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난 후에 시신을 장사 지내는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난주간 때마다 십자가 사건을 계속 마음에 묵상하고 있는데,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믿음의 선택입니다. 성경은 십자가 앞에서 대부분은 빌라도와 같은 잘못된 선택, 부끄러운 선택을 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 잘못이 없으며 억울하게 잡혀 왔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 아내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판결을 하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선택들도 있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과 목숨을 걸고 함께 할 것 같이 호언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다 숨고 도망갔고 배신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런 어리석은 선택과 불신앙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선택을 오늘 말씀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통해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전면에 나와서 목숨과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깨지고 병들고 아픈 세상에서 인생을 살다 보면 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발견하는 것은, 진짜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것 같이 생각되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숨어 버린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제일 먼저 와서 나를 도와 줄 것같이 기대고 믿었던 사람들이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고, 심지어 그 사람들이 배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내가 전혀 머리에 두지 않았던 사람들, 생각지 않은 의외의 사람들이 나에게 손을 내며 도움을 주는 일들을 큰 어려움 가운데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은 사랑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고 경고하시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들, 나를 어려울 때 도와줄 것 같은 그 사람들에게 실제로는 제일 상처를 많이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게 인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순과 같은 모습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같이 목숨 걸고 죽을 것 같았던 사람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배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사람입니다. 이런 전혀 의외의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을 보게 되면 아리마대 사람 예수는 부자이자 예수님의 제자라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는 공의회 의원이자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자일 뿐만이 아니라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조용히 믿던 신앙인임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분명했는데, 눈에 띄면 잃어 버릴 게 너무 많고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면 자기 위치에 어려움이 있을 게 분명하니까 예수님을 믿긴 믿지만 조용히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 지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사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내용이고 사도신경에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장사 지내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숨어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믿는 게 그의 인생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었는데 십자가 앞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놀랍게 변하고 뒤집어 진 것입니다. 빌라도는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배신하고 숨어 버렸는데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십자가 앞에서 정반대로 믿음의 결정과 결단을 통해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십자가 앞에서 극적으로 변화했는가에 대해서는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짧은 말씀을 통해 십자가 사건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 것이 분명함을 증언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로 말미암아 놀라운 믿음의 결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몰래 조용히 보이지 않게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목숨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전면에 나오는 예수님의 놀라운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십자가 앞에서 에수님에 나아와 목숨을 걸고 전면에 나와서 위험을 감수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한 겁니다. 지금 분위기는 몸을 바짝 사려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모든 대중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쳤고 종교 지도자들이 수를 써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직후이기에, 그럴 때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선다는 것은 잃어야 할 것이 많았고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한 편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걸 통하여 성경은 아주 극명하게 빌라도의 십자가 앞에서의 잘못된 선택과 아리마대 사람의 십자가 앞에서 믿음의 선택을 딱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놀라운 믿음의 선택은 바로 그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껏 장사 지내는 겁니다. 지금 로마 군인들이 다 쳐다보고 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말했던 수많은 무리들이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홀로 피투성이가 되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시신, 정말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겁니다.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자기가 나중에 죽을 때 쓰려고 했던 새 무덤에 주님을 모시고 장사 지내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열광하고 환호 할 때,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행했을 때 예수님과 함께하고 내가 한 편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에게 떠나갔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아우성 친 십자가 앞에서, 죽으셔서 시신이 된 예수님에게 나아가 나는 예수님과 한 편이라고 말하며 그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그 시신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 곁에 마지막까지 함께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시체가 된 예수님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루며 나는 예수님과 한 편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있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선언하며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나가면서 마음에 진지하게 물어보기 원합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은 십자가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디에 서 있습니까? 빌라도와 같이 양심과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어리석은 선택과 판결로 나아갑니까? 말로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 같았는데 십자가 앞에서는 다 숨어버리고 배신하는 선택으로 나아갑니까? 아니면 그냥 대중의 편승해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그런 무리들의 선택입니까? 아니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이 십자가 앞에서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과 한 편임을 선포하며…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함을 선택하십니까? 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의 선택으로 나아가기를 초대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빌라도의 선택이 아니라, 제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선택이 저와 여러분들의 선택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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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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