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한글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심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영어 사도신경이나 다른 대부분 나라들의 사도신경에는 거기에 뭐가 들어가 있냐면 지옥에 내려가셨다…descended into hell이라는 고백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글 사도신경에만 그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왜 한글 사도신경에만 빠져 있는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부분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중의 초기 사도 신경에는 이 부분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논란과 또 하나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지옥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저희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건물 엘리베이터에 4층이 없었습니다. 1, 2, 3층 다음에 5층이었습니다. 4층이 없는 이유는 죽을 사…한문과 동일한 발음이니까 건물에 부정탄다고 4층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이런 우리만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선조들은 지옥이라는 말 자체를 거론하고 꺼내며 말고 하는 것을 피하고 언급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도신경에는 지옥에 가셨다는 고백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오늘은 가려져 있기도 하고 논란이 많은 이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음부”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적어도 세 개 이상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로 음부를 가리키는 단어는 “스올”입니다. 스올은 구약 성경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단어로 완전히 죽은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음부를 가리키는 단어는 “하데스”입니다. 하데스는 영어로 hell, 지옥을 직역한 단어라고 보면 됩니다. 세번째로 음부를 가리키는 단어는 “게헨나”가 있습니다. 게헨나는 지옥/음부에서 영원히 받는 고통과 형벌을 강조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적어도 이 세 단어가 음부/지옥을 칭하는 단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 지옥에 내려가셨다 부분이 신앙고백으로 있는가….에 대해 주목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왜 예수님은 죽으신 후 거기에 내려가셨는가…대해서도 주목하기 원합니다. 그 이유는 명확한데 천국이 상징이 아닌 실체인 것과 마찬가지고 지옥/음부가 상징이 아니라 실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전히 천국과 지옥을 선과 악의 상징으로만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천국도 분명한 실체이고 지옥도 분명한 실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음부에 내려가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 이후에 어떤 길을 가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우리 인생이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살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살지 않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우리는 영적 존재임으로 영원히 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디서 영원히 사느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있고 음부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는…영원히 지옥에서 사는 자가 아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다는 선언입니다. 영원히 살긴 사는데 천국이 아닌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멸망입니다. 누가 복음 16장을 보게 되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분명한 실체로 우리에게 소개하시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성경은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어떤 인생이 펼쳐지는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거지는 죽어 천사에게 들려 아브라함에게 올라갔고, 부자는 죽어, 장사 지낸 후에, 음부에서 고통받는다고 증언합니다. 죽음 이후에 거지 나사로와 같은 길이 있고 죽음 이후에 부자와 같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 가신 여정은 부자가 가는 그 길을 그대로 가시며 몸소 체험하신 겁니다. 예수 이름 없이 순종과 영접 없이 우리 인생이 끝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죽어서 장사 지낸 후에 음부에 가서 영원히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 부활하시기 전까지 이 음부에 내려가시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죽음이후에 분명한 이 두 실체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지옥/음부가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합니다. 지옥은 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 어둠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에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이 말씀이 사도신경의 고백에 매우 중요한 말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냥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어둠의 권세를 깨고 이기신 승리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이름을 베드로라 명하게 하셨고, 그 반석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 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음부의 권세”가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믿음의 고백 위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듯이, 성도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몸된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 위에 세워집니다. 그 예수 이름 위에 세워진 나의 인생이기에 음부의 권세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내가 거기에 결박되지 못하는 놀라운 역사를 주님이 약속하신 겁니다. 어둠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가 나를 흔들 수는 있어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나를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 베드로전서 3장에 무슨 얘기가 등장하면 노아의 방주 사건을 증언합니다. 노아 시대에 임박한 심판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방주에 탄 8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심판으로 멸망 당했습니다. 그 때 멸망 당한 사람들이 노아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 음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지옥은 한번 지옥불에 들어가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그곳에서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사는 곳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겁니다. 또한 노아 시대의 그 불순종은 과거의 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는 현재 형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예수 이름으로만 죽음 이후에 영원히 거할 거처가 바뀐다는 것을 선포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시하고 경시하며 귀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한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고 옛날 이야기로만 여기며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름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도 계속 어둠의 권세, 죽음의 권세, 음부의 권세에 결박되어 눌려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옥으로 내려가고 있고, 음부의 권세에 결박되어 있다는 이 선언을 우리는 중요하게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정확하게 그림 언어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자 베드로가 풍랑 위를 걷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물이 참으로 중요한 고백의 모티브인데, 물은 세례를 의미하고 그 세례를 내 옛 자아가 물에 완전히 들어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방주도 결국 물을 통과하는 심판이고, 방주는 그 물 심판 가운데 건짐 받은 구원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은 기적은 단순히 물 위를 예수님 바라보고 걸었다는 기적의 사건을 넘어, 물 심판에 빠져 죽어야만 하는 나를 건지시고 예수 이름 바라보고 물 위를 걷게 되는 기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에게 있어서 물은 심판이자 동시에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 가운데 나타나셔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물 심판과 음부의 권세가 예수님을 삼키지 못하고 그 위를 걸어가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나를 바라보고 배 밖으로 나와 물 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몇 걸음 가다가 풍랑을 바라보니까 두려워서 물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빠지는 베드로를 잡아 주시며 건져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믿음이 적은 자여…왜 의심하느냐….그게 바로 물 심판과 지옥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죄인 된 나를 건져 주시는 예수님, 음부의 권세가 예수님 권세 아래 굴복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니 물이 잠잠해 지는 것도 음부의 권세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놀라운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취할 때 물 위를 걷는 기적, 심판 위를 걷는 기적, 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기적을 저와 여러분들이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농담으로 여기며 경시하고 불순종하면 망하는 인생이 됩니다. 복종하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죽음 이후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자들이 있으며 복종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음으로 죽음 이후 음부에서 고통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모두 다 심판의 물에 빠져 영원한 형벌 가운데 고통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 심판의 풍랑 가운데, 심판의 홍수 가운데 주님이 건져 주셔서 구원받은 존재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 심판 가운데 우리를 건져 주셔서 우리에게는 그 심판이 뭐가 되는 겁니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 이름을 붙들 때 우리가 풍랑 위를 걸어갈 수 있고 구원의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음부의 권세에서, 죽음과 어둠의 권세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감격으로 떨림으로 선포하는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겁니다. 그 영원한 거처가 결정되는 것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이전 이 세상에 결정됩니다. 단번의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영접하고 하느냐 고백하지 않느냐에 따라 여러분들의 영원한 거처가 달라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음부의 권세,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 예수 이름을 붙들고 심판에 빠지지 않고 건짐 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임을 분명히 믿고 이미 승리한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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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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