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사사 기드온이 죽은 후 그 아들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과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고 끔찍한 방법을 동원하여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그 안타까운 사건을 통해 비극이 열매를 맺었음을 증언합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기드온의 영적 무너짐과 아비멜렉의 쿠테타로 왕이 되는 모습은 단순히 기드온과 그 집안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영적인 타락과 하향 곡선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죽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바알을 따르며 거룩하고 구별된 삶 대신 음행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렇게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타락한 것이죠. 아비멜렉의 등장은 기드온이 잘못된 씨앗을 뿌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그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자양분을 주었고, 임계점이 되듯이 끓어오르는 시점이 되니까 그 영적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아비멜렉의 쿠테타입니다.
아비멜렉을 기드온의 아들이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첩의 아들, 서자였습니다. 첩의 아들은 그 신분적 태생이 호적에 올릴 수 없는 아들인 것이지요. 집안에서 상속도 받을 수 없고, 왕이 될 수 없는 아들 태생, 한과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던 자가 바로 아비멜렉입니다. 놀랍게도 아비멜렉 이라는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 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우려 오를 때 자신은 왕 될 마음 없고 오직 너희는 하나님이 다스려야 된다고 입술로는 말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아비멜렉이라는 아들 이름을 통해 기드온의 본심이 이미 다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을 통하여 기드온의 속마음은 결국 왕이 되고 싶어 했으며 왕을 열망 했다는 그 중심을 우리는 다 보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하나 하나님은 그 기드온의 중심을 다 보고 계신 것이죠. 그 아들 아비멜렉은 왕이 되려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그는 왕이 될 수 없었고, 서자로서 잘못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자신의 열망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쓴 방법이 소위 말하는 지역감정을 흔들어 분열을 조장하는 겁니다. 세겜 사람들에게 너희는 고향 사람인 나의 다스림을 받는게, 타지 사람인 70명 왕자들의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흔드는 겁니다. 이 방법은 사단의 주특기인데, 항상 사람들을 흔들어 분열하게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 내부 총질 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이가…” 그러면서 내가 혈육이고 동향 사람이니 나를 밀어 줘야한다고 흔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단지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 기울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나서 아비멜렉은 우상 신전에 받은 은 70개를 가지고 불량배들을 고용합니다. 조직 폭력배들을 고용해 가지고 자기를 따르게 맞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은 지금 그 방법도 우상숭배와 폭력이라는 방법을 동원해 그 힘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정치 에서도 똑같이 반복되는 거 아닙니까?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저 사람이 내편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저 사람이 내 동향 이냐 아니냐, 같은 학교 출신이냐 아니냐, 이런 것을 가지고 내 마음을 주고받고 돌아서고 이걸 통하여 분열과 갈등이 조장 되고 이게 바로 옛날 지금이나 사람들이 늘 흔들리며 넘어지는 방법입니다. 힘을 가지기 위해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서슴치 않고 쓰는 겁니다. 그 가운데 정의는 없고 바름은 없고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항상 사단은 이 세상에 교회를 향하여 지역감정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잘못된 우상숭배와 폭력을 동원하게 됩니다. 이걸 통하여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만들며 이 모든 폭력과 갈등을 가지고 살게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을 벌입니까? 그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끔찍한 왕자의 난을 벌이는 거예요 도망간 한 사람을 빼고 왕자 70명을 한 바위에서 한날 모두 죽이는 끔찍한 쿠테타를 자행했습니다. 정통성이 없는 서자이기에,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적 태생을 가진 첩의 아들이기에, 한 사람의 왕자도 살아 있으면 자기는 왕이 될 수 없다 라는 열등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거죠. 그 모든 사람을 죽여야만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량배들을 동원해 그 모든 왕자들을 잡아 한 날에 모두 죽여버리는 이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겁니다. 그 끔찍한 일이 있은 이후에 아비멜렉을 왕이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뿌린 비극의 씨앗,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 없어 보였지만 그 씨앗들은 백성들의 불신앙의 자양분을 먹고 계속 자랐고 결국 아비멜렉을 통해 비극적인 피를 뿌리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 비극의 씨앗을 뿌릴 수도 있고 은혜에 씨앗을 뿌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양분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바알을 추종하고 음행하고 살아가는 삶에 지금 이 순간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도 그건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방치하고 놔두면 때가 되어 그것에 대한 결과를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회복의 은혜를 붙들고 이 잘못된 씨앗을 뿌리지 않는 주님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운 전쟁의 승리를 통해 기드온이 살아있던 40년동안 이스라엘 땅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미디안이 복종하여 다시는 머리를 들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게 모든 것이 끝난 거 같고 다 모든 것이 이제 정상적인 평화의 시대로 온 거 같지만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평화, 여호와 샬롬은 아니었다... 증언합니다. 전쟁에 들어가기 위한 기드온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 샬롬을 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전쟁 후에 가져온 평화는 하나님과의 샬롬이 아니라 힘으로 잠시 누른 껍데기의 평화, 미봉책의 평화였다는 것이죠. 기드온은 승리 후에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영광으로 돌리는 것에 실패하며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며 무너졌으며 왕 노릇을 하며 그의 인생을 끝나게 된거죠.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그 말씀 다음에 나오는 아내가 많은 기드온의 평가입니다. 아내가 몇명이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70명의 아들을 낳을 정도면 굉장히 많은 것은 확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단순히 아내가 많은 것, 자체만을 성경이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당시 기드온이 한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서로 신뢰하며 주님을 의지하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정략 결혼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 주변에 많은 호족들/나라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 관계성을 맺으며 결혼을 하는 겁니다. 결혼을 하면 그 문화와 가치관을 서로 공유하면서 젖어들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아내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많다는 것은 기드온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대신 주변에 있는 나라들의 힘을 이용하고 의지하며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의지하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 뜻과 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된 것이죠. 심지어 그 많은 아내들로도 모라자서 첩도 있었습니다. 그 첩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 아비멜렉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을 통해 이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결국 나중에는 큰 일을 치르게 된다는 복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기드온은 그의 말년에 하나님의 뜻에 반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많이 했으며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샬롬을 이루지 못하며 그의 인생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아내와 자식이 많았다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는 본질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기드온이 죽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영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성경은 세 단어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타락을 묘사합니다. "돌아섰고…따라갔고…. 음행했다…"여기서 돌아섰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거죠. 등을 돌리고 하나님 낯에서 몸을 돌려 숨은 겁니다. 하나님 다스림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거룩한 백성이 등을 돌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멸망과 파멸로 들어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물이 계속 데워지면 임계점이 되서 끓듯이 이미 영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기드온이 죽은 후 끓어오르듯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로 가는 백성들이 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대신에 바알을 따라갑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과 눈에 보이는 풍요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바알신, 세상의 풍요의 신을 추종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셨던 바알신을 따라가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에게 등져버린 겁니다. 그 결과는 음행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무너지고 똑같이 타락한 그 음행을 보이게 됐다는 것이죠. 영적 음행이란 바로 자신들을 건져 내신 구원 하신 하나님, 그리고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당연해지고, 그 당연함의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등돌리게 만들고 떠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드온이 죽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주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현 주소를 직시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원하는 평화는 단순히 문제가 없는 평화가 아니라 여호와 샬롬…나의 속사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하나님을 등을 돌리게 되면 결국 세상을 추종하고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추종하고 따라가면서 하나님에게 등 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결국 하나님과 바알, 둘다 섬 길 수 없고 둘다 추종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민감 하면 세상의 둔감 할 수 밖에 없고 세상에 둔감하면 하나님에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따라가고 세상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나는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 인가?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그분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정말 잊지 않고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 시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여호와를 떠나 바알을 추종하고 행음하며 무너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무너짐의 패턴을 답습하지 않기 간구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따라가며 세상에서 돌아서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격 미달인 기드온을 끝까지 붙들어 쓰셔서, 절대 불가능해 보였던 전쟁에서 3백 명을 데리고 10만명이 넘는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였으며 사람의 노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하심으로 주신 승리였습니다. 이 영적 전쟁을 본질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 승리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잊어버리고 망각 하지 말라고 군인을 300명으로까지 줄이라 명령하신 겁니다. 자신들에게서 어떤 승리의 이유와 원인을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망각하고 하나님께 걱정거리를 안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승리 이후 승리의 모든 공과 영광을 기드온에게 막 돌리며, 기드온 뿐 아니라 그 아들과 손자까지도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 함성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기드온이 잘 싸워서 앞장서서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한 것이죠. 그러나 기드온 자신도 알고 함께 참여한 그 300명의 용사들로 다 아는 사실이 뭡니까? 이 전쟁은 기드온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이긴 전쟁이라는 것을…그런데 백성들은 승리 자체에 도취되어 이 사실을 망각하고 기드온에게 열광하며 대대로 우리 왕이 돼 달라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이 아닌 기드온에게 돌리는 우매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아우성치고 환호성을 보내는 이 왜곡된 모습,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이 구원해 준 것처럼 착각하는 이 모습…여기게 속지 말아야 하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백성들의 함성은 마치 안개와 같아서 치우치고 왜곡된 모습을 가져다 주는 허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 함성과 환호성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가 그냥 안개가 사라지면 뚝 떨어지는 인생이 되버리는 것이지요. 이런 백성들의 환호성과 열광에 기드온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너희가 나를 왕을 세우려 하고 다스려 달라 그러는데 나는 다스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라….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답을 이야기한 겁니다. 정말 정답을 얘기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그들을 다스리시는 왕은 여호와 하나님 이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것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백성이 되는 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이 왕이 되는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다…놀라운 대답이자 은혜로운 대답입니다. 만약에 이 이야기가 23절에서 끝났다면 아마 성경은 기드온이 큰 승리 이후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며 모든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며 백성들이 요청하는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였다….이렇게 평가 하며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았을 텐데….성경은 기드온의 이야기를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입술로 한 대답과 마음속 본심과는 큰 차이가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기드온이 말한 대답과 그가 한 행동들 사이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지금 정답을 이야기했는데, 그 입술의 정답 이후에 그게 삶은 그 정답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죠. 결국 기드온은 입술로 말한 것이 정답이 아니라 마음속에 품은 본심대로 그 몸이 간 것이 정답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입술로 정답을 말한 이후 기드온은 두 가지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합니다. 첫번째는 전쟁에서 얻은 금 귀고리들을 모두 달라 요청하지요. 그 금들이 1700세겔인데, 한 19KG정도되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현재 금 1kg 시세가 약 7000만원이니까 얼마나 큰 돈인지 모릅니다. 그 많은 전리품들을 다 기드온이 가지고 가면서 승리의 원인을 자기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둡니다. 에봇이라는 것은 대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입어야 했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사용했던 그것이 에봇을 만들어 자기 집에 가져가는 것을 통해 예배 중심을 자기 집으로 옮기는 거죠. 결국 자기 영광과 자기 욕심이 끝까지 올라가 자기를 예배하는 자 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하나님께서부터 보냄 받은 메신저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메세지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사입니다. 하나님의 사사로 부르심을 받아 잘 사용받은 메신저입니다. 메신저로써 하나님이 놀랍게 사용하셔서 큰 승리를 주셨는데, 큰 승리 이후 에봇을 집에 둠으로 자신을 백성들이 주목하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이 메세지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결국 이것이 기드온에게 올무가 된 겁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큰 영적 전쟁의 승리 후에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고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며 무너지는 인생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드온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승리 이후 무너지는 인생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 백성들 사이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영적 전쟁의 승리가 있으며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언제나 하나님에게만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나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도 기드온과 같이 무너지는 겁니다. 어떻게 기드온은 저렇게 무너졌을까… 변질되고 타락했을까….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기드온은 여호와의 영이 부어진 사사였는데도 저렇게 변질되고 타락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더 위험한 겁니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열광은 안개와 같이 왜곡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추종하는 순간 무너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시간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나를 다스리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 그분 밖에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성도와 가정,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해 기드온 300 용사가 10만이 넘는 미디안 군대를 싸워 이기는 놀라운 승리를 배웠습니다. 그 승리는 기드온과 삼백 용사의 뛰어난 지략이나 용맹에서 나온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주신 역사하심의 승리였습니다. 그 승리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 그룹의 사람들이 오늘 말씀에 등장을 합니다. 첫 번째 그룹은 승리 이후에 그 승리의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사람들, 두번째 그룹은 승리한 줄 모르고 미디안의 눈치를 보느라 동족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에브라임 지파의 승리에 숟가락을 얻으려는 교만입니다. 기드온이 미다안과 싸우러 나갈 때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길 수 없는, 승산이 없는 전쟁 이라고 여기며 기도원을 돕지 않았고 전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디안을 두려워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와 함께 미디안 족속의 기적적으로 승리 하게 되니까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나와서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냐고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 대표로 바로 에브라임 사람들이 자기들은 너무나 가고 싶었는데 왜 자기들을 전쟁에 부르지 않았냐고 기드온에게 크게 화를 내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적반하장이나 마찬가지죠. 그렇게 숨어있다가 승리하고 나니까 승리한 영광에 숟가락 얹으려고 화내는 이 모습에 기가 막힌 상황이죠.
사실 기드온의 입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 속이 뒤집어지고 폭발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증폭되어 갈등이 터져버릴 수 있는데,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적반하장과 같은 불평을 가지고 내부 분열의 위험으로 가져가는 것을 차단했습니다. 큰 승리 이후에 내부 분열은 무너지는 지름길임을 잘 알고 지혜롭게 이 상황을 빠져나가게 되죠. 그래서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자기 고향 에서 생산되는 포도보다 훨씬 좋다고 치켜 세워 줍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한 공로는 지금 에브라임 지파가 한 공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낮추고 에브라임 지파를 더 높게 칭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승리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분열이 없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내어 맡기고 평화적으로 잘 해결하는 겁니다. 승리 후에 이렇게 숟가락을 얹으려는 사람들, 적반하장 같이 얘기하는 사람들과 부딛히며 내부 분열로 가면 망하는 지름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승리 이후에 문제를 증폭시켜서 분열로 어려워지는 대신 이렇게 기드온과 같이 그 문제를 풀며 문제를 감소하며 그것을 평화롭게 푸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승리 후에 내부 분열로 가는 길을 모두 차단하고 평화로 해결하는 것을 성도의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승리한 줄 모르고 미디안의 눈치를 보며 기드온과 삼백 용사를 도와 주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숙곳에 있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지금 미디안 군대를 싸워 이겼지만 미디안 왕들은 지금 숨어 도망 가고 있었습니다. 그 왕들을 계속 추격하느라 피곤하고 너무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남김없이 그 왕을 처단해야 전쟁이 끝나기 때문에 지금 계속 추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300용사가 숙곳에 이르러 지금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한 거죠. 그런데 다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전혀 도와줄 마음이 없는 겁니다. 미디안을 두려워하며 미디안에게 불이익이 올까 봐 동족을 도와주지 않는 겁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 는 지금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 걸고 전쟁을 하고 미디안 왕을 추격하고 있는데, 동족인 숙곳 백성들은 자기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열심히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 가운데 불이익을 당할까 그냥 눈치만 보고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 이후의 내부분열의 갈등 위기를 기드온은 한쪽에는 평화롭게 해결했고 이 숙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조치를 취합니다. 승리 이후에 돌아오면서 가만 두지 않겠다는 보복의 경고이지요. 지금 사사로써 목숨을 걸고 영적 전쟁하는 기드온에게 세상과 미디안을 두려워하며 눈치보는 그들에게는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것에 대한 큰 댓가가 있을 것을 경고하는 겁니다. 숙곳 백성들을 통해 영적 지혜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놓여 있는 영적 전쟁에서 세상 눈치 보고 세상에서 불이익이 있을까 생각하며 기쁨으로 동참하지 않고 돕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밀어내는 이런 삶을 거절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기드온과 300 용사들이 미디안과 싸워 놀라운 영적 전쟁의 승리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이 전쟁은 기드온과 300 용사가 용맹하고 잘 준비 되어서 놀랍게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어떻게 놀랍게 역사하시는가를 드러내는 승리입니다. 2경이라는 시간은 밤 9시에서 11시 사이인데, 그 늦은 밤 근무 교대를 하는 시간에 기습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격이라는게 무기를 들고 돌격하는게 아니라 갑자기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었습니다. 그 당시엔 전기가 없으니, 갑자기 항아리 안에 횃불들이 보이며 나팔을 부니까 미디안 진영에서 큰 일이 벌어진 줄 안 겁니다. 자다가 일어났는데 갑자기 온 지경이 불이 타고 나팔 소리가 갑자기 들리니까 혼비백산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300용사가 소리지르는 “여호와의 칼, 기드온의 칼”이라 소리치는 것이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로 들려 갑자기 그냥 정신을 못 차린 혼동의 상황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 혼동의 상황을 세 단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 하였는데”…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미디안 진영에서 서로가 서로를 칼로 죽이며 아비 규환이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300명이 나팔을 불고 횃불을 들고 서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미디안 군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수십만 명이 와서 에워싸는 것처럼 보이게 그 마음에 두려움을 심으신 거고 그 압도된 두려움으로 혼비백산하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군대와 싸운 게 아니라 그냥 서서 지켜보고 자기네들끼리 서로 싸우며 칼로 죽이고 있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는 겁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 들은 실제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들이 한 거라곤 횃불들고 있고 나팔 부른 것 밖에 없는데 실제로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만명이 넘는 미디안 군대를 무력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기드온의 영적 전쟁의 승리는 마치 드보라가 철병거 900승을 기손강가에서 놀랍게 무찌는 역사적인 승리와 비슷하고, 여리고 성이 함성으로 한번에 무너진 승리와 비슷한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일하시고 앞서 싸우신 역사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싸워야 되는 영적 전쟁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내 눈에 보기에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나는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과 환경, 그 가운데 믿음으로 주님만을 붙들고 하나님이 친히 앞서 싸우시며 적들을 무력하게 하시는 그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압도당할 필요도, 벌벌 떨 필요도 없이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라 명하시는, 그 명령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게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전쟁과 같은 상황에 함께 하시고 개입하시고 전쟁의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숫자로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기드온과 300용사의 승리를 바라보며300명의 용사가 10만명의 군대를 무찔렀다는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 두려움으로 바라보는 상황과 환경으로 내가 움직이고 내가 포기하는 그 뻔한 삶을 넘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벌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과 능력은 나의 도움은 하늘로부터 옴을 철저히 믿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되는 영적 전쟁의 승리를 사모하며 나아가 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해 기드온이 그가 본 적군들, 모래와 같이 많았던 적군이 압도하는 상황에서 그가 들은 하나님의 꿈과 그 해석으로 본 것을 넘어섰습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두려움 투성이었고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10만이 넘는 적군들이었지만, 그가 들은 꿈의 해석을 하나님이 주신 비젼으로 믿으며 그가 보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경배했습니다. 성도들이 일상에서 싸우는 영적 전쟁의 핵심은 보는 것과 듣는 것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으며 내어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어서고 이기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죠. 기드온은 이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전쟁에 나아갑니다. 300명을 3개 조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횃불을 안에 숨긴 항아리를 들고 나아갑니다. 이것은 정말 전쟁 전략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술입니다. 300명이 10만명이 넘는 적군을 1대 4 150으로 싸운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 그 300명이 최신 무기를 가지고 나가는 게 아니라 나팔과 항아리를 들고 나아가는 것도 우리 생각에는 도저히 담기지 않습니다. 결국 이 전쟁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겼던 영적 전쟁의 패턴과 비슷한 것입니다. 소모는 막대리고 블레셋 사람 600명을 싸워 이긴 영적 전쟁, 골리앗 앞에 물맷돌로 나가 싸워 이긴 영적 전쟁,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이 무기 들고 나가 싸우는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싸워 이겨 주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총칼대신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고 횃불을 숨기고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영적 전쟁을 나아면서 나팔을 불며 “여호와를 위하여…기드온을 위하여…” 라고 소리치라 명령합니다. 300명이 10만명이 넘는 적군을 향해 믿음을 붙들고 나아가는 기드온,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은 불길한 복선과 같습니다. 드라마 보면 맨 끝에 갑자기 주인공이 코피가 나거나 하는 복선같이, “기드온을 위하여…” 라는 이 말은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까를 보여주는 복선입니다. 여호와를 위하여…만 했으면 아주 좋은데, 온전한 영적 전쟁의 모습으로 나아갈 텐데, 기드온은 자신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같이 붙인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붙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름도 붙들고, 자신의 이름도 높이며 나아가는 겁니다. 기드온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기의 영광을 취하려는 모습이 꿈틀 올라오는 겁니다. 결국 이런 기드온의 모습은 곧 찾아오게 될 영적 하향 곡선을 암시하는 복선인 겁니다. 그렇다면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영적 적용이 무엇일까요? 32000명을 300명으로 줄이시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해보면, 이 300명은 결국 이 시대의 남은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만이 넘는 대군과 나팔을 불며 싸우는 이 300명의 용사는 말씀 안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남은자 들입니다. 여호와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남은자가 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남은 자들은 다수가 아니라 이렇게 소수로 언제나 존재하며, 그 남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교회가 많은 것 같고 성도들이 많아보이지만 실제 영적 전투에서 말씀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끝까지 남아서 결국 그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로 이 세상에 남아 있다는 것이죠. 이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하시며, 조건과 환경의 시야를 넘어 내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 가운데 압도당하고 두려워하며 좌절하며 살아가는 일반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압도당하며 지배당해 사는 삶을 돌파하며, 내가 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그 들리는 말씀을 붙들고, 보이는 환경을 넘어서 주님을 의지하며 돌파하는 남은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십시오. 요한복음 2장에서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도저히 그들 머리에 받아들여질 수 없고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과정이 이해되기 못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옳고 맞음을 인정하며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태도로 나아갈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그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영적 전쟁을 벌이며 하나님께 선명하게 쓰임받는 300명의 남은자가 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기준을 붙드는 남은 자와 같이 이 세상에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영적인 전쟁을 하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부르심임을 잊지 말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상황으로 몰아 가시며 3만 2천명이 되는 군사를 만 명으로, 그리고 300명으로 줄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이 영적인 전쟁을 싸우라고 명령 하시는 것이죠. 기드온의 마음에는 순종해서 나아가긴 하는데 여전히 두려운 것입니다. 연약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기드온은 여호와의 영이 임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맞서야 하는 미디안 사람들과 군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드온을 하나님께서는 혼내지 아니하시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미디안 진영에 한번 내려가는데 혼자 가던지 두려우면 부하 한 명 데리고 가라는 겁니다. 그래도 사사이고 전쟁의 장수인데 하나님 말씀만을 의지해 혼자 당당하게 내려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결국 혼자 가지 못하고 부하와 함께 그 군대 진영으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데 여전히 부족함이 많고 자격 미달 같은 기드온에게 두려우면 부하 한명 데려가라 배려하시면서까지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여호와의 영이 나에게 임할 때 내 마음에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져야 정상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바라보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간다 그러는데도 마음에 두려움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나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에 붙들려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두려워하는 나를 혼내지 아니하시며, 두려우면 한 사람 같이 데리고 나아가라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며 다시 한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여전히 두려움이 내 마음에 머물러 있을 때….나를 바라보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하를 함께 붙여서 라도 순종을 향해 나아가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붙들고 연약함에 우리가 좌절하지 말고 그 연약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우리의 인생을 집중하기 원합니다. 그게 바로 기드온을 향한 사랑이었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순종하면서도 그렇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기드온은 부하와 함께 미디안 군대 진영에 내려갔습니다. 내려와서 기드온이 보는 것과 기드온이 듣는 것이 딱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기드온이 본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어마어마한 적군의 숫자들이었습니다. 군사들이 메뚜기 같이 많았고 그들의 낙타 수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습니다. 그 많은 숫자의 군사들과 낙타들을 보면서 상황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겠죠. 한마디로 기가 딱 벌어지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은 낙타들은 사실을 본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힌 왜곡된 눈으로 바라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낙타가 아무리 많아도 해변의 모래알만큼 많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기드온이 바라보는 적군의 수와 낙타는 그의 두려움이라는 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왜곡되고 부풀려진 실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이거는 이미 진 게임이다… 그 마음에 그런 것들이 다 쌓이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을 바라보며 사실로 인정하는 순간 낙심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일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드온이 적진에서 들은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비젼이었죠.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꿈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 꿈은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이었고 그 꿈에 대한 친절한 해석까지 합니다. 그게 바로 기드온의 칼이라는 것입니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기드온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으며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는 거예요. 지금 기드온은 자기가 본 것과 자기가 들은 것 사이에서 결단을 해야 되고 믿음의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기드온은 그가 본 것과 그와 들은 것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 그가 들은 것을 믿으며 용감하게 믿음으로 전쟁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용기를 얻고 두려움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나에게 넘겨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눈으로 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없는 것만 가득 보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눈은 항상 하나님의 뜻이 틀린거 같이 보이는 겁니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보이는 것이 주도하는 인생이 아니라 듣는 것이 주도하는 인생 되기를 원하십니다. 너가 보는 눈의 상황에 압도당하지 말고 네가 듣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보이는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넘어서라는 겁니다. 네가 말씀으로 듣는 주님의 뜻과 주님의 생각이 항상 옳음을 믿으며 순종하며 나아가라 결단하십니다. 기드온과 같이 내가 바라보는 것과 내가 듣는 것 사이의 차이가 있을 때, 내가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가 보는 것을 넘어서 내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으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인생을 의탁하며 인생을 걸고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기드온이 했던 놀라운 결단이며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되는 되는 결단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상황과 환경에 압도 당하지 않고 내가 듣는 하나님의 비젼과 말씀을 진리로 믿으며 약속만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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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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