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왕은 북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역사적으로 가장 악한 왕인 이유는 뼛속 깊숙히 바알 숭배 가문이었던 이세벨과 결혼했기 때문이고, 바알을 추종하는 것을 넘어 바알 제단을 쌓았기 때문이고, 아세라상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깊은 영적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주시며 희망의 싹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아합왕의 시대에 선지자 엘리야가 경험하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 사르밧 과부와 그 집이 경험하고 있는 안타까운 일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일들이 아니라 그 시대 영적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 숨겨져 있습니다. 엘리야가 경험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과 고기로 그가 살았던 것도, 가장 가난한 과부의 집에 머물며 생존하며 버텼던 것도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동시에 사르밧 과부가 굶어 죽기 직전의 절대 빈곤에서 허덕이며 신음하는 모습 또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안타까운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언어 입니다.
오늘 말씀은 굶어 죽을 위기에 빠진 사르밧 과부 집을 건져 주신후 그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증언합니다. 절대 기근, 절대 빈곤의 상태였는데 때에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르밧 과부 집에 임해 기근 가운데 가루가 끊어지지 않고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때를 따라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이 과부의 집이 잘 지냈다, 엘리야로 말미암아 그 집이 축복을 받았다 이렇게 계속되면 좋은데 또 다른 비극이 그 집에 찾아온 겁니다. 굶어 죽지는 않게 되었는데, 그 과부의 유일한 소망이자 희망인 그 아들이 병들어 신음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굶어 죽는 걸 살려 주시더니 굶어 죽는 대신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과부로 사는 것은 어렵지만 그 당시 과부로 산다는 것은 정말 말할 수 없이 고통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삶입니다. 남편이 일찍 죽으면 그 죽은 이유가 그 부인 때문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몰아가는 그런 사회적인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고개를 들고 살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런 과부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은 누구냐 하면 그 아들입니다. 아들을 사랑해서도 중요했지만 아들이야말로 이 과부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버팀목이 되는 겁니다. 그 여인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 아들을 통해서였죠. 그런데 그 과부의 아들이 지금 병들어 죽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사르밧 과부에게는 모든 소망이 무너지는 처절한 절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두 마음이 동시에 있는 거죠. 아들이 굶어 죽는 대신 병들어 죽으니까 첫 번째는 자신의 탓이라고 느끼는 겁니다. 이 아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하는 마음, 이 못난 애미 만나 가지고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다고 가슴을 치는 겁니다. 남편이 일찍 죽은 것도 서러운데 아들마저 죽게 된게 다 내 탓으로 느끼고 내 죄 때문이라 느끼는 겁니다. 동시에 엘리야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있는 거죠. 당신이 왜 우리 집에 들어와 가지고 내 아들 죽겠했느냐는 겁니다. 당신이 들어와서 멀쩡했던 내 아들이 지금 죽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큰 어려움을 당하면 이 두 마음이 동시에 들어갑니다. 한번은 자책이 들고 한번은 원망이 들고 이 두 마음이 계속 사르밧 여인에게 탄식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의 유일한 소망인 아들을 죽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그 아들을 굶어 죽는 것을 건져 주시더니 그를 병들어 죽게 하셨는가? 그렇게 병들어 죽이시려면 차라리 굶어 죽이시지… 이러면서 하나님에게 질문하고 탄식하는게 우리의 당연하면서도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아들이 왜 병들어 죽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라는 대답에 생각보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답을 안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건 뭐냐면 지금 이 말씀은 단순히 사르밧 과부와 엘리야의 개인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에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임을 깨닫게 되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처한 모든 상황은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임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아합왕으로 인해 모든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기근은 물이 없는 기근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메말라 사라진 말씀의 기근이라는 것을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가 처한 절대 빈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북이스라엘이 말씀이 말라 헤메며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영적 상태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에서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다는 것은 동시에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기근이 있었고 그들은 영적으로 병들어 죽었다는 겁니다. 말씀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이 바로 그들의 영적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떠나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 때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찾아오는 영적 현실은 말씀의 결핍으로 영혼이 메말라 죽는 거고 병들어 죽는 겁니다. 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통하여 그 당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자책하고 원망하며 탄식하는 사르밧 과부 앞에서 그 죽은 아들을 바라보며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침상에 죽은 아들을 뉘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두번이나 반복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음을 강조합니다. 굶어 죽는 대신 병들어 죽은 과부의 아들 앞에 엘리야의 기도는 그의 기도는 부르짖음의 기도였습니다. 저도 침묵 기도를 좋아하고 때로는 말을 멈추고 침묵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런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 불가능의 상황에 놓였을 때는 하늘을 향하여 나의 간절함이 토설하듯이 나오는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내 입술을 벌려 나의 가장 큰 소리로 주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 살려 달라고, 이 아들과 같이 영적으로 죽어간 북 이스라엘을 살려 달라고 엘리야는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겁니다. 인생에 사노라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상황에 소망이 보이지 않고 답이 없고 내가 풀 수 없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 시대의 어둠과 죄악을 바라보며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 성도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기 원하십니다. 동시에 엘리야가 했던 기도는 죽은 아이 시신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려 기도했다 그랬습니다. 아이 시신 위에 자신의 몸을 엎드렸다는 건 그 죽은 시신과 자신의 몸을 똑같이 대는 거죠. 내 생명과 아이의 죽음이 맞교환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어서 저 아들 살기를 원합니다…간절한 행동과 기도입니다. 세 번이나 내 생명이 끊어지더라도 저 아이를 살려 주시옵소서… 죽음을 각오한 기도였습니다. 엘리야의 부르짖는 기도, 죽음을 각오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과부의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이걸 통하여 이방신전과 바알 숭배가 가득했던 땅에서 사르밧 과부의 입을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안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왕과 백성들은 말씀의 결핍으로 메말라 죽어가고 병들어 죽어갑니다. 아합의 시대에 어둡과 죄악된 세상 속에서 그 영적 기근과 영적 질병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원합니다. 끝까지 북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기근과 병듦을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깨우시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보내주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영적 기근을 해갈하시고, 영적 병듦에서 구해주시고, 죽음에서 살리시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북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우리 공동체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게 했음을 믿고, 하나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소망의 백성,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붙들고 영적 기근과 영적 병듦에서 해방되어 살아가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
아카이브
March 2025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