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 왕은 다윗과 견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산당들을 더 허물었고 하나님을 의지함을 넘어 허리띠로 같이 매는 연합의 관계로 하나님과 형통함을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고 놀랍게 산 왕이었다면 적어도 히스기야의 삶과 남유다의 삶에는 큰 고통과 어려움은 좀 피해가거나 면제 받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응보에 따른 논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왕,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예배의 갱신과 부흥을 열게 한 히스기야에게 꽃길까지 아니어도 적어도 이런 가시길 허락하시면 안되는 게 아닌가…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스기야왕은 면제 당하기는 커녕 앗수르로부터 큰 어려움과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이 모든 신실하고 정직한 일들 후에 히스기야 왕에게는 큰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온 겁니다. 히스기야가 당하는 어려움은 작은 어려움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흔드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킨 앗수르가 남유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지금 여러 지방들이 이미 다 함락이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막 들이닥치려 하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 당했듯이, 남유다도 멸망 당하기 일보 직전의 위기가 찾아온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신실하고 정직했던 왕, 하나님 앞에 이런 놀라운 일들을 다 한 후에 갑자기 찾아온 큰 어려움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풍파와 어려움을 면제 받게 해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살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성도들도 불신자도 동일하게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고 내 계산으로는 도대체 맞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신실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따랐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 오느냐….는 질문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우리의 인과 응보의 계산으로는 맞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신실하지 못하거나 정직하지 못해서,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이런 큰 국가적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산당을 다 제거하고 우상을 무너뜨리고 예배를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큰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럴 때에는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영적 전쟁의 핵심입니다. 히스기야가 갑자기 찾아온 국가적 어려움에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앗수르가 그렇게 공격해 와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 자체로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이 어려움에 히스기야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히스기야가 경황도 없고 놀라도 당황해서 앗수르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들이 요구한 과도한 조공 요구에 성전에 금을 다 벗겨서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치스러울 정도로 금과 은을 다 긁어 모아 가지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친 겁니다. 그렇게 원하는 조공 받았으며 물러가야 하고 공격 안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공을 받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앗수르가 쳐들어오는 겁니다. 달라는 걸 줬으면 공격하지 않고 돌아가야 되는데, 조공의 요구를 들어 주었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닌 겁니다. 또다시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나서 앗수르 군대는 심리전을 펼치며 히스기야왕과 남유다 백성을 두 가지로 흔듭니다. 첫번째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과 개혁을 비난하고 무시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으로 백성들을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조율시키고, 산당을 없애고 우상을 없애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한 신앙이 뭔 힘이 있냐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너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어려울 때 힘을 주지 않는 하나님라고 깎아 내리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신앙은 소위 말하는 현실적이지 않는 일만 가지고 백성들을 지금 힘들게 한다면서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을 흔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단행했던 여호와만을 믿는 신앙과 그 하나님만을 섬기는 순전한 여호와를 의뢰하는 신앙을 흔들고 무시하는 것이죠. 두번째로 히스기야 왕의 군사력을 무시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남유다 가운데 앗수르 대군과 싸우러 나와 말을 제대로 탈 수 있는 사람이냐 있냐는 겁니다. 너희 중에 말을 탈 사람 있으면 내가 말 2만 마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군사력이 앗수르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너희가 아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히스기야의 군사력을 무시함으로서 백성들에게 싸울 의지를 다 꺾어 버리는 것이고, 히스기야와 백성들 사이를 계속 이간질하는 겁니다. 이 앗수르 군대의 히스기야와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리전은 지금 이 시대에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흔드는 사단 마귀의 미혹의 패턴과 동일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마음속에 계속 찾아와 흔드는 사단의 심리전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신뢰한다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신실하게 산다는데 왜 너의 인생에는 그렇게 어려움이 있는 거야? 왜 너는 똑같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거야? 네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많아서든, 혹은 네가 믿는 하나님이 별로 쓸모가 없던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 이렇게 흔드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은 뭐야?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뭐냐는 것이냐며 계속 우리를 흔들어서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드는 게 사단의 심리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스기야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정직하고 신실하고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갈지라도 우리 삶에는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공식과 계산에 들어맞지 않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 성도로서 우리는 낙심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거나 떠나갈 것인가, 반대로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도구로 삼느냐…의 기로에 서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이 잘될 때 교만하지 않고 내 인생이 안 될 때 낙심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내 인생이 잘돼서 계속 올라갈 때 이게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내 인생이 내리막길로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이 올라올 때 질문을 묻어두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붙드는 싸움이 신앙 생활입니다. 내 생각과 내 눈앞에는 하나님의 부재가 가득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붙드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싸움, 그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힘을 붙들고 버티는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이 없으면 무너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나의 되심을 정말 믿음으로 고백하며 내가 주님의 힘을 붙들고 그 고난과 어려움을 버텨내는 겁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게 하는 기적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힘으로 버티며 이겨내는 그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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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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