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우리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아람의 장수 나아만 장군의 치유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의 장군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 땅에 있는 자가 아니라 이방 땅에 이방인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것을 통하여 이방 땅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나 이방 땅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우리 교회에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이방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통해, 이방인들보다 못한 이스라엘 땅과 백셩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맡기신 이스라엘의 왕이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섬기며,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겉보기에는 아쉬운 게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이루고 가진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돈을 좀 더 가지면 좋겠고 명예를 좀 가지면 좋겠고 지위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늘 우리의 결핍을 강조하며 살아가는데, 그에게는 돈이나 명예나 지위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측근이었고 군대에서 별 4개 장군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는 큰 용사였습니다. 겉보기로 봤을 때는 결핍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나아만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의 육체의 큰 가시인 나병이었습니다. 밖에서는 대단해보이고, 지위도 명예도 돈도 아쉬울 게 없는데, 집에만 돌아오면 너무 아픈 그냥 환자의 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아만 장군이 나병을 고치기 위해 해볼 만한 거 다 해보지 않았겠습니까? 재력도 인맥도 있으니 그 당시 유명하다는 수많은 의사들을 다 찾아가 봤을 겁니다. 좋은 약이 있다는 거 웬만한 거 다 써봤을 겁니다. 그런데도 병은 나아지지 않고 호전되지 않은 겁니다. 겉보기에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거 같고 대단한 거 같은데, 자세히 알고 보면 이렇게 어두운 그림자와 아픔 가운데 신음하는 연약한 환자, 이것이 나아만 인생의 현주소였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의 현주소란 것입니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데 나병으로 신음하는 나아만 장군을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이자 몸종이었습니다. 이 어린 소녀는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말적인 인생이었습니다. 집에서 잘 지내다가 아람 군대에 잡혀와서 하루 아침에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갑자기 노예가 된 여인, 이 여인의 인생이 얼마나 기구합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종이였으면 그냥 그러려니 포기하고 산다 해도, 작년까지 집 안에서 사랑받고 이쁨 받는 자유 소녀가 그냥 잡혀서 하루 아침에 노예가 되었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에 모든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 인생에 소망이 보이지 않고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잡혀와서 비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그 소녀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냐 하면 우리 주인 나아만 장군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았을 걸…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 기적의 삶이 가능한 것일까요? 겉보기에는 종이고 노예였고, 상황은 너무나 비참했지만 소망 없어 보였지만, 그 여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과 신분도 그 여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꺾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감옥에 있던 요셉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하게 누명 씌워서 평생 나가지 못할 감옥에 갇혔습니다.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도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 있었지만 주변 사람의 얼굴빛을 살필 마음의 여유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치유, 그 시작은 바로 이 이름모를 이스라엘 소녀, 억울하게 잡혀와 종이 된 이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 이름모를 여종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이스라엘 선지자 앞에 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나아만 장군이 이 얘기를 듣고 상상할 수 있는 일방적인 반응은 듣고 흘려 버리는 겁니다. 그 당시에 노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어린 소녀가 하는 말이었어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콧방귀를 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해볼 걸 다 해봤는데 말도 안되 소리하고 있네… 이렇게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나아만 장군은 그 소녀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붙든 것입니다. 노예이자 어린 소녀가 했던 말을 그는 경청하고 그 이야기에 반응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 얘기를 들어야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고, 그의 주인이었던 왕에게 얘기하면서 이야기가 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방인으로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고민하며 거기에 대해서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치유하실 수도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린 소녀이자 몸종도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고,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왕에게 부탁해서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쓰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왕의 반응을 보면 믿음의 반응과는 전혀 상관없는 철저하게 불신자와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제한 인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하 나아만을 고쳐달라는 편지를 받고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었습니다. 이건 우리는 다 죽었다는 절망의 표현입니다. 왜 왕이 옷을 찢었는가 하면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왜 나한테 와서 살려 달라 그러는 거야…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인데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전혀 하나님에게 찾아갈 마음도 하나님에게 물어볼 마음도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할 마음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병을 고쳐달라는 편지의 진의를 의심합니다. 이렇게 고쳐 달라고 얘기 하는게 나한테 와서 시비 걸고 이래서 전쟁을 걸려 그러는 게 분명하다고 짐작합니다. 그러니까 나병에 걸려 여기까지 찾아온 나아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도 없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고요 하나님 앞에 나고자 하는 그 열망도 없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왕이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커야 되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아야 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불신자 나아만 보다도 못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이스라엘 왕을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이 어린 소녀와 같이 타인의 필요와 눈물이 보이며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복음, 예수님 앞에 나아가도록 초대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회복되기 원합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잘 사는 거 같고 결핍이 없어 보이는데, 예수님이 없어서 결핍으로 어둠움을 사는 많은 인생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산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성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내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내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타인의 낯빛을 살필 수 있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삶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어린 소녀와 같이 겉보기에는 절박하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눈물 나고 아픈 상황일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 하나도 챙기기 어려운 그 때에, 내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내 상황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때문에 내 주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타인의 마음을 읽는 자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살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회복되야 산다는 것을 깨닫고 순전한 믿음, 타인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
아카이브
11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