 가운데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콩심은데 콩이 안 나오는 인생, 아무리 좋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어도 이런 자녀가 나올 수 있는 게 설명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생임을 인정하십시오. 우리가 콩을 심었어도 콩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생은 계획대로 공식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겸손히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오며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지 아니하면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십시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더 선명히 붙들고 하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자녀가 내 인생의 성적표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겸손함과 자유함을 가지고 주님 은혜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마지막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온 북 이스라엘의 국운이 다해서 거의 끝나기 일보 직전 마지막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급격히 기울어 멸망을 향해 질주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그 죄악과 잘못된 것이 한결같이 고착화되고 패턴화 되어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 북 이스라엘 왕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한결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겁니다. 이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들이 반복되다 보니 고착화되고 하나의 패턴으로 정착하여 버렸고, 빠져나올 생각 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너무 일반화되고 자연스러워져서 아예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쌓아두면 이렇게 비슷한 패턴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죄를 지을 수 있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죄가 너무 싫어서 죄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쳐야 하고 죄와 싸우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무너진 자리에서 고착화되고 패턴화 되면 죄에 대해 무감각해고 아예 죄에 대해서 싸울 마음조차 없는 겁니다. 죄에서 빠져나오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그냥 고착화 되어 멸망으로 파멸로 질주하는 것입니다. 이게 북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의 모습이고 망하기 직전의 교회의 모습이고 망하기 직전의 개인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패턴화되고 무감각해진 왕, 하나님과 무관한 삶으로 질주하는 대표적인 예로 말씀에 등장합니다. 지금 앗수르라는 큰 나라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내려와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 고착화된 므나헴 왕은 국가적 문제를 어떻게 풉니까? 큰 어려움과 고난이 국가적으로 찾아왔음에 불구하고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하는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고난과 어려움에 개입하기를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은 채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계산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를 스스로 골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 결정, 내 스스로 계산하고 머리 굴린 결정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북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려고 므나헴 왕이 썼던 묘책이 바로 강대국 앗수르에게 은 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는 겁니다. 은 천 달란트는 34톤 정도 하는 어마어마한 양인데, 그 은 34톤을 모아서 앗수르 왕에게 주는 겁니다. 은 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는 방법도 국가가 마치 조직 폭력배와 같이, 그냥 억지로 힘으로 뺏어 버리는 강탈입니다. 그렇게 강대국에 기대서 은 34톤의 조공을 바치며 그것도 강탈하여 백성들에게 뺏는 방법을 동원해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한 겁니다. 국가적인 큰 위기와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에게 나아감으로 나라를 굳게 세우려 하는 대신 강대국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그것도 백성들에게 강탈해서 모은 은 34톤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서 굳게 세우려 한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한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내가 풀 수 없는 큰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그 때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가 그의 이름을 붙드는 것을 통해 일이 풀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왕으로서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하나님을 배제하며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의 결정을 반복하는 겁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 왕은 좋은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큰 어려움이 있어도 큰 기쁨이 있어도, 큰 성공이 있어도 큰 실패가 있어도 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치고 질주하는 마지막의 안타까운 평가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패턴화 되고 고착화되고 나니 북 이스라엘에 배신과 반역이 패턴화되고 고착화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인 스가랴는 므나헴에게 배신당해 살해되고, 므나헴의 아들은 배신으로 베가의 칼에 맞아 죽고요. 베가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될 호세야의 배신으로 살해 당해 죽습니다. 이런 끔찍한 반역과 배신이 한두 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아예 고착화되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배신하고 죽이는 피비린내의 악순환에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무감각해 그래서 반역과 배신의 역사가 계속되는 것, 패턴화되고 고착화 되는 것이 나라가 망하기 바로 직전 북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야가 배신의 칼을 들어 왕을 죽이고 자리에 올라갔을 때, 이 자리가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가 될 것을 전혀 깨닫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지 않고 망하도록 그들을 놔두실 거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반역으로 그 왕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반역하고 죽이고 올라가 나는 이제 왕의 자리에서 평생 떵떵거리고 살겠다고 착각하며 앉아있는 호세아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어리석음일 수 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천년 만년 살 거 같이 나에게 기회가 영원히 있는 거와 같이 오늘도 살아가는데 오늘 주시는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게 인생입니다. 오늘 주어지는 그 선택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선택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급격히 기우는 국운,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질주하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주시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의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죄에 이렇게 고착화되고 패턴화되고 무감각해질 수 있다 경고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성도에게 눈에 보이는 성공은 성공이 아닐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실패는 실패가 아닐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공하고 나서 그 성공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떠나가게 만들면 그 성공은 결국 실패입니다. 반대로 실패와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만든다면 그 실패의 어려움은 결국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성공과 실패, 기쁜 일과 슬픈 일, 내 삶의 고난과 어려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만 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에게 복으로 만들어 주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결정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철저히 배제하고 무관한 삶의 결정을 하게 되면 그게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는 삶입니다. 죽은 낙엽과 같이 흐르는 물에 떠내려 내려가는 신앙생활, 사람과 환경을 붙들고 머리를 굴리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해결하려는 신앙 생활을 경계하십시오. 이 고착화되고 패턴화 된 나의 영적 무감각을 깨고 이 경고의 메시지를 내 마음에 새기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아 오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마샤의 아들, 역대기에서는 웃시야 왕으로 알려진 아사랴 왕에 대해 증언합니다. 아사랴 왕은 무려 52년동안 남 유다를 통치한 대단한 왕으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북 이스라엘이던, 남 유다던 모든 왕을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이 여호와 보시기에 어떠한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가 악한가….그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평가인 겁니다. 모든 왕들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동일하게 인생 평가의 기본 공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 어떠한가…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로서 살아가는 내 인생에서 고려할 가장 첫번째는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 어떠한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늘을 향하여 내 마음이 들리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야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고, 그 지혜가 있을 때 나의 삶이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하는 형통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만드시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그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았던 것이 다 망가지고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국의 역사도 하나님 보시기에 점점 보시기 안 좋은 영적 내리막길, 다 망가지고 깨지는 길로 질주합니다.
아마샤 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기에 온전함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증언합니다. 첫번째 문제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산당에서 여전히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다면 왜 남 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하나같이 산당을 없애지 않았는가? 백성들이 자신들의 필요와 원함을 채워주는 산당을 좋아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고, 내 편의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당에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화 되고 도구화되는 것을 너무나 원하기 때문에 결국 백성들이 원하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겁니다. 산당은 제거하지 않은 것을 사람들은 별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하나님 보시기에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아사랴 왕의 문제는 인생 후반전에 영적 교만으로 무너지는 문제입니다. 왕으로서 52년의 통치 기간 가운데 후반전은 왜곡과 변질로 무너지는 영적 내리막길의 길을 가게 됩니다. 아사랴왕의 아버지 아마샤, 할아버지인 요아스 왕도 동일하게 용두사미의 길을 갔습니다. 인생 전반전에 하나님께 순전하고 정직했는데, 후반전에 교만으로 넘어지며 무너졌습니다. 그 용두사미의 인생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손자도 똑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아사랴왕의 후반전을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했다는 1절로 매우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6장을 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 아사랴 왕을 치셔서 그가 나병환자가 되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바운더리와 경계를 자꾸 허물고 무너지게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제사장이 할 일을 왕이 못할 게 뭐냐며 그 질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분향하려 합니다. 제사장들이 와서 목숨을 걸고 아사랴 왕을 막아서자 그들을 밀치고 손으로 향로를 잡으려는 순간 왕의 몸에 나병이 확 퍼졌습니다. 모세 오경을 보게 되면 아론의 두 아들들이 성전에 불을 잘못 만져서 죽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지정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하나님이 치셔서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사랴 왕이 막아서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며 손으로 잡고 분향 하려는 찰나에 나병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치신 징계라는 것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일반적으로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다는 것은 영적 감각이 다 무뎌지고 다 사라지는 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먹어야 될 거먹지 말아야 될 것, 찬밥 더운 , 나아갈 때와 머물 때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임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질서와 우선순위와 바운더리를 다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무너지게 되어 나병에 걸린 아사랴 왕은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하고 그렇게 후반전은 좋지 않은 인생으로 끝나게 되는 겁니다. 아사랴 왕이 인생 후반전에 그렇게 무너지게 된 이유는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형통함과 강성함을 주셨는데 그럴 때 하나님께 더 매달리며 하나님께 겸손하게 쓰임 받아야 되는데 강성해지고 형통해지자 마음이 교만해 지는 겁니다. 나라가 이렇게 잘되는 게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잘해 가지고 내가 앞서서 헌신해서, 내 리더십이 탁월해서 이렇게 잘 됐다고 자꾸 공로를 취하려 보니까 점점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사랴 왕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하나님 보시게 정직했다고 평가하시는 겁니다. 그런 실수와 과오, 영적 내리막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그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는 겁니다. 반면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으로 평가 받습니다. 남유다 왕들은 용두사미, 즉 전반적에는 좋았다가 후반전에는 변질과 왜곡으로 무너지는 패턴이고 북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전반전부터 무너지는 한결같이 악한 패턴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유다 왕들도, 북이스라엘 왕들도 둘 다 무너지고 안타까운 왕이지만 그나마 성경은 북 이스라엘보다 남유다가 낫다는 겁니다. 남유다가 완벽해서 나은게 아니라 북 이스라엘 왕들이 하도 악하고 안 좋으니까 그나마 낫다는 안타까운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처음부터 질주하는 북 이스라엘 왕은 여섯 달만에 배신이 일어나서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신을 통해 왕위에 오른 다음 왕은 불과 한 달 만에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반역을 당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삶을 견지한 북이스라엘에 반역과 배신과 피바람이 계속 몰아치는 것입니다. 완전한 어둠과 무질서로 나라가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팍삭 주저앉고 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이럴 수 있습니까? 왕도 하나님의 백성도 이럴 수 있기에 말씀으로 우리는 찌르시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한때 열심히 있고 한때 주님께 순전하고 한때 주님을 바라보고 정직히 살다 인생 후반전에 이렇게 무너지고 타락하고 자빠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아예 무너지며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삶, 전반전은 괜찮다가 후반전에 무너지는 용두사미의 삶은 우리 삶에 반면교사로 주신 경고임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처음부터 비참한 인생도, 처음에는 괜찮다 끝에 가서 비참한 인생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이 새벽에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하루 첫 시간을 드리며 이 자리에 나올 때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귀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 우선에 두고 살아가시기를 살아가십시오. 이런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영적 감각이 사라지도록 방치하지 말고 영적 겸손함과 민감함을 가지고 주님이 주신 축복이 가운데 나의 인생이 끝까지 머물러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여호와 앞에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왕의 역사를 통해 증언하는데 두 나라 공통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멸망을 향한 내리막길로 질주합니다. 남유다는 요아스와 아마샤로 이어지는 용두사미, 즉 처음에는 하나님에게 신실했다가 나중에 변질되고 타락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면 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악한 모습으로 우상숭배와 타락에서 떠나지 않고, 결국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으로 결론짓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동명이인이기에 보통 여로보암 2세로 부르는데, 41년 동안 왕으로서 있으며 받은 하나님의 평가는 아주 냉정합니다. 여로보암의 이름값을 하듯이 조상 여로보암의 악한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악한 왕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로보암 2세로 말미암아 경제 재건과 나라를 확장시킨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41년동안 왕으로 있으며 겉보기에는 굉장히 대단했고 놀라운 업적을 많이 세운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가 따라간 여로보암의 죄는 여러 가지로 우리가 표현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현실적으로 유리하면 그 유리한 길을 기쁨으로 선택하며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 여로보암 2세의 선택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으냐 옳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잘 지내는데 현실적으로 더 유리하냐, 유리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죠. 대표적 예로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 없으니까 여기 가까운 곳에서 편하고 쉽고 간단하게 예배 드리라며 북 이스라엘에 산당을 만들고 우상을 만드는 것이 여로보암의 실용주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안정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은 언제든지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 이게 북 이스라엘의 신앙 타락과 우상숭배로 변질된 여로보암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 신앙적 선택보다는 현실적인 결과가 항상 중요하게 살았던 실용주의 노선을 갔던 사람이 여로보암 2세이고, 그런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시는 겁니다. 사실 이 모든 업적들은 여로보암 2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하여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약속해 주신 결과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선지자 요나에 대해서 굉장히 좀 미숙하고 불평 많은 선지자로 여기지만 사실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특별히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재건과 확장의 약속을 대언한 훌륭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때 그렇게 놀라운 축복으로 경제가 부흥하고 나라가 커지고 확장하게 되는 것을 통하여 정말 원했던 것은 영적인 재건이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재건을 넘어, 나라의 안정과 재건을 넘어 하나님만을 섬기는 시간으로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신앙의 재건을 정말 원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이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 때 경제가 부흥하고 이스라엘 영토를 많이 회복하게 하시며, 북 이스라엘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랍게 영토가 확장되며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삶이 윤택해졌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신앙의 기준이 분명히 서 있는 왕이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나같이 부족한 것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면서 이렇게 복을 주셨구나….믿으며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와 기회로 삼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대단해서, 나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 이루어진 결과라고 착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안정으로 먹고 살만 해지고 영토 확장이 형통이라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국토는 확장되고 경제는 나아져서 백성들은 살만 해졌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전혀 형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제 재건이 전혀 신앙 재건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부국강병과 경제 재건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형통은 바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늘 누리고 살아가는 것임을 철저히 망각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로보암 2세의 겉보기에 수많은 업적들과 경제 재건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형통을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간 왕, 하나님을 바라 보지 않은 왕을 하나님께서는 왜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부국강병과 영토확장, 경제 부흥이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이것은 형통이 아니라 재앙이고 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삶이 어렵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도구가 되어 은혜를 구한다면 그 잠시의 어려움과 고통의 눈물이 곧 지나가고 결국 우리에게 하늘의 축복이 이어지게 하는 도구가 되는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기를 계속하며 온 나라를 영적인 내리막길로 걷게 만들고 영적 재건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다가올 파멸과 멸망의 길로 질주하게 하는 나쁜 왕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이런 똑같은 문제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눈에 보이는 열매들이 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가 될 때만 진정한 형통입니다. 이 모든 게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게 축복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열매들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한다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의 거울로 삼아 그 어떤 것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부유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나의 형통의 기준이며 나의 신앙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내 삶의 생사 화복이 내 삶의 모든 기쁜 일과 슬픈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관심사와 초점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맞춰져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형통임을 믿으며 주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14장 말씀은 남유다 요아스 왕이 가까운 신복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는 것을 증언합니다. 아버지의 과오를 뒤로하고 라도 가장 가까웠던 신하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봤으니, 아마샤의 마음 상태는 얼마나 불안했을 지 상상해봅니다. 아버지가 살해 당한 후 그렇게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서 왕의 자리에 올라간 아마샤는 감사하게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마치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전반기에는 한결같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나아갔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 신실하고 정직한 왕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보시게 정직하게 행하기는 했는데 온전한 마음으로 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긴 했는데, 조상 다윗과 같지는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나, 전심으로, 온전하게 다윗과 같이 순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전심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예 악한 왕이면 기대도 안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데 완전히 전심으로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모습이 아마샤왕, '분명히 하나님 앞에 괜찮은 거 같은데 뭔가 2% 부족했다는 진한 아쉬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다윗과 같이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말은 다윗과 같이 완벽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다윗의 인생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게 오답이라는 것을 분명합니다. 다윗과 같이 전심으로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며 가는 삶이란 승리해도 하나님만 바라고 나아오고, 실수해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삶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흠 없고 문제 하나도 일으키지 않으며 완벽한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시각에서는 그런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밑에 감추어진 뿌리, 마음의 중심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윗은 언제나 그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합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식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잘 나가며 성공할 때나, 실패하고 넘어질 때나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문제를 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완벽하고 흠이 없는 삶을 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다윗과 같이 정직한 인생입니다. 승리해도 실수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오고, 자빠지고 실수해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겁니다. 나의 승리도 나의 실수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바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 신앙생활이 자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한다거나 껍데기를 가지고 신앙의 모든 것을 재단하려고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좋은 신앙 생활을 넘어 하나님 바라보시기 좋은 신앙 생활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중심을 하나님께 두며 살아가는 삶, 바로 다윗의 순전함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아마샤 왕이 그의 인생 전반기에 하나님에게 정직한 왕으로 평가 받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사건 하나를 증언합니다. 그게 바로 왕으로서 감정대로 보복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순종한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요아스왕이 측근에게 살해 돼서 왕 위에 올랐습니다. 자신도 언제나 살해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마침내 나라가 그의 손에 안정적으로 모든 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권한이 생겼습니다. 그 때 감정을 실어서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모든 인간의 마음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한대 쳤으면 한 대로 갚아주는 게 아니라 열 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반역한 사람들에게 삼족을 멸한다….즉 삼대를 죽이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 왕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지를 섬기다가 배반하여 죽인 그 배신자들만 법에 따라 죽였습니다. 가족들에게 연좌죄를 물어 삼대를 멸한다거나, 감정으로 보복하지 않고 당사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살려줬다는 겁니다. 이유는 단 하나, 모세의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으로서 드는 감정에 따라 보복하는 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법이 정한만큼만 처단한 겁니다. 내 감정대로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지켜낸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아마샤 왕은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힘과 권한이 있었고 아무도 뭐라 그럴 수 없는 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버지가 그렇게 살해당한 것이 아들인 본인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멍이 되었겠습니까? 억울하게 살해당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보복의 감정이 확 올라오고, 이 배반자들의 씨를 진멸하고 다 말려야 된다는 좋은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 말씀 아래 내려놓고 그 당사자들만 딱 처단한 겁니다. 되로 준 것을 말로 갚아야 한다는 나의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감정에 따라 보복하지 않고 말씀이 멈추라 하신 곳에서 순종하며 딱 멈춰선 것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삶이란 내 감정대로 내 마음대로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고 말씀이 허락한 데까지만 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다윗과 같이 더 전심으로 온전히 나아가기 원하시는 마음이 녹아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신앙 생활이 사람들 앞에서의 보여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붙드는 삶을 살아가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나의 인생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인식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며 나의 삶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오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내 신앙 생활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인생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내 마음대로 내 감정이 이끄는 대로 내 힘을 마음대로 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기까지만 가서 내 복수의 칼을 내려놓고 정확하게 기준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영적인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심지어 그게 내 감정이 폭발하는 보복 일지라도 말씀이 멈추라 하신 지점에서 멈추고 내려놓는 순종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말씀으로 나를 되새겨보며, 말씀의 기준으로 내 인생을 묶으며,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며 온전히 나아가는 그 열망이 우리 가운데 선명히 회복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엘리사 선지자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가장 유명한 선지자들로 이 두 선지자만큼 이렇게 굵직한 인생을 산 하나님의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엘리사와 엘리야가 위대하고 유명했다는 말은 반대로 그 시대는 참으로 어두운 시절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 시대에 놀랍게 쓰임 받던 엘리야도 하늘로 올라가고, 그의 제자였던 엘리사도 이제 죽을 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렸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며 말씀을 놀랍게 대언하며 살았던 광야의 예언자 엘리사, 영원히 생명력 있게 쓰임 받으며 함께할 것 같았는데 때가 되니까 엘리사도 죽을 병에 걸려 결국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놀랍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사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듯 잠시 쓰임 받고 떠나는 겁니다. 엘리사와 같이 이렇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한때 쓰임 받고 그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연결해 주는 것을 잊지 않는 게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 잠시 살아가며 내가 잠시 쓰임 받으며 잠시 하나님의 손에 놀라운 역사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쓰임 받을 그 때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쓰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엘리사, 죽을 병에 걸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엘리사에게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요아스가 찾아옵니다. 찾아와서는 왕이 엘리사 선지자의 임박한 죽음을 보며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여 아버지여 내 이스라엘의 병과 마병이여…통곡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참 요아스 왕에게는 특별한 반응인 게, 만일 하나님께 정직하고 신실한 왕이었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선지자 엘리사와 가까이했던 왕이라면, 엘리사 선지자의 임박한 죽음이 그에게는 큰 슬픔으로 다가왔고 이렇게 통곡하는 게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아스 왕은 분명히 하나님 보시기 악한 왕이었다고 정확하게 평가받았던 왕이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는 것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곁길로 간 왕이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는 과거 스승이었던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로 바람 타고 승천할 때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 악한 왕인 요아스가 왜 엘리사 선지자가 죽을 때 그렇게 찾아서 눈을 흘리면서 그렇게 특별히 애통해하는가…굉장히 특별한 의외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악한 요아스 왕은 엘리사 선자가 죽는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병거와 마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요아스가 갑자기 하나님께 돌아서서 회개하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인가?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요아스 왕이 지금 너무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아스 왕이 통치하고 있을 때 북 이스라엘은 거의 군사력이 바닥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때로부터 요아스때까지 아람이 거의 동네북과 같이 북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동네북처럼 공격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 몽고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듯, 그렇게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의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번을 공격하고 나서 아예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주변 나라로부터 내정간섭을 당하니까 요아스는 왕으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합니까? 그런데 싸워야 되는데 요아스는 지금 너무 힘이 약한 겁니다. 군사력이 너무 바닥이고 싸워야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나마 그에게 소망으로 가지고 있었던 건 엘리사 선지자가 하늘로부터 마병과 병거로 자기 나라 북이스라엘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는데 그 엘리사 선지자마저 지금 떠나려고 하니까, 두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슬퍼서 눈물을 흘린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죽어가서 슬퍼하는 게 아니라 엘리사가 죽은 후에 직면할 자신의 처지와 북 이스라엘의 처지가 너무 한심하니까 이 악한 왕도 그렇게 찾아와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이렇게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악한 왕 요아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불쌍히 여기며 은혜로 회복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십니다. 지금 엘리사는 죽을 병에 걸려 자기 몸을 건사하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힘들었을지 모르는데 정말 모든 힘을 모아 마지막으로 왕에게 유언과 같이 얘기하는 겁니다. 그 몸을 일으켜서 왕에게 나를 잡으라 말하고, 화살을 보여주며 이 화살은 여호와의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임을 알려줍니다. 악한 왕임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있는 왕임 불구하고 너와 북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능력 구원의 화살이 되어 너를 다시 한번 도와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놀라운 약속을 엘리사가 죽기 직전에 요아스 왕에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시고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그렇게 악한 왕이지만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찾아와 은혜를 구할 때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외면하지 아니하시며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고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 입니다. 그 화살을 붙들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해서 아람과 싸워 이기게 하실 것을 약속의 말씀으로 주신 겁니다. 그러면 요아스 왕이 말씀 앞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시면 나는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주님만 믿고 나아가겠습니다… 이런 수용하는 마음과 간절한 순종이 그의 반응 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아스가 그 믿음의 온전한 순종과 간절한 반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땅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가 얼마나 믿고 신뢰하며 그것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갈까 대한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그런데 땅을 치라 그랬는데 몇 번 안 친 겁니다. 힘이 닿는 만큼 쳐야 되는데 죽을 힘을 다해 쳐야 되는데 그냥 몇 번 하다 만 겁니다. 그랬더니 죽을 병에 걸려 임종을 앞에 두고 있는 이 엘리사 선지자가 말할 힘도 없는데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화를 젖먹던 힘을 다 짜내어 화를 내는 겁니다.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라 그리하면 왕이 아람을 멸하기까지 힘을 주셨을텐데…왜 반만 치고 끝납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의탁하지 못해서 딱 반만 가니까 거기서 멈춰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 악한왕 요아스 앞에서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망하는 것을 끝으로 엘리사는 죽게 됩니다. 그게 엘리사가 했던 사역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죽을 병에 벌려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로서 끝까지 잘못된 지도자들을 통하며 화를 내며 그들을 교정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겁니다. 결론은 엘리사가 말한 그대로 아람 군대를 요시아왕은 딱 세번만 이기게 된다는 것으로 말씀이 끝납니다. 그 막강한 아람 군대에 요아스는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적과 같이 그들을 세 번이나 쳐서 찌르는 역사가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인생을 던졌다면 그는 여섯 번 일곱 번 계속해서 진멸할 때까지 승리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을 향한 반쪽 믿음으로 말미암아, 딱 거기 까지가 승리의 전부였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이 말씀대로 펼쳐지는 것을 위해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시어 이스라엘 왕들을 책망하며 바른 길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놀랍게 쓰임 받았던 엘리사도 때가 되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됐던 것처럼 우리 또한 잠시 이 세상을 살고 잠시 쓰임 받다 떠날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떠나가고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존재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영원히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진리임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의 인생을 던지며 쓰임받는 잠시의 시간에 온전히 순 종하여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 지는데 진정한 갈망과 열망으로 선명히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후와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던 예후의 아들이었던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였던 요아스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은 예후로 의해 모든 것이 변하고 완전히 새로워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 받으며 예후는 아합 가문은 철저히 진멸하고 바알 우상들과 선지자들을 모두 무너뜨리며 새롭게 북 이스라엘을 세우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통째로 변화되는 것을 통하여 이제 이 나라가 새롭게 되며 새 출발 할 것 같은 큰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모습으로 북 이스라엘이 탈바꿈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후 이후 그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정말 그렇게 몰라보게 달라졌는가? 정말 그 나라가 그렇게 새롭게 되었는가? 안타깝게도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후 이후에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새로운 왕으로 바뀌자마자 옛적 모습으로 뒤돌아가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여호아하스의 의미가 “여호와가 붙들었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얼마나 이름이 좋습니까? 그런데 여호아하스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 예후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허무하게도 정반대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죄를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렸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름값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려 타락했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여호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람 군대라는 경고의 채찍을 보내셨습니다. 그 경고의 채찍을 통해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기 원하시는 아비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쳐들어왔고 북이스라엘은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공격과 수치를 당했는가 하면 마치 조선시대에 몽고가 세운 청나라로부터 받은 공격과 수치와 비슷합니다. 조선 시대 역사를 보게 되면 몽고가 청나라를 만들고 조선을 쳐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병자 호란으로 승리하고, 왕이었던 인조가 땅에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대고 그렇게 비참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청나라가 승리 후 돌아가서 끝난게 아니라 계속 조선의 조정에 내정 간섭을 하게 됩니다. 자꾸 이래라 저래라 위에서 자꾸 지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람 군대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해 승리한 이후,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 바로 내정 간섭을 심하게 하며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여호아하스가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또 하나님은 그를 불쌍하게 보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자를 북 이스라엘에게 보내셔서 아람의 공격과 수치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을 건져 주십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으면 여호아하스 왕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하며 이름값 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조율 받는 인생으로 하나님에게 붙들려 사는 삶을 살아가고, 아버지 예후의 모습으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기회를 더 주시고 은혜로 건져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아하스는 하나님에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에 묶여 떠나지 아니하고 심지어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큰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고 구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붙들려 사는 삶 대신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악한 삶을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주셔서 그 죽을 위기 가운데 아람의 손에서 건져 주셨는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가 완전히 그들을 박살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이번엔 아람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것입니다. 비행기 다섯 대, 탱크 10대 정도만 남기고 모두 박살이 나는 큰 패배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후의 손자이자 여호아하스의 아들이었던 요아스가 등장하는데, 그 또한 역시나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따라가는 삶을 답습했습니다. 아버지 여호아하스의 안 좋은점을 그대로 닮아 따라하는 겁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에 뒹굴며 사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는 죄악의 삶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이 북 이스라엘 왕들에게서 다시 한번 삶의 패턴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며 죄에 붙들려 죄에서 떠나지 못한 왕이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 요아스였습니다. 예후가 이루어 놓았고 닦아 놓았던 모든 개혁과 새로운 물결이 끊어지고 예전 모습으로 회귀하는 안타까운 모습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에게 묶이는 대시 죄에 묶여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이 악한 모습으로 왜 자꾸 회귀하고 돌아가려 합니까? 인간의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붙드는 대신 나를 의지하고 붙드는 삶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옛날 이야기로 끝나면 안되고, 우리 또한 이런 똑같은 패턴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이제는 새롭게 나라가 다시 새 출발 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실망스럽게 옛적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북이스라엘 왕들을 바라보면서 사실 이게 우리의 모습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정신 못 차리고 가만히 있으면 죄에 묶여 떠나가지 않고, 죄에 머무르며 죄를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죄에 묶여 머물러 있는 것을 거절하는 삶이고, 죄를 따라가는 대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이란 죄에 붙들리지 않는 삶입니다. 죄 문제를 그 어떤 것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삶입니다. 이 시간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고,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죄에 붙들려 사는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 붙들려 사는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죄에 붙들리고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처절히 절망하며 이 시간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여호아하스와 요아스를 반면교사 삼아 죄에서 떠나가며 단절하며 죄에 붙들리는 대신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유일한 다윗의 혈통 요아스는 40년동안 남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의 전반기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행했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정직하고 신실했던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성전 수리를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 낡고 초라해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요아스 왕에게 성전은 그냥 신앙을 재건하는 하나님을 향한 봉헌의 의미를 훨씬 넘어섭니다. 요아스가 태어나서 한 살에 도망가 일곱살이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성전에서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마음의 고향이자 자기를 살려준 특별한 장소이기에 그 성전에 대한 애착이 남유다의 다른 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으로 그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고 나서 요아스 왕은 성전 중수하고 재건하는데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됩니다. 성전을 수리하는데 있어 모든 결정과 헌금 사용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성전을 잘 수리하는데 사용됐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 정직하게 행하게 되는 참으로 중요한 업적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동시에 이 말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요아스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실패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에 요아스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 후반전에 무너지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요아스 왕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큰 화근이 되는 것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일입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성들의 일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그 산당들을 놔뒀다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 무엇으로 변질되는가 하면 우상숭배의 현장으로 왜곡되고 변질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강조하셨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불순종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되는데, 이 분명한 기준 앞에 그가 끝까지 온전히 전심으로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은 후 결국 이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 때문에 나중에 백성에게도 왕 본인에게도 바른 길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삶의 스승이자 멘토였던 여호야다가 죽고 나서 요아스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왕이 되었고,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이 자리까지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니까 내가 잘해서 왕이 되고 내가 잘해서 이 나라가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전 수리했던 요아스가, 인생의 후반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펼쳐 보려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각하지 않고 나를 부각하려고 하니, 내가 대단해 보이는 것을 부각하는 산당을 통해, 바알 우상숭배의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수하고 재건하고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보이지 않는 신앙을 더 분명히 세우기 위한 고백으로 나아가게 했어야 하는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 왕은 이 본질을 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강조했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순종으로 나아 갔어야 하는데 정반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성전은 수리되어 겉모습을 괜찮게 세워졌는데, 실제로 보이지 않는 성전은 점점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전은 멋지게 세워졌는데 보이지 않는 성전은 무너져서 그 틈으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성전을 재건했던 놀라운 업적을 뒤로 한 채, 요아스 왕 통치 후반에 산당을 중심으로 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들이 확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 열왕기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평행 본문인 역대기를 보게 되면, 이렇게 변질되고 내리막길로 질주하는 요아스 왕을 건지시기 위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게 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경고합니다. 그런데 요아스 왕은 이미 들을 귀를 상실해서 자신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평생 멘토이자 스승이었던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를 죽여버립니다. 그러니까 요아스 왕의 후반전에 안타까움은 그렇게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이상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말씀을 들을 귀가 없어진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내가 너무 높아진 겁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나락과 내리막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질되고 무너진 요아스 왕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그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살해 당하며 그 인생이 비참하게 끝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말 칼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인생을 살려서 성전에서 그렇게 숨겨서 7 살까지 키웠고 거룩한 쿠테타 이후에 드디어 왕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40년을 통치했는데 그의 말로는 결국 가까운 심복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끝나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결론은 인생을 어떻게 끝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요아스 왕은 유일하게 남은 다윗 혈통으로 기적과 같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는 대표적인 왕이 돼 버렸고, 그의 인생 결론은 용두사미로 끝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높는 대신 보이는 우상을 붙들고 나를 높이고 참 신앙에서 이탈하는 요아스 왕, 그래서 그의 인생 후반전은 완전히 변질되고 타락하는 내리막길로 가게 됩니다. 처음이 아무리 좋았어도 우리의 끝이 이렇게 무너지면 심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첫사랑을 기억하고 나를 끊임없이 돌아오기 원하시고 교정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들려질 때 외면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엎드릴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며, 보이는 성전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성전을 끝까지 지키며, 끝까지 주님을 향하여 순전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결론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한 여인 아달랴의 손에 모든 다윗의 씨앗이 진멸당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남은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 요아스는 극적으로 피신해서 성전에서 6년 동안 숨겨 몰래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거룩한 쿠테타를 통해 아달랴는 죽게 되고 7살된 유일한 다윗의 혈통 요아스가 왕위에 올라 새 시대가 열리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정말 꺼지기 일보직전인 다윗 가문의 혈통이 일곱살 된 요아스가 살아남아 왕이 됨으로서 다시 한번 불이 붙어서 소망의 불을 다시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7 살짜리가 왕이 된다는 것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왕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이 아이가 죽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그런 요아스를 잘 보필하고 끝까지 그가 잘할 수 있도록 도은 사람이 바로 제사장 여호야다입니다. 여호야다가 없었으면 요아스는 살아남지 못했고 왕이 되지도 못했으며 그 시대에 그렇게 쓰임 받지도 못했을 겁니다. 일곱살의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이런 여호야다의 든든한 후원 덕에 40년 동안 남유다의 왕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 눈에 보기에는 모든 게 끝난 것 같고, 소망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을 이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혈통이 내려가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꺼져 가는 등불을 살리듯 여러 우여 곡절과 기적을 통과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 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요아스가 일곱살에 왕이 되며 마지막 남은 다윗 왕가의 혈통이 계속 계승되는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 환경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세상은 불법과 악한 여인인 아달리 같은 세상의 문화와 흐름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우리 스스로는 지켜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어둡고 절망스러운 때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를 구하시고 건지시는 분이 계시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고 내 스스로는 버틸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호해주시고 지켜 주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성도로서 우리가 여전히 서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남유다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다윗 혈통 요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하게 되듯이 복음에 이르는 말씀을 통해 기적과 같이 나를 세우시는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남유다를 40년동안 통치한 요아스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등장하는데,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모든 날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전반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좋은데, 거기에 전제조건이 붙은 게 뭐냐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 앞에 좋았다는 겁니다. 그만큼 여호야다가 요아스 왕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겁니다. 영적인 멘토이자 스승이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여호야다가 그를 가르치는 동안에는 하나님 보시게 정직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교훈하고 가르치며 나를 바로잡아줄 영적 스승이 있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의 미성숙의 시절에 나를 이렇게 바로 잡아주고 나를 깨우쳐줄 그런 영적인 스승과 어른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복 중의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아스 왕은 제사장 여호야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 안에 바르게 잘 자라 하나님 앞에 남유다를 잘 통치했다는 것이죠. 요아스가 인생의 전반기에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바로 그의 성전 수리를 향한 열망을 증언합니다. 요아스 왕이 하나님께 신실한 왕으로 쓰임 받았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마음의 뜻이 성전을 다시 한번 수리하고 변화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세워졌던 성전이 너무나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나서 방치되어 예전에 그 모습이 사라진 채 이곳 저곳이 낡고 부서져 초라하다 못해 안타까운 상태였습니다. 잘 고쳐지지 않아 흉물과 같이 방치되어 버린 성전을 바라보면서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 이 성전을 잘 수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성전 수리하는 그 뜻을 그가 품고 구체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전 수리에 대한 일을 추진하려고 보니까 제사장들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그 일이 잘 진척되지 않는 겁니다. 제사장들이 건축이나 건물 수리의 전문가들도 아닌데다가 그 책임에 대해서 오랫동안 방임하고 있었기에 성전 수리의 길이 지지부진한 겁니다. 그래서 요시아 왕이 무슨 명령을 내리냐 하면 제사장들이 직접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은 제사 업무에만 집중하고 헌금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대서 일이 원활하게 추진되도록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드려진 헌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성전 수리의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제사장들은 제사장 본의 일을 감당하면서, 구체적 실무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면서 그 일이 속히 추진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사도행전이 있었는데 초대교회가 은혜롭게 잘 성장하고 부흥하는 가운데 교회 안에 구제 문제로 분란과 다툼,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 일로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는데 그때 초대교회가 기도로 한 결정은, 사도들은 그 일을 더 잘해야 한다고 책임을 모는 대신, 책임을 배분하고 나누는 결정입니다. 사도의 일을 정확하게 구별해 말씀과 기도에만 집중하게 하고 실무적인 일들은 집사들을 세워서 그들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와 집중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한 이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선명하게 일하게 된 것입니다. 요시야는 그 낡아진 성전을 보수하고 바꾸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성전도, 마음의 성전 속에 자리잡은 나의 낡은 신앙도 새롭게 된다는 것을 믿으며 성전 수리에 뜻을 두고 추친 하면서 하나님께 기쁨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고 세우는 것을 보이지 않는 성전이 새롭게 수리되며, 마음이 새로워짐을 통하여 예배가 회복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망과 순전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 것이고 그것이 요시야 왕이 하나님께 정직하다 평가받는 본질적 이유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작은 촛불 요시아를 통해 왕위가 계승되어 다윗의 혈통을 이어가는 기적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이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며 그 신앙이 계승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꺼져가는 것 같은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선 그 약속을 이어 가시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워 가심을 신뢰하십시오. 그런 요시아 왕이 있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동시에 그를 가르치고 보호하며 바로 잡아줄 영적 스승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도 그런 영적 스승을 가까이 두기를 열망하고 그런 스승을 찾아 가까이하며 신앙 생활하기 원합니다.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는 열망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 마음속 성전을 새롭게 수리하는 열망이었음을 잊지 말고, 내 마음이 새롭게 수리되고 내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새롭게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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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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