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배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말씀이자, 끊임없이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사랑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할 만도 하실 것 같습니다. 남북 갈등으로 서로가 원수세어 싸우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북북 갈등으로 서로 내전을 벌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자리를 자기 마음대로 힘과 권력을 통해 차지하려고 하는 그 피비린내 나는 타락의 극치, 불순종과 우상숭배가 만연해지는 북 이스라엘을 바라보면 정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북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내시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그 위대하고 놀라운 엘리야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가장 시대가 어둡고 가장 왕이 타락하고 악할 때 입니다. 아합이라는 왕은 북 이스라엘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가장 악한 왕이 지배하는 가장 힘든 영적 암흑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하고 센 선지자를 보내 주십니다. 이 어두운 역사를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배반하고 등 돌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원하시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사랑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 엘리야는 누구인가? 이 정도 위대한 선지자면 그의 출생 이야기를 하든지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하든지 어느 백그라운드가 증언될 것 같은데, 집안에 혈통도 어머니 아버지 이름도 전혀 없습니다. 길르앗지방 디셉 사람 엘리야…가 끝입니다. 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이유는 엘리야에게 집중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일하시는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은 엘리야를 바라보는게 아니라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던진 선포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 없으면 앞으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합왕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말입니다. 뼈속 깊이 바알 숭배자인 이세벨과 결혼한 것과, 바알 제단을 만든 것과, 아세라상을 만든 이런 악하고 어두운 왕이었으니 이런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 듣고 회개하겠습니까? 전혀 들을 귀가 없는 것이고, 들을 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진리를 죽이려고 하는 왕이기에 엘리야의 선포는 목숨을 거는 선포였습니다. 시대가 악하면 항상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그 진리를 죽이려 하려고 합니다. 마치 모세가 바로 왕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 바로 왕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 모세를 죽이려 했던 것과 동일한 겁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듣던 듣지 않던 아합왕 앞에 가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막지대를 살고 있습니다. 거기 자라는 많은 식물들은 새벽에 내리는 이슬로 자라게 되는데 비가 안 오면 당장 식물들이 말라 붙습니다. 그러니까 비도 이슬도 며칠 내리지 않으면 그 땅은 다 메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그런 척박한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하늘에서 주시는 비와 이슬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 은혜 없으면 망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매일 알려주시며 철저히 하늘만을 바라보고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도록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대신 눈에 보이는 바알 우상에게 달려가고 절하고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며 심지어 그 바알의 딸과 결혼하는 왕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고는 뭡니까? 지금 네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보이는 풍요와 번영의 우상 바알에 매달리고 살아간다면 그 우상에게 한번 구걸해 봐…거기 인생 한번 걸어봐 어떻게 될지….이 시간 경고하는 것이죠. 네가 잘 먹고 살아가는 것이 네가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바알이라는 우상이 너를 도와줘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매일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어서 네가 살아가고 있는 건데 지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그렇게 붙들고 바알을 붙들고 살아간다면…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거야….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아합왕은 깨달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연히 진리를 선포한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피할 곳을 마련하셨고 그 곳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살도록 이끄셨습니다. 엘리야는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지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가 주시는 음식으로 내가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선교지에서 선교사님들이 참 많이 하는 말씀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까마귀가 엘리야를 먹인다는 것은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그가 그 기근과 어려움을 몸으로 경험하는 때임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동물이 가져다주는 음식이 좋겠습니까? 까마귀가 드론으로 해가지고 요리된 불고기를 가져다 주는게 아니라 그 새가 물어다 주는 고기들이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죠. 정말 겨우 먹고 살만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부정하다고 말씀하신 동물입니다. 까마귀가 먹어 가져다주는 음식은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는 먹으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정하다고 여기는 까마귀가 물고 오는 음식을 먹으면서까지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이시는 그 절박한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부정한 동물이 가져오는 음식을 먹이면서 하나님은 버티라는 거예요. 까마귀가 물어다니는 음식으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서 목숨 거는 그 절박한 상황에 엘리야가 처하게 만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까마귀를 생각하라…심지도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는게 바로 엘리야가 처한 상황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그 부정한 동물인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기르시고 먹이시는데 너희가 이 부정한 새인 까마귀보다 얼마나 더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까마귀가 아니라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입히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걸 통하여 먹는 것이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게 하시며 그 백성의 탄식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자가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아합의 시대가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일 수 있습니다. 그 어둡고 죄악된 시대만 바라보고 있으면 절망하고, 뉴스를 바라보면 절망만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선지자들은 대부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들입니다.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배반하는 백성들,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가 어둡고 사람들이 악하다는 것으로 절망하고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기에 가장 어두운 때에 가장 위대한 사람을 보내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렵고 악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 보내심으로 돌아올 기회를 계속 열어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한 시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그 가운데 보내시는 빛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기대하는 것,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빛을 어둠에 비추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동시에 엘리아를 바라보지 말고, 엘리야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까마귀에 집중하지 않고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선명히 바라봐야 합니다.나의 일상이 사람과 상황을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받으며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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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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