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세 친구가 드리는 죽음을 뛰어넘는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내 주변에 친한 다섯 사람이 누군가를 보면 내가 누군가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면 내가 가까이 교제권에 있는 그 사람들이 결국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좋은 영향이든 안 좋은 영향이든 그 가까운 주변의 친한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그 영향력을 주고 받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다니엘의 세 친구라고 부르는데, 이 세사람과 다니엘이 함께 친한 교제권에 있었다는 것을 통해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보여주는 신앙의 수준이자 영적 현주소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드리는 기도는 아주 본질적인 원초적인 도전 앞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만을 절하며 섬길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우상에도 절하며 섬길 것인가에 대한 아주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도전에 그들이 직면했고 그들은 그 원초적 도전 앞에 죽음을 뛰어넘는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느브갓네살이 세운 신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 금신상이 어느 정도냐 하면 30m 이상 된다고 합니다. 당시에 30m 높이로 세운 신상이란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 금으로 얼굴만 입힌 게 아니라 30m 되는 신상 전체를 금으로 다 입힌 게 느브갓네살이 세운 신상입니다. 그 화려하고 높이 세워진 신상을 통해 누가 신이라는 겁니까? 왕 자신이 신이라는 겁니다. 왕이 세운 금신상이랑 왕자신을 신격화 시켜 만들어 놓은 신상이자, 자신을 높이고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은 교만의 끝판왕입니다. 이 금신상은 하늘 끝까지 닿으려고 높이 세운 바벨탑의 교만과 똑같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늘 하늘까지 올라가 내가 신이 되려고 하는 열망입니다. 내가 신과 같이 유사 전능성을 가지고 신과 같이 모든 권력과 지위를 가진 왕이기에 사람들은 그 앞에 절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힘 있는 사람에게는 가서 굽신거리고 아쉬운 소리하고 그 앞에 절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은 진짜 신이 아니기에,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문제일 뿐 아니라, 그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강요와 협박입니다. 느브갓네살 왕 앞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끌려왔는데, 끌려온 이유는 왕에 세운 금신상에 절 하지 않았다는 죄목입니다. 왕의 금신상에 사람들에게 절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요와 협박으로 죽이고 파괴하는 게 바로 인간이 세운 금신상의 한계입니다. 비인격적인 대상화가 되어 거기에 절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사람을 신격화 하고 우상화 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면 반드시 강요와 협박을 통해 사람들을 파괴하고 죽이게 됩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진행하는 우상화가 정확하게 느브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강요하고 협박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모든 우상은, 자신의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우고 신상을 세운 모든 형상은, 이렇게 강요와 협박으로 파괴하고 죽이는 데로 나아갑니다. 지금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느냐 사느냐의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짜 우상, 신격화된 왕의 금신상 앞에 강요와 협박으로 절하라는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절 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죽는다는 협박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도전이 우리 삶에 일상으로 다가오는 도전은 아니나, 때로는 이런 도전을 직면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게 되면 늘 평화롭게 자유를 가지고 신앙 생활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니엘의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어야 되는 때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담보로 하는 도전 앞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담대하게 믿음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나의 대답은, 우리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확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이게 그들의 분명한 신앙이요 고백의 기도입니다. 인간이 세운 느브갓네살의 금신상은 강요와 협박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허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죽음 가운데, 풀무불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고 건지시고 살리시는 생명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기도로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살리시는 하나님, 건지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도로 선포하는 겁니다. 더 귀한 고백은 18절에 등장하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절하지고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나를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 그 능력의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지 않아도 나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이게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의 소위 말하는 마지노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서 있기에 그렇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그 우상을 섬기지도 절하지도 아니할 것이라는 놀라운 고백이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의 죽음을 뛰어 넘는 기도입니다. 그러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의 선포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선포의 기도를 누구 앞에서 하느냐 하면 스스로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금신상을 세운 세운 느브갓네살 왕에게 선포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스스로 왕이 신이라고 착각하는 왕 앞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생명을 거는 기도를 통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은 내 목숨을 연장하는 수단 정도가 아니라 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되는 본질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참 하나님이고 참신이시라는 그들의 고백에, 느부갓네살 왕은 얼굴이 변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분명한 믿음의 고백, 그 결과는 그들이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풀무불의 세기를 7배나 더 세게 해서 그 풀무불에 던져 넣게 됩니다. 우리는 이 뒷부분을 아니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개입하셔서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되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전혀 타지 않는 모습으로 살리시고 건지시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게 큰 감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건져주신 게 아니라 그러지 아니하실 지라도…의 결과가 훨씬 많았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는 가운데 풀무불에서 죽었고,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하며 죽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고 없이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피를 흘렸습니다. 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죽음을 뛰어넘는 기도를 통해 대다수는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는 대가로 순종의 희생을 기꺼이 치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 우상과 금신상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강요하고 협박하며 파괴하며 죽이는 우상들이 이곳저곳에 가득합니다. 그 속임수와 거짓, 우상과 금신상의 홍수 속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능히 건져내시는 분, 능히 살리시는 분, 능히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위에 서서 그 고백을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
아카이브
April 2025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