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리는 사단의 공격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직접적인 공격 (Trial) 이 있고, 간접적인 공격인 미혹 (Temptation) 이 있습니다. 채찍과 당근이라고 생각하시면 딱 맞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대군의 직접적 공격에 벼랑 끝에 서게 되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고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죽을병에 걸려서 큰 어려움에 빠졌지만, 절망과 원망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 눈물과 마음을 쏟는 기도로 하나님께서 15년 인생을 연장해 주시는 놀라운 치유와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히스기야는 너무 잘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다윗 왕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남유다에서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하나로 성경은 평가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찾아온 미혹에서 히스기야는 안타깝게도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오늘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공격에도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아갔고 자기의 죽을 병으로도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아가서 하나님이 역사하심과 하나님이 치유하심 모두 경험했는데 여기서, 미혹에서 무너지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가 공격 할 때는 정신이 확들 정도로 긴장감이 생겨, 하나님에 나아가 그렇게 의지했던 히스기야가 바벨론이라는 미혹과 유혹에는 긴장감이 없이 마음이 풀어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너지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말씀이라는 것이죠
바벨론 왕의 사신들이 편지와 예물을 이유 없이 보냈겠습니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큰 선물을 보내면 좋다고 덥석 받으면 안되고 좀 의심해보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게 선물이 아니라 뇌물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봐서 똑 같은 선물일지 모르나 선물과 뇌물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며, 뇌물에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는 겁니다. 바벨론 왕의 사신들이 가져온 예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었고, 미끼 같은 당근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긴장감이 없이 마음이 풀어져서 이게 뇌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바벨론의 사신이 가저온 예물은 히스기야를 교묘히 공격하는 또 다른 패턴인 미혹이었는데 거기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무너진 것입니다. 성경은 선물을 가져온 바벨론 사신들에게 모든 것을 보일 거 안 보일 거 구별하지 못한 채 다 보여주었다고 증언합니다. 왜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 사신들에게 a급 군사 기밀을 공개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다 그렇게 보였을까요? 여기에는 자기 과시와 교만이 있는 거죠. 내 나라가 이렇게 대단하고 이렇게 가진 게 많다고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그 자랑의 본질에는 “내 죽을 병이 나았다” 는 그 사실을 자랑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벨론 사신들은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으로 치유 받은 것은 몰랐는데,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그걸 자랑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놀라운 은혜로 나 같은 죄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에게 그 모든 것을 돌렸어야 하는데 내 죽을 병이 나았다는 것 자체만을 강조하는 겁니다. 치유자 하나님이 빠진 채 내가 치유 받고 내가 기적으로 건짐을 받았다는 것만 강조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에 대해 거룩한 분노가 있었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데 앞장섰던 자가 히스기야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이름과 내 치유와 내 군사와 내 보물들이 자랑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병 고쳐 주심이 아니라 내 병 나음이 자랑거리가 되었기에 자기 교만에 빠져 내 나라의 보물들, 내 나라의 군대 내 창고의 모든 것을 다 활짝 열어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대단하고 이만큼 힘이 있고 내가 이만큼 부강하다고….죽을 병에서 건짐 받고 선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끝에 가서 자빠지는 인생이 되 버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바벨론의 사신들과 같이 끊임없이 우리를 흔드는 미혹이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과 직접적인 공격에는 믿음으로 반응하여 승리하다가, 인생의 승승 장구 속에 조용히 찾아오는 미혹 앞에 사정없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영적 긴장감이 풀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게 당근에 사정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바벨론 사신의 미혹에 그 당근을 덥석 물고 하나님에게 나오는 대신에 나를 자랑하며 내 치유 받음을 자랑하는 자가 되 버린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바벨론의 당근에 영적 긴장감이 다 풀어진 히스기야의 자기 교만과 자기 자랑 때문에 치명적 결과가 찾아오게 됩니다.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거 다 바벨론에게 털리고 빼앗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몸에서 난 아들 중에 한 사람은 바벨론에게 사로잡혀 환관이 된다는 겁니다. 결국 남유다는 누구 때문에 국운이 기울어서 바벨론에게 망한다는 겁니까? 히스기야 왕 때문에….망한다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비극의 소식을 들었으면 예전 히스기야 같으면 하나님 앞에 당장 나아가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한 번만 기회 주시옵소서…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내가 사는 날에 이런 일이 안 일어나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대답하고 끝입니다. 자기 아들이 사로잡혀서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되고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바벨론에게 빼앗긴다는데, 그게 나 때에는 일어나지 않으니 상관없습니다…이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죽을 병에서 건져 치유하시며 15년의 삶을 연장시켜 주셨을 때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와 예배하며, 성을 다시 지키고 세우기 위해서, 그 사명을 위해 15년의 삶을 기적으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결론은 히스기야가 기적으로 15년을 더 살고 한 일이 없다는 겁니다. 좀 더 냉정하기 말하면 차라리 15년 전에 죽었으면 더 좋았을 인생이라는 겁니다. 15년을 더 산 게 히스기야 에게는 복이 아니라 화라는 겁니다. 15년을 기적으로 더 살아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 인생을 살며 나라를 무너지게 하는 인생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는 앗수르 군대의 직접적인 공격만 있는 게 아니라 바벨론 사신의 미혹으로 흔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벨론의 미혹으로 오는 당근에 무너지고 어떤 사람들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오는 채찍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대신에 자꾸 나를 자랑하게 되고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게 되고, 내 치유 받음, 내 축복받음, 내 신비체험이 자랑거리가 되어 무너질 수 있는 겁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치유, 하나님이 부어 주신 축복, 하나님이 부어 주신 신비체험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영적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며 인생이 잘 나갈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인생의 고난과 역경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이 초심을 잃지 않게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만들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주신 사명 가운데 늘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앞장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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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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