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 감정이란 함께 할 수 없는 감정이나 느낌이 동시에 내 마음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이 두 마음이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 같이 양립하면서 내 마음에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그 감정이 머물러 있을 때 그것을 양가 감정이라 그럽니다. 예를 들면 오늘 새벽기도 오는데 마음이 좋으면서도 싫거나, 혹은 기쁘면서도 슬픕니다. 설명되지 안호 이해되지 않는데 이 두 가지가 분리되지 않고 내 마음에 동시에 찾아올 때 양가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왕이 문 사이에 앉아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바로 이 양가 감정입니다. 그가 간절히 기다리는 소식은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지만 좋으면서도 나쁜 소식일 수도 있고 기쁘면서도 슬픈 소식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왕은 무슨 소식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로는 정말 질 수밖에 없는 열세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의 승리를 주시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압살롬은 살았으면 하는 소식을 기다렸을까? 반란군의 수장인 압살롬이 건강히 살아 돌아오면서 전쟁에 이기는 건 불가능 합니다.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다윗이 왕으로 복귀하고 살아날 수 있는 것이고, 그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그 군사들이 죽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을 향하여 칼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 열세인 상황에서 반드시 압살롬의 군대와 싸워 이겨야 되죠. 근데 동시에 그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아들 압살롬은 건강하고 멀쩡하고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마음을 간절히 품고 지금 설명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다윗은 문 사이에 앉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왕과 마찬가지로 좋으면서도 슬픈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이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양가 감정을 가지고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 모순과 같은 양가 감정을 가지고 앉아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그 다윗의 실존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이 설명되지 않는 아픔과 어려움에 점철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실존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 양립할 수 있는 없는 두 마음이 지금 다윗에게 있을 때 저 멀리서부터 두 전령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 멀리서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적어도 그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하러 오는 전령이 재를 뒤집어쓰고 막 저 멀리서 달려오면 내용이 뭔지 모르지만 아 저 소식은 지금 좋지 않은 소식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식을 가져 오는 사람들이 제사장의 아들이었으니 분명히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가 가져온 좋은 소식은 질 수밖에 없는 전쟁 겉으로 봐서는 패배가 분명했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이겨 주셔서 그 모든 원수와 대적하는 자들을 다 물리치고 승리해 주시게 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기적과 같은 소식을 듣고 왕이면 이렇게 대답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제군들이여 정말 수고했다…이렇게 얘기해야 되는데 전쟁 이긴 건 됐고 내 아들 젊은이 압살롬은 잘 있나 물어보는 겁니다. 어떻게 다윗왕은 압살롬을 향해서 이런 양가감정을 가지게 되었는가? 첫 번째는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사랑일 겁니다. 전쟁의 승패의 소식도 중요하지만 내 아들이 죽지 않고 잘 있느냐를 물어보는 바보 아버지가 누구냐면 바로 다윗 왕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은 아들인데 지금 그 아들과 전쟁을 하는 중인데 그 아들이 살았나 죽었나를 물어보는 바보 아버지가 바로 다윗왕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고 아버지 등의 칼을 꽂아도 결국 압살롬은 내 아들이라는 것은 지울 수가 없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광야로 쫓겨나가면서 다윗이 영적으로 민감해지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압살롬의 배신과 배반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앞에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다윗은 발견한 것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 앞에 압살롬이었음을, 이렇게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늘 하나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던 자가 바로 압살롬 같은 내 자신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돌아오기를 그렇게 바라시는 말도 안 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졌다는 것을 다윗이 신앙적으로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생을 얼마나 용서하시고 나 같은 인생을 얼마나 기다려 주셨으며 나 같은 인생을 얼마나 용납 하셨는지를 광야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 대해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윗의 생각대로 압살롬이 돌아오지는 못했습니다. 두 번째 전령이었던 구스 사람 이디오피아 종을 통하여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 다윗의 마음이 심히 아파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프다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한 우리 말이 바로 장이 끊어지는 아픔의 “단장”입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우리 마음이 창자의 끝인 쓸개에 있다라고 믿었기에 창자가 들어간 마음의 표현이 많았습니다. 장이 뒤틀리는 환장이라는 말도, 장이 끊어지는 단장도 다 마음의 아픔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압살롬의 소식을 듣고 다윗의 마음이 바로 단장의 마음으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그 아들로 인하여 그 소식은 슬픈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날 향하여 등에 칼을 꽂고 배반하고 반역한 그 반역자 압살롬을 여전히 내 아들로 부르며 단장의 아픔으로 통곡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았겠다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헤아릴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다윗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이 단장이 아픔으로 통곡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장의 아픔으로 통곡하신 것 뿐 아니라, 실제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내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될 그 자리에서 대신 죽으시며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게 나를 살려주시고 구원해주시고, 내 아버지는 평화시라는 그 진정한 압살롬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며, 모든 원수 맺어진 것이 풀어지는 진정한 평화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의 안에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배신하고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죄인이었는가… 그런 나를 여전히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내가 발견하게 될 때 은혜로 하루를 시작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 압살롬과 같은 인생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가능성이 없고 나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충돌하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압살롬과 같은 인생이었음을 발견하십시오. 그런 소망 없는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위해 그 죽을 자리에서 대신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돌아와야 될 때가 돌아오지 않고 구원받아야 되는데 구원을 거절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단장의 아픔으로 아파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에 적셔져 사명자소 선명히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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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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