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에게 늘 조심해야 할 때는 큰 승리 이후, 큰 치유 체험 이후입니다. 눈에 보이는 큰 축복이나 놀라운 치유가 자칫하면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 축복이나 치유 자체에 매몰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큰 승리 자체에 취하거나, 놀라운 치유와 병고침 자체에 매몰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망각할 위험에 빠집니다. 불치병 나병으로 고생하며 살아가던 이방인 장군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어린이 같이 깨끗하게 고침받고 치유 받았습니다. 나아만에게 하늘로부터 임한 놀라운 치유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나아만이 몸의 나병을 고침 받은 것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의 병도 치유 받았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더 본질적인 치유는 몸에 나병의 치유를 넘어 영혼의 나병을 치유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영접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단순히 나아만이 불치병을 고침 받았다, 기적으로 나병을 치유 받았다는 것을 넘어서는 그 영혼이 건짐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병 나은 것보다 더 큰 기적은 그 큰 치유 이후 나아만이 치유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앞에 엎드려 그의 영혼의 나병이 치유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의 백성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바로 오늘 말씀의 증언입니다.
첫 번째 나아만은 큰 치유를 경험한 이후, 불치병을 고침 받았다는 치유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치유해 주신 분 하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평생 못 고칠 줄 알았던 나병을 치유 받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놀랍게 나병을 치유받고 기적을 경험해서 나는 고침받았다고 감격하며 그 치유의 역사 자체에 집중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병고침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가 대단하다고 높이는게 아니라, 엘리사를 사용하신 하나님을 대단하다고 높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치유 능력의 주인 되시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천하의 신이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고백합니다. 그게 바로 나아만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큰 승리와 치유 이후 믿음의 반응입니다. 내 삶에 큰 축복 주신 분, 내 인생의 큰 병을 고쳐 주신 분, 하나님에게 가서 엎드린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믿음의 반응인 것입니다. 까딱하면 큰 승리에 취해, 큰 치유에 취해 그것 자체에 매몰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망각하기 쉬운 게 인간입니다. 내 삶에 큰 축복과 큰 치유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큰 치유와 큰 축복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 내 인생에 하늘로부터 부어진 축복과 치유의 역사가 하나님에게 온전히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내가 치유 받았고 내가 승리를 경험했음에 집중하게 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나아만은 그 병이 난 후에 바로 하나님에게로 그 마음을 돌이켜 순종하며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찬양하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두 번째 나아만은 나병을 고쳐준 선지자 엘리사에게 예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강권하는 나아만의 예물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숟가락 얹지 않으려 그랬고 더 나아가 그 예물은 사람에게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드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그토록 단호하게 예물 받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이 불치병의 치유는 엘리사가 치유한 게 아니라 엘리사를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이 치유하셨다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나 은사가 돈벌이의 도구가 되는 것은 타락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우리가 예물을 드릴 때 분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 예물이 사람들과 교회 필요를 위해 사용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나의 예물은 하나님께 고백과 함께 드리는 겁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교회가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도네이션 하듯 드리게 되면 그건 하늘 하나님과 상관 없는 그저 육의 행위일 뿐입니다. 예물은 사람에게 바치면 땅의 것이 되고, 하나님께 바치면 하늘의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 즉 내 삶과 예배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드리겠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번 째, 나아만에게 놀라운 변화는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로 나아간다는데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세상적으로 사는 것도, 우상 숭배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나아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런 것들이 다 회개해야 할 것들임이 보이는 겁니다. 내 죄가 얼마나 큰 지가 선명히 보이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건짐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것, 이게 하나님을 만난 자의 놀라운 변화라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을 만난 증거, 내 영혼의 나병이 치유 받은 증거가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가 깨달아지는 것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가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 넘치는 은혜를 붙들고 나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가 선명히 보여야 합니다. 동시에 그것보다 더 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도 동일한 이 두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회개하고 재산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억울하게 한 사람들에게 갚겠다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앞에 엎드려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서도 고백하죠. 왜냐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나면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병든 자이며 내 죄가 얼마나 큰지가 선명히 보이는 겁니다. 그 가능성없는 나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한없이 크신 예수님의 은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에게 두 가지의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불치병인 그의 나병이 치유받고 나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치유와 기적은 바로 그의 영혼의 나병이 치유받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만 섬기는 자로 변화된 그 놀라운 역사가 가장 큰 기적인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인,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나병과 함께 영혼의 나병이 치유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과 상관있는 자가 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가 선명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지었던 죄가 나에게 큰 죄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이 나에게 큰 문제로 다가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 하나님을 신경 쓰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아만은 이 고백이 분명한 변화 받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큰 승리와 큰 치유 자체 매몰되어 살아간다면 우리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큰 승리 이후, 큰 치유 이후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때가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볼 때이고, 축복 주신 하나님, 치유하신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붙들 때입니다. 큰 승리 이후에, 큰 치유 이후에 우리는 축복과 치유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축복을 주신 분, 치유를 주신 분에게 집중해야만 왜곡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으며 더 놀랍게 뻗어 나가며 쓰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서서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동시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큰지를 깨달아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엎드리며 선명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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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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