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들이자 세번째로 왕이 되는 여호람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남유다는 계속해서 여호사밧 왕이었는데 북 이스라엘은 아합왕에 이어 세번째로 왕에 세워집니다. 여호람 왕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평가인 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지는 아니하였으니…” 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분명히 여호람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악한 자였기에 부정 평가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 만큼 악하지는 않다는 평가, 긍정 평가라고 할 수는 없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평가가 끝나면 되는데 하도 북 이스라엘에 불순종하고 배반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그 악한 자들 가운데 이 여호람은 좀 좋은 편에 속하는 악한 자였다고 어떻게든 좀 좋게 평가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한 왕이라도 말씀 가운데 정신차리며 본질로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녹아져 있습니다. 여호람 왕이 그 부모보다 그래도 낫다고 하나님께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주상을 다 없앴기 때문입니다. 주상을 북 이스라엘에서 모두 없앤다는 건 왕이어도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 백성들의 함께하는 뿌리깊이 내려오고 있는 우상숭배 근원이 되고 상징이 되었던 것이 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상을 없앤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과 반발을 직면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놀라운 결단을 통해 그렇게 주상을 모두 없앴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악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람 왕은 부모보다 훨씬 나은 존재이고 훨씬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왕들에 대한 일관적인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이 잣대로 우리 모두를 평가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내 인생 평가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 천국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분명히 실체로 함께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분명한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 인생은 어떠한가…를 늘 인식하고 내 삶을 돌아보며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바라보고 계시고 평가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한가…세상 기준으로 어떠한가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정말 중요한 인생 가치로 두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평가를 민감하게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내 삶을 두며 살아갈 때, 아합왕와 같은 부정 평가, 여호람과 같은 씁쓸한 평가를 받지 않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주님의 길을 동행하게 될 줄 믿습니다. 또 하나 여호람 왕의 평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등장하는데 배반한 모압을 향한 연합군의 전쟁입니다. 여호람 왕이 직면하게 되는 모압과 전쟁, 남유다 여호사밧 왕에 함께 연합군을 조직해 모압과 전쟁을 벌이려 합니다. 모압은 원래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는데 모압이 배신을 하고 나니까 여호람 왕은 그 모압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전쟁이 하나님의 뜻에 옳은 지 아닌지, 하나님이 함께 싸우시는 전쟁인지 아닌지 고려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 생각에 배신한 자들을 가만 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앞서 전쟁을 밀어 부치고, 하나님을 찾는 대신 눈에 보이는 이웃이었던 남 유다 여호사밧왕을 함께 전쟁에 끌어들입니다. 그 초대에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 심사숙고하거나 하나님께 분별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대신,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전쟁 참여를 결정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성은 당신의 성과 같고, 내 말들은 당신의 말들과 같다면서 적극적 전쟁 참여를 결정합니다. 여호사밧왕의 인생 후반전의 문제는 아합왕으로부터 좋지 않은 영향이 그에게 흘러 들어와서 변질과 왜곡을 지속하게 하는데, 또 한번 실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유다를 끌어들여서 함께 전쟁하면 겉으로 보면 세가 커져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국 망하는 전쟁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전쟁에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주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은 이렇게 연합군을 조직해 모압을 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전쟁의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 가운데 척척 계산대로 진행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모시지 않은 전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아가는 전쟁길 앞에 그들은 생각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가 하면 떠난지 7일 만에 군사들도 가축들도 먹을 물이 딱 떨어져 목말라 죽게 생긴 겁니다. 전쟁에서 보급은 필수인데 먹을 것은 고사하고 먹을 물이 없으니까 사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하여 위기 속에 갑자기 찾아온 것은 왜곡되고 과장된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당하는 겁니다. 아 슬프다….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모압의 손에 넘기려고 하시는구나…전쟁은 해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목말라 죽겠구나…탄식합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을 그렇게 찾았다고…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 두려움에 빠지니까 다 하나님 탓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자문도 구하지 않고 전쟁에 뛰어 들고서는,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과 위기 속에 하나님을 배제한 자신들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에 보냈다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모압의 손에 죽었구나…벌벌 떨고 두려움에 압도당하는 그 때, 남 유다 여호사밧은 또 한번 정신을 차리고 다르게 반응합니다.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지금 물이 떨어져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말라 죽을 것 같은 전쟁터의 절박한 상황 가운데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우리는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말고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볼 수 있는 선지자가 가까이에 있는지를 먼저 찾아야 한다며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 당하여 벌벌 떠는 대신, 늦었지만 회개하는 마음으로 먼저 이 주변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직 살 길임을 외치는 것입니다. 아합 가문과의 결혼을 통하여 안 좋은 영적 영향력이 계속해서 여호사밧 왕에게 젖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의 왕보다 훨씬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민감한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때가 늘 한발 늦습니다. 전쟁 하기 전, 일이 터지기 전 먼저 하나님께 자문하고 갈 길을 어쭙는 영적 겸손이 있어야 사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붙드는 타이밍이 꼭 일이 터지고 나서, 위기와 복병을 만나 두려움에 압도 당하고 나서 찾게 되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여호사밧 왕과 같이 믿음의 반응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상황에 압도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눈에 보이는 문제나 어려움을 뛰어넘어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며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십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시고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지 못했다면 인생의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것 만이 회복의 길이고 살 길이며 승리의 길입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죽겠다고 포기하는 인생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두려움과 낙심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구하며 붙들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엘리사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 한 직후 직면한 한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여리고에서 물을 달게 하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엘리사를 모욕하고 놀리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의 수제자이자 후계자는 엘리사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외에도 소위 말하는 엘리야의 제자라고, 내가 엘리야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엘리야가 승천한 후 그의 시신을 찾는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찾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굳이 며칠씩 헤메면서 엘리야의 시신을 찾는다고 돌아다녔습니다. 왜 그렇게 그들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는가? 엘리아의 시신을 찾으면 본인들은 엘리야의 후광을 좀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왜 꼭 엘리사만 엘리야의 직속 선지자냐….우리도 다 엘리야의 제자들이니, 본인들이 리더십을 주장하고 영향력을 주장하면서 엘리사를 압박하기 위함입니다. 엘리야의 시신을 찾아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 뭔가 해보려는 인간적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찾아 헤멘 것입니다. 마치 모세의 가족들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만 하나님이 부르셨나...우리도 부르셨다면서 그의 지도력에 도전을 가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논리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가 봐야 쓸데 없는 일이라고 알려준 엘리사의 말 대로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시신을 찾을 필요도 없고, 엘리야를 기념할 필요도 없고 엘리야를 높일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때 잘 쓰임 받고 천국에 들려 올라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냐가 아니고, 엘리야와 엘리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 쓰임 받고 떠난 엘리야를 이제는 뒤로 하고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쓰시는 선지자인 엘리사를 쓰고 계심을,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억되지 말아야 되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만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사람에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면,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게 되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내려놓고 가지치기 하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높이고 사람들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자꾸 기념비를 세우면서까지 기억하려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에서 물을 달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의 첫 정복지민 여리고 지역의 문제는 뭐냐면 위치도 좋고 여러 조건들이 좋은데 물이 안 좋아서 농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그 물을 고쳐 주셨습니다. 엘리사가 분명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엘리사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게 아니라 엘리사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라는 물에서 엘림의 단물로 바뀌지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그 땅에 물을 고쳐주고 그 땅의 물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시는 엘리사를 통해 그 땅에 물을 고쳐 주시고 치유하며 생명을 얻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생명을 주며 쓴물을 단물로 치유하시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기에 이 새벽에 은혜 가운데 우리가 말씀을 먹기 위해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으며 말씀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정반대의 역사인데 엘리사를 놀리고 저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했는데, 이 작은 아이는 어린이기 아니라 청년이라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합니다. 젊은이들과 청년들이 엘리사는 대머리라 놀리고 조롱하며 엘리사의 사역을 방해하는 겁니다. 대머리라고 놀리는 것은 단순히 엘리사에게 머리가 없다는 것을 조롱하는 외모 비하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머리는 부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머리를 놀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모욕이었습니다. 엘리사에게 대머리라고 놀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족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조롱하며 선지자의 사역을 가로막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지만 저주하고 모욕한 젊은이들을 수풀에서 곰들이 나와 42명을 찢어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모욕하고 저주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가로막은 그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비극적 사건은 마치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의 역사로 즉사한 비극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흔드는 사건을 저질렀기에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큰 일이 아는 거 같지만 그 일이 얼마나 교회 공동체에 큰 악영향을 미쳤는지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하는 것도 바로 성령의 역사였다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엘리사를 통한 이 두 기적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치유받고 복과 구원을 얻는 역사가 있었던 반면에 그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고 거절하면서 화와 심판을 얻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말씀으로 죽은 땅을 살리며 쓴물을 단물로 바꾸며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축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끌기도 하고, 동시에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치는 자들을 향하여 이런 화와 심판에 역사를 이끌기도 함을 잊지 마십시오. 본질을 붙들고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사람들이 대단한 게 아니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대단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고 주어진 시간 잘 쓰임 받는 사람들을 높이는 대신, 사용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엘리야가 하나님의 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놀라운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기로 직전에 그의 사랑하는 제자인 엘리사에게 마지막으로 사명을 맡기고 떠나갑니다. 엘리야가 떠나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은 엘리사를 통해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복은 사람은 떠나가지만 사명은 남겨져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내가 그 자리에 충성을 다하다가 떠나가도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워 그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신비입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야는 지금 곧 하늘로 들려 올라가기 직전인데 그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인 엘리사에게 맡기는 겁니다. 내가 지금 떠나기 일보직전인데 내가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즉 너가 나에게 진짜 원하는 것을 구하라 말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 한가지가 있다면 진정 복된 인생입니다. 엘리사가 정말 원하는 한 가지는, 진정으로 구한 한 가지는 성령의 갑절의 능력과 역사입니다. 내 삶에 가장 큰 복은 창세기 창조 사역을 통해 배웠지만 말씀이 말씀 그대로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는 것은 두 번째이고 내 인생의 가장 큰 복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풀어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성령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이루어지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 그 통로가 되는 것만큼 귀하고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내 뜻으로 살다가 신앙이 깊어지면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되고요. 처음에는 내 힘으로 애쓰고 열심히 살다가 신앙이 깊어지면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 직전에 그토록 간절하게 성령의 갑절의 능력과 역사를 구했을까…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엘리사의 간절함과 열망, 즉 내가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만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동시에 이 엘리사의 고백은 나는 엘리야 당신보다 너무나 작고 약한 사람입니다…그렇기에 나는 정말 갑절의 부으시는 역사와 능력이 없으면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고백하는 겁니다. 지금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가나안 정복 여정을 되돌리는 듯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입니다. 그만큼 시대가 악한 때에 엘리야와 같이 목숨 걸고 사람들의 충돌과 부딪힘을 이기며 담대하게 주신 말씀을 선포하며 내미신 하나님의 손을 그들이 붙들어 구원받게 인도하려면 나는 주님이 주시는 갑절의 은혜와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간절히 구하는 성령의 갑절의 능력과 역사는 두 가지가 다 포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 그 능력과 역사를 간절히 사모함과 동시에 나의 능력 없음에 대한 처절한 인정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일수록 내 힘을 붙들고 겸손한 사람일수록 하늘의 능력을 구하며 하늘의 역사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엘리사의 고백을 마음에 새기게 하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는 게 아니라 내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능력에 맞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사명 가운데 내 능력에 맞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하나님께서는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맡기시는 겁니다. 내 힘으로 안되는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 사명을 너희 힘으로 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능력을 구하며 그 사명에 맞는 능력을 구하고 받으며 살아가는 자가 되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힘과 능력이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내가 하늘의 능력과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한 자입니다…그렇기에 주님의 역사와 능력이 저에게는 갑절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하늘의 힘을 붙들고 하늘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구했던 기도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구해야 되는 간절한 기도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엘리야가 영광스럽게 하늘로 승천하게 됩니다. 병거 타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회오리 바람 타고 하늘로 들려 올라갑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대단한 선지자였는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가면서 이 땅의 삶을 마친 자였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역사를 보여준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하늘의 놀라운 모습으로 변하신 후에 거기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두 사람 모두 이 땅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서 들림을 받은 놀라운 사람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인생의 끝이 가장 복된 인생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시작은 미약하고 중간은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날지 모르나 내 인생의 끝은 이렇게 영광스럽고 찬란하다…주님이 나를 이렇게 놀랍게 받아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는 인생이라는 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늘에 소망을 두는 성도입니다. 새벽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 인생을 주님 앞에 조율하며 하늘의 힘과 능력을 구하는 성도들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나의 소망을 하늘에 두는 것이며 그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내 인생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나의 인생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도와 주옵소서…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와 같이 우리 인생도 주님 은혜 가운데 영광스럽게 천국으로 올라가 주님께서 품에 맞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의 인생의 끝에 펼쳐지게 도와 주옵소서…그것을 정말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임계점이 넘어가고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역순으로 모든 것을 여정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 말은 엘리야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역순으로 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며 광야로 내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하고 그 축복의 땅에서 우상과 불순종과 반역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물러나게 하시며 광야로 내 모시는 그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가 바로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이 시대가 점점 악하고 어두워집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지만 끝까지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임계점이 넘어가면 그것이 끝내시는 때가 있고 심판이 오는 때가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이 시대를 분별하고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통해 이 세상을 깨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내 능력에 맞는 일이 아니라 내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며 내 힘이 아니라 하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어깨 힘을 빼며 하나님이 주신 힘 붙들고 그 하늘의 능력을 구하며 살아가십시오. 엘리야가 놀랍게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을 바라보며 나의 인생의 끝도, 내가 맞이하게 될 죽음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복된 인생이 되도록 사모하기 원합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 놀랍게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환승역임을 내가 분명히 믿고 확신하는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끝이 그 엘리야와 같이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라가며 예수님이 나를 맞아 주심을 분명히 믿으며 이 땅에서의 여정이 천국을 준비하는 여정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5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