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히스기야가 남 유다에 찾아온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보였던 믿음의 반응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남 유다에 찾아온 큰 위기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잘 마무리 된 후 히스기야 왕 자신에게 찾아온 큰 위기와 어려움을 증언합니다. 히스기야는 다윗 왕에게 필적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왕이었으며 하나님께 충성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온 나라가 벼랑 끝에 서는 큰 위기가 찾아오더니, 그 어려움이 물러가고 아니까 이렇게 회복되기 어려운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놀라운 믿음을 가진 왕,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의 형통한 은혜를 누리는 왕이었는데 그의 인생에 찾아온 것은 꽃 길이 아니라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신실함과 충성됨에도 불구하고 큰 위기와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왔었습니다. 그 풍랑과 어려움 가운데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영광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끝났습니다. 그렇게 국가적인 어려움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끝나고 나면 좀 쉬게 해주고 히스기야에게 평탄한 길을 좀 걷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어려운 국가적 위기를 풀고 나니까 찾아온 건 죽을 병입니다. 나라의 벼랑 끝 어려움과 고난이 끝나고 나니까 히스기야 자신에게 큰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듣고 있는 히스기야 왕은 과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 말도 안되는 상황을 직면하면서 히스기야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곰곰히 묵상해 봅니다. 아니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섬기고 충성하고 정직한 왕, 유월절 정신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참 예배를 회복하려고 했던 그 신실한 히스기야 왕에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계속 닥치는지… 왜 국가적인 어려움이 그렇게 닥치고 그게 끝나니까 이제는 죽을 병에 걸리다니요. 그렇게 정직하고 신실하고 충성된 그 히스기야 왕에게 너는 곧 죽을 거라는 것을 굳이 이사야를 통해 예고까지 하시는 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삶의 자리가 히스기야가 직면한 삶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닥치는 삶의 자리입니다. 인과 응보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고 머리 속 계산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는 하나님의 정직하고 신실한 성도들에게 닥치는 어려움과 고난, 기막힌 어려움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깨지고 아프고 눈물나는 세상을 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의 반응은 원망과 낙심입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오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사람들을 향한 원망이 밀려옵니다. 마음이 낙심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고 내려 놓으려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놀라운 믿음의 반응이 뭐냐 하면 죽을 병에 걸린 그때에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죠. 낯을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는 겁니다. 죽을병에서 걸린 그가 했던 것은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 벼랑 끝에 섰을 때도,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가는 겁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진심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여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한 것을 기억해 달라며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통곡의 눈물과 함께 드리는 마음 쏟는 기도였습니다. 상황 중심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의 반응이었고,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합한 자로서의 믿음의 반응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위대하고 그의 믿음이 대단한 이유는 그의 삶에 어려움과 고난을 하나님이 다 피하게 해 주셨다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히스기야의 신실함과 정직함은 그 인생에 찾아오는 설명되지 않는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믿음의 반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어떤 방법론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가는 것, 이게 기적이며 놀라운 믿음의 반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형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이 계산된 대로 쫙쫙 잘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계획과 계산대로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설명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 신음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반응이 바로 형통한 삶입니다. 놀라운 것은 히스기야의 눈물과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겁니다. 원망과 낙심 대신 하나님을 향하여 제일 먼저 은혜를 구하며 가까이 나와 하나님 앞에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드린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응답을 주셨는데 너의 기도를 들었고 내 눈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병에서 건져 주시고 15년을 더 살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는지 아닌 지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면서까지 불쌍히 여기신 사건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나 선지자를 통한 니느웨 백성의 멸망 예고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통해 말씀을 주셨지만, 그 말씀을 듣고 성의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반응하며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고 회개하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의 뜻을 돌이키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심판을 원하지 않으시는 자비하심이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셨고 히스기야 왕을 향한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히스기야의 정성이나 열심이, 눈물과 마음을 쏟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변경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했다는 생각은 위험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가 너무나 정성과 마음을 쏟아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불쌍히 여기심을 통해 치유 받았으며, 더 나아가 죽을 병을 고쳐 주심을 통해 그 나라가 다시 한번 돌아오고 회복하기 원하시는 주의 뜻이 담겨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죽을병에서 건져 주시고 15년 연장의 삶을 선물로 허락하시면서 네가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고 이 성을 보호한다는 치유의 목적성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병에서 히스기야를 고쳐주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고 이걸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사용하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죽을 병에 걸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 히스기야와 같이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게 기적입니다. 원망과 낙심으로 주저 앉는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며 마음과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도들은 문제나 고난과 어려움이 피해가는 인생이 아니라 눈물과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는 기적을 누리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의 증거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적, 눈물을 쏟고 마음을 쏟으며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고치시듯 우리의 병을 낫게 하시며 그 기적을 통해 이루실 분명한 목적성이 있음을 믿음으로 붙들기 원합니다.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기도, 주님의 뜻을 붙들고 응답 받은 히스기야의 놀라운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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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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