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고난 주간 새벽기도 시간에 사도신경을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음을 고백하고 나서 그 많은 공생애 사건들을 다 뛰어넘고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운데서 하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많은 주옥 같은 천국 복음 가르침과 이사와 기적들이 복음서에 등장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다 패스하고 바로 십자가로 넘어간다는 것이죠. 이걸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첫번째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여러가지들이 있지만, 그것이 꼭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에 인생을 집중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번째 지혜는 예수님 공생애의 모든 것들은 결국 십자가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적과 기사들도, 제자들을 부르신 것도 모두 이 십자가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가게 될 천국을 위한 준비 과정이며 천국을 위한 예행 연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사명과 조율되고 천국에 조율되어 본질에 인생을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고난 주간을 통해 주시는 말씀의 지혜라 믿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후 십자가로 직행하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만큼 중요한 사건이 없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사명, 십자가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셨음을 콕 집어서 고백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먼저는 오늘 말씀에도 등장하듯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통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을 통해서도 고난 당하셨고 무리들을 통해서도 고난 받으셨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련데 왜 사도신경은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빌라도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면도 있고 자기 변호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사실 본디오 빌라도는 사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죄가 없으니까 풀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석방시키기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을 다 빼놓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게 너무하다 생각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 증언하는 이유는 빌라도가 로마로부터 그 자리에 임명 받은 재판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로마의 재판관으로 중요한 판결을 내리는 빌라도이기에,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법의 이름으로 판결 내린 자였습니다. 결정적으로 그의 아내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은 옳으신 분이기 해를 가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잘못 없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그렇게 꿈에서 나타난 것 때문에 상관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판결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던 빌라도는 바른 판결 대신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빌라도는 상황이 어찌되었던, 자기 마음과 뜻이 어떠했던, 결정적으로 결과는 그의 선고를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위치에서 결정되는 모든 것들은 핑계 댈 수 없고 책임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계속해서 자기가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지만 회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 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책임회피를 하려 합니다. 정말 중요한 바른 판결을 해야 하는 위치에서 백성들에게 그걸 물어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씻으며 예수님의 피와 자신이 무관하다고 책임회피를 합니다. 백성들에게 물어보는 것을 통해서, 손을 씻을 것을 통해서, 이게 잘못되면 내 책임이 아니라 백성들 책임이라며 떠 넘기려 하는 겁니다. 문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빌라도의 이런 책임 회피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도자 위치에 서고, 특별히 결정하는 위치에 서는 사람들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합니다. 왜냐하면 그 책임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죠. 어리석은 빌라도와 비슷한 사건이 며칠 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 미국이 정보를 분석해서, 조만간 테러가 있을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정보를 줬다는 거죠. 그런데 푸틴 대통령이 뭐라고 결정했는가 하면 이건 미국이 러시아를 흔들기 위한 나쁜 의도다… 잘못된 정보라고 몰아 세우고 무시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되 1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하는 끔찍한 테러가 일어난 겁니다. 이게 바로 뭐냐면 지도자의 우매함이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그 백성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지금 빌라도는 그 결정적인 책임을 자신에게 있음을 부인하며 계속 책임 회피하며 결국 그 우매한 판결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만드는 직접 가해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불명예의 이름으로 매 주일 전세계의 성도들을 통해 계속 저주의 이름으로 고백되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예수님, 그 고백의 본질은 본디오 빌라도를 집중하고 바라보는 대신 우리를 위해 아니라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우리 또한 빌라도와 같이 책임회피 하며 마치 빌라도에게만 책임이 있고, 나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면 안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로 인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음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게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매주 고백하는 신앙 고백,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나로 인해 당하신 고난이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허락하신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에 인생을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나의 인생에 맡겨진 책임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니라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목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묶여 살아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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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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